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215화 (215/225)

215.

#천룡부 (2)

빛은 찬란하니 존재한다. 하지만 명확한 형체는 없다. 그저 실존하는 걸 알 뿐이다.

지금 진우선이 마주한 광체(光體)가 딱 그러했다.

가슴팍에 어려 있는 은은한 빛무리는 그저 빛의 덩어리일 뿐, 어떤 모양도 없었다. 구체가 일렁이는 듯도 하고 빛살이 삐쭉 쏘아지는 듯도 했으나, 뚜렷한 형태가 없었다.

한데 중요한 건 이 광체의 정체가 바로 검노야라는 사실이었다.

“스승님!”

[나는…… 괜찮다…… 우선이 네가……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검노야가 힘겹게 말을 전했다. 그나마 진우선이 깨어나며 기운이 전해지니, 종전보다 의사 표현을 길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정적이었다.

보이지 않을 듯이 흐릿하던 광체가 이제는 영롱한 빛을 뿜었으나, 신선의 풍모를 흘렸던 이전의 모습까지 되찾지는 못했다.

“스승님, 혈라에서 무사히 나오셔서 다행입니다. 득도하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선기만이 아니라 영체도 잃으셨는데, 그게 혹시……?”

[우선아, 자책하지 말아라. 너 때문이 아니다. 혼돈기의 주인을 막아낸 까닭이지.]

“혼돈기!”

진우선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폭발하는 기세로 순식간에 천공을 뒤덮던 혼돈의 기운이 알맹이만 남은 채 잠잠해져 있었다.

“적문강, 그자가 다녀간 것입니까?”

[맞다. 그가 혼돈기로 천하를 가렸고, 혈라와 귀역무간진의 정수를 섞어 혼원혼천영겁대진으로 이 일대를 뒤덮었었다.]

“하아! 혼원혼천영겁대진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칩니다. 스승님께서 그것들을 흔적도 없게 소멸시키셨군요.”

진우선이 검노야의 상황을 단박에 이해했다. 심히 탄복하면서도, 깊은 안타까움이 흘렀다.

[한데 그것만이 아니더구나. 그의 혼령은 주문강이었고, 외적 신분은 우리가 금천이라 불렀던 천룡부의 황금존자였다. 적문강이나 마영은 그의 분신일 뿐이지.]

“아-!”

진우선이 장탄식을 흘렸다.

적문강, 아니 주문강의 행적과 심계가 어찌 이리 복잡할 수 있단 말인가.

“주문강 하나로 인해 강호가 이토록 혼돈에 빠지게 될 줄이야! 실로 너무나 무시무시한 자입니다.”

[그는 혼돈의 씨앗을 품고 태어나서, 스스로 혼돈의 운명을 열었다. 그러니 강호가 휩쓸릴 수밖에.]

검노야는 그의 혼령을 관(觀)하여 운명을 보았다. 득도하여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

진우선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스승님, 그럼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하아-! 주문강이 그들을 집어 삼켰다. 그 힘으로 소멸을 피해갔어.]

“그들 둘 다 말입니까? 실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가 잔백마군의 기운을 어찌 품었는지도 납득하지 못했는데.”

[혼돈은 모든 것을 삼키며 흑암으로 덧씌워버리지. 그는 그 힘을 통해 혼돈의 운명을 열었다. 나 역시 그 이치는 도저히 가늠되지 않더구나. 삼키는 건 어찌하는 것이며, 소화해서 하나로 품어내는 건 또 어떤 조화인지…….]

“정말 말도 되지 않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목도했으니 마냥 부정할 수도 없겠지.]

“그걸 다 품어냈다면…… 이미 혼돈천하가 이루어졌겠군요.”

[맞다. 극사는 오래전부터 그의 안에 있었고, 잔백마군으로 극마를 얻었으며, 화산지도를 품어 탈경에 오르려 했으니까. 삼원합일을 이루어 생사경을 넘본 모양이야.]

“화산지도!”

[아마도 자하선옹마저 그에게 떨어진 모양이더구나. 다행히 그때 내가 혈라에서 나왔고, 주문강이 화산지도마저 품어내는 것만은 막았다.]

“스승님께서 계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나는 그를 멸하지 못했어. 혼돈이 광분하여 천하를 삼키는 걸 막았을 뿐이지. 그리고…… 선기를 다시 품어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아! 그럴 수가…….”

