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비록 우연히(?) 마주친 산적 소탕 덕이라지만, 제 손으로 번 첫 돈이라는 느낌 탓일까? 현상금으로 금전을 여섯 냥이나 챙기게 된 아이들의 표정에는 감출 수 없는 희열이 엿보였다.
“흥, 이 몸이 직접 손을 썼는데 고작 여섯 냥이라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바람을 치는 정순욱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얼굴이 살짝 붉게 상기된 것이, 여지없이 좋은 기분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마현은 예정했던 대로, 그 돈을 아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쓰라 말하였다. 금전 여섯 냥이면 세 아이가 나누어도 일 인당 두 냥씩이나 되니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현명한 세 아이라면 분명 자신이 만족할 법한 일에 돈을 잘 사용할 것이다.
그렇게 세 아이는 각자 나눠준 금전 두 개씩을 손에 쥔 채 생각에 빠졌다.
“여비로 사용해 주세요.”
가장 먼저 나선 이는 소수린이었다.
그녀는 큰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큰돈을 마현에게로 불쑥 내밀었다.
“네가 하고 싶은 데 쓰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
마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묻자,
“이게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소수린이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답한다.
두 눈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였다.
‘고마운 게냐…….’
그 깊은 곳에 감춰진, 표현하기 힘겨워하는 감사함을 느낀 마현이 작은 웃음을 흘린다. 말이 별로 없다고 하여, 표현이 약하다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수린은 언제나 늘, 마현을 향해 감사하고 있었다. 천애 고아나 다름없는 자신을 거두어 준 것으로 모자라 먹여주고, 재워주고, 글공부와 무공까지 일러준다. 처음 마현을 찾아왔을 때의 그녀는 많은 각오를 한 상태였다. 더러운 바람이라도 있다면 그라도 들어줄 생각이었다.
한데 마현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의 스승이 되어 지켜봐 주고, 다독여주고, 멀리서나마 응원해줬다.
안다.
지금의 그녀가 있는 것은 마현이라는 훌륭한 스승이자,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수린에게 있어 마현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친아버지보다, 훨씬 더 깊은 부정(父情)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잘 쓰도록 하마.”
처음으로 제 손으로 번 돈을, 부모님께 가져다 드리는 자식의 마음일까? 마현이 순순히 돈을 건네받자, 소수린의 입가로 오랜만에 본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저는…… 죄송합니다. 여비에는 보태지 못할 것 같아요.”
뒤를 이어, 머쓱한 표정의 백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나 행동은 소수린과 다를 바 없었다.
마현을 향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금전 두 냥을 내민다.
“다음 달 제 서원비로 쓰였으면 합니다.”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아버지, 백일을 생각하는 마음인가. 언제나 느끼지만 기특하다 생각될 정도로 마음이 순한 아이다.
“한 달 서원비는 금전으로 한 냥하고 반이다.”
“하면 남은 돈은 그다음 달 서원비에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손으로 처음 번 돈으로 아버지를 위한 효(孝)를 행하고 싶다는 백산의 마음이라면 받는 것이 옳다. 그편이 백산의 마음을 훨씬 더 편안하게 해줄 터니 말이다.
“뭐, 나도 이깟 푼돈은 필요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가장 뒤편으로 빠져 있던 정순욱이 금화를 꽉 쥐고 있는 주먹을 내밀었다. 푼돈이라 치기에는 유난히도 아끼는 듯한 그 모습에, 빙그레 웃은 마현이 물었다.
“다음 달 네 서원비에 보태면 되겠느냐?”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집은 이깟 푼돈 없어도 잘 살거든.”
검지로, 볼을 살짝 긁은 정순욱의 시선이 백산을 가볍게 훑는다.
“그러니까 저 곰 같은 녀석 서원비에나 더 보태줘요. 따, 딱히 뭐 신경 써준다거나, 배려해준다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고요.”
다급하게 말을 덧붙인 정순욱은 놀란 백산을 향해 눈알을 부라리며 콧대를 높이 추켜세운다. 참으로 삐뚤어진 방법이라고밖에 표현할 바 없는 행동에, 피식하는 웃음을 흘린 백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은 하지 않을게. 고맙다.”
