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225화 (225/225)

225.

#금선무

‘대연을…… 이루지 못했다.’

대연(大然)은 크게 그러한 것이다.

이는 천지간의 가장 근본적인 순리로서, 검노야가 익혔고 진우선에게 전했던 모든 무학의 핵심이었다.

검노야는 삼문협에서 비움의 도를 깨달아 대연을 이루며 신선경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깨달음을 대연만궁으로 진우선에게 전했다.

하지만 진우선은 끝끝내 비움의 도를 이루지 못했다.

황금존자의 한없는 공력을 감당해내려면 신선경에 오른 이에게만 허락된 오롯한 선기가 필요했으나, 결국 얻지 못했다.

‘아…….’

극심한 고통이 엄습하여 전신을 지배하더니, 이내 고통스럽다는 느낌마저 앗아갔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신은 깨어 있었다.

‘……?’

정신만이 홀로 존재하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이것이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의아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존재성이 없으면서도 존재하지 않음이 없고, 빛이 없으면서도 빛이 아님이 없었다.

경계가 아득했다.

정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도무지 형언할 수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無)에 거하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지 않다고 해서 유(有)에 거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한없이 흘러갔다.

몇 년일까?

혹은 몇 겁(劫)일까?

아니, 시간을 따질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이 없고, 시간이 흐르지 않음이 없었으니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치가 없으면서도 지극한 이치[無理之至理]요, 그렇지 않으면서도 크게 그러한 것[不然之大然]은 일심(一心)의 근원이다.’

그 순간, 밝고 고요한 가운데서 일심이 깨어났다.

일심의 근원은 유(有)와 무(無)를 떠나 청정하며, 이는 무상(無相)이기 때문이었다.

‘아!’

빛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온전한 하나의 이치, 시공무상(時空無相)이 뇌리에 떠올랐다.

‘금선무의 끝은 대연만궁이 아니라, 시공무상이었어야 했구나!’

비움의 도는 검노야의 길일 뿐이었다.

금선무는 육초식 금륜소천에서부터 검노야의 선무와 완전히 다른 무공이 되었지 않은가.

비움의 도는 진우선의 근원을 일부분 담아낼 수 있어도, 모든 게 될 순 없었다.

‘내 근원에는 선천과 후천이 있다!’

패왕금룡신공의 선천지기와 광륜의 오행진기인 후천지기가 있었다.

금선무는 이 둘이 함께 어우러진 무공이니,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선 안 되었다.

그러니 선천이라 하여 후천이 아닌 게 아니며, 후천이라 하여 선천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이를 한데 어우르니, 비로소 모든 제약을 넘어서는 온전한 하나의 이치가 열리고 있었다.

‘조화의 도.’

이름이 지어진 순간, 지극한 도(道)가 열렸다.

인지하던 세계에 빛이 한없이 어렸다.

이윽고 전신의 감각이 생생히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탐심 가득한 음성이 들려오며, 아득한 옛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일대진미를 맛보게 되었구나. 네놈은 영광인 줄 알아라!”

흑암이 천지를 덮었고, 흑혈이 진우선의 육신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황금존자는 흡수한 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없어?”

황금존자가 두 눈을 부릅떴다.

눈동자에 가득 깃들어 있던 탐욕의 광기가 사방으로 폭발하여 터져 나갔다.

“왜지? 어떻게 된 거지?”

흡룡천신력(吸龍天神力)이 진우선을 녹여내지 못할 리는 없었다.

이는 타인의 육신을 삼켜 공력과 능력을 제 것으로 만드는 절세신공으로, 괜히 황금존자의 삼대신공 중 정점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진마경에 오른 절대천마와 반사령을 이룬 사령신군의 육신도 단박에 소화했고, 종전에 먹어버린 방각 선사도 고스란히 흡수했지 않은가.

그러니 흡룡천신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데 이유가 있을 터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자, 황금존자의 얼굴에 깊은 수심과 짙은 당혹감이 어렸다.

한데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를 찾는 건가?”

빈틈 하나 없는 흑암 가운데서 빛이 번지기 시작하며, 신령스러운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광륜의 빛에 휩싸여 나아오는 인물은 바로 진우선이었다.

“대체 어떻게?”

황금존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진우선에게서 그토록 쏟아냈던 피도, 위중해 보였던 상처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생사의 기로에 처해 있었건만, 어찌 이리 말짱하게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종전과 똑같은 건 육신에 걸친 넝마나 다름없는 옷뿐이었다.

“다 먹어 치웠나?”

진우선이 좌우를 한 번씩 살피며 무뚝뚝한 어조로 짧은 소감만 꺼냈다.

“달라졌군.”

답을 들은 건 아니지만, 황금존자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불도를 넘어서 선도까지 탐냈구나. 그래서 나조차 삼켰던 거였어.”

“크크! 그래, 맞아. 흡룡천신력은 한계가 없는 무적의 신공이라, 네놈마저 먹었으면 나는 고금제일인이 되었을 거다.”

“욕심이 너무나 지나치군.”

