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혼돈의 선봉장 (2)
삼십 년 넘게 불려온 이름, 방연.
삼 년 가까이 살아온 신분, 탁탑천왕.
귀에 익은 음성이 옛 기억을 불러일으키니, 그는 이미 자아가 변해버렸음에도 잠시 온몸이 굳어버렸다.
“후우-!”
그의 입에서 한숨이 먼저 나왔다.
“후후-!”
그리고 냉소적인 웃음이 이어졌다.
찰나간에 번뇌가 찾아왔으나,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방연아!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청송아! 너 맞느냐?”
방각 선사와 청풍자가 전심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며 달려갔다. 앞장서던 진우선은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주었다.
그에 회색장포의 두 금면인이 다 무너진 보제암 앞에서 기운을 피워올렸다.
“적들이 오는군.”
“언젠가는 끝맺어야 할 인연이었지. 영영 마주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인연? 아직도 그렇게 말할 거야?”
“실수다. 그저 과거의 편린일 뿐이다.”
거구의 금면인, 탁탑천왕이 말을 정정했다.
그와 동시에 강렬한 내력을 폭발시켰다.
후웅-!
거친 파공음과 함께, 회색장포와 별반 구별되지 않는 탁한 빛깔의 기류가 탁탑천왕을 휘감으며 피어 올랐다.
마른 금면인 역시 이에 질세라 전신에서 맹렬한 기세를 피워냈다. 그에게서는 탁하게 얼룩진 흑백의 두 기류가 얽히고설키며 회오리치고 있었다.
“방연아-!”
이윽고 방각 선사가 십여장 앞으로 급히 달려온 순간.
콰앙-!
탁탑천왕이 두 주먹을 전광석화처럼 내뻗었다. 땅에 두 발을 박아 넣으며 한껏 응축시킨 공력이 허공을 격하고 쏘아져 나갔다.
섬전 같은 쏘아진 백보신권(百步神拳)의 한 변형이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날리던 방각 선사는 피할 길이 없으리라.
바로 그때였다.
화악-!
신비로운 광채가 탁탑천왕의 일격을 휘감더니, 섬광을 뿌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의 회심의 일격이 단숨에 무위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한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화아아아-!
신비로운 광채가 한층 짙어지며,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부, 불광……!”
탁탑천왕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부지불식중에 읊조렸다.
방각 선사의 이마 정중앙에서 뿌려지는 신비로운 빛, 불광(佛光). 이를 목도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까닭이었다.
‘법륜(法輪)이 느껴집니다.’
[그렇구나. 과연 소림이야!]
한편, 진우선과 검노야는 탁탑천왕과 달리 방각 선사의 불광에서 법륜을 느끼며 놀라고 있었다. 이는 정통한 불법을 깊이 깨달아 극경인 등각(等覺)을 넘어섰다는 증표나 다름없었다.
“방연아. 그게 무슨 꼴이더냐?”
어느새 탁탑천왕의 삼 장 앞에 도달한 방각 선사가 크게 일갈했다.
“돌아오너라! 불조께선 아직 너를 기다리신다!”
“나는 탁탑천왕이오. 옛 이름은 버렸소.”
“버렸다고? 아-!”
방각 선사의 탄식이 쏟아져 내렸다. 어느새 아련해진 눈빛은 그의 슬프고 애달픈 마음이 다름없었다.
“이걸 찾으러 왔겠지만, 줄 수 없소.”
탁탑천왕이 손에 든 영주를 두고 묻더니, 곧장 품에 집어넣었다.
“아니다. 나는 너를 찾으러 왔다.”
그 순간, 탁탑천왕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잠시일 뿐이다. 그는 등 뒤로 손을 뻗어 묶어둔 봉을 끌어 내렸다.
“보물이 중요하지 않은가 보구려. 이제 소림에 아미타불의 덕광은 사라졌소. 하긴, 나완 상관없는 일이지.”
“그게 아니야. 아무리 영주가 보물이라지만, 어찌 네가 돌아오는 것보다 중하겠느냐? 방연아, 가장 소중한 건 네 안에 있는 청정광(淸淨光)과 지혜광(智慧光)이다.”
청정광은 탐욕에 찬 마음을 비추어 더러운 때를 벗기는 광명의 덕이며, 지혜광은 무명(無明)을 깨뜨리는 광명의 덕이었다.
방각 선사는 불법이 특출났던 사제, 방연에게 계속 짙은 불광을 비추면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참고 또 참으며 정심을 쪼개려 하고 있었다.
