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욕망과 숙명 (1)
십층 전각의 맨 위층에서 장원을 내려다보며 대화를 나누는 두 인영이 있었다.
“탁탑천왕. 너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느냐?”
“존자시여. 소생은 천룡부의 일통강호만을 생각하며 전심전력하고 있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지. 네 개인적으로는 어떤가?”
“부단히 수련하여 무학의 이치를 깨닫고 싶습니다.”
황금존자 주문강이 시선을 계속 창밖으로 둔 채 물었다.
“깨달으면?”
“그 후에는 천지간의 이치를 깨우치고, 거기서 벗어나는 탈경에까지 오르는 게 목표입니다.”
“탈경인가? 이제 해탈이라고 말하지는 않는군. 어쨌거나 너는 참 일관적이야.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서 보기 좋군.”
“황송하옵니다.”
“그런데 저들은 왜 이리 다를까?”
“저마다 다른 궁리를 하고 있어서 그런 듯합니다. 사도련주의 귀환을 기다리자는 자들과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니 떠나겠다고 외치는 자들로 나뉘었습니다.”
“사도의 종자들이 이해타산을 심히 따지고 표리부동한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사도련의 본원에서도 이러고 있으니 정말 오합지졸이 따로 없구나. 쯧쯧!”
주문강이 사도련의 여러 무리를 보며 혀끝을 찼다.
이곳 개봉 사도련의 넓디넓은 장원에는 얼핏 헤아려도 일이천이 넘는 무인들이 있지만, 소속별로 나뉘어 제 주장만 내세우니 참으로 변변찮게 보였다.
“사도련은 확실히 천마교보다 기강이 약하군. 하긴, 사도련주부터가 교활한데 어쩌겠어.”
바로 그때였다.
“흡!”
주문강이 갑자기 호흡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온몸에서 암흑신령 광류의 섬뜩한 광채가 소용돌이치며 피어올랐다.
퍼엉-!
와류의 중심부에서 핏빛 구체 모양의 혈옥이 터져 나왔다.
그에 실린 사기는 옅으나 미세하게 넘실거리고 있으니, 이는 분명 여의혈옥이었다.
쿠앙-!
투투투툭-!
암흑신령광류에서 튀어나온 여의혈옥이 한쪽 벽면을 단박에 허물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주문강이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크윽……!”
“존자시여!”
걱정스러운 기색의 탁탑천왕이 주문강에게 즉시 다가갔다.
“걱정하지 마라.”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래. 또 발작이 온 것뿐이다.”
주문강이 손을 내뻗어 탁탑천왕이 다가오는 걸 막았다.
“후우-!”
깊은 호흡을 몇 차례 하자, 황금색 가면 밖으로까지 심히 요동치던 핏빛 안광이 멎어 들었다.
‘그래, 더 발버둥 쳐 보아라. 명부의 영기가 느슨해질수록 사령신군 네놈의 혼령마저 내게 완전히 흡수될 테니까!’
주문강이 아직 소화해내지 못한 사령신군의 영체에 일갈했다.
그는 일전에 흑혈로써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을 잡아먹었는데, 여태껏 완벽히 흡수하지는 못했다.
둘의 혼령을 붙는 명부 영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령신군이 사령체에 남아 있던 힘을 계속 뽑아내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사용한 힘을 채울 방법이 없으니 영체가 작아지게 되고, 이로 인해 명부 영기가 느슨해지며 제약이 약해지는 까닭이었다.
‘후후후!’
사령신군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주문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장원의 사람들이 뻥 뚫린 전각 상층부를 올려다보며 크게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 천사각(天邪閣)이 갑자기 왜?”
“총군사님의 집무실인데!”
“총군사님, 어디 계십니까?”
그러는 사이 전각 십층의 문이 열리며 한 무리가 뛰어들었다.
“웬 놈들이냐?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헉!”
“커컥!”
“끄윽!”
무인들이 저마다 목과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들의 심혼에 암흑신령광류의 칠흑빛 불꽃이 파고든 까닭이었다.
뒤이어 뛰어 들어온 중년인, 사도련의 총군사 모천기 역시 심혼을 짓누르는 거력과 맞닥뜨렸다. 그의 두 눈과 얼굴에 핏줄이 마구 솟아올랐다.