“내 그릇이 큰 게 부러운가?”

황금존자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며 조소를 지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황금존자의 눈만을 직시했다.

황금존자가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해왔다.

“인제 보니, 네놈에게서 선인의 마지막 모습이 비쳐 보이는군. 누가 스승과 제자 아니랄까 봐 풍기는 기운마저 똑같아.”

“그 칭찬은 고맙군. 존경하는 스승님을 늘 닮고 싶었으니까.”

진우선이 피식 웃었다.

그때, 검노야의 전언이 뇌리에

파고들었다.

[우선아. 망설이지 말거라.]

‘스승님…….’

[네 도를 깨달았지 않더냐? 이제 네게 주어진 업(業)을 이룰 때가 되었다.]

‘그건 그렇지요.’

[나 역시 너를 만나 도를 이루었느니라. 이만하면 되었지.]

검노야의 뜻이 가슴을 저몄다.

진우선이 굳은 얼굴로 황금존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생사경 너머의 길을 엿본 모양이군.”

“……그것도 눈치챘나?”

“삼원을 다 모아 생사경에 발을 올렸음에도 합일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선도의 기운마저 탐냈는데,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리하여 고금제일에 오르고자 했겠지.”

“크크크! 정말 네놈은 별걸 다 알아채는구나. 그냥 죽여 버릴걸.”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황금존자를 보며, 진우선이 무정한 눈빛을 지었다.

황금존자의 말은 헛된 망상이며 부질없는 투정일 뿐이었다.

진우선이 의식의 세계에서 영겁의 시간을 보낸 듯하나 실제로는 찰나에 불과했다.

조화의 도를 얻은 그 순간, 삼라만상을 아우르게 되었다.

흑혈이 덮쳐올 때 눈을 뜬 건,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기에 그러했을 뿐이었다.

진우선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빈손 안에서 빛이 일어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흑암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광륜검이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애초부터 손안에 있었던 것처럼.

“……!”

황금존자가 놀란 눈을 치켜뜨더니, 곧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검은 불길이 세차게 일어났다. 그 위로 칠흑의 불꽃마저 단박에 피어올랐다.

그러고도 모자라 암흑신령광류가 휘휘 감아 도는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이윽고 불길과 불꽃이 하나의 형상을 그려내며 황금존자의 머리 위 허공을 장악했다.

그건 불꽃처럼 타오르는 흑룡(黑龍)이었다.

황금존자의 눈에서 흑광이 번뜩 이는 동시에 흑룡이 눈을 번쩍 떴다.

“흐흐흐!”

황금존자의 입이 슬쩍 열리며 괴소가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불도의 기운을 모두 흡수하여 삼원합일을 이루어낸 까닭이었다.

“보이느냐? 용은 나의 것이다! 크크크!”

황금존자가 광포하게 웃어젖히며 천지간에 선포했다. 그는 용에 대한 집착이 있어, 진우선을 종종 감싸는 금룡에도 오랫동안 시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우선은 황금존자의 외침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인연의 실타래가 있는 까닭이었다.

‘스승님…… 저에게 주문강과의 악연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혼원귀일」을 가져간 게 그였구나. 혼원이 어지럽다고 하여도 이로써 귀일할 수 있으니, 그게 바로 흡룡천신력의 모체였어.]

남촌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자 진우선은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와 동시에 황금존자와 대치하고 있는 이 상황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끊어내겠습니다.’

[그리하려무나.]

‘스승님. 죄송합니다.’

[아니다, 우선아. 간극을 갈랐던 네가 옳았느니라.]

바로 그때였다.

“흐압-!”

황금존자의 괴성과 함께, 혼원기와 혼돈기의 정수가 만들어낸 불꽃의 흑룡이 진우선을 덮쳐왔다.

그 기세가 무지막지했다.

마치 온 세상이 한 점으로 압축되어 진우선 단 한 사람을 짓누르려는 듯했다.

가히 미증유의 힘이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미동이 없었다.

그의 눈은 오롯이 찰나의 정적을 바라볼 뿐이었다.

진우선이 광륜검을 허공에 놓았다.

검에서 빠져나온 순백의 빛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수우욱-!

빛이 본연에 그러한 대로 뻗어나가며 천지간에 가득한 흑암을 관통했다.

덮쳐드는 흑룡도 단박에 꿰뚫었다.

시공무상은 모든 제약을 넘어서는 온전한 하나의 이치이니, 혼돈이 어둠으로 천하를 어지럽혀도 비움과 채움 사이에서 본연을 찾아낼 수 있었다.

“컥!”

황금존자가 단말마의 비명을 흘렸다.

“내, 내 천하가…….”

천지간에 번져나가는 본연의 경계에 온몸이 흩어지며, 황금존자의 존재가 소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검노야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우선아. 네가 있어 그간 행복했구나.]

‘스승님! 보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천하는 순리대로 흐르는 것이다. 마음에 두지도 말고 거스르지도 말아라.]

‘스승님!’

[허허! 그간 고생 많았구나. 이제 자유롭게 네 삶을 살거라.]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슈아아아아악-!

