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혼돈천하 (3)
쿠우우-!
쿠르르르르-!
지옥의 심연에서나 들려올 법한 소리가 천공을 뒤흔들고 골수로 파고들어 한없는 공포를 자아냈다.
뇌성벽력과 폭우는 어느새 감쪽같이 멎어 들었으나, 하늘의 형상은 더욱 기괴해져 있었다.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며 하늘을 뒤덮은 흑운.
살갗을 할퀴며 휘몰아치는 스산한 바람.
그 가운데서 종전에 피어오른 용오름이 한없이 치솟아 올라 파괴적인 기세로 천지간을 꿰었다.
용오름이 천하에 드리운 혼돈기를 더 맹렬히 회오리치게 만드니, 용오름의 결을 따라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섬뜩한 빛줄기들이 마구 번쩍였다.
청광, 녹광, 황광, 홍광, 적광…… 그리고 혈광(血光)!
각각의 광화들이 혈광으로 귀결되었다.
흑운의 소용돌이는 이제 수천수만 가닥의 핏줄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야말로 혈운의 소용돌이나 다름이 없었다.
천번지복의 사태가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을 듯한, 실로 전율스러운 광경이었다.
이 광경을 계속 눈속에 담은 절대천마가 아연실색하여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없군! 혼돈기가 순식간에 천지를 휘감아 저리 변했으니, 천지괴멸의 징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지?”
“아-! 혼돈기는 정녕 우리를 집어삼킬 목적이란 말인가!”
사령신군 역시 장탄식을 흘리며 심각한 우려를 드러냈다.
그는 부서진 혈라의 얼마 되지 않는 잔존 영기를 모두 거둬들였으나, 혼돈기로부터 느껴지는 위압감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에 사령신군이 곧 시종일관 진우선의 옆에 앉아 선천지기를 불어넣고 있는 창궁진인, 검노야에게 물었다.
“진인. 혼돈기의 형세가 심상치 않소. 어찌하면 좋겠소?”
검노야는 사령신군을 바라보지도 않고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역천이 깊고 깊어 하늘의 조화가 어그러지니 혼돈마저 태동했음이라. 인과를 어디에 따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이게 우리 탓이란 말이오?”
“진인의 영체가 여기 존재하는 것 또한 역천 아니오?”
사령신군과 절대천마가 검노야에게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검노야는 묵묵히 진우선만 살필 뿐이었다.
“제길! 차라리 저놈에게 온 힘을 쏟아낼 것을! 그리 멀지도 않게 느껴지는데!”
절대천마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안타까운 기운이 점점이 흘러나왔다.
흉악한 적.
절망스러운 포식자.
그 혼돈의 기운은 걷잡을 수 없이 몸집을 불려 나가며 입을 더 크게 벌려대고 있었다.
이제 모든 걸 휘감아 빨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속절없이 끌려가야만 하는가?
“제길! 조금 전에 너무 무리했다!”
육과 혼이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졌고 온 공력을 쏟아낸지라 회복은 더디기만 한데, 적을 제대로 상대할 방법이 없으니 분통이 터져 왔다.
절대천마의 시선이 핏빛 나선을 휘감은 용오름을 타고 올라가 천공을 뒤덮은 소용돌이 혈운에 꽂혔다.
굉음이 끝없이 울리고 흉광이 계속 번쩍였다.
요동치는 피구름의 물결은 포악한 파괴욕을 마구 분출했다.
혼돈기의 기세가 불가항력이라 할 만큼 순식간에 거세지고 있었다.
사령신군 역시 그 광경을 보며 울분을 토해냈다.
“내가 이대로 순순히 당할 것 같으냐?”
창궁진인마저 딱히 답을 주지 않았으니, 이제 스스로 돌파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하늘은 언제나 나에게 불공평했지.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군. 애초에 기대 따윈 없었다. 내가 해낼 수밖에!”
사령신군이 혼돈기를 향해 결심을 선포했다.
그러더니 두 눈에서 요사한 혈광을 뿜으며, 갑자기 절대천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가슴팍에서 지독한 사기를 품은 작은 여의혈옥 하나가 튀어나왔다.
푸슥!
핏빛 섬광 한줄기가 쏘아졌다.
절대천마에게서 급작스럽게 일어난 천마신공의 묵빛 호신강기가 크게 뒤흔들리며 섬광을 소멸시켰다.
“사황! 이 비열한 놈-!”
“크흐흐. 네놈의 상태가 딱 좋아!”
“사특한 네놈 따위가 감히!”
