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죽을 수도 있다.
오랜만에 듣는 그 말에 마현의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익숙한 이야기야.”
“……여유는 버리는 게 좋을게요.”
작은 읊조림에, 미간을 찌푸린 백천악의 몸에서부터 붉고 검은 기운이 뱀처럼 뒤엉켜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 하나, 하나가 가히 드넓은 중원강호에서 무적(無敵)을 논할 수 있을 법한 강력한 힘. 때가 달랐다면, 그는 분명 천하제일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을 무인(武人)이었다.
“체질에 맞지 않는 주술을 익히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문답무용(問答無用)!”
백천악의 몸에서부터 피어오른 아지랑이 같은 기운은 넓은 하늘에 한 줄기 선을 남기며 단숨에 앞으로 쏘아진다. 검 끝은 어느새 양팔과 양다리가 모두 봉인된 마현의 심장에 맞닿은 채였다. 아니, 꿰뚫는다.
펄럭.
하나 백천악의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은 사람의 육신을 이루고 있는 살 거죽이 아니었다.
가벼운 천을 관통한 오묘한 느낌.
눈을 부릅뜬 백천악은 재빨리 신형을 갈지(之)자의 모양으로 움직이며 빠르게 허공을 선회했다.
“헉……!”
이후로 흘러나온 것은 커다란 헛바람이다.
시선의 정면, 정확하게 이등분 된 탄탄한 사내의 가슴팍이 보인 탓이다. 주인은 따로 말할 것도 없었다. 백천악의 검에 걸린 순간, 상의를 완전히 벗어 던지며 흑쇄로부터 벗어난 마현이었다.
“사실 나도 이 힘을 사용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야. 인성이 뒤틀린달까?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같다고 말해야 하려나.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거든.”
곤란하다는 듯한 음성과 다르게, 완전한 무표정으로 읊조린 마현의 손이 백천악의 시선 정면을 덮어왔다. 평범하게만 보이던 그 손바닥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크기를 점점 불려가더니 이내 백천악의 몸을 통째로 삼키고도 남을 만큼 거대하게 변했다.
“크읏……!”
백천악의 선택은 회피가 아닌 정면 돌파였다.
‘피할 수 없다.’
손은 점점 더 크기를 불려, 끝까지 그를 쫓아올 것이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맞서지 않으면 깰 수조차 없다.
검을 쥔 손에 온 힘을 몰아넣는다.
본래 주술이 아닌, 무공으로 극한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의 검기(劍技)는 단참(斷斬). 천하, 아니 천상까지 통틀어 모든 것을 베어내기 위한 절단의 검기.
‘참월(斬月).’
검날 위로 덧씌워진 강기는 그 무엇보다 예리하게 벼려져, 하늘 위의 달을 베어낸다.
콰앙-!
하나 그러한 절대의 단참마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마현의 손바닥을 베는 것은 무리였다.
“쿨럭……!”
진한 핏물을 흘리며 허공을 반 바퀴 회전한 백천악의 눈이 정면을 응시했다.
“처음 보는 무상(無常)인데,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인가?”
그곳에는 꽤나 놀란 표정으로, 살짝 갈라져 핏물이 흘러내리는 손바닥을 쳐다보는 마현이 서 있었다. 아니, 실상 이제는 마현이라 부르는 것조차 모호했다. 어느 새부터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흑결의 기운이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가 싶더니, 마치 하나의 갑주(甲冑)가 된 듯 전신을 휘감은 상태다. 탄탄하던 근육마저 사라졌으며, 걸치고 있던 의복마저 흑색 갑옷으로 뒤덮였다.
보이는 것은 으스스하게 빛나는 두 눈뿐.
“마왕(魔王)…….”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마계를 지배하던 왕들의 명호를 읊조린 백천악이 헛웃음을 흘렸다. 적과 청을 봉했다. 하니 흑이 나온다. 아니, 단순히 흑색의 기운이라 생각하기에도 무리가 많았다. 너무 짙다. 백천악 역시 흑의 기운을 일부나마 이해한 이였기에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흑결과 근본이 다르다.
