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마현과 백산이 인근 마을에 들러, 환자들을 돌보는 시간은 정확하게 하루 한 시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도움을 청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할 일도 많다.’
마현의 직업은 의원이 아니다.
단지 의술을 행할 줄 아는, 아이들의 선생일 뿐이다.
하루 열두 시진의 시간을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짜내어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다 보니 일상이라 하여도 어떻게 여유가 남는 틈이 없었다. 공부를 가르치고, 무공을 일러주고, 의술을 행한 후에는, 잠들기 전 아이들 모두에게 어울리는 무공초식을 떠올린다.
정말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굳이 여유를 뽑자면, 아이들과 함께 글귀를 읽어내리며 훈훈하게 웃는 시간과.
“이것 좀 들고 하세요.”
구혜린과 초이영 등이 챙겨다 주는 식사를 하는 시간일 터다.
“와아아, 밥이다!”
점심때만 되면 아이들은 신이 나 상을 향해 몰려든다.
마현은 그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본 후, 구혜린이 따로 챙겨다 준 작은 밥상 위에서 젓가락을 들었다.
“요즘 많이 바쁘죠?”
그 옆에 다소곳이 앉은 구혜린이 또 다른 젓가락을 들어 마현의 밥그릇 위로 생선의 살을 발라주며 묻는다. 최근 그녀는 최대한 마현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많지 않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마현이 괜히 자신 때문에 마음의 여력이 더 없어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제는 조금 여유가 생길 것도 같아.”
“……?”
“아이들을 위해 만들던 초식. 완성됐거든.”
전날 밤, 침상에 누워 한참을 생각하다 직접 달빛 아래에서 무공을 시연해 본 마현은 박수를 쳤다. 딱이다. 구결신공과 와룡서원의 풍토 영향으로 내공의 밑바탕을 마련했으며, 봉술과 제공권을 익힌 아이들 모두에게 알맞은 옷.
십인(十人)의 색을 모두 고려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만큼 성과는 컸다.
“정말요? 기대해봐야겠는걸요.”
마현이 아이들을 위한 무공을 고민 중이란 걸 알고 있던 구혜린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마현의 옆에서, 조신하게 살고 있지만 그녀는 본래 강호의 고수다. 당연히 무공 이야기라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기본은 권각술하고, 봉술인데…… 연계되는 내공심법도 만들었지.”
“이름은요?”
“……그걸 정하려고 린 매(妹)한테 이야기를 꺼낸 것 아니겠어?”
이제는 자연스럽게 호칭을 사용하게 된 마현의 질문에 짓궂은 미소를 지은 구혜린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속삭인다.
“그런 질문은 지금보다는, 이따 밤에 하는 게 좋지 않아요?”
“…….”
무덤덤하기만 하던 마현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리는가 싶더니, 곧 묘한 표정으로 변했다. 부끄러워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마현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된 구혜린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조용하게 속삭였다.
“그도 그럴 게, 전 그 무공이 어떤 형태인지도 못 봤잖아요? 이따가 한 번 보여주세요. 그래야 이름을 붙여보죠.”
“어?”
이후로는 거리를 벌리며 다시 한 번 혀를 쏙 빼 내밀며 웃는다.
“설마 다른 것 기대한 건 아니죠? 전 무공 얘기에 이어, 무공 이야기로 답한 것뿐인데. 호호.”
당했다.
완전히 속았다.
황당해하는 마현에게로.
“으이구, 은근히 귀엽다니까요.”
검지를 들어 콧잔등을 톡, 두들긴 구혜린이 다른 반찬을 집어 마현의 밥그릇 위에 얹어주었다.
“밥 먼저 먹어요. 다른 일은…… 무공 이름을 정한 뒤에 생각하자고요.”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 * *
“모두 지금부터 내가 보여주는 것을 잘 기억하도록 해라.”
다음 날 오후.
글공부를 끝낸 아이들을 불러 모은 마현이 마보 자세를 취한 뒤 정권(正拳)을 내질렀다.
“와룡일권(臥龍一拳)이다.”
평범한 동작만큼이나, 평범한 이름이었다.
“다음은, 등천(登天).”
몸이 비스듬히 세워지며, 내뻗었던 정권이 위로 솟는다.
“용미각(龍尾脚).”
다음 초식의 이름을 말했을 때는, 마현의 몸이 뒤로 넘어간다. 내지른 반대편 손이 바닥에 닿자마자 뻗어진 것은 용의 꼬리라 이름 붙여진 긴 다리다.
“팽지각(烹地脚)!”
