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206화 (206/225)

206.

#운명의 굴레 (4)

‘축지성촌을 익힌 극사경의 사도인이라니!’

사령신군은 그간 희노애락 등의 감정에서 매우 무뎌진 줄 알았으나, 지금의 경악은 어떠한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신마황동의 산꼭대기로 다시 오르며 어떤 방법으로 조용히 혈라를 가져갈 수 있을지만 궁리했었는데, 그를 기다린 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네놈의 숨겨진 패였잖아!”

절대천마가 버럭 소리쳤다.

“어이없는 소리 하지 마라! 나 역시 그를 지금 처음 알게 됐으니까!”

“적문강을 정말 모르시오?”

진우선이 사령신군에게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모른다! 살아생전에 나 외에 누군가가 극사경에 오른 것조차 오늘 처음 느꼈다!”

“그걸 믿으라고?”

“이건 사실이다. 내가 아무리 신뢰가 없다고 하나, 내 무공과 술법마저 남에게 마구 넘겨줬을까!”

“그럼 저건 뭐요? 사사혈라대법 아니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지?”

사납게 일갈하던 사령신군의 기세가 갑자기 푹 꺾였다.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여 말문마저 꼬이고 있었다.

사사혈라대법은 여태껏 강호에서 단 한 번도 펼쳐진 적이 없었다. 아니, 아예 자신의 머릿속 밖으로 나간 적조차 없는 술법이었다.

한데 그 이름을 진우선에게서 들을 줄이야!

“적문강이 다 말하고 갔소.”

“미치겠군. 적문강? 그놈은 대체 어떤 놈이냐?”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요? 당신의 사도무학을 이었는데.”

“나는 모른다. 정말로 모르는 놈이다! 그의 존재를 방금 처음 알았어!”

“그럼 일단은 믿어보겠소.”

진우선이 사령신군을 진득하게 노려보더니, 사령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혈라를 푸시오.”

“그럴 수는 없다!”

“그러는 게 좋을 거요. 반령반신이 아니라 진체로 온 이상, 이번엔 살아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설마 적문강이 반령반신마저 말하고 갔더냐?”

“반령반신에 사령의 영기가 절반 이상 들어갔다더군. 아까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과연 진체의 느낌이 다르긴 하오.”

“웃기는 소리가 따로 없군. 내가 왜 사령신군이라 불리는지 아느냐? 반사령의 경지에 올라 영(靈)과 신(身)이 공존하여 항시 반령반신이기 때문이다. 지금 역시 반령반신이고. 크크큭!”

사령신군이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하지만 진우선의 안광은 여전히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허장성세가 따로 없군. 내가 그걸 두 번이나 속을 것 같소?”

“그깟 너덜너덜한 혼령으로 잘도 지껄여대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말이지.”

절대천마 역시 진우선과 비슷하게 사령신군을 꿰뚫어 보면서 말을 이었다.

“사황! 네놈은 이리 오래 살아도 참으로 가소롭구나. 스스로는 답이 없으니 온갖 잡술을 다 끌어다가 여태까지 살아놓고, 이제 진인의 영체로 네놈의 혼령을 정결케 해 탈경에 오르려는 것 아니더냐?”

“온갖 잡술이라니! 감히 불멸을 이루는 사도 무학을 뭐로 보고!”

절대천마의 동공에 멸시의 빛이 가득 차올랐다.

“잡술이지, 이혼대법(離魂大法) 따위는. 별 나부랭이 같은 술법으로 불멸을 이루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사도 무학이야말로 천하의 학문을 집대성했거늘, 한낱 마도 종자가 능멸하려는 것이냐! 네놈이야말로 패악한 무공을 익힌 주제에!”

사령신군이 대노하여 외쳤으나, 절대천마는 콧방귀도 뀌지 않은 채 조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천하 학문? 후후후. 누더기 같은 혼령을 유지하기 위해 극사지체로 옮겨탄 주제에 쓰잘머리 없이 말만 늘었군.”

“감히 천 년의 사도 무학을 집대성한 일대종사를 뭐로 보고!”

사령신군이 윽박지르며 씩씩 콧김을 뿜었다.

하지만 절대천마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그 틈에 진우선에게 물었다.

“근데 아까 적문강 그놈이 정도 무공을 빠르게 익혀냈다는 건 무슨 말이냐?”

