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혼돈천하 (4)
한없는 어둠이 드리워진 산 아래.
시리도록 새하얀 백발의 마녀와 청광(淸光)으로 빛나는 검붉은 벽력창의 무인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은 심히 지쳐 보였다. 직전까지 끝없이 공수를 주고받은 까닭이었다.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틈에 벽력창의 주인, 탁무위가 하늘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천공을 뒤덮은 소용돌이 혈운이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천기가 심히 어두워졌군.”
“천기도 볼 줄 알았어?”
“극경에 오르면 천지간의 이치를 다소 엿볼 수 있다.”
“무극지경에 오르니 별게 다 되는군. 원래라면 이쯤에 내가 이겼을 텐데, 그것도 안 되고.”
구음신녀 염능파가 원한 서린 눈빛을 쏘아내며 분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 왜 나를 베지 않았지?”
“만만치 않았으니까.”
“무극에 올랐는데도? 믿을 수 없군.”
“그래도 능파 너는 어려운 상대다.”
염능파는 탁무위의 말을 딱히 신뢰하지 않는 듯, 여전히 싸늘한 눈빛만 발했다.
그러더니 선혈을 쿨럭쿨럭 토해내며 전의를 다시 불태웠다.
“싸움이나 마저 끝내자.”
끄덕.
탁무위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지막 일격이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그에 탁무위가 검붉은 무월창에 혼원벽력진기를 힘껏 불어넣었다.
염능파도 마찬가지로 양손에 구음대라진력의 내공을 모조리 집중시켰다.
파츠측!
탁무위의 전신에 뇌기가 어리고 창신에서 뇌화가 마구 튀었다. 그에게서 태산마저 단숨에 베어버릴 듯한 웅혼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염능파는 탁무위의 혼원벽력진기에 전신이 찌릿찌릿 아려왔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사방으로 구음의 기운을 한없이 펼쳐냈다.
그녀의 두 눈에선 어느새 시퍼런 안광이 끔찍하게 솟구치고 있었다.
탁무위와 염능파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와 동시에 둘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먼저 손을 포개어 기운을 쏘아낸 건 구음마녀 염능파였다.
파아앙-!
음한의 냉기가 땅거죽을 뒤집어 엎으며 일제히 밀려들었다.
구음대라진력의 정수, 대해멸절세(大海滅絶勢)가 순식간에 삼 장 높이의 새하얀 벽을 세워 올리며 탁무위에게로 덮쳐갔다.
그러자 검붉은 창끝에서 뇌성벽력이 터져 나왔다. 뇌화를 한껏 머금은 창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혼원벽력창의 절초 벽력파천황(霹靂破天荒)이었다.
콰콰쾅-!
샛노란 벽력 줄기가 공간을 참혹하게 찢어 파공성을 터트려냈다. 그에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뻗어져 나가 새하얀 벽을 관통하여 허물었다.
일 장이 넘는 두께의 대해멸절세가 그대로 뚤리며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염능파는 꿰뚫린 초식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여전히 불꽃이 타오르는 뇌창(雷槍)이 자신에게로 쏘아지고 있었으니까.
푹-!
“……!”
염능파의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해 가슴이 힘겹게 호흡을 짜내고 있었다.
촤아아-.
사방에 드리워졌던 한기가 와해 되었다. 곳곳에 뭉쳐 있던 구음의 기운이 힘을 잃고서 차가운 물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염능파의 육신이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땅에 떨어지진 않았다. 탁무위가 얼른 그녀를 안아 들었으니까.
“능파!”
“……아!”
염능파가 창백해진 얼굴로 미약하게 탄성을 흘렸다. 복부를 감싼 손 주위로 시뻘건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어.”
“능파 ……미안하다.”
탁무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염능파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오만가지 감정이 다 담겨 있었다.
“어쩔 수 없었지. 너무 많이, 지나와서.”
염파가 힘겨운 숨으로 끊어 말했다. 그녀의 아련한 눈동자는 미안해하지 말라는 뜻을 보내고 있었다.
“후우-!”
탁무위가 허공에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 숨결 안으로 언뜻 잔상이 어리는 게,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듯했다.
한없이 그리웠던,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적이 되고 만 일남일녀의 과거.
그때, 염능파가 마지막 진기를 끌어모아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 한 번만, 옛날 그때처럼 불러줄래?”
“……염 사매.”
“탁 사형.”
염능파의 입가에 작은 미소 하나가 그려졌다.
그 모습에 탁무위는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
“염 사매. 미안하다.”
“난, 사형이, 보고 싶었어.”
염능파가 힘겹게 손을 들어 탁무위의 뺨을 한 번 어루만졌다.
탁무위도 염능파의 뺨을 어루만졌다.
너무나 차가웠다. 아마도, 옛날보다 더.
“나도 보고 싶었어.”
“정말로?”
반색하는 염능파의 모습에 탁무위는 가슴속이 매우 아릿해져 왔다.
강호신비문파로 불렸던 은천문(隱天門)의 두 제자, 탁무위와 염능파의 운명은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먼저 사문을 박차고 나갔던 염능파.
