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구혜린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칠 주야가 더 흐른 뒤였다.
의식을 차린 그녀는, 아찔한 두통에 가볍게 이마를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질문은 했지만, 대답을 해줄 사람이 없다.
하면 선계(仙界)인가?
적어도 살면서 나쁜 짓은 하지 않았으니, 그럴 확률이 높다.
“……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지?”
구혜린은 바보가 아니었다. 현실적인 감각마저 외면할 정도로, 멍청한 편도 아니었다. 살아있다. 단숨에 그 사실을 자각한 그녀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드러누웠었다.
의식은 멀어지고, 꼭 살아남으라는 스승님의 유언이 들려오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리고 뭐가 있었더라?
덜컥.
고민에 빠져 있던 차, 문이 열렸다.
구혜린은 곧바로 몸을 굴려 벽 한구석에 놓여 있던 유성검을 집어 들었다. 이미 의식을 찾은 순간 주변 환경 파악쯤은 모두 끝내둔 뒤였다.
“그거 은인한테 들어도 되는 물건입니까?”
들어선 인물, 마현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안 되겠죠.”
천천히, 경계를 풀기 시작한 구혜린이 유성검을 아래로 늘어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어디죠?”
아까는 대답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반면, 지금은 상대가 생겼다.
호의(好意)를 가진 상대라면 질문에 답해줄 것이다.
‘아니면 악의(惡意)를 가진 주제에 지나치게 여유로운 사람이거나…….’
물론, 마현은 전자였다.
“무명현에 있는 와룡객잔입니다. 혹시 아시는가요?”
“무명? 무명이면…… 광동인가요?”
“뭐, 그런 셈이죠.”
“하…….”
마현이 처음 그녀에 대해 알게 된 후, 기가 차다고 느낀 부분을 구혜린 역시 공감했는지. 헛바람부터 흘린다. 마현은 그런 그녀가 꽤나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신비문파의 후계자.’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갖춘 초고수.
거기에 더해 공서하와 비슷한, 분위기는 영 다르다 한들 천하절색(天下絶色)이라 불려도 부족하지 않을 미모, 까지는 그렇다 치자.
‘제법 머리가 좋은 것 같지?’
마현이 흥미가 가는 부분은 바로 이 점이었다. 방금 막 눈을 떠 정신이 없을 법한 상황치고 굉장히 침착한 대응 하며,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까지. 강호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단 점까지 감안하면, 아주 뛰어난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 눈치도 빠른 편이다.
상황이 생각만큼 최악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자마자, 기가 차 할 정도로 여유를 보이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나타났던 사람이…… 당신이었던 건가요?”
당시는 정말 모두 다 놓아 버렸던 상황이라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여태껏 쫓아오던 추격자들에 비해 독특하다고만 느꼈지, 다른 인물일 것이라고는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자면 참 우스운 일이다. 대체 그 모습 어디를 보고 추격자라 떠올린 건지…….
‘빨리 죽고 싶었나 보지.’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눈앞에서 부정은 하지 않은 채, 어깨만을 으쓱하는 마현을 보자 그 웃음은 더욱 진해진다.
“어쨌든, 살아남은 거네요.”
들고 있던 유성검을 다시금 벽면에 기대 놓은 구혜린이, 정중한 자세로 포권을 취했다.
“반가워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은하검결류의 팔(八) 대 전승자, 구혜린입니다.”
“마현입니다.”
“휴…… 힘드네요. 괜찮으면 앉아서 대화해도 될까요?”
예의도 바른 편이고.
속내로 감탄한 마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구혜린은 망설일 것 없이 누워있던 침대로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마현에 대한 긴장감을 완전히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확실히 경험 미숙이긴 하군.’
그 모습에 마현은 살짝 실소를 흘렸다.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른 편이지만 강호 경험이 모자란 것은 감출 수가 없다. 정확하게는 악의를 가진 상대와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다.
정녕 노리는 것이 있는 인물은, 때론 호의를 가장해 접근하기도 한다.
소리장도(笑裏藏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방심하고 있다가는 웃는 칼이 심장에 꽂힌다.
“휴…… 궁금하시겠죠? 제가 왜, 누구에게 쫓기고 있던 건지.”
“…….”
마현은 묵묵히 구혜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저희 은하검결류에 관해서부터 설명해야 할까요?”
은하검결류는 비인부전(非人附傳)의 소규모 문파였다.
