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혼돈의 선봉장 (1)
“아미타불!”
방각 선사의 입에서 애끓는 듯한 불호만이 반복하여 흘러나왔다. 비통한 심경이 여실히 느껴질 정 도였다.
잠시간 경악하여 말도 채 잇지 못하던 청풍자가 숨을 토해냈다.
“허! 방연 대사가 어찌! 어찌……!”
“진인께선 그분과 가까우셨군요.”
“그렇소. 나이가 같고 성정 또한 비슷하여, 우리는 강호에서 만나자마자 금세 의기투합했다오. 각자 추구하는 도는 다르나 천하에 높은 뜻을 전하는 삶도 비슷했고 말이오.”
진우선이 청풍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의 격렬한 감정을 받아 주었다.
그러는 사이 방장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방각 선사가 차분한 기색의 진우선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인도 나처럼 어렴풋이 느낀 모양이구려. 사실 방연 사제는 어릴 적부터 체구가 크고 호전적인 데다가 똑똑하기까지 했다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비우지 않고 늘 채우기만 했지. 아마도 그게 화근이 됐을 거라네. 안타깝게도.”
“방장께선 이미 결심하신 모양입니다.”
“맞네. 불도로 그 마음을 다스린 게 아니라 역으로 다스려졌으니, 어찌 거두지 않을 수 있겠나. 혼돈에 몸을 담아 제 빛을 잃어버리고 흑암을 뒤집어썼으니, 이제 나락에 떨어질 일만 남은 것을.”
불도에 들었으나 심마에 잠식된 방연은 이제 열반에 드는 일이 요원했다. 어릴 때부터 수십 년간 동고동락하며 그를 아꼈던 방각 선사는 어떻게든 사제의 번뇌를 끊어 업을 되돌리고 싶었다.
진우선이 방각 선사의 두 눈을 차분히 직시했다. 그리고 입을 열려는 찰나.
“아! 그렇다면!”
공야청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청풍진인!”
“공 각주, 무슨 일이시오? 천천히 말씀하시오.”
“청송진인을 기억하십니까? 이삼 년 전, 본 맹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오시다가 천마교에 참변을 당하셨던…….”
“당연히 기억하고 있소. 근데 갑자기 청송이 왜?”
공야청을 진정시키려던 청풍자가 오히려 그의 말을 끊고 급히 되물었다.
“본 맹이 그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지난 몇 년 사이 정사마를 막론한 강호의 고수들이 의문스럽게 실종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방연 대사였고, 청송 진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게 사실이오? 천마교에게 목숨을 잃고서 한 줌 혈수로 녹아내린 게 아니었단 말이오?”
“천자산에서 벌어진 혈사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가 본 맹의 이 무원주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청송 진인의 시신만은 찾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혈전을 치르셨다 여겼으나, 재차 살펴보니 의문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말이 안 되지 않소? 설마 제자들이 죽어갈 때 청송만 그곳에서 내뺐단 말이오? 청송 사제는 절대로 그럴 리 없소!”
“물론 그 혈사는 천마교의 짓이 맞습니다. 하지만 황금존자는 천마교에서 마영으로 존재했고, 그간 어떤 수작을 부려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방연 대사가 천룡부에 속했다면…….”
공야청이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그간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방연 대사의 소재가 드러나면서, 뜻밖에도 정사마 강호명숙의 실종 사건이 새롭게 해석되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알아채지 못할 사람이 없었다.
“말도 안 돼! 청송이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강하게 부정하는 청풍자의 목소리가 급격히 작아졌다. 숨소리마저 확연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설마…… 설마…….”
“진인께서 쉬이 못 받아들이시는 것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저만이 아니라 신기수사도 같은 생각이란 걸 유념해주십시오.”
공야청의 목소리에 짙은 확신이 배어 있었다. 두 눈에서는 강렬한 빛이 뿜어졌다.
이에 청풍자가 뒷목을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기맥마저 마구 날뛰니 졸도할 지경이었다.
그때, 진우선이 청풍자의 손목을 붙잡고 청아한 기운을 흘려 넣었다. 청풍자의 들끓던 기운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청풍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탄식을 흘렸다.
“허-! 천하를 밝히는 정무맹의 두 지자(智者)가 이견이 없었다면, 이는 사실이란 말이나 다름없거늘…….”