충분히 네 마음을 이해했다는 그 어른스러운 모습은,
“하, 너도 착각하지 마. 그냥 어디에도 쓸모없는 푼돈이 빈민구제에 도움이 된다면 그나마 의미가 있겠지라는 생각에 한 일이니까.”
왠지 모르게 더욱 화가 난 듯한 정순욱의 반발만을 불러왔지만 말이다.
* * *
사건의 발단은 언제부터인가 따라붙은 시선들로부터였다.
‘아마 칠성암(七星岩) 정도 때부터였지?’
관찰하듯 따라붙은 시선은 꽤 번거로운 편이었지만, 무엇을 하는 놈들인지 확신이 없어 잠시 지켜보자 했었다. 그렇게 칠성암을 지나, 인근 마을에 도착하여 객잔에서 음식을 먹고 침소로 들 때까지도 별일이 없었다.
‘그저 감시가 목적인가?’
하면 그러한 감시에도 이유가 있을 터.
혼자라면 모른 척하고 지나쳤겠지만, 아이들이 연관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마현으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하여 모두가 잠들었을 때쯤 직접 몸을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몽혼향(夢魂香)을 풀어?’
단순히 잠이 드는 걸 기다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의식을 없애려 한다. 단순한 감시 외의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때였다.
마현은 잠시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몽혼향을 뿌렸으니 시간이 지난다면 놈들은 알아서 모습을 드러낼 테고, 이후로 모두가 잠들었다는 확신이 서면 안심한 후 마구잡이로 자신들의 목적을 떠벌릴 터다. 굳이 죽인 후 영혼 고문이라는, 마현 입장에서도 번거로운 방법을 펼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두 잠들었나?”
예상대로, 시간이 흐른 뒤 몽혼향을 뿌린 녀석들이 천천히 객잔 내부로 들어섰다. 그 숫자가 총 다섯이었는데, 모두가 최소 일류 이상의 고수였다. 고작 여행객들의 뒤를 쫓다, 몽혼향을 뿌린 후 음침하게 움직이기에는 아까운 실력이라는 뜻이다.
‘아직 한 명은 바깥에 있나?’
심지어 바깥에 남은 하나의 경우는 더했다.
‘마인(魔人)이었나?’
제법 잘 갈무리한 마기(魔氣)는 마현으로서도 놈이 인근에 다가오기까지 느끼지 못했을 정도. 아무리 마계에서 느꼈던 지독한 마기들 탓에 일반적인 마인들의 기운 정도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놈의 실력도 제법이라는 말이겠지.’
못해도 어느 한 지역에서 마두(魔頭) 소리를 듣는 실력자가 나섰다. 마현은 이번 일이 짐작했던 것보다 큰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까지나 강호의 입장에서지만…….’
마현의 입장에서만 따진다면, 몽혼향을 뿌렸다 한들 상관없다. 계속해서 감시를 한다 하여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이들과 구혜린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굳이 직접 손을 쓸 이유도 없을 터. 하나, 세상일이란 게 언제 마현의 입장을 배려해준 적이 있었던가?
“어른들은 죽이고, 아이들은 모두 납치한다. 아이들의 경우도 동정이 아니면 소용이 없으니…….”
으스스한 목소리가 끝내 하지 않은 뒷말이야 들을 필요도 없었다.
‘결국에는…….’
마현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
의견을 나눈 놈들이 객잔 내부에서 나뉘어 방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릴 때쯤, 뒷머리를 긁으며 가볍게 몸을 일으킨 마현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컥!”
마현과 백산, 정순욱이 머물던 방문을 열던 침입자의 목이 단숨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뭐, 뭐야!?”
“잠들지 않은 놈이 있다!”
그 광경에, 다른 방으로 향하던 침입자들 모두가 마현에게로 몰려들었다.
“번거롭지 않아서 좋네.”
마현은 침상에 앉은 자세 그대로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강기가 당황하는 침입자들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다. 본래였다면 남은 네 침입자의 목이 한 번에 허공으로 치솟았어야 할 공격이었다.
콰지직, 쾅!
한데 막혔다.
객잔의 천장을 뚫고 내려와 매서운 눈을 부라리는 봉두난발의 장년인 탓이다. 거대한 도(刀)에 물결처럼 흘러넘치는 강기를 뿌리고 선 그는 마현이 바깥에 남았다고 감지하였던 마두, 구절마제(九節魔帝) 태거악(太擧嶽)이었다.