절대천마가 손을 뻗었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천마신검이 허공을 격하고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그때, 사령신군이 쏘아낸 여의혈옥이 어느새 절대천마의 일 장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여의혈옥은 구체 표면에 수많은 불꽃을 튀기며 금방이라도 섬광들을 쏘아낼 기세였다.
저게 뿜어지면 육신이 벌집처럼 꿰뚫릴 것이리라.
한 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천마신검의 검신에 묵빛 강기가 어리자, 절대천마가 곧장 검강을 쏘아냈다.
화아악-!
콰앙-!
여의혈옥이 터졌다.
한데 소멸되는 게 아니라, 산산이 쪼개져 기운이 비산하며 허공에 핏빛 그물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서, 설마!”
절대천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혈라의 그물이 쏟아져 나오다니!
“크크크! 네놈의 혼령을 가져가 주마!”
사령신군이 득의양양하여 섬찟한 미소를 드러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후우웅-!
짙은 명부의 영기가 그들을 옭아매더니, 둘을 각기 따로 결박했다. 그 사이 혈라는 허공에서 소멸되었다.
“지, 진인!”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오!”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이 그 자리에서 움찔거리지도 못하며 거세게 소리쳤다.
[자네들이 싸우라고 잠시 놔둔 게 아니었다. 혼돈기를 보라는 뜻이었지. 한데 꼴이 참 가관이군.]
“그럴 거면 진즉에 묶지 그랬소?”
“혼돈기는 이미 실컷 봤잖소! 도와주지 않을 거면 방해도 하지 말든가!”
절대천마보다 사령신군이 더욱 광분하여 대꾸했다. 사사혈라대법으로 절대천마를 포획하기 직전이었던지라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고 있었다.
[너희 둘이 싸워서는 혼돈기를 막아낼 수 없다!]
“그럼 우리끼리 안 싸우고, 진인과 싸우란 말이오? 혼돈기에 죽나, 진인에게 죽나 내겐 똑같은 결과잖소!”
사령신군의 성난 대꾸에 검노야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건 네가 뿌린 씨앗이다. 네가 풀어내는 게 좋겠다.]
“혼돈기를 왜 내가…… 아악!”
불퉁스럽던 사령신군이 허공으로 시선을 올리다가 안구가 터져 나갈 듯이 눈을 부릅뜨며 기겁하여 소리쳤다.
“혈라가 어떻게!”
사령신군만 그리 놀란 게 아니었다.
절대천마도 고개를 들다가 저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트렸다.
“귀, 귀역무간진?”
허공에서 커다란 구를 그리며 펼쳐져 내려오는 기운이 있었다.
구는 빽빽하게 짜인 핏빛 그물의 형태였고, 그 안에는 자욱한 귀무가 천하를 지울 듯이 내리고 있었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삼문협 일대를 모조리 삼키고도 남을 정도였다.
“미쳤다, 미쳤어!”
사령신군이 실성한 듯이 괴성을 질렀다.
절대천마는 떨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몇 차례 가로젓다가 의문을 흘렸다.
“저, 저게 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아무래도…… 혈라귀역무간진이라 해야겠지.]
“그럼 아까 호의 시신을 가져갔던 게…….”
절대천마가 비통한 마음에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사령신군이 그런 절대천마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천마! 적문강 그놈은 대체 어떤 놈이더냐? 사도 무학에 정통한 나로서도 마를 품을 방법은 찾아낼 수 없었거늘, 어찌 저런 게 나올 수 있단 말이냐!”
“나한테 묻지 마라. 나는 아직도 네놈에게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절대천마가 원한어린 싸늘한 눈으로 사령신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령신군은 그 시선을 무시한 채, 허공을 바라보며 기운을 낱낱이 살피기 시작했다.
“설마 귀로써 사와 마를 아우른단 말인가? 아니다. 극사를 바탕으로 귀와 마를 머금었는데, 어찌 귀로 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답이 없는데…….”
사령신군이 그렇게 마구 중얼거리다가 검노야에게 결론을 전했다.
“진인! 저건 당장은 어렵소. 게다가 공력마저 없으니, 수를 낼 방법조차 없소.”
하지만 검노야는 사령신군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에 들려온 미약한 신음성 때문이었다.
“흐으으…….”
진우선이 가느다랗게 숨을 토해 냈다.
검노야가 즉각 반색하며 진우선의 기운을 살폈다.
[아! 천우신조로 생명의 불씨는 살렸구나!]
