(第四章)
아이들도, 마현도 갈피를 정확히 잡지 못하고 고민하는 때.
‘춘(春)이 아니라 추(秋)에 이른 것 같지 않은가.’
갈대밭에 갈대가 흔들리는 모습을 떠올린 마현은 몇 번이나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하여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아이들은 학문적으로, 무공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조금 복잡한 때라 하여 그 걸음을 멈출 필요는 없었다. 하나 조급할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
“쉬어 가야 한다 여기면 알아서 천천히 걷도록 하여라. 내 아무런 탓도 하지 않겠다.”
결심을 내린 마현의 말에, 몇몇 아이들이 학문을 익히거나 무공을 익히는 시간에 잡념(雜念)에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반대로 무공이나 학문에 더욱 열정을 보이는 아이들도 늘었고 말이다. 마현은 그런 제자들을 위한 또 다른 준비를 했다.
‘현재로써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백산과의 의료봉사활동마저 마친 늦은 밤, 평소였다면 자신의 글공부에 열중했을 시간에 붓을 든 마현은 하나의 서책을 작성해 나갔다. 책의 표면에 적힌 글은 태평심성공(太平心性功)이라는 다섯 글자였다.
태평심성공은 따지자면 일종의 무공이었고, 또 파고들자면 이름 그대로 평범한 마음공부였다.
‘정확하게는 마음을 다스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태평심성공은 일종의 내공심법이었다. 하나 흔히들 내공심법이 의의를 둔 축기(築氣)보다는 그야말로 마음을 다스리는데 중심이 잡혀 있었다. 덕분에 그 어떤 내공심법과도 어울리며, 익히기도 쉬운 편이었다. 한창 자신의 미래와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 싸우는 지금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훗날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고생도 하고 위기도 맞을 제자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무공은 없을 터였다.
총 열 권.
하룻밤 만에 창안하여, 모두 필사한 마현은 아이들 각자에게 그 책을 나누어주며 언제든지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익히라 하였다. 다 익힌 후에도 태우거나 버리지 말고 여유가 남으면 한 번 더 읽어보라고도 말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서책 자체에 간단한 주술을 걸어 조금 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효과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는 마음은 훗날 큰 위기가 왔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겠지.’
무공을 익힌 무인들의 생사결의 마지막은, 결국 정신력이 그 끝을 가른다고들 한다. 인생도 그렇다. 위기의 순간, 가장 마지막에는 한 인간이 가진 정신적인 강함이 그를 이겨내기 위한 가장 큰 척도가 되리라.
태평심성공을 창안해, 그를 나누어준 마현은 이제야 무언가 마음이 놓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곧이어 불쑥 치밀어 오르는 생각에는, 깜짝 놀라 고개를 내젓는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하늘이 맑구나.’
그리 생각한 마현이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을 때였다.
와룡서원의 대문이 열리고, 익숙한 기운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마현의 입장에서야 한동안 보지 못했던 정겨운 사람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시선을 내려, 접근한 인물을 직시한 마현이 웃으며 말한다.
그러자 건너편에서부터 다가와 가볍게 포권 치레를 한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나러 왔어요.”
공서하의 와룡서원 방문이었다.
* * *
언제나 말하지만, 두 사람의 공통점은 말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야…….’
그나마 구혜린과 같이 마음이 완전히 놓이는 상대가 있으면 입이 열린다. 하면 공서하는 어떨까? 그녀가 입을 완전히 열어 누군가와 수다를 떨며 호호 하하 하는 모습을 그려 본다. 대상은 그녀의 어머니쯤이면 좋을 것 같았다.
‘……상상이 안 되는군.’
미안하지만 도저히 어울리지를 않는다.
그런 황당한 재미에 마현의 입가에 또다시 웃음이 그려질 때였다.
“어라, 이 분은……?”
마찬가지로 와룡서원의 문을 열고 구혜린이 등장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공서하의 얼굴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아가씨는 함께 안 오셨나 봐요?”
그녀가 있으면 마연이 있을 것이다.
아마 그리 생각한 듯했다.