검노야는 영체임에도 득도하여 세상의 이치를 벗어났기에 존재는 소멸하지 않았다.

하지만 폭발하던 혼돈기를 잠재우느라 육신이 없는 채로 모든 선기를 쏟아냈다. 그로 인해 영체마저 손실되었으니, 기운이 머물러 있을 그릇 자체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대자연의 지극한 이치를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이었다.

[나는 괜찮다. 그리고 우선이 네가 있지 않으냐? 다행히 네 혼백이 빠져나가기 직전에 붙잡았고, 때마침 상청영단이 있어 이리 회복할 수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단전마저 텅 비어 있는 것 빼곤 괜찮습니다. 다시 보니 육신에 생겼던 자잘한 상처들도 감쪽같이 아물었군요.”

[태산영기가 진득하여 회복이 빨랐지. 네가 극경을 넘었기에 세 알 모두 품을 수 있었지만 말이야.]

“하하!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성의를 거절키 힘들어서 주는 대로 받았을 뿐인데,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삼라만상의 이치가 그런 법이겠지.]

검노야의 광체가 진우선의 머리 위에 올라앉았다.

그건 어쩌면 검노야가 자애로운 손길로 진우선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양새일지도 몰랐다.

검노야와 진우선이 잠시 교감을 나누었다.

그때, 사방의 운무가 천천히 걷히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잠시 일대를 내려다보자꾸나.]

“알겠습니다.”

검노야와 진우선이 걸음을 옮겨 산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 달 가까이 대혈전이 벌어졌던 산자락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 와중에 빠르게 움직이는 이들이 보였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의 사도련 무인들과 제각기 찾아온 강호인들이 심히 지친 초췌한 몰골로 일제히 삼문협 일대를 벗어나고 있었다.

[허어! 천룡부 무리는 이미 빠져나가고 없구나. 비가 한없이 쏟아졌건만, 그사이 사라져버렸어.]

“아무래도 진세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마교도들 역시 그래서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그렇겠구나.]

진우선이 그런 이들을 보면서 물었다.

“스승님. 그런데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의 기운이 흐릿하나마 이어져 있는 느낌입니다. 아까 천기에도 희미하게 흔적이 있었는데…… 왜 이런 걸까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스승님은 혹시 못 보셨습니까?”

[나는 이제 영체마저 없어 아무것도 볼 수 없구나. 그저 우선이 너를 느끼고 있을 뿐이다.]

“아-!”

진우선이 흐느끼는 듯한 탄식을 흘렸다.

검노야는 이제 천기마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들이 이어져 있는 느낌이 정확하겠지?]

“네. 미세하게나마 어딘가에서 명부의 영기에 붙들려 있는 느낌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요.”

[혼돈에 빨려들었으나 명부영기로 혼령이 붙들려 있는 모양이구나. 내가 그들과 연결해 두었었다. 태산부군과 약속한 바였으니까.]

즉,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의 혼령이 아직 오롯하게 존재하는 것이리라.

사실 이는 명부 영기와 그들의 깨달음이 한데 맞물리며 벌어진 일이었다.

명부 영기가 그들의 혼령을 묶은 게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힘이 되었고, 또한 각기 진마경과 반사령의 경지를 깨달아 존귀한 영체로 거듭나고 있었기에 쉽게 녹아들지 않았다.

[우선아. 실로 네가 할 일이 막중하다.]

“그렇군요. 하지만 정말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래도 그와 맞서 싸우려면 금선무를 다 깨달아야만 할 것 같은데…… 모르겠습니다.”

진마경을 넘어선 절대천마의 파천마신과 동수를 이루었던 걸 떠올려보면, 천하를 뒤덮었던 혼돈기는 어찌 싸워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도 않았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우선이 너는 여태껏 잘해왔으니, 충분히 해 날 수 있을 게야.]

“감사합니다, 스승님.”

진우선이 검노야의 말을 곱씹으며, 마음속으로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때, 산 중턱에서 한 인영이 산봉우리 쪽으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벽 소저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비가 그쳤으니, 네가 걱정되어 찾아오는 모양이구나.]

이윽고 벽소군이 정상에 올랐다.

벽소군이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진우선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곧 안심의 한숨과 함께 반가운 표정을 보였다.

