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축국을 시작하기 전 아이들의 일과는 획일화되어 있었다.
오전 일찍, 묘시쯤 일어나 소룡원을 비롯한 와룡서원 일대를 청소한다. 그 뒤로는 와룡객잔에서 직접 준비한 조식(朝食)을 먹고, 수업 전 남은 시간 동안 구결신공을 운용한다. 이후로는 점심 전까지 서원의 본 수업을 행한다.
점심을 먹은 뒤로도 크게 변할 것은 없었다.
약 이 각 정도의 휴식 후 계속해서 수업.
하루 열두 시진 일과 중 여섯 시진이 넘게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참 답답한 모습이었다.
다 큰 성인도 아니고,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저 줄여가며 책만 파고든다. 좋던 건강도 해치기 마련이다.
‘더 성장할 수 있는 체격도 줄어들 테고…….’
몇 번을 생각해도 공부 시간을 다섯 시진으로 줄이고, 축국과 같은 놀이 시간을 한 시진 섞은 것은 아주 좋은 선택인 듯했다. 생각이 변했다. 처음 아이들을 가르칠 때, 최대한 많은 학문을 익히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다른 것은 돌아보지를 못했다.
정확하게는, 학문 외의 것을 보게 하는 것이 그른 선택이라 여겼다. 한데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반대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민의 결과다.
‘고민이라…….’
누군가에게 고심이 말 그대로 골칫덩어리라면, 마현에게 있어서 고민은 즐거운 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현이 바로 아이들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인생이란 것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것은 아직 어린아이들이라 하여도 다를 것이 없다.
스승과 부모의 몫이 그러한 아이들이 최대한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면, 고민이란 당연히 따라와야 하는 선결과제다. 그도 그럴 게 당연하지 않은가? 아직은 어리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일이다. 본래 결과란 작은 선택에서부터 만들어지는 법이란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여 마현은 아이들을 위한 고민(苦悶)을 즐겁게 여긴다. 머릿속의 괴로움과 어려움이 아이들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오로지 스승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한 고민을 단지 괴로움의 영역으로만 끌어내린다면, 이미 스승으로서의 자세를 잃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로구나.’
또한 어렵기에 즐거운 일이구나.
스승으로서, 고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행복이 아닐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마현의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는 한 줄기 상념이었다.
* * *
아이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무엇일까?
바로 변덕(變德)이다. 변덕은 어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창의적인 답안을 내놓기도 하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마구잡이로 날뛰기에 하나의 고정된 관념에 묶어 두는 것을 불가능케 하기도 한다. 짧게 말해, 금방 질린다는 뜻이다.
‘당장에야 축국이 재미있다고 뛰어놀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른다면, 아이들의 열기도 금방 식을 것이다. 놀이도 돌아가며, 여러 가지를 할 때 재미있는 법이다. 하나만 즐긴다면 언젠가는 질리기 마련이란 것이다.
‘조금 더 다양한 육체단련법을 생각해야겠어.’
기왕이면 축국과 같은 일석이조, 삼조의 놀이일수록 좋다.
그렇게 마현이 아이들에 대한 또 다른 고민에 빠져들려 할 때였다.
“현아. 서원 생활은 지낼 만한 게냐?”
오랜만에 가진 가족 식사 자리.
조용히 젓가락을 들어 올리던 마전이 물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체질에 맞는 것 같아요.”
밥 먹는 시간까지 제자들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채울 정도로 즐겁다. 마현은 감정을 조금도 감추지 않은 채, 웃는 모습으로 답했다.
“다행이구나.”
마전의 입가로도 절로 미소가 번졌다.
“형은 원래부터 그랬어.”
“……?”
“애들이랑 노는 거 잘했었다고.”
“아……! 우리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 게냐?”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동생들이 참 잘 따라주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었다. 나름대로 믿음직한 형, 오빠가 되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리된 것뿐인데…….
‘당시에도 고민을 많이 했었구나.’
사람이란 것이 어쩔 수 없나 보다.
조금 더 나은 결정을 위해 늘 고민한다.
어쩌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뭐, 대충. 운이 녀석이 왜 아직도 형만 보면 눈이 돌아가겠어? 연이라고 해서 다를까. 기억을 잘 못 해서 그렇지. 예전에는 형이 없어지기만 해도 울고 그랬었다고.”
마정이 피식, 하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떠올려 보니 좋은 추억이라는 생각 덕일 터다.