“무형무음(無形無音)의 강기…… 네놈, 무형투왕(無形鬪王)하고는 무슨 관계냐?”
“무, 무형투왕?”
태거악의 등장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침입자들이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무형투왕은 전대의 천하십대고수, 그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내에 꼽히는 엄청난 고수였다. 특징은 별호 그대로 보이지 않는 형태의 투명한 강기를 다룬단 점이었는데 이는 그의 독문신공인 무형무상공(無形無常功)의 능력이었다.
본래 내기란 익히는 사람과, 종류에 따라 독특한 빛깔을 띤다. 마교의 마인들이 가진 강기 대다수가 어둡고 칙칙한 것도 이러한 데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었다. 개중에서도 무형투왕의 무형무상공은 전 무림사(武林史)를 통틀어도 손가락으로 꼽히는 굉장히 특이한 형태의 내공심법이었다.
수련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내공을 투명화시키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소리를 없앤다. 마지막 세 번째 수련에 와서는 육체마저도 무형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데, 무형투왕은 이 삼 단계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던 무시무시한 강자였다.
‘생각보다 거물인 것 같네.’
첫 번째 침입자의 목이 날아간 순간 달려와, 모자라지 않게 도착하여 마현의 강기를 쳐내기까지 했다. 게다가 단숨에 무형무상공을 알아보기까지 했다.
“천하에 무형무음의 흉내를 내는 무공은 많지. 하나 응축된 강기를 무형으로 뽑아낼 수 있는 것은 무형투왕의 무공뿐. 다시 한 번 묻지. 네놈…… 누구냐?”
마현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후 어깨를 으쓱하며 간결하게 답했다.
“글쎄, 그의 하나뿐인 전인쯤……?”
“뭐……?”
무절곡의 수많은 동료 중, 무형투왕이라 불리던 백무영(伯武迎)의 무형무상공을 전수받은 이는 마현만이 유일했다. 딱히 백무영의 욕심이 많았던 탓은 아니다. 무형무상공을 익히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전제, 그러니까 신체의 문제 탓이었다.
‘무형무상공이야말로 진정한 일인전승(一人傳承)의 무공이다.’
처음 백무영이 그리 말했을 때, 이를 납득할 수 있는 동료는 아무도 없었다. 천하에 일인전승을 표방하는 문파는 많다.
하나 그는 일종의 규율일 뿐. 벽이 무너지고, 서로의 생존만을 목표로 하게 된 마현과 동료들에게 있어서는 변명과 같이 들릴 뿐이었다.
끝내 밝혀진 사실은, 백무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만을 말했다.
무형무상공은 진정한 일인전승의 무공이다. 다음 대에 무형무상공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당대 계승자가 목숨을 버려가며 자신의 무형지혈(無形之血)을 전수해야만 한다.
신체마저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무형무상공의 비밀에는 수 대에 걸쳐 내려온 혈세(血稅)가 담겨 있던 것.
첫 마족과의 싸움 끝, 자신의 목숨마저 버려가며 일행들을 모두 구해 낸 백무영은 자신의 무형지혈을 마현에게 전했다. 그를 다음 대 무형무문(無形武門)의 후계자로 지정한 것이다.
직후 마현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무형지혈에 잠든 기억과 감각만을 되새기며 스스로 무형무상공을 익혔다. 비록 무형투왕이라 불리던 백무영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세 번째 스승, 혹은 전인쯤은 되겠지.’
백무영은 참으로 말이 없던 인물이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동료들에게 수많은 오해를 받아가면서도 무형무상공의 비밀을 밝히지 않았을 정도로 말이다. 덕분에 정을 나눌 시간도, 마음을 깊이 되새길 사연도 많지 않았다. 하나 이제는 다시 붉게 돌아온, 마현의 피에는 분명 백무영의 흔적이 살아있다.
전인이라는 말은 결코 들리지 않은 이야기일 터다.
“확실한 게냐? 네가 바로 그 백가 놈의 전인이라고? 아니 아니, 무형무상공을 사용하였으니 의심할 바는 없겠지.”
태거악은 매우 기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쁜 듯도, 화가 난 듯도, 슬프기도 해 보이는 표정을 지은 그의 선택은 끝내 광소를 터트리는 일이었다.
“크하하핫! 오늘은 아주 운수가 대통한 날이로구나!”
