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218화 (218/225)

218.

#공야청의 결단

이튿날.

공야청이 현청각주 여문각, 남양지부장 곽완과 함께 진우선의 방에 새벽같이 찾아왔다.

떠날 채비를 갖춘 진우선이 그들을 맞았다.

“진 무사. 긴히 전해줄 정보가 있네. 간밤에 전서들을 취합하던 중, 흑요궁의 신물인 용사건곤패가 천룡부로 전해진 정황을 포착했어.”

“그럼 사도련의 흑요궁이 천룡부로 전향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상황이 묘한데, 일단 그건 아닌 거 같더군.”

공야청이 함께 온 곽완에게로 대화를 넘겼다.

“흑요궁이 운영하던 도박장과 정보상인 하오문이 이곳 남양에 있었던 건, 일전에 다녀가신 진 대협께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한데 얼마 전에 그들이 모두 철수했습니다.”

“흑요궁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요.”

“궁주 막검해가 금지옥엽을 잃은 후 실의에 빠져 심마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장로 무중신유(霧中神儒)에게 신물인 용사건곤패를 보내며 궁의 대소사를 맡겼다는데, 그 수행인이 천룡상단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천룡상단이었습니까?”

“네,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표행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천룡상단은 지난달에 표행을 나선 적 자체가 없으며, 또한 용사건곤패 같은 귀물의 표행이라면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습니다.”

황하강이 관통하고 평야가 드넓은 하남성에는 강호의 거대 집단이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게 개봉의 사도련과 숭산의 소림사였으며, 인근으로 확장하면 화북지방을 아우르는 천룡상단도 있었다.

정무맹 남양지부는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소식을 취합하는 요충지였고, 오랫동안 책무를 잘 수행한 지부장이 바로 곽완이었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저들의 손에 들어가 있겠군요. 한데 무중신유는 누구입니까?”

“그는 대략 십여 년 전부터 흑요궁의 현안들을 해결해온 은자라네. 명망이 계속 높아져 가는데도 세상사에 초탈하여 나서지 않으니, 흑요궁을 넘어 사도련에서 각광을 받았지. 이름조차 알리지 않아 다들 홍 장로라고만 불렀다 들었네.”

만학수사 공야청이 요점을 간략히 전했다.

“사파의 무인들은 누구보다 사리사욕을 우선시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참 희한하군요.”

“일설에 따르면 홍 장로에게서 귀태가 났다더군. 지금 생각해보면 천룡상단의 숨겨진 인물이 아닐까 싶다네.”

“그리 말씀하시는 건…… 혹시 주문강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까?”

“아무래도 그리 여겨지는군. 적문강이 되어 정무맹에 침입했고, 마영의 신분으로 천마교에 존재했으니, 사도련에서도 한 역할을 하지 않았겠는가? 은자로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도 뒤집어 보면, 천하를 종횡무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실이지.”

진우선의 안색이 급히 어두워졌다.

“어쩌면 각주님께서 언급하셨던 천룡사문이 진짜로 나타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극사경과 극마경에 오른 황금존자이니, 예하에 천룡사문과 천룡마문을 두려는 욕심도 분명 냈을 걸세. 그의 행보를 보면 탐욕 그 자체이니 말이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기필코 황금존자를 막아내야겠습니다.”

진우선의 두 눈에서 정광이 쏟아졌다.

아직 기운은 다 회복하지 못했으나, 마음에 품은 뜻만큼은 하늘에 닿고도 남았다.

“알겠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는가?”

“말씀하십시오.”

“진 무사, 자네는 어떻게 황금존자를 상대할 생각인가? 설마 혼자 천룡부로 쳐들어가서 적들을 상대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미 거기 모인 무인의 수가 너무 많은데.”

“아직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어서요.”

“허어-! 진 무사, 그러면 안 되네. 천하의 안위와 직결된 일이라 제 한 몸 아낄 수 없다 해놓고서,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닌데 어찌 그런 무모한 생각을 한단 말인가!”