“혼자…….”
구혜린을 향해서도 포권을 취해 보인 공서하가 짧게 답했다.
“아……. 공 소저 혼자 오신 길이군요. 어쩐 일로……?”
실상 마현과 그녀가 마주친 지는 벌써 반 각.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던 둘이었던 덕에 묻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구혜린이 대신해서 질문한다.
“…….”
그에 공서하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직후 마현을 바라보고, 구혜린을 쳐다본다.
이내는 알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어서.”
“…….”
그 직설적인 말에, 구혜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 사람…….’
첫 만남.
마현의 막내 여동생 마연과 함께 왔을 때, 그렇게 마주친 순간 기묘하다고는 느꼈다. 독특한 행동에 쉽게 볼 수 없는 언사, 그리고 그 끝을 알아볼 수 없는 깊은 눈빛. 솔직히 말해, 제법 귀여운 외모를 빼자면 먼저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고 해야 할까? 언제나 그렇듯 어려운 사람은 접근하기도 난감한 법이다.
하나 그런 모든 단점을 제쳐놓고라도, 빨려들 수밖에 없는 매력을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공서하를 보며, 무언가 불안하다 여겼었다.
아마 구혜린 본인이 마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나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연적(戀敵)……인가.’
뭐랄까, 난생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말이다.
아니, 언젠가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올 수 있겠거니 했지마는 실제로 겪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가슴 한편이 답답하고, 짜증도 났다.
한데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아쉽게도 구혜린 본인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의외로 덤벙대는 면이 있어 가끔 실수를 하곤 하지만, 이러한 일에 관해서 무조건 감정적으로 나가는 것이 옳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공서하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마현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또한 머릿속 역시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운 채였다.
그렇기에 더 잘 알 수 있었다.
무언가 난감해하는 마현의 표정 뒤에, 검은 눈빛 안에 구혜린이 있다. 여태껏 그에 대해서는 무엇도 알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공서하였다. 한데 이번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로지 마현만 보고 있었기에, 더욱 냉정히 느낄 수 있는 감각.
그렇기에…….
욱씬.
가슴 한편이 아파온다.
‘뭐지?’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려 한다.
한데 그런 모습조차 마현 앞에서는 보이기 싫어, 표정을 다잡았다. 어렵지는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서 있으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아파…….’
한데 너무나 아프다.
무겁고 답답하다.
또한 그리 접점도 없는, 사실은 크게 관심도 없는 구혜린에게 알 수 없는 악감정이 피어오른다.
‘어째서?’
처음 겪는 경험이다.
딱히 살기가 짙은 악인도 아니고, 어딘가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인물도 아니다. 질기게 따라붙으며 귀찮게 하는 종자에도 속하지 않는다.
한데 구혜린이 싫다.
조금, 밉다.
그렇다고 하여 그 감정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구혜린이 그렇듯 공서하 역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갑자기 피어오른 악감정에 떠밀리듯, 무조건적으로 상대방을 증오할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다.
‘시간이 필요해…….’
이 역시 처음 있는 일.
공서하의 이성은 언제나 차가웠다.
뇌 속으로 들어온 정보는, 빠르게 흡수되고 처리되어 가장 올바른 결론으로 도달한다. 한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한 탓일까?
‘모르겠어.’
공서하는 묵묵히 마현에게서 시선을 뗐다.
직후 등을 돌려 서원의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또 올게요.”
남기는 말은 짧았다.
* * *
공서하가 떠난 자리.
마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공서하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두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하나 그 마음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짙은 감정으로 나아가기에는 무리가 많다 여겼다. 이유야 간단했다. 남녀 간의 호감이란, 서로를 알아가며 생기는 감정이다.
구혜린과 만나기 직전까지는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 본 마현이 장담하기엔 우습지만 분명 그렇다고 알고 있었다. 그가 구혜린을 마음에 품게 된 것 역시, 그녀의 사연과 마음. 또한 원하는 바를 알고 있었던 탓이 컸다.
서로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는 분명 연애라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일일 터였다.