그야말로 태생적인 어둠(暗).
검은빛을 칠한 것이 아니라, 품은 힘 자체가 단언할 수 있는 어둠이다.
마현이 어째서 저 힘을 싫어하는지도 이해되었다.
저처럼 완벽한 어둠에 몸을 싣는다면,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인간이라 하여도 내면에 와해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암흑신(暗黑神)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희대의 마신이 되어 수많은 피와 슬픔, 고통을 흩뿌리는 끔찍하고 추악한 존재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야 하는데…….’
마현은 버텨내고 있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암흑을 조정하고 조율하고 있었다.
다소 불쾌하게 느끼고는 있으나 어둠조차도 완벽히 발아래 두어 자기 뜻에 따르게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야말로 마의 왕.
마왕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이미 마계라 불리는 암흑의 영역을 지배하던 왕들을 쓰러트려, 그조차 지배하였기에 가능한 마현의 신기에 백천악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길 수 없어.’
힘을 반, 거기서 또다시 반.
그 정도만 줄인다면 해볼 만할 것이라 여겼다.
싸워서 죽일 수도 있다 자신했다.
뒤늦게 깨달은 오만(傲慢)이 전신을 무력감으로 감싸온다.
“이렇게…… 한 건가?”
마왕이 된 마현은 분명 평소와 달라져 있었다.
암흑을 조율하고 있지만, 평소에 비해 말이 많아졌다.
또한 행동 역시 과격해졌으며, 훨씬 더 즉흥적으로 변했다.
그를 보여주듯, 가볍게 휘두른 마현의 손날이 한 줄기 강기가 되어 백천악에게로 쏟아졌다.
가늘고, 예리해 보이는 그 강기를 마주한 백천악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참월…….”
조금 전, 그의 손으로 펼쳤던 단참의 기예다.
그를 한번 본 것만으로 똑같이 따라 한다.
온몸에 감돌던 무력감이, 알 수 없는 모멸감과 분노로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런 힘을 가지고도…….”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며 힘을 끌어올린다.
단참의 기예, 마현은 무상이라 부른 그 힘은 백천악이 일부나마 절대라 불리는 경지에 발을 디디며 얻은 힘이다. 하나 그 끝은 참월이 아니다. 비슷한, 아직은 닮은 그 힘을 사용하는 지금이라면 희망이 있다.
‘일격!’
참월의 뒤로도 단참의 기예는 아직 세 단계나 더 남아 있다.
그 중간 과정을 넘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힘을 단 한 번의 일격에 모두 쏟아낼 수 있다면! 거기에 주술의 힘을 이용한 확정된 공격을 쏟아 넣는다면……!
고오오-!
참월을 마주한 백천악의 몸 주변으로 거대한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천지 만물, 그야말로 대자연의 힘을 한 호흡에 받아들인 그의 검 끝이 쏟아지는 참월에게로 내뻗어진다. 이후 빠르게 뱉어낸 그의 숨결은 하나의 확정된 결과를 가지게 하는 절대의 주술로 변한다.
미래를 점지한 후, 현재가 이어지게끔 한다.
시간의 순서를 뒤바꾸는 절대의 주술이자 저주.
각인의 술(刻印之術).
흑천맹주라 불리며, 천하를 뒤흔들려던 백천악의 생명을 담보로 만든 저주는 분명히 마현의 몸 위로 새겨졌다.
‘그러니 제발…….’
뻗어진 강기가 참월을 베어낸다.
‘그만 쓰러져라!’
바람을 담아 외치며, 허공에서부터 힘을 잃고 떨어질 때는,
번쩍-!
허공에서 빛이 번뜩이며 드넓은 하늘에 한일(一)자의 커다란 참상이 남는다.
일순간이나마 하늘을 쪼갤 수 있는 절대의 기예.
단천(斷天).
그 힘에 각인의 술이 더해진다면 아무리 마현이라고 하여도…….
