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217화 (217/225)

217.

#천룡부 (4)

“헉! 헉!”

폐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격렬한 숨소리가 한없이 터져 나왔다. 누구 하나만 그런 게 아니라 진령 산맥을 바삐 헤쳐나가는 네 사람 모두가 그랬다.

그들 넷의 몰골은 처참했다. 눈두덩이가 시커멓게 죽은 게 열흘은 잠을 못 이룬 것처럼 보였고, 눈에는 절망이 어려 있었다.

걸음걸음에서도 고단함이 잔뜩 묻어 나왔다. 그럼에도 급박하게 달려가고 있는 건 목숨이 쫓기는 까닭이었다.

그러던 중.

‘이래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선두에서 길을 이끌던 중년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뒤따르던 세 사람 역시 즉시 멈춰 섰다.

“종주님!”

“계획을 변경한다.”

천마교의 흑암무영종주, 흑야가 세 남녀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광웅의 추격이 더 가까워졌다.”

“그럼 이렇게 멈추신 건…….”

“누군가 이곳에서 시간을 벌어야 해.”

“……!”

흑야의 말에 지금까지 함께 왔던 세 남녀, 청매와 흑죽, 그리고 혈검자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혈검자, 혈련수라종주의 네 제자 중 막내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변절자들을 막겠습니다.”

“저와 흑죽 역시 사력을 다해 막아내겠습니다. 종주께서 후일을 도모해주십시오.”

월령마화종주를 보필하던 사대마령 매난국죽의 두 사람, 청매와 흑죽이 눈빛을 마주치며 뜻을 모았다.

“아니다.”

흑야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막아설 것이다. 광웅이 극마경에 올랐으니, 그를 막고서 시간을 벌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종주님!”

“그건 안 됩니다! 왜 종주님께서!”

“나는 이미 결심했다. 아래를 살피지 못해 천마교의 백년대계를 그르쳤으니, 이건 내가 매듭지을 일이야.”

흑야의 눈에서 독기 서린 흑광이 뻗쳤다. 음성에서는 가슴속 깊숙이 맺힌 한이 뚝뚝 묻어나왔다.

그간 지혜를 높이사 중용했던 마영이 알고 보니 천마교를 집어삼키는 독사였다.

그는 제 수하인 풍노를 부려 마교도들을 규합해 강탈했고, 동료였던 광웅을 포섭하여 지금 자신을 궁지로 몰았다.

특히나 광웅은 흑야가 발탁하여 직접 키워낸 제자였다. 삼 년 전 정무맹과의 혈전에서 죽었다고 보고받아 한참을 슬퍼했는데, 이렇게 적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어느 것 하나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흑야의 가슴은 천 번 만 번 무너지고도 남았다.

그때, 혈검자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종주님! 재고해주십시오! 지존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이끌어주실 때, 종주님도 함께 계셔야 권토중래할 수 있습니다.”

“광웅은 극마에 가까워져 있지. 그를 막아낼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게다가 혈운귀역무간진이 펼쳐졌을 때 지존께서 변을 당하셨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가정이긴 하나, 만약 그렇다면 나 하나보다 너희 셋이 도망치는 게 낫다.”

혈운귀역무간진은 흑야가 혼원혼 천영겁대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는 그걸 본 순간부터 심히 불길한 예감이 사로잡힌 상태였다.

“더는 시간이 없군.”

“종주님!”

“너희는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와신상담하며 나 같은 패착을 두지 마라!”

후우웅-!

흑야가 모든 공력을 끌어올리자, 살기 짙은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콰아아-!

광풍이 응축되었다.

흑야의 눈에서 서릿발 같은 마광이 뻗쳐 나왔다. 한 톨의 내력도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변절자들을 죽이기 위해 제 몸을 모두 태워버릴 기세였다.

혈검자와 청매, 흑죽이 흑야의 확고한 의지를 읽었다.

“추격해오는 수가 수십이니, 많은 시간을 벌지 못할 수도 있다. 혈검자, 이 패를 가지고 청해로 가라.”

“알겠습니다!”

“뒤돌아보지 말도록.”

혈검자를 비롯한 세 사람이 떠났다.

휘이-!

남쪽 하늘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건만, 한 줄기 차가운 북풍이 불어와 뺨을 베고 지나갔다. 왠지 모르게 가슴 시린 한이 울컥 솟구쳐 골수까지 치밀었다.

상념이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창공은 그의 타는 속을 모르고 맑기만 했다.

“후우-!”

흑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추격자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열 명 남짓한 금면인들이 에워싸더니, 뒤편에서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간 늘 칙칙하게 살더니, 임종의 장소로는 양지바른 곳을 택했구려.”