“천, 천룡부가…… 크헉!”
모천기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지며 선혈을 토해냈다.
“반갑군, 총군사.”
“황금존자요?”
퍼억-!
오색의 띠가 엉킨 거무튀튀한 와류가 모천기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쿠헉-!”
뿜어진 울혈 속에서 내장의 살점마저 보였다.
모천기는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데 내상은 외상보다 심했다. 단박에 공력이 흩어지고 정심이 깨져, 살아있는 것조차 용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화, 황금존자이십니까?”
“네 대답 여하에 따라 백성들의 운명이 결정될 거다.”
“알겠습니다.”
모천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총군사. 천룡사문의 문도를 지금 바로 모아라. 얼마나 가능하지?”
“화, 환사문과 파천문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모천기는 이미 천룡금문과 천룡마문의 소식을 들은 상태라, 천룡사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사사천과 오독교는?”
“그들은 련주님을 찾으러 나간지라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사도련주는 죽었다.”
“……네.”
모천기의 동공이 잠시 떨렸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황금존자는 반사령에 올랐던 사도련주보다도 위압적인 존재였다. 그가 이리 말하는 걸 보니, 사도련주의 마지막 상황에 직접 관여한 게 틀림없으리라.
“흑요궁은 얼마나 있지?”
“흑요궁은 전체의 절반 정도인 하오문도와 녹림도만 이곳에 있습니다. 흑요궁주가 무공을 잃어 봉문한 까닭에 나머지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들도 부르도록.”
“알겠습니다.”
혼절 직전의 모천기는 이미 거역할 마음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간신히 정신을 붙잡은 채 물었다.
“하온데 천룡사문은 어느 분이 이끄시는지요?”
“무중신유.”
“무, 무중신유군요! 알겠습니다.”
모천기는 오랜만에 들은 그 이름에서 반가움과 놀람을 동시에 느꼈다. 예전에 몇 번 만나 사도의 무학과 술법에 대해 깊이 토론하며 관계를 쌓았던 까닭이었다.
옛 기억의 편린들이 떠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총군사. 고개를 들어라.”
모천기가 고개를 들었다.
금면을 벗은 황금존자의 얼굴이 조금씩 변화하더니, 익숙한 이목구비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나다!”
“……헛!”
모천기가 넋을 잃을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라는 찰나.
퍼엉-!
암흑신령광류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여의혈옥이 터져 나오더니, 전각 지붕을 산산이 조각내며 날려버렸다.
“크흐!”
“호, 홍문강이 아니……!”
하지만 황금존자이자 무중신유인 주문강은 이에 반박할 새가 없었다.
뇌리를 번쩍인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주문강이 찰나간에 용사팔형의 내공심법을 운용하며, 용사건곤패를 꺼내 들었다.
용사건곤패에서 핏빛의 사이한 광채가 뿜어지더니 여의혈옥을 감쌌다.
우우웅-!
그러자 혈광과 여의혈옥이 함께 공명했다.
그리고.
화아악-!
암흑신령광류가 여의혈옥을 뒤덮어 삼켜버렸다.
“후후후! 여의혈옥인가?”
주문강이 포만감을 느끼며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모천기는 그 모습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괴물이구나!’
***
“……!”
진우선은 길을 가던 중에 느닷없이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근방에 적이 나타난 것도 아니요, 누가 적의를 보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한데 하늘을 보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문강!’
혼돈의 기운이 점점 세를 넓히고 있었다.
위력 또한 강해졌는지 그 어두운 빛이 더욱더 짙어져 있었다.
[우선아. 꽤 걱정되는 모양이구나.]
검노야의 광체가 진우선의 머리 위에서 은은히 빛을 발했다. 영체가 있을 때처럼 인자하고 따스한 느낌이었다.
‘혼돈기가 파죽지세입니다. 스승님께서 온 힘을 다해 없애버리셨는데도 거침이 없습니다.’
[그가 익힌 혼원기는 천공의 혼돈기와 결속하여 천지간을 아우르더구나. 그건 둘이지만 궤가 같아 하나이기도 해서, 배로 늘어나고 배로 강해졌다. 극사에 극마가 더해져 반선경의 도를 넘으면서 그게 가능해진 모양이더구나.]
