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천룡부 (1)
비가 어찌나 내리는지, 이제 천하는 희뿌연 운무로 온통 가려져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 삼문협 쪽을 바라보는 만상 각주 공야청의 얼굴은 한껏 찌푸려져 펴질 줄을 몰랐다.
“삼문협이 백 리 앞이거늘 이게 대체 무슨 천지조화일까? 삼문협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벌써 며칠째인가.
어째서 한겨울인데도 눈이 아니라 비만 이토록 내린단 말인가.
설마 하늘이 이토록 슬퍼할 변고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공야청은 불과 한 달 사이에 급변한 천하의 정세를 곱씹으며, 진즉에 나서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들만 보내는 게 아니었어. 더 일찍 맹도들을 이끌고 왔어야 했는데…….”
그간 이곳에 모여든 정사마의 무인만 수천이 넘었다고 파악됐으니, 삼문협에서의 격전은 천하대전을 방불케 하는 규모나 다름없었다.
그중에 정무맹도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명성과 실력이 하늘에 닿은 정검신협이 있다곤 하나, 무수한 적들을 상대하며 얼마나 노고가 컸을 지는 예단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을 상대했을 사람도 정검신협밖에 없고……”
이는 당대의 신마황전이나 다름없었다.
절세의 진법에 가려져 정말 그들이 맞부딪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그랬다면 풍전등화의 상황이나 다름없었으리라.
근방의 명문정파들이 무리를 이끌고 왔다고도 들었지만, 잘 조우했을지마저 알 수 없었다.
“후우-! 여기까지 와서 움직일 수가 없다니!”
공야청이 땅거죽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운무로 인해 삼문협이 백 리밖에 남지 않은 민지현(渑池县)에서 발이 붙잡혀 나아갈 수가 없으니 가슴만 답답할 뿐이었다.
주룩주룩-.
하지만 비는 그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며 운무만을 한없이 피워 내고 있었다.
눈앞의 세상처럼 천하의 정세도 짙은 안개에 휩싸인 형국 같았다.
그때, 이능운이 다급히 정자로 올라오며 외쳤다.
“각주님! 맹에서 온 급보입니다! 왕 노사가 추종 세력을 이끌고 반기를 들었다 합니다.”
“뭐라고?”
공야청이 눈을 부릅뜨며 이능운이 건넨 서찰을 얼른 살폈다.
-공 각주! 삼문협의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져 막대한 역할을 짊어진 그대에게 심각한 소식을 전하게 되어 몹시 유감이오.
장로원의 왕동웅 장로가 진양각과 광명각을 포섭하여 맹에 반기를 들었소. 야욕이 컸던 진양각주 관역산과 광명각주 사공도백이 그를 따르는 모양이오. 맹의 전력이 양분된 틈을 탄 거요.
삼대봉공 중 남궁 노사와 용 노사가 독에 당해 붙잡힌 상태이며, 제갈 노사는 세가에서 맹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를 듣고 노발대발하셨소이다.
일단 맹주께서 숭의각의 위의광 각주와 함께 그들을 맹 밖으로 내쫓으셨소. 다만 전세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지라 당분간 삼문협까지 신경 쓰지 못할 것 같소이다.
그러니 그곳의 일은 공 각주가 현청각주와 잘 상의하여 순리대로 풀어주시오.
그리고 천룡상단을 각별히 조심하기 바라오.
근자에 왕 장로에게 천룡상단에서 몇 차례 접촉했었는데, 때때로 천룡부를 언급했다고 하오.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아무래도 천룡부는 천룡상단의 모태인 것 같소.
만약 그들이 연루된 게 사실이라면, 그들의 근거지인 화북지방으로 향한 공 각주 역시 위험에 처해있을지도 모르겠소. 부디 이 서찰을 받을 땐 별일 없기를 바라오. 혹여나 천룡부에 대해 듣게 되면 알려주시오.
그럼 무운을 빌겠소.-
“이, 이럴 수가!”
내당주 냉군상의 서신을 순식간에 살핀 공야청이 격정에 휩싸여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능운이 순간적으로 휘청이는 공야청을 부축하며 서찰을 건네받았다.