공야청이 진우선에게 진심 어린 눈빛을 보내더니, 곧장 여문탁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여 각주. 진 무사의 말을 어찌 들었는가? 나는 아무래도 방향을 돌리는 게 좋을 것 같구려. 우리가 진 무사를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나?”

“하아-! 어렵군요. 너무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여문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심이 깊은 눈으로 공야청과 진우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맹의 전력이 쪼개진 상황에서 우리가 맹주님께 달려가 힘을 보태는 건 정무맹도로서 당연한 도리이네만, 결과적으로는 승리해도 작금의 상황을 유지하게 될 뿐이네. 하지만 황금존자와 천룡부를 막아내는 건 정도의 기치만이 아니라 강호의 평안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며, 결코 이 시기를 놓쳐선 안 될 일이지.”

“백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맹도로서 맹의 안위, 맹의 원칙 역시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숙고해주게. 탁 선배께서 도와주기로 하셨으니 시일이 흐르면 왕 노사를 제압할 수 있을 걸세. 우리가 그동안 천룡부와 맞선다면 진 무사를 돕는 것뿐만이 아니라, 저들의 남하도 견제하는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네.”

여문탁은 성품이 강직하여 맹을 수호하고 법을 지키는 데 능했다.

하지만 유연하지 못하니 공야청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결정을 쉬이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청각의 맹도들이 이백뿐이라 수가 너무 적습니다. 천룡부의 수가 이미 천오백을 헤아리고 있으며 더 늘어날지도 모르는데,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전서를 띄울 참이네. 소림과 무당을 비롯해 하남 근방의 강호동도들에게 말일세. 이번 천하대전에서 진 무사가 보여준 활약상을 들은 협의지사들이라면 발 벗고 힘을 모아줄 걸세.”

그에 여문탁이 공야청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 각주님은 확실히 냉 당주와 다르시군요.”

“사람이 다르니 뜻도 다르겠지. 한데 뭐가 그리 다른가?”

“공 각주님께 의협심을 느꼈습니다. 맹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람을 아낄 줄 알고 뜻을 살피시는 모습에 감탄했습니다. 냉 당주에 비해 이상적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군. 그게 내 모습이겠지.”

공야청이 고개를 끄덕였고, 여문탁은 잠시 숙고에 잠겼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부럽습니다.”

“별말을 다 하는군. 그래서 결론은 내렸는가?”

“저로선 이리 결정해 본 적이 없어 사뭇 두렵기도 하지만, 공 각주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아! 고맙네!”

공야청과 여문탁이 서로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잠시 후, 진우선이 입을 열었다.

“두 분의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진 무사 자네의 말 덕분에 우리가 생각을 바꾸게 되었네. 오히려 우리가 고마울 따름이지. 그간 위기에 급급해 천하를 보지 못했어.”

말을 한 공야청만이 아니라 여문탁도 그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아무래도 지난밤에 생각이 많았던 것이리라.

“진 무사. 출발을 하루만 늦춰주게. 맹을 도우러 갈 인원을 추려야 한다네. 현청각은 내일 천룡부로 나아갈 걸세.”

“알겠습니다.”

***

“나한전주(羅漢殿主) 방호가 부름을 받고 방장을 뵙습니다.”

십팔나한의 첫째인 대나한 방호 대사가 방장실에 들어섰다.

“방호야. 몸은 좀 추슬렀느냐?”

“불법이 깊지 않아 내상을 다 다스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돌아왔을 때보다는 훨씬 낫구나. 공력의 수발이 어렵지 않아 보이니.”

“아미타불. 천존의 보살핌이 있으신 덕분입니다.”

방호 대사의 말에 방장실에 앉아 있던 백염의 노도사 방각 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선이는 어떻더냐? 그리고 제자들은?”

방선은 십팔나한의 넷째로 삼문협에 함께 다녀온 사제였다. 제자 이백 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선이는 저보다 먼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그에 반해 제자들은 삼분의 일 가량이 아직 거동이 어렵습니다. 송구합니다.”

“네가 송구할 게 뭐가 있느냐? 다 천존의 뜻이시거늘.”