직후 태거악의 강기가 빠른 속도로 마현에게로 쏘아졌다.
‘강기발출!’
일반적인 내기와 그를 완전히 응축한 강기를 발산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한데 눈앞의 봉두난발의 괴인, 태거악은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그렇다는 뜻은 하나.
‘화경!’
초절정을 넘어선 초인(超人).
수많은 무인들의 정점에 서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지점에 선 무인이 바로 눈앞의 태거악이었다.
하나 그러한 공격도 마현에게는 부질없는 일.
쾅-!
마찬가지로 가볍게 강기를 휘둘러 태거악의 공격을 방어해 낸 마현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제자리에서 싸우기에는 뒤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들이 신경 쓰인 탓이다.
“내가, 이 구절마제 태거악이! 드디어 백가 놈에게 원수를 갚는 날이로구나! 크하하하!”
공격에 실패했음에도, 태거악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두 눈에는 광기 서린 집착만이 이글거릴 뿐.
척 보기만 해도 백무영에게 원한이 많은 태거악의 행위에 마현의 인상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강호를 사노라면 원한 하나 사지 않는 이 어디 있겠냐만은, 태거악과 같은 광적인 집착을 내보이는 원수(怨讐)는 많지 않다. 이쯤 되면 백무영으로서도 말 한마디 들어봤음직 한데…….
‘하긴, 그는 본래 말이 없었으니까.’
원한을 쌓는다 한들 자신의 몫일 뿐, 마현에게 떠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을 터였다.
심지어 마현은 모르고 있지만, 태거악의 원한은 그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었다. 현 강호의 전 시절, 그러니까 전대(前代). 이제 갓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던 두 무인은 우연히 허허벌판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부터 마두로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던 태거악은 일찍이 천하십대고수에 꼽힌 백무영을 보고 호승심을 느껴, 곧바로 싸움을 걸었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는 압도적 패배.
백무영은 코웃음 치며 태거악을 지나쳤다.
이후로 그는 분노에 사로잡혀 더욱 무공에 빠져들었다.
단정하던 머리가 풀어헤쳐 봉두난발이 되고, 준수하던 외모가 고된 수련에 못 이겨 뭉그러져 갈 정도로 미친 수련이었다. 그 끝에 얻은 것이 작금의 태거악이 대성하게 된 아홉 가지의 마공이었다.
천하십대고수, 구절마제 태거악.
명성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자신감이 충만해진 그는 백무영을 찾아 나섰다.
하나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원을 넘어선 변방 남만에서도, 살 떨리는 추위가 가시지 않는다는 북해에도, 마지막으로 무형투왕의 소식이 들린 일월마교가 존재하는 천산. 그 너머 서장의 포달랍궁에도 백무영은 없었다.
태거악은 점점 더 미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조직과 접선하였으며, 그들을 도와준다면 백무영을 찾아준다는 거래조건을 받아들였다. 개인은 찾지 못해도 단체라면 쫓을 수 있다. 일생의 목표가 백무영과의 일전이 된 태거악에게 이보다 매력적인 조건은 없었다.
그렇게 오 년을 보냈다.
헛된 세월에 지쳐가고 있던 것도 사실.
태거악은 떠올리고 있었다.
입곡자 불생환의 무절곡.
어쩌면 무형투왕은 그곳으로 향한 것이 아닐까?
이번 임무 끝에도 소식이 없다면 그 죽음의 협곡으로 향하겠다.
굳은 마음을 먹은 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데 이 무슨 우연이란 말인가?
마지막이라 정한 임무에서, 인연이 돌고 돌아 백무영의 전인과 마주했다. 비록 그 본인은 아니지만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그의 구절(九節)이 백무영의 무형무상공의 우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일 뿐.
태거악은 생각했다.
‘하늘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내 원(怨)을 풀라는 뜻이 아닌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깊은 희열이 차오른다.
눈앞의 마현이, 젊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부족함 없는 무형무상공을 익힌 듯하기에 더욱 만족스럽다.
“받았으면 와라! 나의 아홉 절기가 네놈들이 자랑하는 무형의 무공을…… 컥!”
“……한 수 재간은 훌륭하다만, 백무영에 비하자면 한참이나 부족해.”