한데 공서하와는 그러한 경험이 없었다.
편안하게 함께 걸으며, 자연스럽게 잡담을 나누었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풀지는 않았다. 당장 마현에게 묻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는 공서하에 대해 무얼 아는가? 동생인 마연의 사저라는 것? 해남파 장문인의 무남독녀 딸이라는 사실쯤? 대외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곤란하군.’
그러한 상황에서 다가온 공서하의 눈빛에 비친 감정은 분명 연정(戀情)에 가까웠다. 아직 본인도 완벽한 확신은 없는 듯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한다.
최근 들어 자주하는 생각이지만, 또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공서하와 직접 이야기를 한다.
말을 나누고, 자신의 마음속에 담긴 구혜린에 대해 솔직하게 풀어낸다.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품고 있는 남자를 사랑하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사실. 이는 분명 현재 마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가 가볼게요.”
한데 그런 마현보다도, 구혜린이 더 빨랐다.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보이던 그녀는, 말과 함께 곧바로 지면을 박차 공서하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래서야 마현이 따라붙을 여지도 없었다.
‘여인들 간의 대화에 괜히 끼어들려 했다가는…….’
양측으로 깨지고 마현만 못난 놈이 될 뿐이다.
“…….”
결국, 바람만이 쌩하니 부는 와룡서원에 혼자 남게 된 마현이었다.
* * *
“잠깐 거기 서 봐요!”
“……?”
평소보다 훨씬 걸음이 빨랐었다.
습관처럼 들고 다니며 읽던 서책을 품에 넣어 둔 채였던 탓이리라.
‘아…….’
그러고 보니 매일같이 읽던 책을 내려놓았는지 모른 채 걸었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속으로 짧은 탄식을 흘린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걸음, 생각보다 엄청 빠르네요.”
어느새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온 익숙한 얼굴이 당황한 얼굴로 목소리를 흘린다.
‘……구혜린?’
그녀의 이름을 떠올린 공서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려다, 곧 납득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를 산 건가?’
자신은 분명 마현이 보고 싶어, 와룡서원에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 말한 직후 마현의 표정에는 그녀, 구혜린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며, 서로에게 감정이 향해 있고, 자신의 그러한 말투와 눈빛이 오해를 샀다면 충분히 현재 상황이 말이 되었다. 머릿속 한편에서 마치 하나의 연극과 같은 그림이 연속으로 떠오른다.
그 끝에 남은 것은 의문이었다.
‘……오해인가?’
가슴의 욱신거림.
평소라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머릿속.
어째서 당시의 자신은 시간이 필요하다 여겼을까?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었는데,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을까?
“…….”
이미 머릿속으로는 수십 번 내뱉은, 오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렵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금 도망치듯 또 뵙자며 달아날까? 마음만 먹고 움직인다면…….
스릉.
그런 고민에 휩싸인 공서하의 귓가로, 익숙하면서도 서늘한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는 조금 굳어진 얼굴의 구혜린이, 반쯤은 억지로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검을 뽑고 있었다.
직후, 그녀의 입 바깥으로 나온 말은 꽤나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었다.
“우리, 대련 한 번 안 할래요?”
* * *
대련이라는 이름의 치정 싸움은, 공서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아 든 순간 곧바로 시작되었다. 세인(世人)들은 공서하를 보며 더 이상 ‘과연 해남검후의 딸.’ 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후기지수란 이야기도 저 멀리로 넘긴 지 오래였다.
호남제일검화(湖南第一劍花).
공서하의 사문은 해남파다.
또한 해남파는 호남이 아닌, 광동성 아래 해남도에 속해있다.
한데 어째서 호남제일검화라 불리는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또 다른 별호로, 냉검(冷劍)이라 불리는 공서하는 분명 호남(湖 南)에서 제일 가는 여검객(女劍客)이다. 호남과 호북을 가르는 동정호(洞庭湖) 아래의 모든 영역을 통틀어서 말이다.
아직 한참이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 해남검후와 같은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공서하의 무명(武名)은 호남, 강서, 복건, 광동, 광서를 비롯하여 귀주 일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퍼져 있었다.