아무리 납득할 수 없는 말이라 해도, 만학수사 공야청과 신기수사 냉군상이 이름을 걸 정도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물론 진실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어떤 목적이었는지도 밝혀내기 어렵지요. 하지만 만약 청송 진인이 살아 있다면, 십중팔구로 방연 대사와 같은 신분일 겁니다.”
방장실의 공기가 불편할 정도로 무거워졌다. 네 사람 중 두 사람이 침음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진우선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방각 선사가 물었다.
“신인께선 또 짐작되는 게 있나 보구려. 말씀을 부탁드리오.”
“이 이야기들이 다 맞는 듯합니다.”
“아-! 그럼 이 모든 게 정말 사실이란 말입니까?”
청송자가 좌절에 물든 얼굴로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설명을 갈구하는 눈빛이었다.
“그들의 공세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네! 본산에 오르는 이가 아무도 없을 것이거늘…… 설마?”
방각 선사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추측되는 바가 있는 까닭이었다.
“종전부터 산중에서 피어나는 기운이 변질되었습니다. 지극한 영기를 혼돈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산중에? 혹시 어디인지도 아시는가?”
“동쪽으로 이삼십 리 부근입니다.”
“이럴 수가! 방연 이놈이 제 마지막 근간인 반야(般若)마저 저버릴 심산이구나! 감히 보제암(菩提庵)이라니!”
여태껏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방각 선사가 기겁하여 소리쳤다. 오랜 수도로 마음을 비워갔음에도 격노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공야청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외쳤다.
“보제암이라면 공오 대선사께서 대열반에 드신 곳이지 않습니까?”
“맞네. 조사께서 무여열반(無餘涅樂)에 드시며, 아미타불의 덕을 남기고 가신 곳일세. 그때 남기신 광명의 빛이 소림을 두루 비춘다네.”
공오 대선사는 묘각의 깨달음을 얻어 탈경에 오른 이백여 년 전 성승이었다. 그가 생전에 머물다 입적에 든 보제암은 소림의 성지나 다름없었다.
“그럼 황금존자가 그 빛을 품는다면…….”
공야청이 말을 하다 말았다. 동공이 마구 요동치고 얼굴에 사색이 가득했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좌중에 서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
진우선만이 담담히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방각 선사가 그 모습에 경탄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신인께서 아까 무언가 말하려 했던 게 혹시…….”
“네, 그분이 느껴진다는 거였습니다.”
그러자 청풍자도 급히 물어왔다.
“그렇다면 청송 사제의 기운도 느끼셨다는 말씀이시오?”
“현재 산중에 두 사람이 와 있는데, 그분이지 싶습니다.”
“헛!”
청풍자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머뭇거릴 틈이 없구려. 얼른 가야겠소.”
“한데 그냥 출발해선 안 됩니다. 산 아래로도 무수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진 무사. 그 말은 천룡부의 군세란 뜻인가?”
“그렇습니다. 대략 이삼천 가량 될 겁니다.”
“허어-! 숫자도 압도적으로 많군. 아무래도 우리가 이곳에 도착할 때를 노린 모양일세. 시간이 갈 수록 전력을 수습하며 전세를 가다듬을 테니 말이야.”
천룡부에도 군략을 두루 살피는 이가 있다면, 소림사에 당도하여 잠시 긴장의 끈이 풀리는 이때를 결코 놓칠 리 없었다. 수적 우위에다가 싸우는 때마저 유리하게 가져가는 것이니까.
공야청이 곧장 판단을 내렸다.
“방장, 저는 산 아래로 내려가 그들과 맞서겠습니다. 강호의 협의지사들이 숭산으로 다가오고 있을 테니, 그곳이 응당 제가 임할 자리일 겁니다.”
“그럼 염치없음에도 불구하고, 천룡부의 군세를 공 각주께 부탁드리겠소. 마침 나한전주가 산 아래에서 천불전 제자 오백과 대기하고 있으니 그대가 함께 이끌어 주시오! 다른 나한들과 제자들도 곧 내려보내리다.”
“알겠습니다.”
그때, 진우선이 묵직한 한마디를 보탰다.
“각주님, 벽 곡주와 함께 가십시오.”
“천룡부에서도 극경의 무인이 나섰다는 말이군. 알겠네.”
공야청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서려다 말고 진우선에게 인사를 건넸다.
“진 무사, 살아서 만나세.”
“각주님, 산 아래를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떠날 채비를 마친 세 사람이 방장실을 나섰다.