후회하며 뒤늦게 사문을 나선 탁무위.
둘은 모두 강호로 향했으나 속한 곳이 달랐다.
그로 인해 수많은 피와 얼룩만이 그들의 사이에 채워져 있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매우 깊은 골이 나 버렸다.
하지만 과거가 무슨 상관일까.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염능파는 마음이 가는 대로 할 뿐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진기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전혀, 아니었잖아.”
“아니야. 많이 보고 싶었다.”
“호남과 호북을, 가로질렀는데도, 나타나지 않더니.”
“나는…… 끝맺고 싶지 않았으니까.”
탁무위가 힘겹게 진심을 꺼냈다. 그렇게 물꼬를 트게 되자, 심중 깊은 곳에 꾹꾹 눌러놨던 말이 연이어 쏟아졌다.
“옛날에 너를 이기고 나서 좋아한다고 말하려 했는데, 이기질 못했어.”
“알아.”
“안다고?”
“사형은, 다 티가 났으니까.”
염능파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나 탁무위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사문을 나갔어?”
“사형이, 내 마음을, 몰랐으니까.”
“아!”
탁무위가 탄성을 흘렸다.
늘 아는 척했지만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알지 못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제야 깨달아지고 있었다.
그때, 염능파의 핏기 사라진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시간이, 많이 지났어.”
“너무…… 늦었구나.”
“어쩔 수 없지.”
“이십 년을 함께 자랐는데…… 그때 왜 몰랐을까?”
“괜찮아. 그게 사형이야.”
“난 바보였구나. 그래서 이십 년을 떨어져 있었어.”
“아니야. 내가, ……욕심이 많았어.”
염능파의 숨소리가 작아져 갔다.
탁무위는 그녀의 한 모습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그래도, 사형, 사랑해…….”
“능파! 나도 사랑한다.”
“응…….”
스르륵.
미소 띤 염능파의 고개가 힘을 잃고 젖혀졌다. 숨을 거두었다.
“아아-!”
탁무위가 몹시 슬퍼 탄식을 쏟아냈다.
이래서 그간에 만나고 싶으면서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감정에 젖어 있기도 잠시였다.
저 멀리서 극마경의 고수 하나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아직 천마교의 암계는 끝나지 않았구나. 천기도 심상치 않은데.”
탁무위가 얼른 자신의 옷자락을 풀어 헤쳐 염능파의 주검을 감싼 뒤, 등에 업고서 꽁꽁 묶었다.
그러고는 기운의 형세를 살펴 신형을 날렸다.
탁무위가 쏘아지는 방향의 끝에는 빙화곡에서 온 막유수 장로가 있었다.
휘익-!
막유수의 지팡이가 칼날보다 날카롭게 바람을 갈랐다.
“크헉!”
[끼학-!]
그녀가 지팡이로 뿜어낸 얇은 강기 하나에 마교도와 악귀가 꼬치처럼 꿰여 숨졌다.
“끝이 없군. 끝이 없어!”
막유수가 넌덜머리 난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지팡이를 사방팔방으로 연거푸 휘둘러갔다.
귀역무간진이 깨졌다 하나 귀기들이 잔존해 있고, 마교도를 비롯한 무인들 역시 마구 뒤엉켜 있어 난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가려서 할 수도 없었다.
빙화곡주 벽소군이 막상막하의 상대 혈불을 맞아 방해 없이 싸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덕분인지, 벽소군은 혈불과 격전을 치르면서도 여전히 냉랭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벽소군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빛살을 쏘아냈다.
쐐애액-!
순백의 빛무리가 검붉은 형상의 일부를 싹둑 잘라냈다.
푸스슥-!
“크아악-!”
혈불이 고통에 찬 표정으로 괴성을 질렀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혈마신의 삼면육비 중 머리 하나가 또 잘려 나간 것이었다.
잘린 목에서 핏빛 기운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삼면육비의 혈마신은 이제 머리와 팔이 각각 두 개씩 잘려, 일면 사비의 괴물로 작아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오랜 시간 악전고투를 펼쳐온 혈불이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는지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빙령! 빙령 때문이구나! 네년은 대체 뭐지? 어떻게 극마에 오른 마기를 밀어낼 수 있단 말이냐!”
온몸에 핏줄이 마구 불거진 혈불이 울부짖으며 발광했다.
하지만 벽소군은 침착하게 그를 주시할 뿐이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쉼없이 혈전을 치렀음에도 안색이 그다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눈동자에 투명하게 깃든 빙령의 기운이 빛을 발하기 때문인 듯했다.
‘복수!’
벽소군이 마음속에 두 글자를 되새기며, 다시금 기운을 가다듬었다.
촤촤촤-!
벽소군의 몸 주위로 빙기가 쫙 늘어서며 육각기둥의 빙석(氷石)으로 화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심혼마저 얼려서 깨부술 듯한 신령스러운 빙령이 신광을 뿌렸다.
그러더니 빙령의 밝히는 빛을 따라 빙석들이 마구 뻗어나갔다.
쩌저저적-!
푸푸푹-!
허공에 빙해가 펼쳐졌다.
