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三章)
마현에게 감사함을 표현한 주화화는, 그 길로 곧바로 정도맹을 떠났다. 아마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또 보자니…….’
개방 거지들의 집요함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마현은 주화화의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또 보자 그러면, 언젠가 다시 보게 된다. 아마 감정이 정리되는 대로 곧바로 마현을 찾아올 게 분명했다.
‘호기심이 남았으니까.’
입맛을 다시며 의약방으로 돌아가니, 마운과 마연이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현 덕에 상처가 모두 회복되었다지만, 이제 막 몸이 나은 마운이다. 아직 신체가 휴식을 바랄 때. 마연도 같았다. 마운을 돌본다고 몇 날 며칠을 잠도 자지 못했을 터. 긴장이 풀리며 쏟아지는 잠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푹 쉬거라.”
두 동생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그린 마현은 등을 돌려 의약방을 벗어나려 했다.
“다시 떠나시나요?”
등 뒤에서, 기척을 죽이고 있던 공서하가 물어온다.
“몰래 들어와서 말입니다. 나가지 않고 있다, 혹시라도 들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
설마하니 정도맹 내부에, 그것도 의약당 건물까지 몰래 침투했을 줄이야. 마현의 태평한 말투에 작은 웃음을 터트린 공서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밖에 나가서 이야기해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딱히…….”
공서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밝힌 것뿐이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딱히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 진솔함은 좋다. 마현은 피식하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따라오셔야 할 겁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공서하가,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마현의 뒤를 따랐다.
* * *
말이 없는 이인(二人)이 함께 다니면 어찌 될까?
그 답이야 뻔했다.
‘조용하군.’
정도맹의 높은 담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나, 여유롭게 걷기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사이 무공이 또 진일보했군.’
하나 서로를 향한 관심이 전혀 없는 건 또 아니었다.
마현은 공서하의 무공이 초절정에 들어섰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녀 역시 분명 천재의 범주. 어린 나이에 대단한 경지를 이룩한 것이다.
‘얼마나 더…….’
공서하는 마현의 감춰진 비밀을 떠올렸다.
얼마나 더 많은 껍질을 까야 그 끝이 보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신비해지는 마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심경은 제법 복잡했다.
‘그냥…… 신기하기만 한가.’
묘한 기분이다.
알쏭달쏭하고, 함께 걷고 있으니 좋다.
말 한마디 없어도 괜찮았다.
‘편안해.’
어린 시절, 해남검후라 불리는 어머니 공여령과 함께 손을 맞잡고 산책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나이가 들고, 머리가 크며 이제 공서하는 공여령과 함께 걸어도 그때의 안락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랐다. 편안하기는 한데, 먼 과거처럼 아늑하지는 않다.
한데 마현과 함께 걷고 있으니 오래전 과거의 감각이 몸에 새겨진다.
너무나 좋은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하자고 했음에도, 말 한마디 안 꺼냈지만 상관없었다. 그냥 이 상태로 길을 잃어, 몇 날 며칠을 걷기만 한다 한들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공 소저, 나이가 이립(而立)이던가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마현이 먼저 입을 연다.
워낙 동안인 탓에 가끔 잊고 있지만 공서하는 제법 나이가 많다. 조금 있으면 강호에서는 더 이상 후기지수라 불리지 않을 정도였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공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꽤나 나이를 생각지 않고 살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연이는 해남파에서 잘 지내는 편입니까?”
끄덕, 끄덕.
고개가 두 번.
이번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많이 친하신가 보군요.”
끄덕, 끄덕, 끄덕.
세 번의 고갯짓.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던 마현은 갑작스러운 오기가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어떤 질문을 하면 고갯짓 숫자를 더 늘릴 수 있을까.
두 번 다음에는 세 번을 했으니…….
‘이번에는 네 번째인데.’
쓸데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왠지 시도하고 싶다.
“어머님과는 사이가 좋으신 편입니까?”
사실 의미 따위는 없는 질문이다.
해남검후와 딸인 공서하의 관계 같은 것.
마현의 입장에서는 관심 밖이니 말이다.
단지 네 번의 고갯짓을 얻어내기 위한 말.
끄덕, 끄덕.
한데 이번에는 두 번의 고개만 끄덕여졌다.
‘실패로군.’
망설임은 없었지만 끝내 네 번째는 보지 못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마현은 곧바로 쓸데없는 오기를 버렸다.
‘이미 실패했는데…….’
이제 와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말, 편히 하셔도 돼요.”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것은 공서하였다.
마현은 묵묵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음 이야기가 나오면 두 번의 고갯짓을 할 예정이었다.
한데 더 이상 말이 없다.
공서하는 다시 입을 닫고 정면만을 바라본 채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피식.
그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린 마현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도 나쁘지 않군.’
말이 없으면, 서로에 대해 알기 불편해 힘들 줄로만 알았다.
한데 이렇게 있는 것도 딱히 나쁘지는 않다.
‘린 매가 알면 섭섭할 소린가?’
분명 양 볼을 꼬집어 늘리거나, 콧잔등을 두들길 터다.
그러한 상상을 하자 또 한 번 웃음이 나온다.
소붕을 떠올리게끔 하는 주화화의 등장에 이어, 공서화와의 여유로운 산책까지.
분노로 가득 차오르던 마현의 마음을 씻겨주는 것만 같은 단비가 계속해서 내린다.
‘너무 화내지 말란 건가.’
그렇다면, 그 의도는 정확히 먹혀들었다.
천하를 뒤집어엎을 것 같던 분노는 모두 가라앉았다.
적어도 이성적 판별쯤은 분명히 할 수 있는 상황.
하나 그렇다고 하여 마음먹은 바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넋 놓고 보고만 있다가는 가족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본다. 그때는 정말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 전에, 미리 삭초제근을 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만큼.
후회할 법한 일을 남기지 않는 자세도 필요하다.
결정을 내린 마현이,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말도 없이, 생각보다 오래 걸은 탓에 하늘의 해가 어느덧 저물고 있었다. 제자들을 생각해서라도, 하루빨리 돌아가려면 슬슬 움직여야만 할 때다.
“그만 가봐야겠어.”
이번 마현의 말에는, 공서하의 고개가 한참이나 반응이 없었다.
그야말로 정적.
하나 공서하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마현 역시 굳이 대답을 채근하지 않았다.
덕분에 둘은 약 일다경 정도를 더 함께 걸었다.
그때쯤 돼서야.
끄덕.
공서하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조차도 매우 느릿한, 아쉬움이 가득한 동작이었다.
“다음에 또 보자.”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웃음을 그린 마현이 말하자, 조금은 편안한 눈빛이 된 공서하가 답했다.
“꼭…….”
그렇게 두 사람 역시, 다음을 기약하며 멀어졌다.
제십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