청풍자가 하늘을 보더니, 구역질 하듯이 숨을 토해냈다.
“컥! 혼돈의 기운이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어오고 있었구나! 저리도 끔찍할 줄이야!”
소름 끼칠 정도로 검붉은 구름이 한없이 펼쳐져 해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시산혈해를 뚫고 돌격하는 지옥의 군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미타불!”
“속이 다 울렁거릴 정도구려. 저게 정말로 황금존자의 기운이란 말이오? 신인은 대체 저런 자를 어떻게 상대했던 거요?”
숭산을 덮쳐오는 혼돈의 기세가 가히 심상치 않았다.
그에 진우선도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종전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칠주야동안 신광이 흑암을 갈랐다고 들었는데, 오히려 강해졌단 말인가?”
“황금존자의 도는 채움의 도입니다. 그리고 삼문협에서 저 속에 너무나 많은 것을 채웠습니다. 그러니 패퇴한 것처럼 보여도 패한 게 아니었을 겁니다.”
“허어-!”
청풍자가 땅거죽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탄식만 하다 보니 하루 사이에 몇 년을 늙은 것처럼 보였다.
“채움, 채움이라……. 천하에 그런 길도 있다니.”
방각 선사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세를 바라보던 진우선이 얼른 말했다.
“일단 황금존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얼른 가면 선객을 먼저 만날 수 있겠습니다.”
“알겠소. 신인께서 앞장서 주시면 바로 뒤따르리다.”
***
보제암에 올라서니, 숭산의 장엄한 산세가 내려다보였다. 끝을 모를 정도로 한없이 펼쳐져 있어 한 눈에 담을 수 없고, 자세히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 멀리 소림사의 경내는 훤히 보였다. 사방에 산줄기와 봉우리가 겹겹이 펼쳐져 있으나, 그곳만큼은 손바닥 손금 보듯이 알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전각 하나하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낡아 있군.”
메마른 음성이 사방에 앉아있던 정적을 깨트렸다. 회색장포를 걸친 거구의 금면인이었다.
옆에 나란히 선 회색장포의 마른 금면인이 대화를 받았다.
“네 말대로군. 방장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어.”
“당연한 일이다. 이곳은 소림의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와 내가 반야의 법을 발견한 곳이기도 하니까.”
반야의 법,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은 불법의 깊은 이치를 일깨우며 측량할 수 없는 공능으로 소림의 신묘한 무공들을 터득하게 만드는 신공의 하나였다.
“너야말로 의도치 않게 사형제를 만나겠군.”
“나는 상관없다. 그는 네 대사형만큼 자비롭지 않았으니까. 너처럼 별 애틋한 일도 없었어.”
“그랬군.”
“내게는 존자만이 존경받아 마땅하시다. 존자께선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주신 것만이 아니라, 반짝이는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셨지. 그래서 나는 지금이 좋아. 능력이 되는 만큼 강해지고 가질 수 있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치냐!”
“맞아. 아름답다. 능력이 있다면 계속 쌓고 쌓아서 위로 올라갈 수 있으니까. 만물에 적용되는 유일한 법칙이지.”
거구의 금면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마른 금면인이 핀잔을 주었다.
“그런데 뭘 망설이고 있는 거지? 태극혼원의 기운이 깃들어 암자의 광력(光力)이 다 거두어졌는데. 설마 후회해? 탁탑천왕이 된 것을?”
“아니.”
거구의 금면인, 탁탑천왕이 단호히 대답했다.
그러더니 우락부락한 팔뚝을 들어 올렸다. 그의 두 팔에 괴력이 깃들었다.
푸스슥-!
움켜쥔 두 기둥에서부터 거력이 퍼져나가더니, 암자가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쿵-!
여덟 기둥이 무너지고, 보제암의 지붕마저 쏟아져 내렸다.
이제 폐허뿐인 보제암의 터 속에서 탁탑천왕이 잔해를 뒤졌다.
그러더니 곧 영롱한 구슬 하나를 찾아냈다.
“그거였군.”
끄덕.
진주알처럼 생긴 이 구슬은 공오 대선사의 불사리(佛舍利)로서 신골(身骨)이자 영주(靈珠)였다.
“그 정도면, 존자께 충분한 재물이 되겠군.”
“그렇군.”
그때, 저 멀리서 애끓는 음성 하나가 들려왔다.
“방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