탁탑천왕이 눈동자가 요동치고, 얼굴에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촤악-!
탁탑천왕의 미간에서 흑암의 기류가 쏟아져 전신을 뒤덮었다. 눈동자에도 깃들어 단박에 검게 물들였다.
“흐하하하-!”
탁탑천왕이 섬찟한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방장! 그깟 구닥다리 같은 말로 날 꾀려 하지 마시오. 강해지려는 욕심이야말로 순수한 거요! 후후 후후!”
“아-! 정녕 탐욕에 먹혀버렸단 말인가!”
방각 선사가 크게 탄식하며 울부짖었다.
신비로운 불광으로 방연의 정기신을 비추었으나, 결국 그는 탁탑천왕이기를 택한 것이다.
“방연아. 대체 네 마음에 무엇을 심은 것이더냐…….”
“후후. 혼원기요. 세상은 승자의 것이라는 이치를 명확히 깨닫게 하는 무공이지. 보시오. 혼원기가 내 단전에 자리 잡아 삼십 년 적공(積功)을 먹고서, 금세 이리 강해졌소!”
후우웅-!
탁탑천왕의 전신에 흑암의 기류가 짙게 어리며, 공력이 한층 더 배가되었다.
“이게 바로 혼원반야신공(混元般若神功)이오. 크크크!”
탁탑천왕이 더욱 탁해진 내력을 줄기줄기 뽑아내어 봉에 실었다.
쐐애액-!
섬찟한 파공음이 귓전에 스며들었다. 파괴적인 공격이 모든 걸 부술 듯이 마구 짓쳐들었다.
“아니야! 그래선 안 된다! 방연아, 왜 네 스스로 잡아먹히려 하느냐! 어째서!”
퍼엉-!
방각 선사가 급히 두 손을 겹쳐 내밀었다. 손 전체에서 신비로운 금광이 번지며 커다랗게 변해가니, 탁탑천왕의 공격해오는 모든 방위가 가로막혔다.
이는 일만 가지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여래신장(如來神掌)의 절초였다.
그 광채가 봉으로 펼쳐진 기막을 뚫고 탁탑천왕의 전신을 후려쳤다.
하지만 흑암에 물든 탁탑천왕의 눈빛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더욱 기세를 올리며 반격할 뿐이었다.
콰콰콰쾅-!
방각 선사와 탁탑천왕 사이에서 격전의 굉음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깊은 불심에 기반한 여래신장으로 맹공을 막아내던 방각 선사의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생을 함께해온 대사형의 마음으로 사제 방연이 죄를 뉘우치고 스스로 성불하기를 바라나, 손을 맞부딪칠수록 요원해지는 까닭이었다.
‘아미타불! 이를 어쩐단 말인가. 아아……!’
한편, 청풍자 역시 상황이 마찬가지로 흐르고 있었다.
“먹음직스럽군.”
“청송아! 너 맞구나!”
“나는 일원진군(一元眞君)이거늘, 말코도사같은 네놈 따위가 함부로 입을 놀려?”
“청송아! 왜 그러느냐!”
청풍자의 눈이 몹시 떨렸다.
사제였던 청송자, 이제는 일원진군이 상상 이상의 공력으로 대등하게 맞서며 대꾸하자 쉬이 반박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후후! 인제 보니 네놈도 강호의 별 볼 일 없는 조무래기에 불과했군.”
“너, 너는 대체 어떻게…….”
“태극은 혼원에서 났으며, 혼원은 태극을 품는다. 태극은 음양의 몸(體)이 되고, 고요함(靜)이 극에 다다라 움직(動)이니, 이로써 천지의 심(心)을 본다. 그러니 천지의 심(心)이 태극혼원(太極混元)이다.”
“뭐, 뭐라고?”
“흥! 이리 말해줘봤자, 도량이 좁디좁은 네까짓 게 이해했을 리가 없지!”
일원진군이 태극혼원신공의 이치를 한 단락 읊어주자, 청풍자가 위압감을 느끼면서도 눈알을 굴렸다.
일원진군은 그런 청풍자의 모습이 꼴사나웠다. 역시 그는 변한 게 없었다.
“너와 나의 차이를 보여주마.”
일원진군이 두 손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내력을 힘껏 뽑아내더니, 청풍자에게 강맹한 일격을 내던졌다.
퍼어엉-!
***
숭산 아래, 등봉현 외곽에서 수많은 무인이 기세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중 일 천명이 소림의 제자였고, 오백여 명 가량은 정무맹 현청각과 급히 숭산으로 모여든협의 지사들이었다.
