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귀환-21화 (22/83)

(第八章)

여름날, 뜨거운 열기에 취한 듯 각자의 공부에 열을 쏟는 와룡서원의 제자들은 조금씩 자신들이 배우고 있는 것이 범상치 않은 것임을 확실히 자각해가고 있었다.

서원에서 무공을 알려준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

한데 어느 누가 있어 제공의 지배와 와룡강림공 같은 신공절학을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애초부터 구결신공에 이은 글공부 효율도 너무 놀라웠다.

‘스승님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하나 함께 공부를 하고 있는 마현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평범한 학사일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기묘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마현과 닮은 행색을 한 의원이 인근의 가난한 마을들을 돌며 중병과 난치병을 치료하고 있다.

옆에는 제자로 보이는 청년이 따라다녔는데, 앳된 외모와 다르게 덩치가 마치 산과 같다더라.

“네 이야기 아니냐?”

아이들 사이에서 나오는 소문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정순욱이 백산을 향해 묻는다.

“맞아.”

백산은 굳이 부정을 하지 않았다.

벌써 이 개월.

마현과 함께 주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구제와 활생의 도리, 그리고 의술을 배웠다. 이제는 작은 병 정도는 혼자서도 구급조치 정도는 할 수 있게 된 상태. 성류의문의 기공치료법도 천천히 단계를 밟아 나가고 있었다.

“하…… 그런 쓸데없는 잡기까지 배우면서 시간을 낭비하다니. 조만간 네놈을 따라잡는 건 일도 아니겠군. 아니, 어쩌면 이미 격차가 났을지도 모르지.”

정순욱이 가볍게 혀를 차며 그런 백산을 나무랐다.

학문과 무공의 단련만으로도 모자란 시간이다.

한데 의술이라니.

세 우물을 판다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오만한 정순욱이어도 그러한 일이 어렵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내 꿈이야.”

“……뭐?”

“아프고 지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돕고 싶어. 나 혼자만 살려는 세상이 아니잖아.”

본인이 가진 맑은 마음에, 성류의문에서 말하는 구제의 덕까지 가지게 된 백산의 의지는 너무나 굳건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 남들이 그것을 보고 어리석다 비웃고, 손가락질한다 한들 이야말로 백산이 향하는 길이다.

마현은 그를 보고 대협(大俠)으로 이르는 길이라 칭했다.

“……응원할게.”

옆에서 듣고만 있던 소수린이, 조금은 감탄한 표정으로 백산에게 말했다. 느껴지는 의지와 기개가 또래 아이들의 것을 월등히 벗어난 탓이다.

“무슨…….”

타박하는 정순욱도, 같은 것을 느낀 탓에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 같으면 한심하다고 비웃어 줄 텐데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백산이란 아이는 언제나, 또래의 아이들 아니, 다 큰 성인들과도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존경할 수밖에 없는 스승인 마현이 가진 것과는 다른, 또 다른 빛이다.

‘어쩌면…….’

저 빛이 있는 이상.

평생을 가도 나는 백산을 이기지 못하는 게 아닐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재빨리 고개를 내저은 정순욱이 눈을 부라렸다.

“흥, 열심히 해봐라. 혹시나 말하는데, 나중에 세 우물을 동시에 파느라 나한테 졌다 해도 그 역시 변명일 뿐이다. 욕심을 부리려면 제대로 부리란 뜻이다.”

“그럴게.”

백산이 그런 정순욱을 보며 활짝 웃는다.

그것이 정순욱 나름의 응원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와룡서원의 제자들이라 하여, 몇 해 동안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니다. 먼 곳에 있던 부모들이 시간이 될 때면 무명현으로 찾아와 자식들을 불러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것이다.

백산의 경우는 분명 그러한 부분에 많이 자유로웠다.

소룡원에 머물며 집에 가는 날도 얼마 없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아버지, 백일을 볼 수 있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어릴 때 함께 뛰어놀던 친구도 우연히 마주치곤 할 때가 있었다.

“어, 백산아!”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서융(書融).”

서융은 백산이 다섯 살배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지금이야 서원 공부에 바빠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지만, 서원에 들기 전에는 하루가 멀다고 함께 어울려 놀았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정겹게 물어오는 서융의 말투는 예전과 변함이 없는 그대로였다. 순박함이 느껴지는 유순한 말투. 덕분에 어린 시절에는 성격이 강직하지 못해 아이들에게 많은 놀림을 받기도 했었다.

“그럭저럭. 너는 어때?”

“나야 뭐…….”