“봄에 마영을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도 무공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소.”

“그럼 일 년이 되지 않았는데, 그 정도였단 말이냐?”

“그렇소.”

절대천마가 진우선의 대답을 들으며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흑야!”

“예, 지존!”

“그놈은 본교에서 얼마나 많은 소임을 수행해왔느냐?”

“마영은 이곳 삼문협의 대계를 준비하며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본교가 다 그놈 손아귀에 있었겠군.”

“송구하옵니다. 지존.”

흑야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다. 내가 진즉에 봤어야 하거늘, 종주들만 접견을 허락한 게 잘못이었어.”

“어찌 그게 지존의 실수이겠습니까? 교도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저의 책임입니다.”

“그리 말할 필요 없다. 극사경의 술법으로 제 놈을 가렸을 테니, 네가 극마를 넘어섰어야만 확인할 수 있었지. 결국, 나밖에 없었던 거야.”

“아…….”

흑야가 탄식했다. 절대천마가 얼마나 피 토하는 심정으로 말하는지 절절히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곧 절대천마가 선언했다.

“그는 마가 아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근처에서 멀리 떠나지 않았다. 잔백마군의 주검을 가져간 술법의 대가이니,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르겠군. 괘씸하게도 또 꾀하는 게 있는 모양이야.”

“아직 혈련수라종주와 월령마화종주가 살아있습니다. 저는 얼른 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하도록. 종주들은 그간 천하의 핍박을 견디며 본교에 헌신했는데, 이제 너 말고는 둘밖에 남지 않았어. 나는 그들마저 잃고 싶진 않구나.”

“명심하겠습니다.”

한데 그때였다.

어느새 혈라의 사령체 근처에 있던 사령신군이 재빠르게 기운을 확 쏘아냈다.

그러더니 산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찰나.

스릉-!

어느새 검집에서 뽑혀 나온 광륜검이 새하얀 빛무리를 뿌리며 쏘아져 나갔다.

“컥!”

사령신군이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냈다. 금빛 영기가 휘몰아치는 광륜검이 그를 꿰뚫은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도 모자라 광륜검이 신묘한 영기를 허공에 마구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금빛 운무가 넓게 펼쳐지다가 둥근 테를 이루더니, 사령신군의 몸 안으로 꽉 쪼여 들었다.

“으아아아악!”

갑자기 사령신군이 온통 사색이 된 채 돼지 멱 따는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진우선이 손짓하자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된 사령신군이 허공으로 날아오더니, 곧 진우선의 발치 앞에 내던져졌다.

“후우-. 후우-.”

진우선이 숨 가쁜 호흡을 토해냈다.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심전력을 다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같잖지도 않군. 하는 짓이 이리 똑같을 줄이야!”

절대천마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사령신군은 그 말에 반응할 힘도 없이, 진우선을 보며 떨리는 눈으로 간신히 말을 꺼냈다.

“어, 어떻게……!”

“내가 진체를 느꼈다고 말했는데, 설마 허투루 들었소?”

“말도 안 돼…….”

사령신군이 눈을 부릅뜬 채 힘겹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진체를 살피니, 혼령도 물렁물렁하고 약하더군.”

그랬기에 선천지기와 명부의 영기를 주축으로 하여 만들어진 광륜의 테에 혼령이 옥죄여 사로잡힌 것이다.

진우선이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광륜을 풀고서 명령했다.

“혈라를 푸시오.”

“싫다.”

“죽기 싫으면 푸시오.”

“네놈 같으면 풀겠느냐? 그리고 푼다고 살려주지도 않겠지.”

사령신군이 적반하장으로 진우선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진우선이 손을 슬쩍 오므렸다.

콰악-!

“으아아아악-!”

사령신군이 숨이 넘어갈 듯한 비 명을 질러댔다. 광륜의 포박이 혼령을 쥐어짠 까닭이었다.

진우선이 다시 한번 물었다.

“푸시오.”

“크크크. 차라리 나를 죽여라!”

“죽고 싶소?”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라. 나를 죽이는 순간, 혈라는 소멸한다. 내 반령반신으로 만들었기에, 혈라 역시 내 영체나 다름없지.”

“……!”

진우선이 쉬이 대답을 못 하자, 사령신군이 계속 이죽거렸다.