빙령의 눈길이 닿는 곳에 모조리 빙석이 깔리니, 혈불에서 피어오른 혈마신을 제외하곤 모조리 얼어붙었다.
이제 혈마신의 차례.
빙극천월강의 정수, 빙령천해(氷靈天海)가 혈마신을 옥죄며 아주 커다란 빙석을 만들어 그 속에 가두었다. 이는 혈불도 옭아매는 거나 다름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흐아악-!”
혈불이 온몸을 비틀어 짜낸 진원지기를 터트렸다.
그러자 일면사비로 왜소해진 혈마신의 몸이 울퉁불퉁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파사삭-!
커다란 빙석이 깨져나갔다.
혈마신의 검붉은 형상은 마구 뜯기고 잘린 것에 분이 났는지, 세차게 핏빛 기운을 뿌려대며 이전보다 더 몸집을 부풀렸다.
핏빛 기운이 닿는 빙석은 붉게 물들다 깨져나갔다.
그러다 혈마신의 몸집이 터졌다.
퍼엉-!
극마의 핏빛 기운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한데 그 순간.
화아아-!
벽소군의 고개가 젖혀지며 허공으로 새하얀 빛이 내뿜어졌다.
거대한 빙화의 형상이 영롱하게 피어올랐다.
빙령이 빚어낸 빙화였다. 아니, 빙령 그 자체라 봐도 과언이 아니리라.
벽소군은 빙화의 형상 안에서 신광을 뿜어내며 사방에 다시 빙해를 펼쳐 나갔다.
털썩.
이윽고 한 사람의 신형이 쓰러져 내렸다.
그 앞으로 신비로운 눈빛을 흘리는 벽소군이 다가갔다.
“아버지. 드디어 복수를 완수했어요!”
벽소군의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에 맺혔다. 많은 상념이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때, 막유수가 다가오며 물었다.
“곡주님, 고생하셨습니다. 내상은 없으신지요?”
“나는 괜찮아요. 파파.”
막유수에 이어 검붉은 창을 든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벽 곡주, 원을 풀었구려. 수고하셨소.”
“탁 대협도 여기에 오셨었군요.”
“그렇소. 오랜만이오.”
“네, 오랜만입니다. 강호를 떠나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뵙네요.”
벽소군이 탁무위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어릴 적에 아버지와 함께 탁무위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거의 늙지 않은 듯했다. 다만 몹시 지쳐 보일 뿐.
“벽 곡주. 천기가 심상치 않소. 용오름이 치솟은 것 보셨소?”
“하늘의 혼탁한 기운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심히 위험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귀역무간진과도 엇비슷한 것도 피어나는 것 같군요.”
빙령으로 천지간에 소통하는 벽소군이 탁무위의 말뜻을 알아챘다.
“그렇소.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소. 맹의 무인들과 잠시 힘을 합치면 어떻겠소?”
“알겠습니다. 저희야말로 많은 도움을 받고 여기까지 쫓아올 수 있었으니까요.”
“고맙소.”
탁무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벽소군이 혈불의 시신을 보며 입을 열었다.
“탁 대협,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벽소군이 허공에 손을 그었다.
빙강 한 줄기가 뿜어져나와 혈불의 목을 그었다. 머리통이 땅에 툭 떨어졌다.
벽소군이 혈불의 머리를 빙공으로 얼린 뒤, 품에서 꺼낸 보자기로 감싸서 챙겼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본 탁무위가 그제야 물었다.
“다 되셨소?”
“네, 되었습니다.”
“그럼 갑시다.”
한데 그때였다.
“윽-!”
지상을 덮은 진세가 혼령을 심히 압박해오니 막유수가 부지불식간에 신음을 내뱉었다.
한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사방의 귀기가 다시 일제히 허공으로 치솟고, 머리가 잘린 혈불의 시신에서 혈수도 뽑혀 나와 하늘로 빨려 올라갔다.
“아니 이게 대체……!”
벽소군이 놀람을 토해내다가, 탁무위를 보며 아연실색하여 외쳤다.
“탁 대협!”
“……!”
탁무위가 눈을 부릅뜬 채 재빨리 등에 멘 구음신녀의 시신을 끌어 내렸다.
이미 숨을 거둔 그녀의 입에서 혈수가 뽑혀 오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탁무위가 얼른 구음신녀의 입을 막아보았으나, 핏줄기가 코로, 그 다음엔 귀로 빠져나왔다.
막을 수가 없었다.
“아, 안돼!”
“탁 대협, 잠시만요.”
탁무위가 구음신녀에게서 잠시 몸을 뗐다.
파슥!
벽소군이 그녀의 시신을 얼렸다. 그러자 구음신녀의 시신에 얇은 빙막이 맺히며 피가 빠져나오는 상황이 그쳤다.
“조금 무거우실 거예요.”
“괜찮소. 고맙소이다.”
탁무위가 구음신녀 염능파를 얼른 다시 둘러업었다.
“우리도 얼른 갑시다.”
그렇게 움직이는 세 사람의 뒤로, 산봉우리에서 혈운의 소용돌이 한복판으로 잿빛 신광이 쏘아져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