“응? 운이랑 연이만 그런 것도 아니지. 생각해보면 정이 너도 꽤나 귀여웠지 않으냐. 대충…… 열두어 살쯤이던가?”
“무, 무,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마현 역시 추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흘리자, 당황한 마정이 입가로 가져가던 요리마저 내려놓으며 언성을 높였다.
“그 이야기 제법 흥미가 가는데요. 계속 들려주세요.”
“정아, 누가 밥상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라고 가르쳤더냐.”
마전과 초이영이 동시에 입을 열며 그러한 마정의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최근 들어 나잇값 하겠다는 뜻인지, 제법 엄중한 표정만 짓고 있는 마정의 귀엽던(?) 옛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미 가족들 모두의 흥밋거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예, 옛이야기지 않습니까…….”
초이영은 그렇다 치고, 아버지 마전 앞에서 계속 언성을 높일 수는 없다.
마정으로서는 우물쭈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설아도 궁금하지?”
“응응, 설아도 궁금해!”
거기에 더해 초이영의 지원요청을 받은 마설의 호기심까지 더해졌다. 딱히 무언가를 알았다기보다는, 그냥 엄마의 말이니까 고개를 끄덕인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모두가 궁금해하니…… 큼큼.”
슬쩍, 안절부절못하는 마정의 눈치를 본 마현이 입가로 미소를 그린 채 말을 이어나갔다.
“열두 살 때쯤이었죠.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정이가 저를 보며…….”
얼굴을 반쯤 찌푸리며, 울상을 만든 마현이 또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어 어린 시절 마정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요즘 매일 운아랑 연아랑만 놀아주고 있잖아. 나도, 나도 형아랑 놀고 싶은데……. 라고 했던가요? 음, 당시 눈물 한 방울이 정이의 볼 가를 타고 쪼르르 흐르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바, 밥 먹읍시다. 밥 먹어요. 식탁 앞에서 뭐 굳이 이런 이야기를.”
“아, 그때라면 나도 기억한다. 아마 울면서 나한테 왔었던 것 같은데. ‘형아, 미워.’ 라고 했던가? 생각해보면 그런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지…….”
마현에 이어, 마전까지 한몫 거들자 부끄러움에 온몸이 붉게 물든 마정이 밥공기에 얼굴을 묻은 채 빠르게 젓가락질을 놀린다.
“어머, ‘형아.’ 라니. 당신한테 그런 시절도 있었군요.”
초이영은 그런 마정을 향해 눈을 흘기며 웃음을 흘린다.
“그러게 말이죠. 이제는 귀염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져서는…….”
“아가,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이 녀석 열세 살 때까지도 이불에 …….”
“아버지……!”
얼굴을 가린 것만으로는 모자랄 법한 발언이 나오려 하자, 다급해진 마정이 마전의 팔목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흘렸다.
“제, 제발…….”
끝내는 애원을 흘리기까지 한다.
그쯤 되자, 가족들의 입가로는 자연스레 더욱 큰 웃음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하하.”
“호호호.”
“하하하, 녀석.”
모르는 듯하지만.
마정은 그때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귀여운 아들이며, 동생이며, 남편이었다.
“까르륵.”
어쩌면 귀여운 아빠까지 포함이 될 수도…….
* * *
강호는 현재 무림대회전으로 들끓는 중이라고 하였다.
반면, 무명현과 와룡객잔, 와룡서원은 너무나 평안했다. 무림대회전 측으로 시선이 몰리는 바람에, 전보다 외부인의 유입이 줄어든 탓도 있으리라.
그런 와중에도 내부에서의 작은 변화는 늘 일어나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와룡서원의 어린 제자들 같은 경우 더욱 그랬다. 구결신공에 이어 축국을 통한 육체단련과 내가진기의 수양까지. 아이들의 성장은 시간이 무색하다는 말을 절로 떠올리게 할 만큼 빠르게 이어졌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독 느린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제자도 분명 존재했다.
‘정순욱.’
마현의 가르침은 그 무엇도 받지 않겠다.
그리 다짐한 어린 반골의 고집은 가히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분명 구결신공을 익힌 이후 크게 변화했다. 기본적인 오성이 확장된 덕이다. 이를 모르는 이는 와룡서원 내에 그 누구도 없었다.
가르치는 마현도.
익히는 아이들도.