“각주님! 왕 노사는 작년에 전 맹주님을 사지에 빠트렸던 자이지 않습니까?”
“맞다. 그는 그때 이미 맹을 배반했었겠구나. 그간 죄책감 때문에 숨죽여 지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아-!”
이능운이 탄식했다.
장로원의 원로 왕동웅은 삼대봉공을 부추겨 전 정무맹주 독고월로 하여금 천룡상단의 적문강을 치료케 했었다.
그 일로 정무맹에서 평생을 쌓아 온 위신이 땅바닥에 처박혔건만, 이런 큰일을 벌였을 줄이야.
“욕심이 많고 부지런하나 의기와 배포가 대단치는 않아 큰 인물감은 아니었으니, 적당히 사리사욕을 챙기며 여생을 보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탐심이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그득했구나!”
“천성이 무골이고 얼굴마저 어수룩해 보이니, 모두가 속았습니다!”
“능운, 얼마 전에 왕 장로와 마주쳤다고 하지 않았나? 그의 무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기억 나는가?”
“왕 장로는 저보다 높은 듯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함께 온 현청각의 여문탁 각주님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 그럼 일단은 맹주님보다는 반 수 아래로 보면 되겠는데, 어쩌면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겠군.”
공야청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토록 교활한 모습을 보여준 왕동웅이 탁신의 무위를 상대할 방법 없이 일을 벌였을 리 만무했으니까.
그러던 중.
휘이이-.
한줄기 미풍이 뺨을 스쳤다.
어느새 비가 멎어 운무가 서서히 옅어져 가고 있었다. 곧 안개가 하늘로 흩날리며 점차 시야가 트였다.
이윽고 삼문협으로 넘어가는 산세마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간에 상황이 그리된 순간, 공야청과 이능운의 눈빛이 통했다.
“설마 이제 비가 그친 건가?”
“햇빛도 보이는군요. 비구름이 다 걷힌 모양입니다!”
공야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능운, 일행들을 챙겨주게. 그리고 여 각주님께도 이곳에서 뵙자고 전달해주고.”
“알겠습니다.”
이능운이 재빨리 정자에서 내려가 장원 전체에 알리기 시작했다.
공야청은 서서히 천하에 뿌려지는 햇살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진퇴양난의 형국이구나. 일단 이곳의 일부터 제대로 파악하는 게 급선무야!”
자칫하면 둘로 갈라진 정무맹이 각기 격파되며 강호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만은 막아야 했다.
고심이 깊어지는 것과 함께 공야청의 시선이 삼문협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또 염려되는 바가 있는 까닭이었다.
“천하에 비가 이토록 내렸는데, 진 무사 자네는 무사한가…….”
***
비가 조록조록 내리다가 점점 멎어간다.
운무의 한복판, 산 중턱에 뚫린 신마황동의 한 동혈에서 무인들이 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백부님, 비가 이제 그쳐가려나 봅니다.”
“그렇구나. 비가 참 많이 내렸어.”
그중에 동굴 입구에 나란히 선 탁무위와 탁운비, 두 혈족이 해후를 나누었다.
“이제야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곳에서 백부님을 뵐 줄은 몰랐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강호를 떠났었으니 별일이야 있었겠느냐? 무탈하게 잘 지냈다. 그런데 나야말로 너를 여기서 만나 반갑고 신기하구나. 게다가 네가 맹에 몸담고 있을 줄이야.”
“하핫!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맹의 일원으로서도 백부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때는 급박하여 말씀을 못 드렸는데, 백부님이 오시니 모두가 환호했습니다.”
“허허! 네가 이리 격식도 차릴 줄 알고, 참 많이 변했구나.”
“점점 더 나아져야지요. 아! 그리고 혼례도 올렸습니다.”
“혼례를? 누구와?”
“이름은 영화이며, 성은 신입니다. 아버지가 성을 붙여주셨습니다. 태중혼약으로 알려졌기도 하고요.”
“사연이 있는 아이인가 보구나. 아무튼 축하한다. 인제 보니 혼례를 올리면서 철이 든 게군.”
“감사합니다. 사실 그것도 있지만, 진 대협을 만나서 느낀 바도 많았습니다.”