그 용의 꼬리가, 지면을 강하게 내친 순간에는 작은 폭음과 함께 먼지 구름이 일었다.
“콜록, 콜록.”
아이들 몇몇이 기침을 토하며 고개를 내젓는 사이에는,
후웅-!
어느새 마현의 손에 쥐어진 연봉이 매섭게 앞으로 쏘아졌다.
“용각사(龍角射)!”
페엥-!
공기가 당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대기가 진동을 일으킨다.
이후로도 스물여섯의 초식을 더 연계해서 선보인 마현이 연봉을 한 바퀴 돌리며 지면에 내리찍었다.
“마지막, 용왕현신(龍王現身)까지. 모두 잘 보았느냐.”
“예.”
아이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보기는 했다.
한데 초식의 본질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당연한 일이겠지.’
전날 밤, 구혜린과 함께 이름 지은 무공 와룡강림공(臥龍降臨功)은 따지자면 굉장히 난해한 무공이었다. 하나의 무공 내에 권과 각, 심지어 봉을 다루는 방법까지 연계되어 있으니 일반적인 오성을 가지고는 익힐 수조차 없다. 또한 각자 길이가 다른 무구(武具)를 사용하기에 주변 공간에 대한 지배 감각, 제공권이 없으면 함부로 펼칠 수조차 없다.
‘대신 이를 똑바로 펼칠 경우는…….’
손에서부터 발이 닿는 거리, 심지어 봉이 내뻗어지는 공간까지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다.
아이들의 제공권 내로 들어와 와룡강림공에 맞서는 적은 마치 끈끈한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 된 듯 허무하게 발악하다 패배를 겪게 될 터였다.
“오늘부터는 제한대련과 함께 이러한 초식, 와룡강림공을 수련한다. 모르는 부분이나 어려운 동작이 있다면 언제든 질문하도록 하여라.”
고개를 끄덕인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연봉을 잡은 채 자세를 취했다. 마보 자세에서 정권으로 시작되는 와룡강림공은 등천에 이어 용미각으로 이어진다. 거기서, 편안한 모습으로 무공을 시전하던 아이들의 인상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용미각을 시전하려면 몸을 반쯤 누여야 한다.
또한 내지른 주먹의 반대 손은 지면을 짚어야 한다.
하면 이미 기수세에서부터 들고 있던 연봉이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한 아이가, 손을 들어 질문하려던 찰나였다.
파앙-!
“큿!”
다른 장소에서 제한대련을 하던 백산과 정순욱, 둘 사이에서 엄청난 파공음이 오갔다.
“이걸 막아?”
방어를 한 측은 백산.
공격을 한 이는 정순욱이었는데, 둘 다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하나 아이들을 경악게 하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용미각…….”
정순욱은 다른 아이들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용미각을 정확히 펼치고 있었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반대 손으로 땅을 짚는 대신, 연봉을 지지대 삼아 다리를 휘둘렀다. 봉의 탄력을 이용한 덕에 오히려 위력은 늘어난 채였다.
‘이해를 잘하고 있어.’
마현의 입가로는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봉이 없는 상태에서 와룡강림공의 시전을 보여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와룡강림공은 총 서른 가지의 초식으로 이루어졌다. 완벽히 다른 각자의 동작은, 고정된 듯 보이지만 형태의 자유를 취할 수 있다. 개인의 성향과 체형에 맞게끔 또 다른 형식으로 무공을 펼칠 수 있다는 뜻이다.
‘바로 지금 순욱이처럼 말이지.’
백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고, 독특하다 볼 수 있는 정순욱의 공격을 막아선 방법은 다름 아닌 열두 번째 초식, 용풍격(龍風擊)의 변환 동작이었다. 봉을 회전시켜 작은 용권풍(龍卷風)을 형성해내듯이 밀어붙이는 용풍격은 본래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며 억압을 넣기 위한 동작이었다.
한데 백산은 그러한 용풍격의 회전 원리를 이용해 빠르게 봉을 돌려 정순욱의 기습을 막아냈다.
머리로 생각했다기보다는 몸이 따른 바 같지만, 굉장히 대단한 일이었다.
“저, 저기 봐!”
거기에 이어 소수린 역시 발군(拔群)이었다.
같은 여제자, 화영령(華英靈)을 밀어붙이는 그녀의 초식은 그야말로 물이 흐르는 듯한 형태. 주먹을 내지르고, 발을 내뻗으며, 봉을 휘두름에도 어디 하나 막힘이 없다. 강맹하지는 않더라도 완벽하게 상대를 제압해 놓는다. 힘이 약한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어울리는 형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터다.