모두가 구결신공의 위력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한데도 정순욱은 끝까지 구결신공을 행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곤란할진대, 질문조차도 안 한다. 공부하다 막히는 부분이 생겨도 이를 악물며 스스로 익혀 나간다. 언젠가 답을 찾을 수야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배 이상의 시간이 소모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이제 슬슬 준비는 된 셈인가.’
다른 아이들 사이에 뒤섞여 있지만, 분명하게 동떨어져 공부를 하고 있는 정순욱을 보며, 마현의 두 눈이 작은 빛을 흘렸다.
최근 들어 급성장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정순욱은 조급해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열심히 하는 편이었지만, 최근에는 식음조차 줄여가며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 추월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느낀 탓이다.
지금이 때다.
마현은 반골이라는 종(種)을 길들이는 법을 나름대로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마계로 넘어온 마인(魔人)들 중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가진 인물들은 두루 존재했으니 말이다.
‘물론 제자 녀석은 경우가 다르지만…….’
마계의 마인들은 일반적으로 마족과 마수 등에 생명을 위협당하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절박한 상태였다는 뜻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순욱은 어떠한가? 아닌 척하지만, 나름대로 믿고 있는 것이 있다.
영 안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회피의 선택지가 남은 것이다.
우선 그 믿음부터 무너트릴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이라고 하셨던가?’
정순욱을 위한 선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도대체 왜 답장이 없는 거야……!’
와룡서원의 문제아, 정순욱은 최근 답답함에 속이 콱 틀어 막힌 듯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답신은 없고, 공부는 제대로 안 풀리며, 서원을 차린 허우대만 멀쩡한 학사 놈은 재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본다.
‘아니지…….’
마현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있는 얼뜨기 녀석들도 다를 바가 없다.
아침마다 기묘한 사술(邪術)을 읊으며 저녁때에는 뛰어놀기까지 한다. 그런 주제에 공부는 잘하고 싶다고 말한다. 개중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한림원에 들어가고 싶다는 얼간이까지 있다. 시간을 이리저리 나눠 쓰는 주제에 한림원이라니, 하. 기가 차다 못해…… 한심하다.
분명 한심한데, 가장 열 받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그깟 사술이 뭐라고……!’
놈들이 빠른 속도로 글을 익히고 있다는 점이었다.
‘구결신공이었던가?’
몇 번을 생각해도, 다 그 기묘한 사술 탓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할아버지께 부탁해 무당산이나 곤륜산의 정통한 주술사들에게 와룡서원의 조사를 의뢰해 달라고 말할 참이었다. 애초에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도대체 그깟 구결이 뭐라고 멍청한 얼간이들의 머리가 열리고 있단 말인가? 분명 사악한 술수가 포함된 마술(魔術)이다.
들통 나는 날에는 천하가 뒤집힐 정도로 끔찍한 음모가 숨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이 저런 얼간이들에게 따라 잡히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갑갑해.’
분노를 쏟아내자.
다음으로 찾아오는 것은 감정에 구획이 나뉘어있다면, 한 바퀴를 크게 돌아온 것이 분명한, 울연(鬱然)이다. 답답하다. 갑갑하고 온 마음이 난잡하다. 따지자면 작은 항아리에 물을 꽉 찰 정도로 담아 놓고, 누군가가 기다란 막대기로 마구잡이로 휘젓는 느낌이다.
어디 하나 숨 쉴 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데 그 안에서 또다시 혼란을 만든다.
미쳐 버릴 지경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냥 나가?’
연락을 기다리느니, 능동적으로 먼저 나서는 게 낫겠다.
목숨을 건 여정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대로는 숨 막혀서 죽을지도 모르겠어. 그런 생각이 정순욱의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쯤이었다.
“순욱이 있느냐?”
아버지, 정철영이 와룡서원을 방문했다.
소룡원 이불에 파묻혀 그 누구와도 얽히지 않은 채 공부에만 집념하던 정순욱이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버지!”
부슬 듯이 문을 열며 뛰어나가자, 익숙한 회색 의복 차림의 정철영이 작은 미소를 그린 채 서 있었다. 집 안에 있는 동안은 그리 사이가 좋은 부자지간(父子之間)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불편한 사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철영은 예의를 모르는 정순욱의 태도를 늘 걱정했으니 말이다. 한데 짧은 시간 동안 떨어져 있다가, 이렇게 만나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정순욱은 정말 뛸 듯이 기뻐하며 정철영에게로 달려들었다. 품에 안기지 까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그리웠다는 감정을 느끼게 할 법한 모습이었다.