말꼬리를 흘린 서융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백산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며,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 다친 것 같은데.’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마현에게 의술을 배운 백산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서융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몸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은 그 탓일 터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알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건, 아직 어린 백산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없어. 그보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이번에 원시에 합격했다는 소식 들었어.”

“그렇긴 한데…….”

하나 서융 본인이 계속해서 부정하면 의미가 없을 수밖에 없는 노릇. 백산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듯 질문했다.

“혜아는 어때? 잘 지내?”

서혜(書慧)는 서융의 여동생으로서, 어린 시절 백산을 참 잘 따랐던 아이였다. 오빠를 닮아 유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인지라 여성스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던 서융과 서혜 남매는 무명현 내에서도 사이가 좋기로 유명했다.

“자, 잘 지내지.”

그런 서혜의 이야기가 나오자, 시선을 피한 서융이 식은땀을 흘린다.

‘역시…….’

무슨 일이 있다.

그것도 집안 전체를 흔들 정도의 큰일이었다.

“너 혹시…….”

“아, 난 이만 가야겠다. 볼 수 있으면 또 보자.”

백산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자, 과장된 목소리로 말한 서융이 손을 흔들며 재빨리 등을 돌렸다. 백산은 그 모습을 인상을 찌푸리며 한참을 바라보다, 몰래 뒤를 밟아 나갔다.

‘말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알아내면 된다.

연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낼 수 있었다.

“막내 놈이 이렇게 느려 터져서야.”

“오늘 수거 똑바로 안 되면 형님한테 제대로 깨지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 어설프게 했다가는 네놈도 함께 죽는 거다.”

“예, 예!”

어두운 골목길.

척 보기에도 왈패로 보이는 청년들과 함께 선 서융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서융의 얼굴이 어둡던 이유.

몸의 흉터.

왈패들을 본 순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한데 어째서 서융이 그들과 어울리고 있단 말인가?

맞서 싸우다 안 좋은 일에 휘말려 맞았다면 차라리 납득이 될 텐데.

‘조금 더 봐야겠다.’

백산은 계속해서 숨을 죽인 채 뒤를 따랐다.

딱히 추적술을 배우거나, 은폐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큰 상관 없었다. 고작 삼류 왈패에 불과한 청년들이 마현의 밑에서 올바르게 무공을 단련한 백산의 기척을 알아챈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오늘은 여기부터 할까?”

서융과 어울린 청년들이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마현의 아버지, 마전이 매일 아침 장을 보는 그곳 말이다.

저녁 늦게 시장으로 들어선 왈패들은 날카로운 눈매로 주변을 스윽 훑어보고는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분위기를 조성했다.

“캬악! 퉤!”

침을 뱉는 것은 기본.

“요즘 장사 잘 된다던데. 분위기가 이게 뭐야.”

“뭐 다들 축 처진 얼굴이네.”

발길질로 툭툭.

시장을 전체적으로 한번 훑고 지나간 왈패들이 곧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들에게 당과 등의 간식을 파는, 이제는 육십이 넘은 노파가 운영하는 작은 가게였다.

“어이, 할멈. 이번 달 보호비 아직 하나도 안 냈다며?”

“보호비는 무신. 네놈들 같은 왈패 새끼들한테 줄 돈 없으니까, 썩 꺼지거라.”

노파는 눈알을 부라리는 청년을 보고도 조금도 겁먹지 않은 채, 언성을 높이며 삿대질을 했다.

“히야, 이 할머니 말귀 못 알아듣기로 유명하다더만 진짜였네.”

그에 왈패 중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노파의 앞으로 다가갔다. 성큼, 성큼 걸음을 옮긴 그는 뒷걸음질 치는 노파를 향해 묵묵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말로 안 통하면 주먹을 행사한다.

예로부터 흑도(黑道)에 속한 이라면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배운 가장 단순무식하며 효율적인 방법이다.

“아니, 가만.”

눈을 질끈 감는 노파를 보며 뺨을 내리치려던 사내의 움직임이 잠시 멈칫했다. 시선은 천천히 돌아가, 서융을 향한다.

“어이, 막내.”

“예, 예!?”

“네가 해라.”

“……무슨 말씀이신지?”

“이, 씨벌 놈이. 꼭 같은 말 두 번 하게 만드네.”

퍽.

“커억!”

화가 난 듯, 단숨에 서융에게 다가간 사내가 발을 들어 서융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찼다. 본래부터 몸이 튼튼하지 않았던 서융은 그것조차 견디지 못해 시장바닥을 데구르 구르며 거친 신음을 몇 번이고 토했다.

