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암흑천하 (1)
천하는 아수라장이었다.
혼돈의 혈운이 휘휘 돌며 천공을 가렸고, 그 아래 펼쳐진 거대한 핏빛 그물이 삼문협 일대를 모조리 집어삼킨 까닭이었다.
태양 빛이 없어진 지상에선 혈무와 귀무만이 자욱했다. 혈무는 육신을 짓이겨 혈수를 빨아들이고, 귀무는 심혼을 갉아먹은 후 혼백을 거두어갔다.
결국 진세에 짓눌려 산 자는 죽고 죽은 자는 혼백마저 잃었다.
일대의 광경은 참혹했다. 압사되어 터져 죽은 시신들이 갈가리 찢겨 뇌수를 흘리며 사방에 가득히 널려있으니, 실로 목불인견의 참상이 따로 없었다.
절망만이 지배하는 상황.
이 와중에 무인들을 더욱 낙담케 하는 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금면인들이었다.
“일통강호- 천룡부-!”
천룡부-!
“천추군림- 황금존자-!”
황금존자-!
“만세- 만세- 만만세-!”
만만세-!
군집한 무리가 사기충천하여 지저에서 끄집어낸 듯한 울림을 쏟아내니, 삼문협이 떠나갈 듯이 진동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포악한 솜씨로 장내를 점령했다. 무슨 까닭에선지 잔혹하기 그지없는 진세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리 악랄한 손속이라니!”
“천룡부? 대체 그게 무슨!”
“금면귀다, 금면귀!”
“저들은 귀, 귀신의 집단이란 말인가?”
금면인들은 온통 흑의를 입은 터라 어둠 속에서 무표정한 황금색 가면만 보였다.
그러고서 생자와 사자를 무참히 찌르고 짓밟으니, 어마어마한 살육에도 무감정한 살귀처럼 보이며 심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더하여 황색 장포의 금면인이 화룡점정이 되었다.
그는 말 위에서 신묘한 창술을 펼쳐내며 일대를 내달렸다. 시뻘건 기운에 휩싸인 창을 휘두르면 무수한 생자와 사자가 도륙되었는데, 일 합을 넘기는 이가 거의 없었다.
한편, 제갈영과 용천월은 그들이 등장했을 때부터 경악하여 이구동성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그, 금천!”
“저들은 금천입니다.”
이마에 천(天)이 새겨져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황금색 가면과 천룡부라는 외침에서 절로 금천이 떠오른 것이다.
“이럴 수가!”
“설상가상이군!”
정무맹에서 온 무인들이 몹시 술렁거렸다.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기 일보직전인데, 심상치 않은 적이 늘어난 까닭이었다.
“모두 중심을 잡으라-!”
벽력신창 탁무위가 정심한 공력을 모아 사자후를 터트렸다. 그러자 무인들의 술렁거림이 다소 가라앉았다.
그때, 탁운비가 백하련에게 다급히 물었다.
“백 책사님, 상황이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방책이 있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진세가 너무나 난해합니다.”
“칠성둔형진으로라도 어찌 안 되겠습니까?”
칠성둔형진이 대단치는 않았어도 귀역무간진 내에서 요긴하지 않았던가.
“안 됩니다. 그건 아무 역할도 해내지 못합니다. 귀역무간진과 언뜻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오히려 다른 기운들이 뒤섞이며 더 혼란스러워졌어요.”
“맞습니다. 전대미문의 대술법입니다. 이대금진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아니 더 심오하여 막막한 기문진법입니다!”
백하련에 이어 제갈영도 다급하게 외치니, 탁운비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얼른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탁운비가 그리 말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악전고투 속에서 쉼 없이 진신무공을 펼쳐내는 우문혁과 만총, 그리고 무인들이 보였다. 다들 좀처럼 쉬지도 못한 채 전심전력으로 적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등 뒤로 솟구쳐 올라있는 신광 한 줄기만이 이들의 얼굴을 밝히고 위로할 뿐이었다.
“진 대협…….”
탁운비가 조용히 뇌까렸다.
산봉우리에서 쏘아져 혈운의 소용돌이 한복판을 꿰뚫은 미백색 신광.