“광웅. 자네는 왜 나를 배신했나?”

흑야가 대뜸 물었다. 삼문협에서는 격전에 휘말리고 백여 명의 수하들을 통솔하느라 묻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금웅이요. 만인지상(萬人之上)이신 존자께서 주신 이름이지.”

“내가 준 이름은 불만족스러웠던 건가?”

“불만족?”

금웅이 싸늘하게 되물으며 조소를 짓더니, 곧장 핏빛 짙은 혈마기를 터트렸다. 그의 두 눈에서 흑야를 꿰뚫을 듯한 혈광이 쏘아져 나갔다.

“종주, 그깟 이름 하나로 살가운 척하지 마시오. 그대에게 수하는 절대천마의 강호군림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잖소? 그에 딱 맞는 수준의 무공만 가르쳤지. 이제 한 번 보시오. 당신이 가르쳤던 마인들 중에 지금 누가 살아있소?”

“네놈! 네놈이 감히 역심을 품었었구나! 만마를 호령하실 지존의 진실한 충복이 아니었어!”

“진실한 충복? 크크크. 그딴 말은 개나 주시오. 죽음을 무릅쓰고서 임무들을 수행했건만 치하하는 말조차 없었잖소. 게다가 그로 인해 나는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지. 고작 닷새를 부탁했을 뿐인데.”

“그게 다 지존께서 오실 천하를 위한 것이었다! 네놈에게 전해진 은혜 역시 지존에게서 비롯된 것이었어. 한데 네놈은 먹여주고 키워준 은혜를 정녕 저버렸다!”

“그게 은혜요? 그렇다면 존자께선 나에게 극마경을 보여주고 오르게 해주셨소. 이 은혜와 그 은혜 중에 뭐가 더 크오?”

“이, 이……!”

극도로 분노한 흑야의 안구에서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광웅의 배신을 머리로는 납득했으나,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이었다.

“후후후! 꼴이 우습군. 후회되오? 그때 나를 죽을 수밖에 없는 임무로 내몬 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 말할 줄 알았소. 충견이 짖어댈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니까.”

“네놈! 천하의 마교도가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흑야가 목에 핏줄을 바짝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의 전신을 뒤덮은 마기가 몹시 일렁거릴 정도였다.

“위기에 처한 절대천마를 버리고 혼자 제 살길을 내뺀 건 당신이오. 그리고 그는 죽었지. 천하는 내가 당신을 변절자로 기억할 거요! 당신이 최악의 변절자요.”

“지존께선 죽지 않으신다-!”

“후후후! 천하의 으뜸에는 혼원기가 있소. 마의 존재 자체도 먹어치울 수 있는 힘이지. 당신이 그래도 나를 키워준 바가 있으니, 혼원마기를 보여주겠소. 후에 지옥에서 원통해 하시오.”

혼원기의 이치로 본연의 마공을 품은 혼원마공(混元魔功)이 극한으로 피어올랐다.

퍼어엉-!

금웅의 잔악한 기세가 마지막 기운을 짜낸 흑야를 덮쳤다.

잠시 후.

흑야의 목이 떨어졌다. 그의 마지막 얼굴에는 아득한 좌절감뿐이었다.

그러자 금면인들이 금웅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문주님, 감축드립니다!”

“이로써 천룡마문(天龍魔門)의 역사가 천룡부와 함께 시작되었다. 존자께서는 천하의 귀인이시오, 우리의 은인이시다.”

금웅이 힘차게 외쳤다. 그러자 어느새 모여든 추격자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일통강호- 천룡부-!”

“천추군림- 황금존자-!”

“만세- 만세- 만만세-!”

“우리의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흑야와 함께했던 변절자 무리를 끝까지 쫓아라! 공을 이루는 자에게는 만인지상의 옥좌에 앉아 계신 존자께서 합당한 포상을 내리실 것이다!”

“와-!”

***

“각주님. 급보입니다. 천룡마문 오백여 명이 복양 천룡부에 입성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천룡마문?”

만상각주 공야청은 삼문협에서 남양지부로 오자마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맞아야 했다.

“천룡마문의 선두가 든 깃대에 흑암무영종주의 머리가 효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설마 마교도들이 분리해 나왔단 말인가? 그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소문으로는 흑야가 정검신협과 결전을 치르던 절대천마를 두고 홀로 몸을 내뺐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룡부에 몸을 담아 정무맹을 칠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리고?”

“황금존자는 만인지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능력을 증명하여 황금존자의 포상이 주어지는데, 이중에 극마경에 오를 수 있는 무공이 있다고 합니다.”

“극마경? 아-!”