“하여간에 허약한 새끼. 무슨 말이겠냐. 엉? 너도 이제 우리 문파에 들어왔으면 저런 노파 요리하는 법 정도는 배워야 하지 않겠냐는 거다. 알아들었어!?”

“아, 알겠습니다.”

바닥을 기며 힘들게 말하는 서융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사내가 턱짓으로 노파를 가리켰다.

“알아들었으면 벌떡 일어나서 해봐. 오늘도 똑바로 안 했다가는 정말 죽는다.”

“네, 넵.”

그 흉흉한 살기에, 바닥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서융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노파에게로 다가갔다. 고집 가득한 주름이 새겨진 노파의 가게는, 서융도 불과 몇 년 전까지 자주 이용하던 장소였다.

‘이곳에서…….’

서혜와 백산과 함께 당과를 사 먹고는 했다.

함께 침을 묻히며 웃고 떠들고.

눈앞의 노파는 그런 자신들을 보며 귀엽다고 간식거리를 더 얹어주기도 했다.

그랬는데, 그랬던 장소인데…….

“네놈이 저런 왈패 새끼들하고 어울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노파가, 그런 서융을 알아보고는 거칠게 말한다.

“지랄한다. 야, 막내. 뭐하냐? 저 할멈 노망 좀 고쳐줘.”

뒤에 선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후, 다시 한 번 서융을 채근했다. 서융의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두 눈은 붉어졌다. 그 사이에도 분명히, 서융의 팔은 천천히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아, 씨발. 거 답답해 죽겠네. 시원시원하게 못 해!”

“아직 늦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오거라.”

사내와 노파의 목소리가 동시에 서융의 귓가를 울렸다.

서융은 눈을 꼭 감았다.

어찌해야 될까.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머릿속에 혼란이 가득 차는 듯했다.

이곳에 오기 전 보았던, 백산의 얼굴이 다시 보고 싶었다.

그리고 끝내.

“죄송, 죄송합니다…….”

손을 휘두르지 못한 서융이 다시금 천천히 팔을 내렸다.

“이 미친 새끼가!”

그에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사내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냥 나가 뒤져라 멍청한 새끼야.”

명령을 했던 사내가, 앞으로 달려와 그런 서융의 등을 강하게 걷어찬다.

“커억!”

신음을 내지르며 다시 한 번 앞으로 고꾸라진 서융이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이놈들! 언젠가 천지신명께서 네놈들에게 큰 벌을 내릴 게야!”

노파가 그런 서융을 감싸며 크게 외쳤다.

“시끄럽기는, 얘들아. 뒤집어엎어!”

“예!”

사내의 명령에 따라 또 다른 왈패들이 노파의 가게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며 흉흉한 눈빛을 흘렸다.

‘더 이상은…….’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주먹을 움켜쥔 백산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슈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퍼버벅.

백산의 주먹이 번개처럼 휘둘러진다.

“뭐, 뭐야……!”

“어떤 새끼가…… 억!”

왈패들 따위가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스로 흑도문파라 칭하지만 기껏 해봐야 동네 왈패에 불과한 사내들을 쓰러트리는 데는 반 각도 필요 없었다. 와룡강림공의 권법과 각법을 이용하여, 봉 없이도 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백산이 노파의 가게와 서융의 앞을 막아선 채 눈을 흉흉히 빛냈다.

“꺼져라.”

목소리에는 단호한 분노가 깃든다.

앳된 얼굴에, 얻어맞고 바닥을 기게 된 주제에 자신도 모르게 반박하려던 왈패들은 그 기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네, 네놈……! 두고 보자!”

이윽고 삼류 악당스러운 대사나 남기며 도망치기 시작한 왈패들이었다.

* * *

사태가 모두 정리된 후.

울먹이는 서융을 통해 모든 사연을 알게 된 백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네 발로 가출해서 야차문(夜叉門)에 들어갔다는 게냐?”

야차문은 얼마 전, 인근에 세력을 형성한 흑도방파였다.

왈패들이나 이끌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겠지만 수준은 기껏 해봐야 삼류. 본래 건달패에서 시작한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렇다 해도 가지고 있는 자본이 많아 사업장을 늘이며 영역확장 중이라니, 우습게만 볼 수도 없을 듯했다.

“으, 응.”

“왜 그런 거냐?”

우물쭈물 대답한 서융은, 이어진 백산의 질문에 또 한참이나 망설였다.

“이번에도 대답 안 할 거야?”