두 눈을 부릅뜬 태거악의 커다란 몸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침대에 앉아 있는 것만 같던 마현의 신형은 어느덧 태거악을 지나쳐, 경악하고 있는 남은 침입자들의 앞에 다다라 있었다.
“주, 죽……!”
그래도 일류라고, 그 짧은 순간에 검을 뽑으려던 사인(四人)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목이 잘려나간다.
“이 노옴……!”
태거악은 그 순간에마저, 허공에서 몸을 회전하며 강기를 흩뿌리려 했다. 작금의 그를 있게 만들어 준 구절 중에서는 공중에서마저 상대를 억압하는 마공도 존재했다.
“보통 사람들은 한번을 말해서는 알아먹지 못하더라고.”
하나 그보다도 훨씬, 남은 네 명의 침입자의 목을 벤 마현이 빨랐다. 허리를 반쯤 돌리는가 싶더니, 직각으로 뻗어 올린 다리를 비스듬한 자세를 한 태거악의 허리에 내리꽂는다.
콰지직-!
“크아악!”
형성된 강기를 채 휘둘러보기도 전에 객잔의 나무판으로 처박힌 태거악이 핏물을 토했다. 자랑하는 아홉 개의 절기? 조화경? 지금은 비록 전대로 밀려났으나, 천하십대고수라 불리던 명성? 모두 의미가 없었다.
절대의 경지조차 돌파한 마현의 무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심지어 두 눈에 붉게 끓어오르는 적결(赤結)은 마현이 가진 권능 중 가장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힘. 거기에 일인 비전으로만 전해질 수 있는 절세의 신공인 무형무상공의 공능까지 더해졌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공격이 패도(敗道)라 이름 붙여도 모자라지 않을 모습으로 펼쳐진다.
광인이 될 정도로 무공을 단련한 구절마제 태거악조차도 마현의 두 수를 견디는 것은 무슨 상황이 오든 불가능했다.
‘백무영이 대신 있었다고 해도 십 초 내에 승부가 갈렸을 테지.’
마현이 기억하는 백무영은 강했다.
정말로 강해서, 만약에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두 스승을 제외하고 첫 번째 손가락으로 꼽혔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런 백무영을, 고작 아홉 개의 절기를 익혔다고 설쳐대는 광인이 이겨낸다고?
“아쉽지만, 네 목표는 처음부터 이루지 못할 꿈이었던 것 같군.”
마현은 냉정한 시선으로 아직까지도 죽지 않은 채 바닥에서 꿈틀대고 있는 태거악을 내려다보다, 다리를 들어 올려 뒷목을 향해 힘껏 내뻗었다.
빠각.
* * *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다음 날 아침.
엉망이 된 객잔 꼴을 본 구혜린이 입을 벌리며 물었다.
천장이 뚫리고 바닥에 구멍이 파였다.
혈흔 하나, 시체 한 구 보이지 않는다지만 아무 일도 없었으리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별일 아니었다니까, 유괴범 몇몇이 객잔에 들어섰을 뿐이야.”
마현의 대답은 처음과 같았다.
밤에 잠을 자던 도중, 우연히 객잔에 침입한 유괴범들과 마주했다. 그래서 가볍게 손을 써 쫓아 보내줬다. 다섯이나 되는 일류 고수니, 구절마제인가 뭔가 하는 양반이니. 괜히 이야기해봐야 속만 시끄러워질 상황이다.
‘게다가…….’
놈들은 분명 동정의 소년, 소녀들을 원했다.
무림사, 동정의 어린아이들 원하는 놈들 치고 정신 제대로 박힌 이 어디에도 없다. 보나 마나 어쩌구 뭐 하는 대법 등을 펼쳐 곤란한 일이나 벌일 터. 현재 천하의 정세를 보건대, 그런 골치 아픈 사태를 벌일 놈들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흑천맹.’
최근 그런대로 복수를 잊고 살아가는 구혜린의 마음을 괜히 어수선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아이들 입장에서야 어려운 생각을 할 이유가 더욱 없었고 말이다.
“정말이지…….”
눈을 흘기며, 한숨을 내쉬는 구혜린이었지만 더 이상 뒷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여자의 감이니, 나도 초절정고수니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많았지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해주지 않을 때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아니 그보다도…….
‘믿으니까.’
그저 묵묵히, 간밤의 상황을 묻어가는 구혜린이었다.
제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