검노야가 불어넣은 선천지기의 일부가 천만다행으로 방금 막 진우선의 진원지기에 안착하여 혼백의 마지막 끈을 붙들었다.
절대천마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허! 말도 안 되는군. 파천마혼에 파천마신까지 연거푸 맞고도 혼백을 붙들었다니. 이게 신선경의 능력이란 말인가.”
원래 극경을 넘어서면 선천지기를 느끼고 다룰 수 있으나, 스스로 불러들인 게 아니면 진원지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러니 파천마신의 영향으로 혼백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던 진우선에게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아무리 창궁진인이 득도했다 하여도 이는 불가해한 일이었다.
“천명이 다하지 않았으니 살아났겠지. 천마 네놈이 아까 나한테 말하지 않았느냐!”
“정말로 천명이란 게 있단 말인가!”
절대천마는 사령신군과 마찬가지로 운명 따윈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이럴진대 어찌 허투루 넘길 수 있을까.
하지만 검노야는 그런 절대천마의 말에 반응할 틈조차도 없었다.
검노야가 곧장 손을 들어 올리니, 진우선의 품 안에서 작은 목함 하나가 빠져나왔다.
검노야가 얼른 목함을 열어 상청영단 한 알을 집어 들었다. 태산영기의 그윽한 향기를 흘려대는 이 신단은 일전에 상청선문의 백관우사에게서 건네받은 감사의 증표였다.
화아아-!
검노야의 손에서 빛이 일었다. 상청영단을 먹어서 흡수하는 과정조차 생략시키고 곧장 스며들 수 있도록 진기로 화한 것이다.
빛이 물방울처럼 진우선의 단전으로 떨어져 내려 흡수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절대천마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뇌까렸다.
“허! 신단마저 가지고 있었소?”
“정녕 천명이 내렸음인가? 다 준비되어 있을 줄이야.”
사령신군 역시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갑자기 몸서리치며 고통스러워했다.
“이런! 도대체 무슨 신단의 영기조차 이리 역겹지?”
태산영기의 정수가 담긴 상청영단인지라, 미약하게나마 담긴 명토의 기운에 속이 거북해진 까닭이었다.
어쨌거나 일련의 상황을 보며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이 상념에 빠졌다.
그때, 검노야는 진우선의 육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세히 어루만져갔다.
[다행이구나, 우선아.]
“흐으으…….”
검노야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느꼈는지 진우선이 옅은 신음을 흘려댔다.
검노야가 그런 진우선을 잠시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허공에 떠 있는 목함에서 상청영단 두 알을 더 꺼내어, 빛으로 녹여냈다.
그렇게 일련의 행동을 반복하며 상청영단 세 알을 모두 진우선에게로 부어 넣었다.
[십주야는 걸리겠군.]
“허어-!”
열흘 후면 회복하고 일어난다는 말에 절대천마가 탄성을 흘렸다.
그때, 검노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허공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순간.
쿠르릉-!
일진광품이 휘몰아치며 눈앞의 공간이 찢어졌다.
그 속에서 잿빛 검 한 자루가 위엄찬 광휘와 함께 흑암천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월검이었다.
검노야가 검을 움켜쥐며, 사방천지를 둘러보았다.
혈라귀역무간진이 어느새 땅끝까지 내려 일대에 귀곡성과 사람의 비명이 가득 퍼지고 있었다.
[귀기와 혼백이 빨려들기 시작하는군.]
“서, 설마 이렇게…… 천하를 먹는다는 말이오?”
[혼돈이 천하를 집어삼키면, 천하가 종적도 없이 사라지며 혼돈에 빠지겠지.]
“진인. 혼천과는 다르게 말씀하시는 것 같소.”
[혼천은 역천의 기운이 하늘을 어지럽혔으나, 그래도 하늘이었다. 하지만 혼돈의 세상에선 하늘이란 게 아예 없을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말이오, 진인?”
사령신군이 물었다.
하지만 검노야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쿠쿠쿠우우우우-!
쿠르르르르-!
혼돈의 혈운이 세차게 요동치며, 거센 노성을 질러댔다. 칼날 같은 바람은 산봉우리를 잘라버릴 듯 몹시 휘몰아쳤다.
현월검에 선명한 잿빛 기운이 몰려들수록 더욱 요란스러웠다.
바로 그때.
화아-!
검노야의 눈이 열리며 신광이 흘러나왔다. 그의 전신에서도 범접할 수 없는 후광이 뿜어졌다.
한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쏴아아아아-!
현월검에서 솟구친 한 줄기 잿빛이 허공을 꿰뚫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혼돈기의 한복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