냉검 공서하의 검은 시릴 정도로 차가우며 빠르다.
들리는 낭설(浪說) 중에는 이미 그녀의 검이 어머니인 해남검후를 뛰어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낭설이라 부르지만, 단순히 허황된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근거도 있었다.
공서하는 절정에 오른 이후로, 단 한 번도 검을 왼손으로 쥔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호에 나서서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았다. 성장한 마연과 대련할 때도 그녀는 검을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채였다.
해남파에서 자랑하는 독문절기들이 모두 좌수검(左手劍)이란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구혜린의 검에 맞서서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모든 공격을 우수(右手)로 막아내며, 해남파의 절기로 반격까지 가하는 공서하의 무공은 그야말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하나 만만치 않은 것은 구혜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서하가 세상에 알려질 다음 대 검후(劍后)라면, 구혜린은 은거한 검의 여제였다. 그녀가 가진 무공에 대한 오성은 독보적. 공서하보다도 더욱 빠르게 경지를 밟고 올라온 만큼 초절정이라는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그녀는 은하검결류 특유의 빠르고 강맹한 초식으로 연신 공서하를 압박했다.
그 어디에도 쉬이 반격의 틈새란 것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
서로를 차가운 눈빛으로 직시하는 두 여인의 검이 허공에서 무수히 불꽃을 튕겼다.
‘상당히 빠른데?’
구혜린은 공서하를 상대함에 있어, 본신 실력의 오 할 이상을 쏟아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명목이 대련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꽤나 많은 힘을 쏟아부은 셈. 게다가 공서하가 성장했듯, 구혜린 역시 무공이 정체되어 있지만은 않았다.
평화로운 와룡 서원 생활 속에서도, 무공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스스로 단 하루도 검을 놓지 않은 덕도 있겠지만, 마현과 제자들의 교육 과정을 통해 보고 배우는 게 있는 만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본래부터 초절정의 고수였던 구혜린이, 더욱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 실력의 오 할 이상이라면 웬만한 초절정 초입의 무인들은 손발이 어지럽게 얽히다 끝내 검을 놓치고 말 터였다. 한데 공서하는 손쉽게 막아낸다.
뿐만이 아니라 틈틈이 반격까지 가한다.
이래서는 손쉽게 쓰러트리기 어렵다.
딱히 이기려고 생각하여 시작한 대련은 아니다.
그냥 두 사람 다 여인이며, 또한 무인이기에 이보다 더 마음을 잘 나누는 법이 없다 생각했을 뿐.
하나 이 정도로는 안 된다.
구혜린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듯, 공서하 역시 전력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혜린은 온몸을 감도는 내기에 속도를 더했다.
가속(加速) 내공.
은하검결류의 조사(祖師)라 불리는 석철웅(錫鐵熊)은 본래부터 타고난 쾌검(快劍)의 대가였다. 그런 그가 은하검결류를 창안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 쾌검을 자랑으로 하는 그는 검의 속도와 힘에 집착했으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과 별의 흐름을 보며 영감을 얻었다.
은하검결류의 내공은 마치 흐르는 은하수와 같다.
수많은 별들이 하나의 강을 만들듯 부드럽게 흐르는 것 같다.
그러한 내공이 급속도로 가속하며 검의 끝자락에 닿아 쏟아진다면……!
파앗-!
허공으로 높이 들어 올려진 구혜린의 검이 은빛 꼬리를 남기며 공서하의 머리를 단숨에 베어낼 듯 쏟아졌다.
동시에 눈을 빛낸 공서하의 손 모양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검날이 기울며 상대의 심장을 도려낼 듯 사선으로 치고 오른다. 그 움직임 역시 극한의 쾌(快)!
파지짓-!
유성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속도를 보인 구혜린의 검과 공서하의 검이 허공에서 동시에 맞물리며 작은 불똥을 연속으로 일으켰다.
카앙-!
기파에 의한 충격은 주변의 수목을 흔들며 휴식을 취하던 작은 동물들을 일깨운다.
