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운명의 굴레 (3)
“정말 대단하군. 이 꼴을 하고서도 죽지 않았다니!”
산봉우리에 가장 먼저 도착한 금면인이 나동그라진 진우선과 절대천마를 바라보며, 기가 막힌 듯이 탄성을 흘렸다.
이어서 허공에 둥실 떠 있는 바위 모양의 사령체(邪靈體)를 살폈다.
“허! 혈라마저 반령반신으로 펼쳤었구나! 그래서였어.”
금면인이 놀람을 토해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반선경에 오르지 못한지라, 영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나마 극경을 넘어서서 언뜻언뜻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종전에 서쪽 산봉우리에서 육안으로 혈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게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는 게 먼저다.
파팟-!
금면인이 진우선과 절대천마에게 극사경의 내력을 한 줄기씩 뿜었다.
한데 그때였다.
투웅-!
묵빛의 호신강기가 극사경의 내력을 튕겨냈다.
“큭! 내가…… 천마인 내가…… 크윽!”
절대천마가 부들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금면인은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떴다.
“천마신공이 저절로 움직였어?”
“크으…… 크흐흐…… 천마신공이 괜히 천마신공인 줄 아느냐? 흐흐흐.”
천마신공은 마의 근원이자 정점이다. 공연히 절대의 마공으로 칭송받는 게 아니었다. 수많은 암흑마기 가운데 홀로 순전한 묵색 기운을 피워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데 절대천마가 가진 신위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후쿠쿵!
사방에서 일진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곧 절대천마에게로 선천지기가 몰려들더니, 정수리의 백회혈로 스며들었다.
번쩍!
절대천마의 동공에서 묵빛 마기가 줄기줄기 뻗쳐 나오기 시작했다.
“혼령이 돼지처럼 비대하군. 네놈은 누구지?”
절대천마가 서슬 퍼런 눈으로 금면인을 노려보았다.
상처가 가득한 그의 전신은 피투성이였으나, 이 순간 그런 건 금면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 나는……!”
금면인이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심혼을 옥죄어 오는 파천마혼의 기운에 힘겹게 저항하는 모습이었다.
“나요……!”
금면인이 전신에 비 오듯 땀을 흘리며 파천마혼의 압제를 간신히 버텨냈다.
그러던 중, 또 하나의 거센 기파가 산꼭대기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우웅-!
황금용이 허공을 크게 휘저으며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한없이 길게 드리워진 용의 몸통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금빛 휘광을 머금은 한 사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지, 진우선!”
금면인이 당황하여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인제 보니 절대천마만이 아니라 진우선마저 호신강기를 두른 채 깨어난 것 아닌가.
극사경의 기운을 쏘아냈건만 목숨을 끊어내기는커녕, 오히려 둘 다 정신을 차리도록 자극한 꼴밖에 되지 않았다.
휘이익-!
광채를 두른 금룡이 진우선을 휘감으며 조심스레 내려앉더니, 여의주를 품듯이 감싸 안았다.
그건 생명의 의지이며 수호하는 힘인 패왕금룡신공이었다.
금광이 은은히 빛을 발하며 진우선에게 깃들어 정기신을 단박에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진우선의 초췌했던 얼굴에 생기가 확 돌았다.
절대천마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파천마신에도 죽지 않았다고? 대체 어떻게?”
“후우-. 그게 파천마신이었소? 어쩐지 혼백이 발라지는 줄 알았소. 정신이 아득하더군.”
진우선이 한숨을 내쉬며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파천마신의 일격에 당했던 순간을 떠올리자, 아직도 그 힘의 잔류가 남아 머릿속을 쿡쿡 쑤셔오는 듯했다.
몸이 부서지고 혼이 끊어지는 듯했던 극심한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파천마신(破天魔神).
이는 마의 근원인 천마신공에 파천마혼의 정수마저 담아내어 인세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는 탈마경의 무학이었다.
그 이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깊으니, 이를 창안해낸 절대천마마저도 아직 초입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 파천마신을 받아냈으니 진우선의 심정이 오죽할까.
그리고 파천마신을 펼쳐낸 절대 천마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진짜 믿을 수가 없군.”
“나야말로 궁금하오.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 거요?”
“네놈의 선무는 도의 근원을 품어 격이 높았으나, 파천마신 역시 진마경을 넘어 탈마경으로 나아가는 무학이다. 부족할 게 없지. 그러는 네놈은 대체 어떻게 살아난 것이냐?”