이는 분명 진우선이 쏘아낸 것이리라.
신광은 본래 잿빛이었으나 깊은 광채가 어려 하얗고 은은하게 빛나니, 흑암 가운데 홀로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풍전등화 같으면서도 꺼지지 않았다.
신광은 이제 힘들고 지친 무인들의 마음을 붙잡아줄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요, 꺼지지 않기를 소원하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이 사태가 이리 커질 줄이야…… 하지만 무너지시면 안 되오, 진 대협!”
탁운비가 진심으로 빌었다.
***
닷새가 지났을 때였다.
“저 빛이었군!”
갑작스럽게 절벽 속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오며, 심혼을 오싹하게 하는 서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는 적문강이었다.
그때, 절벽 앞 암자에서 사방을 주시하고 있던 금적서생이 몸을 부르르 떨다가 얼른 다가왔다.
“존자를 뵙습니다.”
“저건 얼마나 되었지?”
“저 빛은 대략 사흘 전쯤에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럼 내가 자하선옹을 건네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겠군.”
“대략 그러합니다.”
금적서생이 적문강의 근심 어린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대답했다.
“금웅은?”
“그는 존자께 자하선옹을 올려드린 뒤, 곧장 내려갔습니다. 원단에 금무신장이 병사들을 이끌고서 천룡부의 이름을 선포하며 전장을 포위했고, 광웅이 흑야와 격전을 시작했습니다.”
“흑야가 꽤 놀랐겠군.”
금웅(金熊)은 본디 흑암무영종의 광웅(狂熊)으로 흑야가 발탁한 수하였다. 한데 지금은 그를 찌르려는 칼이 되어있었다.
“풍노를 만나서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렇겠지.”
금적서생은 풍노가 마영으로 분하여 마교도 오백을 이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영의 종복인 풍노 역시 흑암무영종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철면호리도 계획대로 서서히 움직이겠다는 서찰을 보내왔습니다. 삼문협의 상황이 심각해져 상당수의 무인이 정무맹을 나선 까닭에, 대계는 걱정하실 것 없다고 전해왔습니다.”
“어느새 철면호리도 움직일 때가 됐었군.”
“원단이 지났으니까요.”
“그렇지.”
천룡부의 대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금적서생이 여러 희소식을 전했음에도 적문강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심각해 보일 뿐이었다.
그에 금적서생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극진히 여쭈었다.
“존자시여. 혹시 우려되시는 바가 있다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고, 분부를 내려주시옵소서. 존자의 발 앞에 천하가 다가와 있고, 존자의 명을 기다리는 수하들이 도처에 가득합니다.”
하지만 적문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한 줄기 신광만 원수처럼 노려볼 뿐.
그에 사방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오오-!
적문강의 육신에서 암흑의 신령스러운 광채가 묵직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광채는 직진의 빛이 아니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와류였다. 와류의 결을 따라 어둠을 살라 먹는 진흑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어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거무튀튀한 와류에는 사특한 혈류(血流)가 있고, 괴기스러운 귀류(鬼流)도 흘렀다. 언뜻언뜻 도기 짙은 자류(紫流)의 맥도 있었고, 청류와 홍류 등의 흐름도 보였다.
적문강의 답답한 심정이 절로 암흑신령광류(暗黑神靈光流)를 일으키며 드러난 것이리라.
금적서생과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금도신장, 금린신장 및 사방에 나열하고 서 있던 부하들이 모두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렸다.
적문강에게서 뿜어진 압도적인 기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한없이 미백색 신광을 노려보던 적문강의 입이 열린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대공을 방해받았다!”
“……!”
금적서생이 너무 놀라서 숨조차 멎은 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적문강을 쳐다보았다.
“도를 깨우친 선인이 있었을 줄이야!”
“소, 속하가 알기로 당금 강호에 그런 자는 없었습니다.”
“없었지만 있었더군.”
“그럼 설마 저 빛이?”
적문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은 긍정이라, 금적서생은 한마디 대답보다 더 큰 확신을 느꼈다.
이윽고 무언가 결심한 적문강이 입을 열었다.
“선인이 홀로 기운을 일으켜 대세를 거스르려 하고 있지. 다녀와야겠다.”