방각 선사의 말에 방호 대사의 마음이 편해졌다.

둘의 나이 차이는 다섯에 불과하나, 대사형 방각은 어렸을 때부터 깊은 불법의 향기를 흘리며 자비를 전하는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곧 방각 선사가 서찰 하나를 펼쳐 보였다.

“정무맹에서 서찰이 왔다. 너도 한 번 보거라.”

그에 방호 대사가 재빨리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천룡부는 천하대전을 일으켜 천하의 의기를 꺾고 수많은 강호인을 산하 고혼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모자라 일통강호 하여 군림할 것을 꾀하고 있으니……

……온 힘을 바쳐 강호를 지켜낸 정검신협이 혼백이 바스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분연히 일어서서 다시 한 번 천룡부에 맞서려 하니, 뜻이 있는 강호동도는 모두 힘을 모아주시기를 바라오.

“그는 어떤 사람이더냐?”

“먼발치에서밖에 보지 못했습니다만, 정검신협의 신위는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혈운이 소용돌이치고 불가항력적인 천번지복의 진세가 산천을 뒤덮었을 때, 그 홀로 칠주야 동안 신광을 뿌리며 맞섰습니다.”

“그랬구나.”

방각 선사가 열린 문밖으로 눈 덮인 숭산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당파의 도우들은 아직 지객당에 머물고 계시더냐?”

“그렇습니다.”

“세 진인은 어떠시더냐?”

“정양에 집중하고 있어 따로 묻진 않았으나, 빠르게 도력을 회복하는 듯했습니다.”

“그렇구나.”

방각 선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다시 멍하니 문밖의 산세를 바라보았다.

그에 방호 대사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방장께선 혹시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근심이라…….”

방각 선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호 대사를 이끌고 방장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호야. 천기가 너무나 요동치는구나.”

“천기 말입니까?”

방호 대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하늘은 잔잔하고 맑기만 했다.

“방호 네가 분명 삼문협에서 혈운이 휘몰아치며 소용돌이의 한복판으로 영겁의 힘이 빨려들었다고 하지 않았더냐?”

“맞습니다.”

“혈운을 머금은 귀역무간진은 극히 요사하고 극도의 마귀지옥 같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게 저 혼돈기인 모양인데, 소용돌이가 멈추질 않는구나.”

“그럼 정검신협도 천기를 본 것이겠군요!”

“당연하지. 그는 나보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천기를 읽었을 것이야.”

방호 대사는 천기를 헤아리지 못했으나 방각 선사의 뜻은 능히 헤아리고 있었다.

“그럼 정검신협에게 제자들을 보내시렵니까?”

“그러자꾸나. 천룡부에 크게 당했음에도 빛을 잃지 않고 일어선 정검신협과 현청각을 돕는 게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천불전의 제자 오백을 대기시키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어. 그들을 하산시켜 현청각을 맞이하도록 일러두거라.”

이에 방호 대사가 즉시 움직이려던 찰나, 하늘을 올려다보던 방각 선사에게서 말이 더 이어졌다.

“방호야. 그리고 본산에도 손님이 들 것 같구나. 그를 맞이할 채비를 해야겠다.”

“본산에도 말입니까?”

“그렇구나. 실로 무서운 손님이 올 모양이다.”

“아!”

방호 대사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그의 동공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서, 설마 그가 옵니까?”

“혼돈의 주인이 우리에게로 칼을 세웠다.”

“그, 그는 피와 혼백을 빨아들일 수 있는 괴물이었습니다. 그런 괴물이 본산에 오르게 둘 수는 없는데……!”

“그래서 정검신협이 오고 있는 모양이다.”

“헛!”

방호 대사가 어찌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 버렸다. 삼문협에서의 기억이 악몽처럼 떠오른 까닭이었다.

한데 방각 선사의 말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도 하는 게 좋겠구나.”

“우려될 게 또 있습니까?”

바로 그때, 여태껏 담담하게 말을 흘리던 방각 선사에게서 슬픈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그간 실종된 줄로만 알았던 방연이가 저 속에서 살아 있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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