“과연 삼인방이네요.”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혜린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아무리 제공권과, 뛰어난 오성을 갖추고 있다 하여도 기겁할 만한 재능. 처음 와룡강림공을 익히자마자 저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그녀였다.
“셋뿐만이 아니야.”
한데 거기에 더 얹어.
“이, 이렇겐가?”
“나는 조금 더 힘을 많이 실어서…….”
세 아이를 보며 무언가를 깨달은 제자 몇몇이 자신만의 와룡강림공을 만들어 버린다.
“……여긴 무슨 수재랑 천재들만 모아놓았나 봐요.”
구혜린의 표정은 더욱 당황으로 물든다.
“그러게 말이지.”
마현도 어깨를 으쓱하며, 웃음을 흘린다.
‘내 제자들이지만…….’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건 인정해야 할 듯했다.
* * *
그렇게 와룡서원의 일상이 한 번 더 변화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구보를 한 후, 본래 운기토납법 형식으로 취하던 운기조식 시간에 와룡강림공에 포함된 와룡심공(臥龍心功)을 연마한다. 제한대련과 함께 와룡강림공의 초식들을 수련한다. 무공적인 면의 진화다.
하면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어떠하냐?
이제 열 명의 제자가 모두 사서(四書)의 공부에 들어갔다.
비교적 빠른 편인 백산, 정순욱, 소수린은 일부나마 삼경(三經)까지 곁들여 공부를 행하고 있었다.
‘나도…….’
마현도 이제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의 다음 시험이 향시다. 단번에 합격하기 힘든 시험이라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그러한 향시에 합격하면?
아이들은 거인이 된다.
마현과 같은 칭호를 부여받는 것이다.
‘체면상 그리될 수는 없지.’
딱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눈초리에 영향을 받는 편은 아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가르친 제자들과 같은 선상에 서는 게 마음 편한 것만도 아니었다.
‘거인까지만 가르치고 말 것도 아니고.’
더욱더, 오래 함께하고 싶다.
어느덧 아이들과 정이 들어버린 마현은, 이 아이들이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때가 되기까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승이 못나 보이면 안 된다. 마현으로서도 노력을 해야만 되는 시점인 것이다.
‘어디 보자…….’
보통 향시 이후에 치르는 시험을 회시(會試)로 아는 이들이 많다. 하나 실제는 조금 달랐다. 회시를 치르려는 응시자들은 우선적으로 거인복시(擧人覆試)를 치러 높은 등급의 판정을 받아야 한다.
‘최소 삼 등급 이상인가…….’
사등급(四等級) 이하의 응시자들은 운이 없으면 회시를 치르지 못하고, 오 등급 판정을 받은 학사들은 거인의 자격조차 박탈당해 평민이 된다.
‘우선 복시에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는 것이 순서겠군.’
나름대로 글공부에는 자신 있는 마현이지만, 시험을 우습게 볼 생각은 없었다. 꼴사납게 떨어져 오 등급을 맞아 아이들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그런 마현의 열정에 맞물려, 아이들도 더욱 노력해 나간다.
열기가 뜨거운 계절, 여름의 한때였다.
* * *
“헉, 헉…….”
어두운 밤.
온몸을 피로 칠한 청년이 협로를 달리고 있었다.
불안한 듯 빠르게 떨리는 두 눈은 쉴 새 없이 사방을 살피며 긴박하게 움직인다.
“죽엇!”
그런 청년의 머리 위로, 검은 복면을 쓴 인물의 검이 바람처럼 떨어졌다. 놀란 표정의 청년은, 몸을 옆으로 비틀며 쌍장(雙掌)을 쏟아냈다.
퍼버벅.
“커어억!”
뒤를 이어 쏟아지던 복면인 서넛이 동시에 핏물을 토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간신히 공격을 막아 낸 청년은 눈가로 흐르는 핏물을 훔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위험했어.’
몸이 본능적으로, 음률을 타듯 흐르지 않았다면 목이 베였을 위기다.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그랬다.
‘큰 형에게 배운 박자의 공능이 아니었다면…….’
목이 수 번은 더 달아났을 상황.
청년, 마운은 입술을 깨물며 협곡 끝을 향해 달려나갔다.
아직도 추적자들은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하나 마운은 죽을 수 없었다.
‘알려야 돼.’
강호를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세력이 천하 곳곳에 암수(暗手)를 펼쳐놓았다. 이 상태로 아무것도 모른 채 더 시간이 흐른다면…….
‘천하는 그들의 발에 짓밟힐 거야.’
흑천(黑天).
두 글자의 단서를 얻어 낸 마운은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제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