파르륵.
타다닥.
하늘에서는 작은 새들이, 지상에서는 토끼 한 마리가 두 사람의 반대 방향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카앙, 카앙, 카앙-!
그러한 공격이 연속으로 부딪치고, 깨어진다.
구혜린의 검은 그야말로 유성우(流星雨)가 쏟아지듯 쉴 새 없이 떨어졌으며, 공서하는 그러한 공격에 수없이 맞섰다.
그 끝에…….
“크읏…….”
신음을 흘리며 먼저 물러난 것은 공서하였다.
그녀는 꽤나 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서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보았다면 깜짝 놀랐으리라.
강호에 나선 이후, 그녀가 분하다거나, 화가 난다는 표정을 지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검과 검이 다투는 무인들의 싸움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무패(無敗).
공서하는 그렇게 늘 압도적인 모습으로 승리해왔다.
몸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그 차가울 정도의 냉정한 검격에 붙은 별호가 냉검.
한데 처음으로 표정이 무너졌다.
입가로는 붉은 선혈이 실 줄기처럼 흐른다.
냉검의 차가움이 깨어진 순간이었다.
“쉽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구혜린은 그런 공서하에게 검 끝을 겨눈 채 차갑게 말했다.
이제 고작 칠할.
마현과 와룡서원 제자들과의 생활 끝에, 구혜린이 손에 넣은 무위는 이미 초절정의 끝자락, 그중에서도 극한이라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
공서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해서, 그녀를 조금 쉽게 본 듯했다.
‘그림이 있었으니까…….’
공서하는 자신 주변의 공간을 제어한다. 무림인이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한다는 제공권을 처음부터 타고난 것이다. 한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감각도(感覺道).
공서하의 눈에는 선명히 보였다.
공격으로 이어지는 선, 빈틈, 죽음으로 이르는 점.
공간을 지배하며, 이어지는 선과 다다르는 점으로 도착하는 형상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그를 따라 움직이면 싸움은 필승. 보다 더 강한 상대라 하여도, 훨씬 더 쉽고 편하게 제압할 수 있다. 그녀의 어려 보이는 외모에 혹해 방심하고 있는 상대라면 더욱 쉽다. 그렇게 무패의 전설을 이룩하고 있었다.
하나 구혜린에게는 그러한 제공권도, 감각도도 명확하지 않았다. 보이고, 그려지지만 닿지는 않는다.
‘마치…….’
어머니, 해남검후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얼마 되지 않은 과거에 만나 본 적 있는 상대의 모습을 그리며, 공서하의 입가로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세상은 훨씬 더…….’
생각보다 몇 배는 더 놀랍고 신비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언제부턴가 그리 느끼고 있었다.
이 세상은 너무나 지루하다.
그녀의 눈에는 모두 다 보였다.
무공의 길도, 방향도, 사람의 성향과 성격까지도.
하여 현실보다, 책장 속의 세상에 더 마음을 품었다.
그 안의 세상은 무궁무진했다.
자유로웠으며, 상상외의 일을 기막히게 해내기도 했다.
마현에게 큰 호기심을 두었던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태어나서 처음 만나 본 유형의 사람.
마현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그녀가 어째서 자신에게 관심을 두었는지 의아해했다.
하나 사람이란 건, 굳이 답을 해주어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서하는 언제나 그래 왔듯 마현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자신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지 스스로 보려 했을 뿐.
그 끝에 조금이나마 마현을 이해하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따뜻한 사람.’
어린 시절, 그녀의 어머니가 그러했다.
무공을 익히기 이전 시절의 공서하를 향해, 해남검후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내비쳤다. 한데 어느 시절부터 변했다. 무공을 익히고, 그녀에게 다음 대(代) 해남파 장문인이라는 직책을 넘기기로 마음먹은 뒤부터일 것이다.
마현은 마치 그때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두에게 그랬다.
세상을 향해서는 차가운 듯도 하고, 때로는 냉정해 보이며, 알 수 없는 슬픔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분명 그 본질은 공서하가 아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래,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존재한다.