덕분에 한 세대에 셋 이상의 제자를 두어 본 적이 없지만, 절기인 은하검결(銀河劍結)만큼은 드넓은 강호에서도 손으로 꼽히는 무공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구혜린의 사부인 칠(七)대 전승자, 유성신검(流星神劍)의 별호는 강호 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외 이상의 세력권으로 벗어나면 꽤 드높은 이름이었다. 강호의 외지라 볼 수 있는 절강에서부터 검을 든 유성신검은 세외로부터 이어지는 외압(外壓)에 수도 없이 맞서 싸워왔다.
가까이로는 동영에서부터 배를 타고 넘어오는 해적(海賊)과 맞섰으며, 멀리서는 남만의 독전사(毒戰士)들의 심장을 도려내기도 했다.
그야말로 신비문파의 문주로서 강호를 지켜온 것이다.
누군가는 그를 쓸데없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보이지 않는 협행(俠行)은 은하검결류의 자부심이었다.
“문파의 시조(始祖)께서 말씀하시길, 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야 갑작스러운 외침(外侵)에 보이지 않는 비수를 꽂을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렇게 조용하게 지냈는데…….”
갑작스럽게 습격을 받게 되었다.
유성신검을 비롯한 은하검결류의 제자들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뛰어난 고수였지만 끝도 없이 몰아치는 복면인들의 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조화의 경지에 오른 유성신검을 홀로 독대(獨對)하여, 끝내 목에 검을 꽂은 초고수의 존재가 문제였다. 만약 유성신검이 자유로웠다면 은하검결류가 이토록 허무하게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초고수라는 자는……?”
대기와 조화를 이룰 정도의 경지에 오른 자라면 마현의 눈에 띄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흑천맹이라는 조직 내에서도 꽤나 높은 위치에 오른 인물일 터였다.
놈을 잡아야 한다.
하면 늘 꼬리만 남기던 흑천맹의 몸체를 잡을 수 있었다.
“그자 역시, 사부님을 상대한 이후 무사하지는 못했어요. 큰 부상을 입고 물러났으니까요.”
“음…….”
그래서 추격자들 중에는 섞여 있지 않던 것인가.
마현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 뒤로 저는 정신없이 달아나기만 했어요. 우선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더 알고 있는 것이 없어요. 휴, 죄송해요. 저도 뭐라도 알려드리고 싶은데, 진짜 알고 있는 것이 없어요.”
영문도 모른 채 당하고, 쫓겼다.
누군가 그런 입장에 처한다면 억울함을 먼저 호소할 것이다. 한데 구혜린은 그러기보다 웃음을 흘렸다. 억울해한다고 상황이 변할 것은 없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머리가 좋아.’
만약 무탈(無奪)하게 구혜린이 은하검결류의 전승자로 성장했다면 어찌 됐을까? 아마 암중조직인 흑천맹으로서도 부담이 되었을 일대고수(一代高手)가 탄생했을 것이다.
‘뭐, 어쨌든 살아남았으니 지금도 틀릴 것이 없나.’
재능만 치자면 마현이 보았던 그 어떠한 인물들보다도 뛰어나다. 결국 흑천맹은, 조직의 미래에 큰 혹이 될 수 있는 그녀를 끊어내지 못했음을 언젠가 후회하게 될 터였다.
“혹시 더 궁금하신 것 있나요?”
“저 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마현은 전혀 모른다는 듯, 눈짓으로 유성검을 가리켰다.
“호호,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그러자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가볍게 웃음을 흘린 구혜린이 말을 이어나갔다.
“검의 이름은 유성검. 사문의 보물이에요. 그렇다고는 해도 뭐 특별할 게 있는 건 아니고, 보시다시피…… 뛰어난 명검이죠.”
“그게 전부?”
“사람 베는 검에 뭐 더 필요한 게 있나요?”
“호…….”
무언가를 알아내서 흘린 감탄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대답에 놀랐을 뿐이다.
‘순진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제법 대답이 강호인스럽기도 하다.
정말이지 매번, 매 순간이 기대되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어쨌든…….’
유성검에 대한 것은 구혜린조차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놈들이 노리고 있는 것이 유성검이라는 사실조차도 말이다.
‘어쩔 수가 없나.’
그렇다고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의무나 책임감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당사자인 구혜린도 모르는 사실을 마현이 안다니, 누구라도 이상하게 느낄 법한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마현은 대충, 정황을 파악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제 제가 질문을 해도 될까요?”
기다렸다는 듯, 구혜린이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 * *
마현은 결국 다 말해주었다.
의무나, 책임감은 없다고 여겼는데도 구혜린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다 보니, 아는 만큼은 모두 알려준 것이다. 의심할 것이라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구혜린은 있는 그대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빠른 정답을 찾아 나갔다.
‘흑천맹이라는 조직과 유성검…….’