“내가 죽는 순간, 창궁진인도 소멸한다. 그렇다면 너는 스승을 해한 제자가 되겠구나. 크크큭! 내가 그 모습을 살아서 볼 수 없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군.”

“당신의 영체만 소멸할 거요!”

“어림도 없는 소리. 내가 괜히 반령반신에 심었겠느냐? 만에 하나의 상황까지 전부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혈라의 사령체 하나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사령신군이 이 기세를 몰아 진우선에게 명령했다.

“너야말로 이걸 놓아라! 그럼 풀어주마.”

“뭘 믿고 그래야 하지?”

“그럼 나는 너를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너부터 나를 믿어야 하지 않느냐!”

하지만 진우선은 본질부터가 영악하교 교활한 사령신군을 믿을 수 없었다.

그때, 절대천마가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흑야는 이미 산 아래로 내려간 상황이었다.

“재밌는 상황이 됐군. 둘이 서로를 묶고 있어, 나만 자유롭지 않은가! 내가 여기서 이런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후후후!”

진우선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어렸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우르르릉- 콰쾅-!

밤이 내려 천지가 깜깜한 와중에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터졌다.

이번에는 번개가 신마황동의 산봉우리만이 아니라 삼문협 일대에 내리꽂혔고, 천둥소리는 하늘과 땅이 뒤집힐 정도로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 정도가 한낮에 내리쳤던 뇌전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맙소사!”

부지불식간에 하늘을 올려다본 진우선이 탄식을 터트렸다.

“혼돈이 휘몰아치고 있소. 사방의 빛을 빨아들일 줄이야…….”

“빛만이 아니다. 혼돈이 천기마저 빨아들이고 있어! 어쩌면 우리의 빛마저 집어삼킬지도!”

사령신군마저 천기의 움직임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진우선의 뇌리로 스쳐 가는 한 생각이 있었다.

“저건 혹시…… 금천?”

***

천지간에 요란스러우나, 전혀 그렇지 않은 곳이 있었다.

바로 혈라의 사령체 속이었다.

[……반령반신의 감옥이라니. 나를 가두기 위해 이런 것까지 만들어냈을 줄이야!]

혈라 내부는 인세와 분리된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기(氣)도 없고, 시공(時空)도 없는 듯했다.

검노야가 좌정하고 앉은 채 주변을 계속 살폈다.

[허! 그래서 스스로 사령신군이라 했구나. 영(靈)에는 한계가 없으니, 사로써 영을 이루어가며 인세를 벗을 작정이었구나.]

검노야가 사령신군이 꾀한 탈경의 이치를 깨달았다.

[하지만 선천지기로 사령체에만 파고드느라 제 혼령이 낡고 헤졌는데, 이걸 받아낼 수 있단 말인가? 영을 쇄신해야 할 텐데…….]

사령을 이루기 위해 혼령이 너덜너덜해지며 거듭해 왔는데, 오히려 사령을 온전히 깨닫게 되면 그 혼령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모순이었다.

하지만 곧 그 답을 찾았다.

[그래서 나를 택했구나. 허허!]

검노야는 어이가 없어 너털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그와 함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 안에서는 시공이 없으니, 빠름과 늦음이 없고, 좁음도 넓음도 없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다 잊어갈 뿐이런가.]

검노야의 음성에서 무력해져 참담한 마음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천마와 사황은 어찌한단 말인가? 나의 업보이거늘.]

무게를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업력의 걱정도 흘러나왔다.

생각을 이어가자 느닷없이 끊어져버린 단 하나의 소중한 인연도 떠올랐다.

[우선아!]

진우선에 대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긴 시간을 함께했으나 헤아려보니 삼 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이리 보면 짧은 시간 같으나 그간의 추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길었다.

수많은 상념이 흘러갔다.

[그러고 보니 우선이에게 내 모든 걸 다 주고 왔지 않은가. 제 길을 간 지 오래며, 스스로 해야 할 일을 깨달았으니, 더 걱정하여 무얼 할까.]

바로 그 순간! 검노야는 이승에 대한 어떤 끈이 삭뚝 잘려 나가는 걸 느꼈다.

[허허! 아무것도 없으니 나마저도 없는 것이구나.]

심상 속이 텅 비워진 게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새하얀 빛무리가 가득 차올랐다.

빛무리가 단박에 영체를 채우고, 사방으로도 찬란히 번져 나왔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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