“진 공자! 깨어 있었군요. 다행이에요.”

“벽 소저, 오랜만입니다.”

근 일 년만의 만남에 진우선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들 걱정 많이 했어요.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혹시 다른 불편한 곳은 없나요?”

“운 좋게 얻은 영단이 있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빙화곡의 뜻은 이루셨습니까?”

“네. 힘겹지만 제 손으로 끝을 냈어요. 이제 빙화곡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지요.”

“축하드립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별말씀을요. 오히려 진 공자께서 더 큰 일을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살아남은 무인이라면, 지난 며칠간 이곳을 지켜내고 막아낸 신광을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진우선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는 검노야가 살신성인하여 이룬 업적이니까.

[우선아. 네 영기와 네가 날 보호하여 이루어진 일이니, 어찌 내 역할만 있겠느냐? 이 일은 네가 해낸 걸로 하자꾸나.]

‘스승님!’

[우선아. 네가 내 제자이고, 내가 네 스승인 것은 변함이 없지 않으냐? 나는 애초에 현세의 사람이 아니니, 네게 기억되는 것만으로도 기쁘기 한량없구나.]

검노야의 말속에 담긴 뜻을 알아챈 진우선이 벽소군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대단하기보다 그간 배운 바를 행한 것뿐이니, 스승님께서 잘 가르쳐주셨지요.”

“그럼 정말 좋은 스승님을 두신 거군요. 진 공자처럼 훌륭한 제자를 두셨으니, 엄청난 선인이신 게 분명해요.”

벽소군이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진우선이 뿌듯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벽 소저. 혹시 오라버니의 소식은 찾으셨는지요?”

“앗! 아니요! 진 공자께선 알고 계시나요?”

“아! 그렇다면 제가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겠군요. 연이 닿은 사람 중에 벽 소저와 흡사하게 빙기를 다루는 분이 있어 조심스레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

벽소군이 놀라서 탄성을 지르더니, 진우선의 말을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가까이 다가섰다.

진우선은 소무강의 근황을 조심스레 전하는데 신경을 쓰던 터라, 그녀의 향기가 은연중에 코끝으로 스며드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분은 아직 볼 면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벽 소저께서 숙원을 이루셨으니 제가 자리를 한 번 마련해보겠습니다.”

“진 공자! 정말 감사해요!”

벽소군이 너무나 기쁜 마음에 부지불식간에 저도 모르게 진우선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다 멋쩍어 손을 내려놓았다.

***

둥둥둥둥-!

묵중한 북소리가 장원에 가득 울려 퍼졌다.

이곳은 화북지방의 한가운데이자, 하북성과 하남성, 산동성과 동시에 맞닿은 복양 땅에 들어선 거대한 장원이었다.

장원의 담장은 성벽처럼 단단하고 높으며, 좌우의 끝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내부에 들어선 전각들은 마치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었다.

그야말로 웅장한 성채나 다름없었다.

바로 이곳에서.

오늘 황금빛으로 빛나는 휘황찬란한 현판을 내걸며 강호에 이름을 드높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천룡부였다.

장원 내부의 대전 앞 거대한 연 무장에선 무인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채 구호를 복창했다.

일통강호- 천룡부-

천추군림- 황금존자-

만세만세- 만만세-

그들의 함성이 일대를 뒤흔드는 사이.

대전 내에선 기세가 넘치는 무인들 여럿이 옥좌 앞에 부복하고 있었다.

그때 청색 장포의 금면인, 금적서생이 옥좌에 앉은 사내에게 말을 올렸다.

“존자시여. 삼문협의 비가 그치며 운무가 걷혔고, 정사외도의 무인들이 처참한 몰골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금적서생은 연거푸 소식을 전했다.

“철면호리가 정무맹의 전력 절반을 움켜쥐었습니다. 자리에 앉으니 야욕이 샘솟아 열정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도련은 구심점을 잃어 사분오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금적서생의 입에서 천하정세가 마구 흘러나왔다.

황금존자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손가락으로 옥좌의 손잡이를 툭툭 두들겼다.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가 명을 내렸다.

“너는 이제부터 계획한 바대로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하면 존자께서는 어디로 행차하실 생각이십니까?”

“탁탑천왕을 들라 이르라. 소림에 가야겠다.”

“명을 받듭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