또한 눈앞의 구혜린이나 어머니, 해남검후처럼 그림 바깥을 벗어나 마구잡이로 날뛰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지루하지 않다.
흥미롭고 즐거운 일투성이다.
이제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복잡한 생각이 왜 쉽게 정리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리가 아니야…….’
욱신.
아파오는 심장.
가슴 한편에 마음이 있다.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고, 따지거나 잴 수 없는 감정.
우습게도 그것을 깨닫게 해준 것은 구혜린의 검이었다.
쏟아지는 유성우와 같은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난 순간, 구혜린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움이 더해지며 승리욕이 타올랐다. 지고 싶지 않다.
무패에 큰 의미를 둔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구혜린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 그러한 직설적인 감정이 자신을 직시하게 해주었다.
‘어머니는…….’
자신한테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언제부터인가 냉정함을 먼저 비치기 시작한 해남검후가, 해남파에 들어선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대련을 요청한 이유는 아마, 그러한 탓이리라.
분명해진다.
그렇게 해남검후와 대련한 후, 허망한 마음으로 해남파를 떠나 자신도 모르게 마현을 찾아 나선 이유도 알 것만 같았다.
‘해남검후.’
해남파 장문인.
또한 해남도 위에 군림한 여제(女帝).
말석이라 불리나 천하십대고수에 뽑히며, 광동 일대에서라면 져 본 적이 없다는, 또 다른 무패의 여왕.
또한…….
‘어머니.’
입가로 흐르는 핏줄기를 닦으며, 묵묵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구혜린을 직시한다. 직후, 검을 들어 올린다. 의식하며 사용하던 오른손이 아니다.
좌수(左手).
애초부터 공서하는 해남파의 무공에 가장 잘 맞는 체질로 태어났었다.
타고 난 왼손잡이.
한데 해남파의 무공은 좌수로 펼칠 때 그 위력이 배가된다.
여태껏 우수를 사용해 온 것은 하나의 수련이자, 고집.
하나 최근 들어 그러한 고집을 ‘두 번’이나 버렸다.
검을 비스듬히 쥔 채, 자세를 똑바로 한 공서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구혜린을 바라보았다.
“다시.”
짧은 말을 내뱉은 순간, 기다렸다는 듯 구혜린의 검이 은빛 꼬리를 남기며 날아들었다. 공서하의 눈이 매섭게 빛을 내뿜었다. 반쯤 기울어진 몸에서부터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좌수검, 해남삼십육검이 펼쳐진다.
‘강기!’
그 끝에 머문 것은, 초절정의 고수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상징이자 무엇이든 베어낸다는 궁극의 힘.
우우웅-!
떨리는 구혜린의 검 위로도 자연스럽게 그 힘이 맺혔다.
강기는 오로지 같은 강기로만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 하나 없는 완벽한 정설(定說).
부딪쳐서 깨어 부수는 은하검결류의 유성검이라면 같은 힘으로 맞서는 것이 옳았다.
‘……!!’
한데 그 생각이 빗나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서하의 검이 변했다.
부딪칠 거라고 예상했던 지점에서 갑작스럽게 검세가 출렁이며 방향을 전환한다. 눈 한 번 깜짝할 시간도 지나지 않은 뒤에는, 다시금 크게 기운을 일으키며 쏘아진다.
이전 공서하의 검격은 빨랐다. 또한 정확하고, 예리했다. 한데 지금은 또 달랐다. 정확하고 예리한 데다, 기묘하기까지 하다. 그 흐름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파도…….’
혹자는 해남파의 검을 보며, 사특하다고 말한다.
그 형태가 워낙 괴이하고 음독하여 쉬이 알아볼 수 없는 탓이다. 또한 누군가는 해남의 검을 파도와 닮았다고 하였다. 구혜린의 마음도 그와 같았다. 출렁이듯 기세를 전환하고, 변화하며 다가오는 공서하의 검은 바다를 움직이는 파도와 같았다.
완벽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금 아프겠는데…….’