‘이러고 보면 참 귀여운 아인데 말이지…….’
역시 영아(嬰兒) 시절의 교육이 중요하다.
너무 어릴 때부터 ‘오냐, 오냐’ 키워졌다 보니 정순욱이 비뚤어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고생이 심했으면 이럴까, 라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일 뿐이다. 정철영은 마음을 굳게 먹은 채,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그간 잘 지냈느냐?”
“전혀요. 못 지냈습니다. 아버지, 이곳은 최악이에요.”
정순욱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격을 모르는 얼뜨기 천지에, 스승이란 자는 사술을 부리는 사특한 마두(魔頭)입니다. 아버지. 이곳은 위험해요. 어서, 놈에게 걸리기 전에 달아나야 합니다.”
자연스레 정철영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얼뜨기에, 사특한 마두라…….’
안 그래도 오만방자한 정순욱이니, 또래의 친구들을 보며 그리 부른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가르칠 스승을 지칭하여 사특한 마두라니. 이런 자식을 아직까지 내쫓지 않고 있는 마현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휴우…….”
자연스레 입 바깥으로 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
그런 정철영을, 정순욱은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정순욱은 집안에서 말하듯 천재는 아니다. 하지만 제법 머리가 열렸으며 눈치가 좋은 편은 맞았다. 작은 한숨과 표정만으로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었다.
“순욱아. 이 아비가 보기에, 와룡학사가 네가 말하는 마두는 아닌 것 같구나.”
“그건 아버지가 그를 모르셔서 하는 말입니다. 그 마두 놈이 지금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자그마치 도덕경으로 위장한…….”
“순욱아.”
“아버지!”
정철영이 다시 한 번 다그치자, 얼굴을 굳힌 정순욱이 분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정순욱에게 있어 와룡서원은 타향(他鄕)이었다. 자신의 편을 들어줄 이 하나 없는, 완벽한 타지란 말이다. 그런 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을 만났다. 그 반가움이 어땠던가? 설렘은 얼마나 컸던가?
드디어, 드디어 서신을 받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보낸 것이다.
이 악의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이 찾아왔다는 말이다.
“우선, 걸으면서 이야기하자꾸나.”
정철영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 채, 어린 아들의 손을 잡아주려 하였다.
“됐습니다.”
하지만 정순욱이 그를 거부했다.
어차피 자신의 편이 아니라면 필요 없다.
아버지라 한들 아니, 아버지이기에 더욱 자신을 믿어줘야만 하는데…….
‘억울해.’
분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다.
독한 척, 강한 척 굴지만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이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다 생각하자 억울한 감정이 먼저 벅차오른 것이다.
‘최악이야.’
차라리 덩치 큰, 하찮은 백정 집안의 자식인 백산에게 두들겨 맞을 때가 훨씬 나았다. 그땐 졌다는 사실이 분했지만, 이렇게 서럽지는 않았었다.
“…….”
말없이 서원 내부를 걷고 있으니 그러한 마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혼자다, 외롭다, 쓸쓸하다. 이 세상 믿을 사람 하나, 하나만…….
‘할아버지.’
문득, 자신을 그렇게 예뻐해 주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름 가득한, 하지만 믿음직한 그 미소는 정순욱에게 있어 세상 유일의 것이었다. 할아버지였다면 달랐을 터다. 아버지랑 다르게 믿어주고, 당장 이곳에서 나가자고 외치셨을 터다.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려 할 때였다.
“순욱아. 할 말이 있다.”
정철영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동시에 정순욱은 양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며 눈물을 거둬들였다. 울 수 없다. 자신의 말 하나 믿어주지 않는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가 너무나 싫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라면 듣고 싶지 않아요.”
그 목소리조차 싫었다.
“가문에 관한 이야기다.”
정철영은 그런 정순욱을 보며, 훨씬 더 쓴웃음을 그린 채 말을 이어나갔다.
“……가문에 무슨 변고(變故)라도 있는 겁니까?”
“부정하지는 않으마. 혹시, 황가장(黃家場)을 기억하느냐?”
정순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기억을 떠올렸다.
“제가 떠나기 전에 새로 생긴 상단 아닙니까?”
어느 문파였던가? 하여튼 강호에 산재한 중소문파 중 하나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황가장은 나름대로 정순욱의 기억에 남는 상단이었다.