일순간, 빛이 전 방위를 잠식하더니 흑암과 함께 증발했다.

검노야의 광체가 사라져 없어졌고, 태산영기에 묶여 흑암 속 깊은 속에 존재하던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의 영체 역시 소멸했다.

그렇게 시공이 베어지며 모든 것이 적멸했다.

삼라만상이 공(空)으로 돌아갔다.

그 가운데 오롯한 것은 단 한 사람, 진우선뿐이었다.

진우선이 멍하니 고개를 들어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잿빛 빛무리가 해맑은 구름처럼 하늘에 어리고 있었다.

‘스승님…….’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목이 메어왔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올랐다.

‘제자의 절을 받으시옵소서!’

진우선이 무한한 존경심을 담아 극진하게 예를 올렸다.

시공무상의 깨달음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바람에 그저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던 게 못내 미련으로 남아있던 까닭이었다.

진우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잿빛 빛무리가 하늘에서 사라져 갔다.

그제야 아직 못다 한 말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스승님, 저도 행복했습니다.’

#종(終)

수많은 날이 지났다.

장사의 오석교 근처에 세워진 작은 누각에는 사람이 끊이는 날이 없었다.

특히 가장 많이 들르는 이들은 옥과 같은 외모에 고귀한 기품을 흘리는 일남일녀였다.

“여름이 다 지나가고 있어요. 소림비사(少林秘事) 이후로 벌써 반 년이 흘렀네요.”

“그렇구나.”

“강호에는 원래부터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천하대전의 대혈사까지 벌어졌는데, 지금은 또 너무나 평온해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은 계속 흘러가니까. 지난 일들은 잊히기 마련이지. 맹주님을 비롯해 정무맹의 모든 식구가 열과 성을 다해 천하를 안정시킨 결과이기도 하고.”

사내 소무강이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눈으로 시간을 느꼈다.

그에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 빙화곡주이자 여동생인 벽소군이 가만히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진 공자를 다 잊진 않았겠죠? 여기에 찾아오는 사람도 아직 많은데.”

“글쎄다. 당주님이 승산에서 벌어진 일을 신안(神眼)으로 살펴 처참했던 공전절후의 대결을 전하셨지만, 듣자 하니 벌써 전설처럼 여겨지는 것 같더라.”

“사람들은 정말 너무 빨리 잊어 버리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가 그를 그리워하며 여기에 연선각(善閣)을 지었지. 그중에는 제일 그리워하는 네가 있고.”

연선각은 이름 그대로, 진우선을 그리워하는 장소였다. 오석교 근처 진우선의 집 앞에 지어진 것도 그래서였다.

진우선은 소림비사에서 천공에 드리운 혼돈을 걷어낸 뒤,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저보단 탁 무사님이 더 많이 그럴 거예요. 날마다 여기서 머무른다고 들었어요.”

“설마? 집이 저긴데?”

“밤에도 여기 나와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고, 영화 언니가 걱정이 많아요.”

“그랬군. 하긴, 탁 무사는 그를 많이 따랐으니까. 여전히 많이 그리워하더라.”

무도원주로서 탁운비를 지켜봤던 소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벽소군이 물었다.

“오라버니. 앞으로도 계속 정무맹에 몸담으실 거예요?”

“안 그래도 내 결심을 알려주려고 했어. 그건 전에 말했던 대로 하자. 그간 곡을 잘 이끌어온 너니까 앞으로도 잘할 거야. 게다가 혈불을 처단하며 복수를 이룬 것도 너이니, 네가 곡주인 게 맞다.”

“그 말은 곧 정무맹에 계속 있겠다는 거네요.”

“그래. 새로운 목표를 정했거든.”

소무강이 저 멀리 정무맹 쪽을 바라보았다.

눈으로는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 하늘의 길을 따르는 한 전각이 또렷이 그려져 있었다.

“알겠어요. 뜻을 이루시길 바랄게요.”

벽소군이 소무강의 뜻을 받아들였다.

“소군아. 너는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아무래도 곡을 너무 오래 비울 순 없겠죠. 근데 진 공자가 여기로 돌아오는 게 확실해요?”

“그건 탁 무사가 호언장담을 했었다. 사람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기 마련이고, 진 대협은 가족이 없어서 더 그럴 거라고.”

“한데 어디로 간 걸까요? 무얼 하려고…….”

“글쎄다.”

무극을 넘어선 벽소군은 천기를 보며 진우선의 기운이 하늘을 떠받치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하에서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여기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 앞에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벽소군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쳤다.

“진 공자! 먼 길을 다녀왔군요.”

“잠시 천하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천하를요?”

“천하가 흘러가듯이, 저도 발길 가는 대로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다녀보니까 세상엔 역시 악한 자들이 많더군요.”

하지만 진우선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토록 힘겹게 싸우고도 여전하네요. 그런데 전과는 달라 보여요. 지금 표정이 보기 좋아요.”

“벽 소저도요.”

웃으며 말하는 진우선의 얼굴은 홀가분하고,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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