검노야는 주문강과 격돌한 순간, 그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공을 겪었다.
아무리 일시적이라도 극경을 훌쩍 넘어선 공력이 곱절 이상의 힘을 뿜어낼 수 있다니.
결국, 검노야는 그를 상대해내기 위해 탈경의 선기만이 아니라 영체를 유지하던 영기마저 쏟아내야만 했다.
‘그건 다시 들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어디까지 먹어 치울 수 있는 걸까요? 대체 얼마나 먹어야만 만족을 할까요?’
[태생이 그러한 것 같구나. 황실에서 나고 자라 천하에 우뚝 서 있음에도 이리 탐욕적인 걸 보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도는 채움의 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욕망의 항아리가 너무나 크고 넓어서 채우고 또 채워도 끝이 없는 모양이니까요.’
[허어-! 네 말이 지극히 타당하구나.]
주문강의 길, 채움의 도.
검노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과 진우선의 대척점이 주문강이라는 걸 깨달았다.
두 사제가 추구해온 방향이 비움의 도였으니까.
[허허!]
검노야가 웃음을 흘렸다.
그가 비록 선기와 영체를 모두 소진했다고는 하나, 존재의 깨달음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신선경에 오른 지극한 시선과 사고 속에서 숙명적 이치가 명확히 보였다.
[우선아. 그는 나와, 또 너와 정반대의 존재였구나.]
‘역시 그렇군요. 저도 스승님과 대화를 하면서 은연중에 그럴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네 경지가 깊어졌구나.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으나, 그간의 경험과 깨달음이 너를 한층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모양이다.]
검노야는 이미 스스로 깨우쳐 알아가는 진우선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네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 가족을 잃고 빈곤한 처지에서 자란 진우선.
어렸을 적부터 모든 걸 가졌으며, 더 가지기를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주문강.
하늘이 그려냈을 이 그림을 말해 주지 않아도 진우선은 이미 본능적으로 알아챘을지 몰랐다.
어쩌면 하늘이 몹시 야속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한쪽에게는 계속 빼앗았고, 한쪽에는 계속 부어 주었으니.
하지만 진우선에게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게 있었다.
바로 검노야 자신과의 인연이었다.
‘스승님. 그렇다면 저는 금선무를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할까요? 그의 힘은 파천마신과는 또 다를 거로 여겨지는데, 지금으로선 이길 방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허허.]
검노야가 헛웃음만 흘렸다.
탈경의 깨달음을 어찌 말로 전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도를 도라 말하는 순간, 그것이 도가 아니게 되듯이(道可道 非常道).
그렇기에 검노야는 자신의 과정을 전할 뿐이었다.
[우선아. 내가 너에게 선무를 전하며, 숙원을 전할 걸 기억하느냐? 나는 그제야 후련한 마음이 들더구나. 한데 그뿐만이 아니었어. 백 년을 건너뛰고서까지 이어진 업보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종국에는 신선경에 들고 싶었던 나 자신마저 내려놓으니, 그제야 비움을 알겠더구나.]
진우선은 검노야의 말을 머리로 이해했으나,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지려 하면 가질 수 없고, 오르려 하면 오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깨달으려 하면 깨달을 수 없는데, 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진우선에게 검노야의 말이 이어졌다.
[우선아, 너는 금선무를 익혔다. 너와 나는 선무에서 시작했으나, 도중에 갈라졌지. 이제 남은 건 네 길을 가는 것이다. 여태껏 정말로 잘해왔으며, 나는 지금의 우선이 네가 너무나 대견하구나.]
‘감사합니다, 스승님!’
진우선은 검노야의 말에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구쳤다.
그때,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가던 공야청이 말을 걸었다.
“진 무사,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는가? 걱정이 많아 보이는데.”
“아! 잠시 무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허허! 그 경지에 오르고도 쉼없이 궁구하고 있다니, 정말로 대단하군.”
공야청이 탄성을 흘리더니, 말을 이었다.
“진 무사, 그래도 잠시만 멈춰주게나. 등봉현에 다 왔다네. 저기 소림사 제자들이 우리를 마중 나왔으니 말일세.”
공야청의 말대로 전방에 소림사 제자들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