마현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구혜린은, 일단 생각나는 대로 유성검에 대한 사연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 무엇 하나 특별한 것이 없었다. 유성검은 오래전부터 은하검결류에 내려오는 보물 중 하나일 뿐이다.
스승인 유성신검을 통해 전수받을 때도, 보물이니 잘 간수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더 이상 전해진 것이 없었다.
‘스승님이 살아계셨다면…….’
또 다른 이야기를 알 수 있었을까?
짧은 상념에, 헛웃음을 지은 구혜린이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이후 말없이, 자신의 다리를 모아 그 틈새로 얼굴을 파묻었다.
사실, 마현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하나 있었다.
‘스승님…….’
유성신검.
은하검결류 칠 대 전승자의 이름은 구철학(球鐵鶴)이었다.
‘아빠…….’
검을 잡은 이후로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그 이름이 뒤늦게야 가슴 속으로 깊게 파고든다. 그리워진다. 마지막까지 부르지 못한 그 이름에 한(恨)이 어린다.
눈물이, 흘러나오려 한다.
‘울지 않아.’
하지만 끝내 눈물을 쏟아내지는 않는다.
‘울지 않아.’
눈물은 무책임한 감정의 분출일 뿐이다.
죽어가는 아버지를 버린 채, 등 돌려 달아나야만 했던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감성이다.
눈물을 거둔다.
감정을 묻는다.
대신해서, 구혜린의 가슴 속에 서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이다.
‘흑천맹…….’
검은 하늘을 찢어 버리는 한 줄기 유성과 같은 검기(劍氣)다.
주먹을 움켜쥔 그녀는 밤이 새도록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복수가 의미 없는 개죽음으로 끝맺기를 원치는 않았으니 말이다.
* * *
‘서원의 선생이라고?’
다음 날, 몸을 혼자서 가눌 수 있게 된 구혜린은 초이영으로부터 마현에 대해 전해 들은 후 헛웃음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쫓고 있던 복면인들을 모두 처리했다고 하였다. 그들 중 몇몇을 사로잡아 실토까지 시켰다 하였으니, 마현은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고수란 뜻이다.
‘사실 반로환동 한 노고수(老高手)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모든 생각이 틀렸다.
와룡객잔을 운영하는 것은 마현의 가족들이었다.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제수씨와 조카.
그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마현은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이제야 서른여섯이 된 노총각일 뿐이라고.
‘그 외모에 서른여섯?’
어찌 보자면 반로환동이란 말이 틀린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마현의 모습은 어딜 뜯어봐도 이십 대 중반 이상을 쳐주기 힘든 외모를 갖춘 상태였으니 말이다.
하나, 어떻게 따져도 결국에는 고작 서른여섯이다.
그 나이에, 천라지망을 펼치고 다가오던 수많은 복면인들을 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지치거나 힘들어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았어.’
구혜린은 마현의 무공 수준에 대해 알기 위해 나름대로 최대한 기감을 세웠었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마치 등대 없이 어두컴컴한 밤바다를 마주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유성신검, 스승이자 아버지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 상상도 못 할 초경지(超境地)를 삼십 대 중반에 이룩했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엄청난 천재란 뜻이다.
그녀도 나름 제법 재능이 있다 생각하였지만, 마현에 비하자면 번갯불 앞의 반딧불일 뿐이었다.
‘한데, 그런 사람이…….’
고작 작은 서원의 선생이라고?
심지어 무공 교관도 아니고, 무공 스승도 아니고.
글 스승이란다.
‘무공을 가르치고 있다고는 했던가.’
하나 서원이라 이름 붙은 만큼, 글공부가 우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십 년 전에 향시에서 합격한 거인이니 당연한 말이기도 하겠지만…….
‘역시…….’
쉽게 납득하기는 힘들어.
그래도 눈앞에 증거가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와룡서원의 문을 연 구혜린은 당당한 보폭으로 내부로 들어섰다. 아직 글공부를 하는 시간이라 그런지, 서원 안은 조용했다. 한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이게 대체…….’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당황을 내비친 구혜린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고작 한 걸음 차인데 세상이 변했다.
눈앞의 풍경이나 경관이 변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제공권을 가졌거나, 내기에 민감한 무인이라면 누구든 눈치챌 터다.
‘천하에 기운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있단 말이야?’
서원 바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기운이 내부로 응집되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운기 조식을 한다면 일반적인 내공의 축적 속도보다 두 배 이상의 효율을 낼 수 있다.
오성이 맑고, 혈도 맑게 뚫려 있다면 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한다 해도 농담이 아니었다.
‘역시…… 평범하지 않아.’
바깥에서만 보기에는 평범하던 서원이, 발을 들인 순간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구혜린은 이러한 현상이 간단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현…… 이라고 했지?’