‘황기명(黃忌明)이라고 했던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정순욱도 나름대로 무례하다면 무례한 편. 한데 황기명은 그 정도가 더했다. 말 그대로 안하무인(眼下無人)이랄까? 이제 새로 장사를 시작한다며 인사를 하러 온 주제에, 거들먹거리던 그 꼴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감히 정가상단(丁家商團)을 무너트리겠다고 선언했던가?
‘아직 천자문도 못 뗀 얼간이 주제에…….’
다시 생각을 해도 열 받는다.
그 오만한 눈빛 하며, 제 아비를 닮아 돼지 같은 들창코를 들어 올린 모습이란…… 생각해보니 참 기특한 일이었다. 그런 못난 얼굴을 보며 주먹 한 방 날리지 않고 참아 냈다. 성숙한 어른(?)다운 행동을 한 셈이다.
“그 황가장이 최근 세력을 키우는 중이다.”
“……그래서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황가장이 뒤를 봐주는 무림 문파 덕에 제법 위세를 업은 상태로 개장(開場)했다고는 하나, 불과 중소규모에 불과한 상단이었다. 반면 정가상단은 신의현에서부터 시작해, 일대에 이름을 날리는 나름대로 명문의 대상단이다.
고작 한두 달이 아니라, 일, 이년의 시간이 지난다 해도 좁혀지지 않을 격차다.
솔직히 말해, 현재 정가상단의 실무를 맡아 전두지휘(前頭指揮)하는 정철영의 입장에서는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상단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분명히 그럴진대 정철영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
말이 안 되기에 이해는 되지 않지만, 황가장 측이 무언가 일을 벌였다는 뜻이다.
“일을 과격하게 벌이기 시작했다. 본래 뒤를 봐주던 청호문(靑虎門) 외에도 중소문파 다섯 정도를 더 영입하여 상단의 일에 훼방을 놓고 있지.”
“그걸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까?”
질문을 한 정순욱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였다.
놈들이 더럽고 추잡하게 나온다면 정가상단도 비슷한 방식으로 간다. 돈이야 많이 들겠지만, 멍청하게 당하는 것보다는 몇 배나 나았다. 상인이라면 그래야만 한다. 명분(名分)보다는 실리(實利)가 우선. 최근 와룡서원에서의 일을 겪으며, 독기까지 갖춘 정순욱의 속내는 단호했다.
“증거가 없다. 게다가 섣불리 일을 벌였다가 괜한 꼬투리라도 잡히면 더욱 곤란해진다.”
“할아버지는요?”
정순욱의 눈동자가 데구르 구르며,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정철영으로서는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정가(丁家)의 핏줄이란 말인가…….’
오만방자하다 말할 정도로 예의가 없지만, 상인으로서의 재능은 특출하다. 눈치가 빠르며, 계산에 밝고, 최악의 사태에도 최선의 방안을 떠올리려 한다. 고작 열세 살의 어린아이치고는 너무나도 이성적인 행동이라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특유의 반골 기질이 옳은 것만은 아니다.
이 자리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마현의 얼굴을 떠올린 정철영은 굳은 마음을 다지며 입술을 뗐다.
“네 할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는요?”
정철영이 말문을 끝까지 잇지를 못하자, 빠르게 좌판을 굴리던 정순욱의 행동이 변했다. 걱정 가득 담은 두 눈이 빠르게 떨린다. 감정이 단숨에 이성을 앞지른 것이다.
‘어찌 된 놈이 제 아비보다 조부를 더 좋아하니…….’
아무리 어쩔 수가 없다 한들, 내심에 새겨지는 쓴 감정은 역시 독하다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니, 아니다. 어찌 됐든…….”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정순욱은 조부의 좋지 않은 소식에 대해 수십 가지의 경우를 떠올리며 물었다. 정말 큰 일이 난 것일까? 설마, 설마하니, 최악까지 가지는 않았겠지. 어느덧 꼭 쥐고 있는 양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 채였다.
“네가 안다 하여 크게 변할 것도 없다. 그보다, 순욱아. 상황이 안 좋은 때이니만큼 더욱 글공부에 매진하도록 하여라. 현재로써는 이곳이 설령 마귀굴이라 하여도 남을 수밖에 없으니…… 만약, 아주 만약의 경우에는. 내가 가문을 다시금 일으켜 세워야 한다. 알겠느냐?”