도합 일천오백이었다.
“각주님. 드러나 있는 천룡부의 군세만 삼천을 웃돕니다. 게다가 상당수의 기운이 사방에서 옥죄어오니, 은신하여 접근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상황이 심각하여 전황을 직접 살피고 온 무원주 이능운의 보고에 지휘부에 모여있던 이들이 침음을 삼켰다.
“사도련에서 발발한 천룡사문만 상대하기도 쉽지 않겠거늘, 그사이 적이 더 늘어난 모양이오.”
“공 각주님, 괜찮겠습니까?”
나한전주 방호 대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엊그제 하북과 산서로 향하던 천룡금문의 종적이 묘연해졌다는 전갈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들이 합류했을 거요.”
그때, 빙화곡주 벽소군이 이능운에게 물었다.
“무원주님, 혹시 거대한 창을 든 금면인도 있었습니까?”
“네, 선두에 그런 자가 있었습니다! 기선을 제압하려는 건지, 흉포한 기세를 마구 뿜어내고 있어 단연코 눈에 띄었습니다.”
“아! 그가 바로 금무신장이에요. 천룡금문의 문주인.”
“헛!”
좌중이 놀란 숨을 토해내며 만상각주 공야청에게로 눈을 돌렸다.
“천하대전을 직접 겪으신 동도들께선 저들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생각하오. 본 각주가 듣기로 천룡부주 황금존자는 감히 경지를 가늠키 어려운 존재이나, 그 부하들은 여기저기서 거둬들인 이들에 지나지 않소. 천룡사문과 천룡마문이 그러하오. 그러니 적의 주력은 천룡금문이라 보면 될 거요. 천룡사문은 사도련의 일부이고, 천룡마문은 천마교의 잔당에 불과하오.”
“공 각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사도련과 천마교의 잔당이라 생각하고 나니 싸움에 임하기가 한결 편하겠습니다.”
산서 장천문의 문주 서궁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때 하남의 이름난 고수, 생사판관필(生死判官筆) 염관웅이 중요한 점을 짚었다.
“하지만 혈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무작정 적을 상대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천하대전에서 본 금무신장의 무위는 심히 놀라웠는데, 우리 중에 누가 그를 상대하실는지요?”
“금무신장은 제가 맡겠어요. 천하대전에 들르셨다면, 저도 보셨겠죠?”
“벽 곡주께서 직접 나서주신단 말씀이십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염관웅이 고개를 끄덕이자, 공야청이 좌중을 둘러보며 당부했다.
“이제 우리는 난적에 맞서기 위해 출진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협객께서 의기를 보태주시니 천도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괴악한 술수와 하늘을 어지럽히는 무공으로 천하를 일통하려 나타난 천룡부에 맞서서 우리 모두 뜨거운 마음으로 하늘의 도를 행합시다!”
“알겠소이다!”
좌중에서 큰 호응이 일어나는 중에 비단옷의 무인, 대별상단의 소주 담상이 물어왔다.
“그런데 정검신협께서는 어디에 계신 겁니까? 이곳에 계시다 들었는데, 그 존안을 뵐 수가 없습니다.”
“정검신협께서는 방각 선사, 청풍 진인과 함께 황금존자를 맞으러 올라가셨습니다. 그가 들리려는 곳이 저 위에 있습니다.”
“아!”
좌중이 공야청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 숭산의 한 산봉우리 위를 쳐다보았다.
심상치 않은 흑암의 기운이 산봉우리 위에서 휘돌고 있었다.
콰콰콰쾅-!
섬찟한 뇌성과 함께 검붉은 벽력이 내리쳤다.
“무시무시하구려.”
“천하대전에서 본 것보다 더 요동치는 듯합니다.”
그 광경을 보던 공야청이 곧 눈에서 정광을 뿜으며 좌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본 각주는 그래서 여기 모여주신 협의지사께 정말로 고마울 따름이오.”
한편.
등봉현으로 접어드는 마차 안에서 창문 밖으로 숭산 위를 바라보는 청색장포의 금면인이 있었다.
“존자께서 당도하셨군.”
황금존자는 큰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중요한 건 자신의 몫이었다.
“만학수사라…….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었지.”
그가 몇 차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돌연 품에서 금적(金笛)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귀로 들리지 않는 초음(超音)의 진언을 외우니, 금적이 오색찬란한 빛깔을 머금다가 금면에 뚫린 두 눈 속으로 빨려들었다.
“천룡출해(天龍出海)의 괘로군. 피를 보기 좋은 날이겠구나.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