“아, 아니. 할게. 할게.”

자신에게는 이름 그대로 야차만 같던 문파의 선배들이, 백산 하나를 당해내지 못해 바닥을 나뒹구는 꼴을 보았다. 한데 어찌 그 말을 거부할쏘냐? 결심을 한 듯, 두 주먹을 움켜쥔 서융은 백산을 노려보며 외쳤다.

“나도! 강해지고 싶었어!”

“음……?”

“나도 너처럼,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단 말야.”

울먹거리며 시작된 서융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따지자면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유순한 성격 탓에 많은 놀림을 받았던 서융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약하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신적 약점으로 남아 있었다. 무엇하나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우유부단(優柔不斷). 웬만한 여아와 비슷한 작은 체구에, 그에 못지않은 허약한 힘. 심지어 성격조차 독하지 못해 무엇 하나 마음먹고 해낸 일이 없다.

그런 서융에게 백산은 우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강직하고 믿음직하게 앞서 나아가는 백산을 보며 동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믿음직한 대형과 같던 백산이 서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글공부를 하여 학사가 되기 위함이란다. 기분 나쁠 것은 없었다.

더욱더 대단한 사람이 되려는 백산을 보며 마음속으로 응원도 했었다.

그런 시간이 흘러가자.

마음 한편에서 두려움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산이가 없는 나는…….’

어린 시절 유약하다 놀림받는 서융을 구제해준 것은 다름 아닌 백산이었다. 함께 손을 맞잡아 주었으며, 여자애 같다고 무시하는 친구들과 골목 놀이를 할 수 있게끔 이끌어줬다. 그렇게 살았다.

백산 없이는, 타인과 어울리는 것조차 겁이 났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기는 싫은데…….

겁이 난 서융은, 자신이 강해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까지 바보같이 백산에게 기댈 수만은 없다.

스스로 강해져야만 한다.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다.

어디서 본 구절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사내는 홀로 설 때 진정 사내다워질 수 있다고 하였다. 직후로는 곧바로, 주먹질을 배우기 위해, 남자들의 세계라는 흑도문파를 찾아갔다. 소문이 안 좋은 만큼 겁도 많이 나 문 앞에서 몇 번을 망설였지만 끝내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있던 것 역시 백산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언제까지 기댈 수만은 없어!’

약하다고 놀림 받는 시절은 지겹다.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걸음을 내디뎌, 야차문의 문도가 되고 싶다 말했다.

그렇게 서융은 야차문의 막내가 되었다.

진정한 남자의 세계에 발을 들여,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 믿으며 기뻐했던 날은 첫날 밤뿐이었다.

이튿날.

선배라는 족속들을 따라 야차문의 행사에 함께 나섰다.

그들은 이름만큼이나 흉포하고, 난폭했으며,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힘없고 가난한 이를 마구잡이로 다루었으며, 돈이 걸린 일에는 칼날을 빼 들기도 서슴지 않았다. 뿐만이랴? 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어린 여아를 향해서 몹쓸 짓을 하는 짓도 보았다.

서융은 곧바로 후회했다.

그제야, 자신이 어떤 세계에 발을 들였는지 깨달은 탓이다.

하나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야차문의 규율 첫 번째.

들어올 때는 제멋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다.

못해도 다리 하나, 팔 한 짝은 내놓아야 문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겁쟁이, 마음 약한 서융이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벌써 일 개월을 끌려다녔다.

그 와중에 가족들의 눈에 띄지 않게 얼마나 조심했는지를 모른다. 백산을 보고 다가간 것은, 저도 모르게 피어오른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서였다.

아니,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백산이니까…….’

어쩌면 백산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못난 자신을 또다시 구원해주지 않을까.

약한 마음이 너무나 미워 울고 싶은 상황에 다가갔다.

그리고 백산은 언제나 그렇듯 약한 서융을 구하러 나타났다.

미안하고, 고맙고, 슬프다.

서융은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은 채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야말로 대성통곡(大聲痛哭)이었다.

* * *

서융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실수에 후회하며, 자책하면서 몇 번이나 후회의 눈물을 흘린 뒤였다.

‘괜찮겠지?’

조금 걱정은 되지만, 큰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 역시 경험이다.

이제 서융은 다시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을 터다.

또한 시간이 더 흐른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 최선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백산 자신이, 마현과의 구제행에서 배웠듯 말이다.

‘너를 믿는다.’

서융을 바라보며, 마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된 백산이 웃음 지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참 어렵지만, 즐거운 일이었다.

제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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