“아버지……!”
“어허, 변할 게 없대도. 네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뿐이다 순욱아. 예전에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 기억하느냐? 네가 처음 천자문을 뗀 날 하셨던 이야기 말이다.”
“마음에 똑바로 선 붓은…… 눈 없는 돈보다 강하다고요.”
“기억하고 있으니 되었다. 이만 가보도록 하마.”
정철영은 작은 웃음을 흘린 뒤, 마지막으로 정순욱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걸음을 크게 옮겨 나갔다. 아버지가 밉다. 싫다 하였지만, 그마저도 거부하지는 않는다.
알고 있는 것이다.
애정 가득 담긴 두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느껴버리는 탓이다.
‘난 혼자가 아니야…….’
하나 지금은,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할 때인 듯했다.
* * *
서원 내, 마현의 방.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다시금 돌아온 정철영이, 작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마현은 그저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 눈앞에 놓인 찻잔을 훌쩍일 뿐이다.
“……우문(愚問)이었군요.”
자신의 자식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렇게까지가 아니라.
이 정도쯤 하지 않으면 꿈쩍도 안 할 아이다.
그나마 이도 아직은 어린 나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지, 조금 더 머리가 굵고 생각이 깊어지면 통하지 않을 이야기다.
“언젠가는 사람을 풀어 정보를 모을 겁니다.”
마현의 짧은 말에, 정철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마주 보며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정가의 피를 이은 정순욱은 실제로 따져 학문의 천재는 아닐지언정, 상인으로서는 독보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다.
조금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될 때, 감정을 누를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통하지 않았을 이야기.
“그때 돼서는 지금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게 되겠지요.”
거짓.
그래, 거짓말이다.
물론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거짓말이란 본래 구 할의 사실과 일 할의 거짓으로 엮는 법이라 했다. 실제로 황가장은 최근 중소 무림 문파 몇몇을 고용해 정가상단에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나 그래 봐야 바늘로 거인의 발톱을 찍는 격이다. 조금 따끔할 수 있을지언정 그뿐, 크게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
‘아버지께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는 중이고 말이지…….’
정가상단의 전대 실무자, 정대형이 고작 그런 일에 변고(變故)를 당한다? 말도 안 된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정가상단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다. 세대가 이어져 내려오는 명문 상단의 힘은 생각보다도 더욱 굳건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문제는 나지.’
당대의 상단주인 정철영은 이름만큼 마음이 단단하지 못해 문제다. 자식 교육의 실패가 그 대표적인 예다. 아무리 정대형이 변호한다 하여도 정철영이 굳게 마음을 먹었다면 정순욱도 저만큼이나 오만방자해지지는 않았을 터다.
“화를 낼까요?”
“내겠죠.”
이번 역시 우문이었다.
정순욱의 성격을 생각건대, 아는 순간 곧바로 쫓아오지 않는다면 다행일 터였다.
“크게 미움받겠군요.”
아, 이번 역시 우문일까?
아니지, 현답(賢答)이로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글쎄요.”
어느새 차를 새로 탔는지, 찻잔을 내민 마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보다 순수하고, 영리한 아입니다. 어찌할지는…… 지켜보면 알겠죠.”
정철영은 해 줄 만큼 했다.
남은 일은 마현의 몫이었다.
* * *
정철영이 떠난 지, 오 일이 흘렀다.
그간 정순욱은 완전히 넋을 놓은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기는 하지만 시선은 풀려있다. 아이들과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같지만, 전과 같이 쓸데없이 높은 자부심 탓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의지가 사라졌다.
마치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는 배처럼, 모든 일에 의욕을 잃은 것이다.
‘충격이 크겠지.’
마현은 그러한 정순욱을 굳이 자극하려 들지 않았다.
스스로 느껴야 한다.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몸으로 깨달아야 한다.
‘집안이라는 버팀목이 없을 때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지를.’
또한 그 속에서 이겨내야 한다.
움츠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스스로만의 목표를 명확히 세워야 한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을 것이다.’
단순히 충격뿐만이 아니다. 걱정, 불안, 무력함, 불신, 수많은 감정이 정순욱의 몸과 머리를 헤집고 있을 터다. 그래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면 된다.’