“조, 존자시여!”
“걱정하지 마라. 나는 존자요, 이전과는 다르니, 대공을 이루러 가는 것이다.”
고오오-!
거무튀튀한 와류, 암흑신령광류가 다시금 적문강의 주위에 휘몰아쳤다.
그의 결심에 사방의 대기마저 부르르 떨렸다.
“금적서생, 너는 지금처럼 대계대로 일을 진행시켜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한데 이 진세는 어떻게 되는지요?”
“내가 죽지 않는 이상, 혼원혼천영겁대진이 소멸할 일은 없다. 하지만 내가 죽을 리도 없지.”
일대에 드리운 혈라귀역무간진은 본디 혼원혼천영겁대진(混元混天永劫大陣)인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금적서생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하는 찰나.
쿠쿠쿠쿵-!
허공에 격렬한 암흑 소용돌이가 피어나더니, 앞쪽으로 길게 누우며 길을 만들어냈다.
적문강이 그 길 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천지사방이 흑암에 뒤덮였으나, 산봉우리 위에 신광의 빛이 훤히 비추고 있었다.
신광 속에는 득도한 선인, 창궁자 검노야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눈을 감은 상태였다.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현월검이 옆으로 회전하며 한없이 신광을 발했다.
그 광경이 실로 엄숙했다.
천하의 안위를 홀로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던 중 검노야의 눈이 서서히 열렸다.
그가 맞은편에 서로 떨어져 앉은 두 사람, 사령신군과 절대천마를 바라보았다.
[혼돈기가 심히 깊어졌다. 자네들이 결자해지해야 할 것인즉, 슬슬 준비할 때가 왔군.]
“진인. 어렵소, 너무 어렵소! 적문강이 혈라와 귀역무간진을 어떻게 엮어냈는지 알지 못하면,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소이다.”
사령신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황 자네는 사도 무학을 집대성했는데도 어렵단 말인가?]
“천하에 내가 풀어내지 못할 이치가 없다고 여겼으나, 저건 도무지 모르겠소. 천지를 하나로 꿰는 이치라도 알지 않는 이상 어렵소.”
검노야가 허공을 잠시 바라보더니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저리되려면 천지만이 아니라 우주 삼라만상을 하나로 꿰는 이치여야겠지.]
“후우-! 부끄럽소이다. 사사혈라대법의 정수를 빼앗기기만 하고, 풀어내지는 못하니 낯부끄러울 따름이오.”
[그렇군.]
검노야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진인, 이 명부 영기의 띠를 풀어주실 수는 없겠소?”
[그 띠가 자네의 구명줄이니, 답답해할 필요 없다.]
“진인이 보기엔 그렇겠지만, 나로선 족쇄가 채워져 있는 거나 다름없소.”
하지만 검노야는 사령신군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때, 절대천마가 입을 열었다.
“진인. 나는 다르오.”
[말해보게.]
“귀역무간진은 극마에 이른 귀마공으로 지상에 귀계(鬼界)를 열어 무간지옥을 펼치는 것인데, 진인의 이 영기로 축이나 그물을 녹여 내면 풀어낼 수 있을 거요.”
“허! 그러려면 막대한 영기가 필요할 텐데!”
“하지만 방법을 못찾은 것과는 다르지.”
사령신군과 절대천마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검노야가 둘의 말을 곱씹던 중, 눈에서 정광을 뿜었다.
[준비하게.]
“진인, 우리도 느꼈소.”
“이미 준비하고 있었소.”
심혼이 떨려올 만큼 어마어마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쿠콰콰쾅-!
허공이 경악하여 파공성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암흑 소용돌이가 산봉우리로 뻗어 오더니, 그 위에서 금면을 쓴 한 인영이 내려섰다.
쿵!
그가 내딛는 한 걸음에서 뻗어지는 파동에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이 흠칫 떨었다.
하지만 금면인은 그들 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검노야에게로 직진하며 입을 열었다.
“천룡부의 황금존자요. 선인을 보니 이제야 감히 누가 날 막았는지 알겠구려. 창궁진인.”
[혼돈의 주인이 나를 알고 있군. 그건 사황의 기억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