‘마왕이라 한들……!’
“마왕갑(魔王甲) 위로 주술을 새기다니. 배짱이 두둑한걸.”
바람을 담아, 정면을 쳐다볼 때였다.
귓속으로 작고 낮은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
의문은 짧았다.
또한 느껴지는 감촉 역시 찰나(刹那)에 불과했다.
서걱.
허리가 잘려나간다.
벤 것은 마현의 검이 아니었다.
딱히 시선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여도, 알 수 있었다.
몸을 베는 감촉이, 그의 손끝으로 느껴진다.
답은 뻔했다.
다름 아닌 스스로가 펼친 단천.
‘어째서……?’
미래로 이어졌던 확신의 주술은 마현을 빗나갔다.
아니, 빗나간 게 아니었다.
튕겨 나왔다.
시전자인 백천악, 본인에게로.
그것이 바로 모든 마(魔)와 술(術)의 지배자라는 마왕갑의 가장 강력한 권능. 그를 모른 채 주술을 이용해 마현과 동귀어진하려던 백천악의 두 눈에 담긴 불꽃이 점점 꺼져갔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삶이란 것의 끝은 본래 죽음이다.
언젠가 다가올 이 날을 충분히 기다리고, 준비해왔다.
하나 이토록 허망하게, 순식간에 다가올 줄이야…….
“강한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힘을 가지고도 무욕(無慾)하는 것 역시 죄요.”
죽음의 순간, 공중에 뜬 채 무심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현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그린 백천악의 의식은 멀어지고, 신형은 지상으로 추락했다.
남은 것은 죽음이었다.
* * *
퍼석-!
지상에 곤두박질쳐, 처참히 으깨졌어야 할 백천악의 시신이 공중에서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볍게 휘둘렀던 손을 거둔 마현은 몸을 둘러싸고 있던 마왕갑마저 거두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아.’
마현은 백천악을 상대로 고의적으로 마왕갑을 꺼내 들었다.
암흑결(暗黑結).
마왕을 쓰러트리고 얻은, 마현조차도 꺼리는 흑백적청 사결(四結)의 위에 선 어둠의 힘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마현조차 진정한 어둠이라 볼 수 있는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했다면 굴복시킬 수 없을 힘. 그런 암흑결을 사용한 이유는 간단했다.
‘나름대로 예우랄까…….’
백천악은 현 천하에 아니, 고금을 뒤져봐도 몇 없을 절대의 고수였다. 비록 서로 상황과 시기가 맞지 않아 대치하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 힘을 얻기 위해 흘렸을 피와 땀은 인정하는바. 마현으로서는 그런 백천악에 대한 예의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힘의 책임이라…….’
마지막 백천악의 유언(遺言) 역시 확실하게 들었다.
그는 마현의 무욕을 죄라 말하며 탓했다.
분명 마지막 순간, 마현을 원망했으리라.
하나 그는 마왕갑의 무서운 권능을 몰랐듯, 마현의 마음 역시 조금도 알지 못했다.
‘무욕이 아니야.’
마현 역시 사람이기에, 분명한 욕심이 있었다.
언제나 가족들과 제자들과 주변의 모든 이들과 함께 행복할 수 있기를.
그 작은 욕심이 죄라 한다면 마현은 충분히 그에 대응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애초에 마현이 굳이 흑천맹을 멸(滅)하겠다 마음먹은 것 역시 동생인 마운이 큰 상처를 입은 탓 아니던가?
‘하니 너무 탓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군.’
어찌 되었든 이제 흑천맹은 머리를 잃었다.
철저한 점조직으로 되어 있던 만큼, 정점에 선 가장 큰 중심이 무너진 순간 흑천맹의 붕괴는 예정되었다 해도 거짓이 아니었다. 이로써 모두 끝.
무림전복이라는 꿈을 꾸던 흑천맹은 그 날개를 펼쳐보지조차 못한 채 마현의 손에 의해 찢기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냉정하지만, 그야말로 수 없는 일이었다.