하면 알아서 때를 찾아 입술을 깨물고 의지를 불태울 것이다. 본래 반골이란 놈들이 그렇다. 옆에서 어중간하게 돕는다고 손을 내밀면 삐딱선을 탄다. 반대로 지켜주지 않고, 무시하고 내버려 두면 또 다른 자신만의 기준선을 세워 벌떡 일어난다. 방향이 잘못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존심이 있을 테니까.’
반골의 단점이자, 장점이 바로 이 자존심 아니던가?
자존심이 강하기에 남들보다 밑이란 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오만하고, 편협한 성격이 되어 세상의 중심을 자신으로 만든다. 남에게 손가락질받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올바른 정의를 가진 반골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 귀여운 제자 놈은…….’
적어도 그른 정의를 가진 비뚤어진 녀석은 아니었다.
독선적이고, 고집이 세지만 결코 그른 길로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을 상인의 자식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더 확실하지.’
정순욱은 아닌 듯하지만, 자신이 훗날 정가상단을 물려받을 것에 대해 확실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 주제에 최대한 계산적으로 생각하려는 것과 실리를 챙기는 일. 거기에 더해 상인의 가장 큰 덕목인 신뢰(信賴)를 쌓는 부분까지 모두.
옳은 선택을 할 것이다.
또한, 현재의 입장에서 최선이라 말할 수 있을 결정을 내릴 것이다.
‘조금 더 강한 자극이 있다면…….’
그 시간이 앞당겨질 텐데.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이 들 때쯤이었다.
턱.
묵묵히 공부에 열을 올리던 백산이 책장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마현의 두 눈이 절로 반짝였다. 백산이 책을 덮는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첫째는 수업 시간이 끝났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서적을 모두 다 떼었을 경우다.
지금이야 아직 수업 중이니…… 말할 것도 없이 후자다.
“벌써 입교(立敎)를 모두 다 익힌 것이냐.”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더 이상 발목이 묶여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읊어 보거라.”
입가로 미소를 그린 마현의 말에,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백산의 입술이 달싹였다.
“자사자왈 천명지위성(子思子曰 天命之謂性)…… 자사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명하여 부여한 사람의 본질을 성이라 일컬으며…….”
백산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서원 내부로 울려 퍼지자, 자연스레 아이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입교는 소학의 내편(內篇)중 가장 첫 부분에 해당하는, 이름 그대로 교육하는 법을 일컫는 서책이었다. 평균적으로 빠른 아이들은 열 살 내외로 떼기도 하나, 늦은 아이들은 열다섯이 넘도록 다 이해 못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데 백산이 그 입교를 열셋에 모두 익혔다.
결코 느리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엄청나게 빠른 편이었다. 위에 말한 평균적인 기준은 어린 시절부터 글공부를 해온 학사 가문의 아이들이다. 한데 백산은 어떤가? 본래 도수의 집안에서 태어나, 불과 보름 전에 천자문을 모두 익혔다.
구결신공을 비롯한 마현의 도움도 크다.
하나 그보다 더욱 대단한 것은 백산 본인이 가진 의지력과 오성이었다.
‘고작 몇 개월이 안 되는 시간에…….’
말하는 방법 자체가 바뀌었다.
그만큼이나 많은 성장을 했다는 뜻.
제자를 키우는 마현의 입장에서는 가슴 한편이 뿌듯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수왈미학(雖曰未學) 오필위지학의(吾必謂之學矣)라. 결국 입교에서 말하는 것은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의 자세. 곧 교육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학문을 시작하는 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와아…….”
“대단하다…….”
백산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끝맺음을 선언하자, 아이들 사이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책을 암기한 것으로도 모자라,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꿰뚫었다. 이리되면 백산은 입교에 대해 완벽히 이해를 했다 하여도 거짓이 아니었다.
“옳은 말이다. 하나, 몇 번을 강조해도 중요한 것이 초지일관(初志一貫)이니. 그 배움과 가르침을 잊지 말도록 하여라.”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백산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모습으로 답한다.
성숙해져 간다.
도리를 알고 배움을 깨우치며 성장해 나간다.
‘기묘하군.’
제자의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란 또 새로운 감각이다.
그 즐거움에, 마현의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하면 이제 명륜(明倫) 편으로 넘어가자꾸나.”
그러한 감정을 억지로 감추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표정으로 드러낸 마현이 말했다. 명륜은 입교에 이어 오륜을 가르치는 소학의 내편 중 하나였다.
또한 현재 정순욱이 익히고 있는 공부이기도 했다.
자연스레 마현의 시선이 정순욱에게로 이어진다.