현재 서원의 글 선생이라는 그가 문제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남들이 모르는 한 수. 아니지, 몇 수가 숨겨져 있었다.
‘직접 물어봐야겠어.’
본래는 상처가 나을 때 정도까지만 쉬어 간다고 부탁을 할 예정이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해, 그 사이 무공 한 두수 정도 전수받으면 좋겠다고도 여겼다.
복수를 하려면 힘이 필요하다.
한데 아직 자신은 미약하다.
구혜린은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다.
개죽음은 몇 번을 생각해도 사양이었으니 말이다.
한데,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부탁해보겠어.’
가능하다면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다.
기왕 복수를 하는데 남의 손을 빌리든, 내 손으로 하든 무슨 상관인가? 안 된다면 무릎 꿇고 시종으로라도 들어갈 생각이었다. 제자는 못 되지만, 시종이 되면 모른 척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끝내 무공을 가르쳐줄 수밖에 없을 것이고, 하면 구혜린의 계획은 생각보다 앞당겨질 터다.
‘혹시 몸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다, 저 멀리 묵묵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마현을 본 순간에야 든 생각이었다.
어이없거나, 황당한 생각은 아니었다.
강호에서는 제법 흔하디흔한 일이다.
무공을 원하는 여자가, 고수에게 몸을 바쳐 전수를 받는다.
강력한 무공만 있으면 천하를 오시하고 살 수 있거늘, 그깟 몸이 뭐가 대수냐 생각하는 여자들도 여럿인 것이다.
‘맞는 말이야.’
이십 대 중반의 나이지만, 아직 남자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았던 구혜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힘이 있어야 복수도 할 수 있거늘.
그깟 몸이 무엇이 문젠가?
어차피 마현이 아니었다면 죽은 뒤 썩어 문드러졌을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두 눈에 다시 한 번 확신이 선다.
구혜린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서책만 보고 있던 마현과 아이들의 시선이 절로 그녀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
그렇게 각오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다가갔는데 막상 물으니 흠칫, 하고 몸이 떨린다.
무슨 일이라고 답해야 되지?
대뜸 무공을 가르쳐 달라 해야 되나.
‘아니면 몸을 줄 테니 무공을 주세요?’
바보냐.
자신의 한심함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막상 떠올리고 보니 아주 좋은 발상인 듯했다.
“여기 서원, 학생 더 안 받나요?”
잘했어, 구혜린.
스스로 칭찬하게끔 되는 멋진 꾀였다.
* * *
“…….”
“…….”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바보일 지도 모르겠다.
마현이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최악의 발언이었다.
자신만만했던 구혜린도 침묵이 이어지자, 얼굴을 붉힌 채 땅만 바라볼 정도였다.
‘너, 너무 막 나갔나?’
각오할 만큼 각오하고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쿵쾅대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했다.
‘이게 다 그놈의 몸 생각 탓이야.’
아직까지 남자 손도 못 잡아 봤는데,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살 색 물결뿐이니, 평소에는 그리도 잘 돌아가던 머리마저 헛길을 탄다.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까, 마현 측이 먼저 입을 열어 주기만을 바라는 것이 현재 구혜린의 심정이었다.
“……한동안 제자를 더 받을 예정은 없습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알아준 것일까?
침묵하던 마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 호호. 그렇죠? 저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구혜린은 뒤늦지 않게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 역시 실패다.
내뱉고 보니,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마구잡이로 치솟는다.
‘대체 왜 그러는 거니.’
한번 발을 헛디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게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사람의 심정일까?
‘그럼 밑에 기연이라도 기다려주든가!’
물론 그런 경우는 천에 하나, 만의 하나니만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어찌 됐든, 방향을 잃고 계속해서 헛다리만 짚을 수는 없다.
지금은 생각보다 마음의 준비가 덜 됐을 뿐이고, 자리가 안 좋았을 뿐이다.
‘우, 우선 물러나자.’
이 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란 말도 있지 않던가?
결국 하려던 이야기를 대다수 접어둔 구혜린은 간단한 본론만을 흘렸다.
“그, 그냥…… 아직 내상이 덜 나아서 그러는데 치료될 때까지만 머물러도……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감사해요.”
그렇게 얼굴을 붉힌 구혜린은 등을 돌려 성큼성큼 와룡서원 바깥을 향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들어올 때 만큼이나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아니지, 쑥스러워서 더 일부러 그러는 건가?’
그 모습을 보며, 작은 웃음을 흘린 마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보다 귀여운 면도 있군.’
아무래도 재미있는 식구(食口)가 늘어난 기분이었다.
제육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