입가로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크게 회전시키며 걸음을 물린다. 동시에 솟구치듯 쏘아진 공서하의 검이 그녀의 손등을 훑고 지나간다. 따끔하고, 뜨거운 감촉이 일며 붉은 핏방울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그 짧은 틈새 속.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구혜린 역시 기세를 더욱 끌어 올렸다.
십 할 모두.
온 힘을 다해, 가속한다.
세상이 느리게 보일 정도로 내공의 흐름에 박차를 가한 순간, 허공에 흩날리는 핏방울마저 선명하게 공중에서 출렁인다. 자신을 향해 조금의 감정 동요도 없이 검을 날리는 공서하의 눈빛도 마주한다.
파도처럼 일렁이며 다가오는 공서하의 검의 움직임이 명확하게 보인 순간에는, 온 힘을 다해 검격을 쏘아낸다.
십 할.
전력(全力)을 다한 공격은 멈출 수도 없게끔 빠른 속도로 쏘아진다. 그리고 공서하의 검과 부딪친다.
‘아니.’
이번에도 틀렸다!
위로 치솟을 줄 알았던 공서하의 검이 파도 한 점 없는 잔잔한 바다를 떠올리게 할 만큼 내려앉았다.
후웅-!
끝내 구혜린의 검은 빈 허공을 갈랐다.
‘아직 끝은 아니야……!’
당황하며 다음 반격을 준비하려 할 때는…….
처억-!
마치 신기루와 같이 모습을 감춘 공서하의 검이 목덜미 바로 아래에 닿은 뒤였다.
“하…….”
졌다.
검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그 직후는 완전히 놓쳤다.
“무슨 초식이었죠?”
“……해시신루(海市蜃樓).”
“바다의 신기루라…….”
강호의 서쪽 끝, 대막(大漠)과 바다에서만 볼 수 있다는 괴현상.
그야말로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분명 검이 발목 아래로 향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았을 때는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공서하의 검은 밑으로 향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특이하고 기묘한 형태를 생각하자면 어떻게 움직였다 하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가 졌네요.”
딱히 더 따질 것도 없었다.
공서하의 검이 멈추지 않았다면, 이 대련이 정말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면 이미 구혜린의 목은 몸에서부터 떨어진 뒤였을 테니 말이다.
끄덕.
공서하는 묵묵히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당연해 보이는듯한 승리였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전력을 다한다고 쏘아졌던 구혜린의 검 끝이 혹시나 하는 감정에 떨리지만 않았다면 그리 쉽게 검격을 피한 뒤 목덜미에 검을 댈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없이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는 채였다. 먼저 입을 연 측은 놀랍게도, 공서하였다.
“그를 좋아해.”
무미건조(無味乾燥)해 보이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만은 진실되었다. 또한 확신이 있었다. 마현을 좋아한다. 그 명확한 답을 들은 구혜린은 조금은 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어요.”
“그를 좋아해?”
같은 말이지만, 의미는 다르다.
구혜린은 활짝 웃으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하죠. 좋아해요, 아주 많이. 괜찮다면 평생을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요.”
공서하의 입가로도 작은 미소가 감돌았다.
조금은 쓰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또한 이겨낼 자신도 있었다.
“방해하지 않을게.”
세상에는 아직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그것을 알게 해준 구혜린에게 감사한다.
또한 마현에게도 고마웠다.
그렇게, 등을 돌렸다.
‘어디로 가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해남의 군림자. 검후의 검을 꺾은 뒤 해남파를 떠나, 허망한 마음으로 무명현으로 왔다. 이곳에서 마현을 만나 마음을 알고, 구혜린에게 그를 직시하는 법을 배웠다.
이러한 감정을 아는 법을 먼저 일러주고 싶어 하던 사람이 있었다.
마현에게 와룡객잔이란 공간이 있듯, 공서하에게도 돌아가서 쉴 집이 있었다.
해남파.
그리고…….
‘어머니.’
무명현을 떠나는 공서하의 발걸음은 그리 무겁지만도 않았다.
제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