* * *
직후 마현은 흑운을 타고 곧바로 광동성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흑천맹 무인들 특유의 기운이 몇몇 느껴졌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벌써 중간 체제에서부터 혼동이 일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조율하던 머리가 무너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서운 일. 완전 하위조직에 속한 허접한 무인을 제외한 남은 흑천맹 무인들은 혼돈에 빠져 갈피를 잃은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광동이 제일 깨끗하군.’
광동성 하늘 위.
마현의 본거지인 덕일까?
그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는 흑천맹의 기운에 실소를 흘린 마현의 흑운이 단숨에 무명현으로 내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익숙한 고향 마을이 보였다. 귀환한 후 마주했던 익숙한 풍경과, 정든 얼굴들. 그리고 와룡객잔, 와룡서원…….
‘아버지, 정아.’
가족들과…….
‘린 매랑 아이들도 보이는군.’
번거롭던 짐을 하나 덜어놓고 온 덕일까?
훨씬 더 마음 편하게 그들을 바라보게 된 마현이 기척을 감춘 채 허공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아무렇지도 않게 안착한 마현이 걸음을 옮겨 소중한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야옹-!
가장 먼저 다가오는 마현을 발견한 것은 이제는 제법 설아와 친해져, 그 어깨에 올라타 생활을 하고 있는 백묘였다.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 마전과 마정 역시 마현을 발견하고는 활짝 미소 짓는다.
“이제 오는 게냐.”
“구 소저한테 걱정 말라는 말만 남겨 두고 사라지더니,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초이영과 설아 역시 그런 마현을 반겼다.
“오셨어요?”
“큰 삼촌이다!”
마현은 그런 그들을 보며 마찬가지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직후 느릿한 음성이지만, 모두의 귀에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 * *
마현에게는 제법 일이 많았던 시간들이지만, 가족들에게는 다 큰 어른이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갔다 온 것뿐이다. 그런 만큼 해후는 가볍고, 간단했다. 인사 몇 마디와 함께, 저녁 먹을 때 보자는 이야기 정도. 이후로 마현은 걸음을 돌려 와룡서원을 향했다.
서원에는 제자들과 구혜린이 도란도란 앉아 글을 읽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스승이 될 수는 없다며 글공부를 시작한 그녀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이들에게까지 물어가며 열심히 글을 익혔다. 머리가 많이 좋은 편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의 진도를 따라잡을 것도 같았다.
“다녀왔다.”
그런 아이들과 구혜린을 향해, 이번에는 마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스승님!”
“선생님!”
아이들이 고개를 번쩍 들어 활짝 웃는 얼굴로 그런 마현을 반겼다. 벌써 삼 년째 보다 보니 정이 들 대로 든 아이들과 마현의 사이는 단순한 서원 선생과 제자들의 관계로 보기에는 다른 점이 너무나 많았다.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보기가 참 좋구나.”
마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 글공부와 운동은 하나의 습관이자, 생활이었다. 일상이란 것은 너무나 뻔하지만 벗어날 수도 없는 종류의 일이라, 이제 와서는 그를 하지 않는다면 어색할 정도. 그런 만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마현의 칭찬이 기분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나도 끼어서 함께 공부를 해볼까.”
돌아왔다고는 하나, 아직 수업 시간 중인만큼 곧바로 해후를 나눌 수야 없다. 마현은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서원의 내부로 들어서며, 본래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아 붓을 들어 올렸다. 그에 아이들은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로 마현을 직시한다.
“네, 선생님.”
그런 아이들 사이에 낀, 구혜린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당차게 답했다.
“……푸하하.”
“소(小) 사부님도 이제 학생 하시는 거예요?”
그 덕에 진지해지려던 분위기는 단숨에 풀어지고.
아이들과 구혜린.
엄숙한 얼굴로 글공부를 시작하려던 마현의 얼굴마저 작은 미소를 머금게 된다.
그야말로 돌아와도 크게 변할 것이 없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제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