공야청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악성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남양지부장 곽완이 건넨 전서를 몇 번이나 살피며 고개를 계속 가로저었다.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곽 지부장. 여 각주와 이 무원주, 그리고 진 무사를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곽완이 재빨리 방을 나서서 그들을 데려왔다.

공야청이 얼른 이 사태에 대해 전달했다.

“이럴 수가! 천룡금문에 이어 천룡마문입니까?”

현청각주 여문탁이 걷잡을 수 없게 번져가는 상황을 가늠하며 소리 질렀다.

천룡금문(天龍金門)은 삼문협에서 천룡부의 이름과 무위를 떨친 군세를 총칭하는 말로, 그들은 이미 천룡부의 성채를 둘러싸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금무신장의 천룡금문이 일천가량이고, 금웅의 천룡마문이 오백여 명이라 하네. 이 정도 규모라면 정무맹과 온 전력과 엇비슷하겠군.”

“하지만 그건 오당오각을 다 합친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네. 왕 노사가 천룡부를 외치고 일어섰으니, 저들이 훨씬 더 많다고 봐야겠지.”

공야청과 여문탁의 대화를 들은 진우선이 조용히 한마디 던졌다.

“각주님은 왕 노사도 천룡문일 거라고 보시는군요.”

“십중팔구는 그럴 것이네. 아마도 그렇게 계획해두었겠지. 천룡부는 애초에 정사마의 세력을 분열시켜 천룡부를 쌓아 올릴 속셈이었어!”

진우선이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황금존자 주문강의 야욕을 알면 알수록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까닭이었다.

그는 제 몸 안에 정사마를 품어 삼원합일을 이루려 한 것만이 아니라, 천룡부로 정사마의 세력을 품어 강호를 지배할 심산이었다.

“그렇다면 사도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있을까요?”

“와해된 사도련에? 아!”

공야청이 탄성을 내지르며 남양지부장 곽완을 바라보았다.

“구심점을 잃은 사도련은 저마다의 터로 돌아갔다는 소식까지만 들었습니다만, 그 이후로는 전해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진 무사의 생각이 충분히 타당하군. 당장 내일 천룡사문(天龍邪門)이 천룡부에 입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이상하지 않게 됐으니까!”

공야청이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그때 이능운이 의문을 쏟아냈다.

“혼원기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이기에 극마경에 오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혹여나 정사마를 다 품게 된다면,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요?”

“후우. 나도 그걸 모르겠군. 천하에 그런 무공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네.”

공야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만학수사라 불린 건 천하의 지식을 빠짐없이 섭렵했기 때문인데, 이 순간 혼원기만큼은 알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그 순간, 진우선이 명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혼원기는 검은 바탕과 같습니다. 모든 걸 받아들여 검게 칠해버리니 이질적이어도 다 품어낼 수 있습니다. 혼원혼천영겁대진이 바로 마도의 귀역무간진과 사도의 사사혈라대법을 품어낸 것이지요.”

“아! 그렇다면 극마극사의 황금존자는 천하 모든 기운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공야청은 혼원기의 존재를 쉬이 납득하지 못했으나, 그 이치는 단박에 이해했다.

한데 이해해버린 순간 무시무시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에 낯빛이 사색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극마극사만이 아니라 등봉조극의 이치를 품어 삼원합일로서 생사경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새, 생사경!”

여문탁과 이능운이 말조차 더듬으며 기겁했다.

“아! 그래서였구나! 전 맹주님의 불상사가 발생하게 된 게 이 때문이었어! 그렇다면 주문강은 혼원기말고도 기상천외한 무공을 또 익혔겠군!”

공야청만이 눈을 빛내며 진실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화산파의 두 분 어른의 실종 역시 이와 관계가 깊습니다!”

“허어! 그렇겠군. 그는 어찌 이리 탐심이 깊단 말인가! 한이 없구나, 한이 없어. 황상의 하나뿐인 아우이니, 천하에 못 가질 게 없을 텐데…….”

“마치 천하의 모든 걸 먹어 치우려는 괴물 같군.”

이능운의 적나라한 한 마디에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진우선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는 그를 저지하러 가봐야겠습니다.”

“지금?”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가 생사경에 오른다면 더는 어찌 될지 모릅니다.”

“진 무사, 그건 아니 되네. 다시 생각해보게! 자네는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잖나!”

“그래도 해내야 합니다. 다만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하니 왕 노사의 분란을 잠재우는 임무는 수행치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네. 그건 괜찮아. 탁 전 장로께서 도와주기로 하셨으니까.”

공야청이 잠시 말을 잃은 채, 진우선의 눈빛을 직시했다.

“진 무사, 정녕 갈 생각인가?”

“천하의 안위와 직결된 일입니다. 어찌 제 한몸 아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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