“오! 그와도 인연이 있었더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랬구나. 네가 크게 변한 이유가 있었어. 귀한 인연이니 잘 지켜 가거라.”
멋쩍게 웃던 탁운비의 얼굴에 돌연 수심이 가득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심히 걱정됩니다. 그토록 강렬한 기운의 파동은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진 대협은 과연 무사할지 모르겠 습니다.”
“그는 아마도…… 무사할 게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탁무위는 비가 그치고 조금씩 개기 시작하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 보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에 반해 탁운비는 강한 확신조로 말하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탁운비가 탁무위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근데 백부님께선 여기에 어떻게 오신 것입니까?”
“허허! 강호에 남아있던 미련을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구나.”
“그럼 그 빙결되신 분이……?”
“……그래, 맞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사매였지.”
“아-!”
탁무위의 아련한 목소리에 탁운비가 탄식을 흘렸다.
정무맹의 대협인 벽력신창 탁무위의 연정의 대상이 천마교 오대 종주의 하나였던 구음신녀라니. 이 무슨 슬픈 운명이란 말인가.
그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그리 깊이 탄식할 일이었더냐? 허허 ! 고생이 많았구나.”
탁무위가 은은한 눈빛으로 탁운비를 바라보았다. 너만은 참 다행이라는 듯이.
그때였다.
“탁 대협.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백하련이 빙화곡의 귀빈인 벽소군, 막유수와 함께 탁무위에게로 다가왔다.
“세 분이 함께 오셨구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탁 대협께도 의논을 드려야겠다 싶어 두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백하련의 말에 탁무위가 벽소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벽 곡주께선 혹시 산 위에서 희미한 기운을 느끼신 거요?”
“아! 맞습니다. 지금 막 비가 그치고 운무가 걷히기 시작한 터라, 우리가 먼저 빠르게 올라가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소.”
탁무위와 벽소군 둘 다 산꼭대기 위의 상황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 금세 뜻이 통했다.
탁무위가 백하련에게 물었다.
“백 책사, 이에 대해서 생각해둔 바가 있는가?”
“있습니다. 저는 두 분 중에 한 분께서만 다녀오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천하에 원인 모를 신령한 비가 내리며 진세가 녹아내렸으나, 어쩌면 운무 속에 사마외도의 무리 역시 살아남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타당한 생각이네. 그때 우리가 진세를 피하고자 신광 가까이로 오면서 본 이들의 수만 해도 상당했으니까.”
전대미문의 극악한 기문진법에 모두가 생사마저 포기했을 때, 신광이 널리 퍼지며 영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이제 귀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이 다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특히나 진세 속에서 돌진하던 천룡부의 기세가 무시무시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섬멸하며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는데, 그들이 다시 나타날까 우려스럽습니다. 게다가 그 수장의 무위가 무지막지하니, 한 분은 꼭 남아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알겠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 남도록 하지.”
천룡부 금면인들의 수장은 신묘한 창술을 펼치며 마상전투로 일대를 난폭하게 짓밟았다.
그와 맞서 싸우기에는 역시나 마상전투를 펼칠 수 있는 벽력신창 탁무위가 더 나을 터였다.
그리고 탁무위는 백하련과 벽소군 등이 그걸 청하고자 찾아온 걸 알고 있었다.
“탁 대협, 그럼 제가 산 위에 다녀오겠습니다.”
“부탁하겠네.”
***
그 무렵.
“으으…….”
희뿌연 운무로 가려진 산봉우리에서 작은 신음성 하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미약한 음성의 주인이 힘겹게 눈을 떴다.
천지사방에 안개가 가득하여 축축하다.
한데 몸을 뒤척여보니 힘은 별로 없어도, 산뜻하고 가벼웠다.
신기한 상황이었다.
“여긴……?”
눈을 끔뻑거리며 생각을 곱씹어 보는 순간.
“……!”
갑자기 동공에서 정광이 뿜어져 나오며, 상체가 튕기듯이 벌떡 일어섰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거지? 절대천마의 공격에 맞았었는데…….”
그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변이 이리된 연유도 알 수 없었다.
그때, 가슴팍에 어려 있던 은은한 빛무리에서 아주 작은 음성 하나가 전해졌다.
[일…어…났…구…나…!]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