감탄하는 아이들은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백산의 발표에, 자신만만함에, 당당한 말투와 오롯이 선 기개(氣槪)에 정순욱의 온몸이 떨린다. 얼굴은 붉었다, 하얘졌다, 수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멍하던 뇌리에 번개라도 내리꽂힌 듯한 모습이었다.
‘놀랐겠지.’
아이들이 무섭게 뒤쫓아 오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을 터다.
하나 끝내 이 정도로까지 좁혀오면 실감이 달라진다.
‘게다가 백산이 시작했다는 것은…….’
그 뒤를 따라 다른 아이들도 금방 쫓아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마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영특한 소수린이,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누군가가, 한 달이 더 지날 때쯤에는 모든 아이가 입교의 과정을 끝마치게 된다. 달라질 게 없어진다. 자신만의 잣대에서, 오롯이, 고고하게 서 있던 정순욱이 다른 아이들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래, 같아진다.
동급(同級).
그 이후로는 무엇이 기다릴까?
말할 것도 없다.
뒤처지는 것이다.
밀려난다. 선두가 아닌, 후미(後尾)로 위치가 내려선다.
“……싫어.”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실낱같은 숨소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마현의 귀에는 분명히 들린 목소리이기도 했다.
정순욱은 부정하고 있었다. 부인하고 있었다.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결과를 원치 않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가 뒤처지는 미래를 그 누가 원하겠는가? 하물며 반골 정순욱이라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저런 놈한테.”
정순욱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떨리는 두 눈에는 승리욕이 불타오른다. 시선이 직시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백산의 넓고 커다란 등이다.
우연일까?
때마침 백산의 시선이 그러한 정순욱에게로 향했다.
“……?”
아무것도 모르는 백산은, 지독할 정도로 적대적인 정순욱과 마주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정순욱은 그런 백산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해서 몸을 벌떡 일으켜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목표는 백산.
아니, 그를 지나 마현이었다.
당당히, 마현의 앞에 서 고개를 추켜든 정순욱의 고집스러운 입술이 벌어진다.
“나를 가르쳐 줘. 지금부터 네 말에 모두 따를게.”
아이들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지금 정순욱이, 스스로 배움을 청했는가?
여태껏 같은 서원에 앉아 있다 한들 혼자서만 나돌던 그 반골이? 어지간한 일로는 흔들리지 않던 백산의 눈조차도 빠르게 떨렸다. 소수린은 이 모든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한 눈치를 보낸다.
‘하여간에…….’
제자조차 몇 안 되는 이 작은 서원에 왜 이리 영악한 아이들이 많은지.
마현은 작은 웃음을 흘리며 떨리는 눈동자의 정순욱을 직시했다. 얼굴이 살짝 붉게 달아오른 것이, 현재 아이들의 반응이 어지간히도 민망한 모양이었다.
“따, 딱히 당신을 인정해서는 아니야.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도 아니고.”
“조건?”
그럼 그렇지.
아이들의 표정이 모두 그리 말을 할 때였다.
정순욱의 두 눈이 다시금 백산에게로 향했다.
곧게 뻗은 검지는, 커다란 몸을 가리킨다.
“저 녀석!”
“……나?”
백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콧방귀를 낀 정순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한테 지지 않게 해줘.”
짧은 말을 흘린 정순욱이, 다시금 마현을 직시했다.
답을 달라는 뜻이다.
“……노력은 하지.”
피식, 하고 실소를 흘린 마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순욱은 그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굳이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노력을 한다. 선생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흥분하여 홧김에 일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 상태도 아니다.
‘선생 혼자서 어찌해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본인의 의지.
아무리 선생이 뛰어나도 가르치는 제자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내가 그럴 리는 없을 테니까.’
정순욱은 자신 있었다.
백산과 다른 아이들과 같이 함께 마현이 가르치는 것을 익힌다면, 여태껏 사술이라 무시했던 그 공부를 함께한다면.
‘지지 않아.’
절대로 뒤처지지 않는다.
여전히 선두에서 뛸 수 있다.
‘이런 얼간이들과 같아질 수는 없지.’
기본적인 태생이 다르다.
근본 자체가 다르다.
그러니까, 절대로 같아질 수조차 없을 것이다.
장담한 정순욱은,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다시금 걸음을 옮겨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남기는 것은 하나.
“흥.”
백산을 향한 도전적인 코웃음뿐이었다.
제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