“글쎄?”
머릿속에 한 존재의 모습이 떠올랐으나 진우선은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혼백이 쪼개질 듯하던 순간, 검노야와 이어져 있던 명부의 영기가 끊어졌다.
‘스승님? 설마?’
이는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충격에 지독한 고통마저도 잠시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보니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저것 때문이었어!’
사령신군의 기운이 느껴지는 수상쩍은 사령체.
이게 바로 소멸하던 사령신군에게서 뿜어졌던 불길한 기운의 정체이리라.
‘저 안에 포박되신 걸까?’
사령체의 내부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으니, 진우선은 심중에 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핏!
진우선이 명토의 기운을 즉각 출수했다.
그러나 사령체에 부딪힌 영기가 파고들지 못하고 퉁- 튕겨 나왔다.
이에 광륜의 오행진기를 내뿜어 보고, 금빛 선기(仙氣)마저도 날려 보았으나, 역시 똑같이 퉁- 튕겨 나올 뿐이었다.
“대체 이건 뭐지?”
진우선에게서 당혹스러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 금면인이 몸을 슬쩍 뒤로 내빼면서 입을 열었다. 진우선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면서 절대천마의 억압이 다소 느슨해진 틈을 탄 것이다.
“진우선! 지금 혈라를 열고 싶은가 본데, 아무리 네놈이 대단하다고 해도 쉽게 열리진 않을 거다. 차라리 대법을 푸는 게 빠를 테지.”
“대법이라고? 이게?”
“사사혈라대법이다. 사령신군이 반령반신을 펼치면서 대법을 심어 넣은 채로 여기에 온 거였다.”
“하! 기분 정말 더럽군. 내가 사황 따위에게 이용당했을 줄이야. 간악한 놈!”
절대천마가 이를 바드득 갈며 분을 터트렸다.
“그래서 아까 죽지 않은 사령신군이 지금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 건가? 이걸 가져가려고?”
“그렇겠지. 사령의 영기가 절반 이상 들어간 반령반신을 터트리면서까지 노렸던 거니까 말이야. 원래대로라면 혈라의 끈으로 끌어당겼어야 하는데, 끈이 끊어진 거 같군.”
“크큭! 하는 짓이 정말 간교하기 짝이 없군. 인제 보니 진인의 영체를 먹어 치워 제깟 놈의 너덜너덜한 혼령을 갈아치우려 했던 거였구나.”
금면인이 사령신군의 뜻을 상세히 말하자, 절대천마가 단박에 그의 속셈을 알아챘다.
“적문강! 그럼 나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 한단 말이냐?”
진우선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화난 음성으로 금면인, 적문강에게 물었다.
사실 진우선은 그가 나타났을 때부터 정체를 알고 있었다.
“반사령의 경지에 오른 사령신군의 대법이다. 반령반신으로 펼쳐 낸 거지. 그러니 혈라를 직접 깨려면 아마도 인세에 구속받지 않는 탈경에 올라야 가능할 거다. 아니면 대법을 푸는 수밖에.”
“사령신군을 죽이면?”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혈라만 없어질 수도 있고, 저 사령체 전체가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제길!”
진우선이 똥 씹은 듯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절대천마가 그런 진우선을 보며 비웃었다.
“크크크! 꼴좋구나. 창궁진인이 없으니, 이제 네놈 혼자서 이곳을 어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 그 게 아니겠어. 스승이 혈라에 갇혔는데 혼자 도망가진 못하겠네. 정파 놈들은 으레 그래왔으니까.”
“내가 왜 도망가겠소? 혹시 지금 올라오는 극마경의 마인을 염두에 둔 거요?”
“그럴 리가. 나는 그저 사제지정이 어떤 건지 궁금할 뿐이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누구한테 무언갈 배워본 적 따위가 없어서 말이야. 후후후!”
계속 이죽거리는 절대천마에게 진우선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때, 적문강이 진우선에게 의문을 던졌다.
“그런데 네놈에게 어려 있는 그 황금빛 광채는 뭐지? 천하에 그런 무공도 있었나?”
적문강의 눈빛에 깃든 탐심이 심히 불쾌했다. 그에 진우선은 대답을 주지 않은 채 적문강을 노려보며 물었다.
“적문강 네놈도 금천에 속해 있었구나! 네놈은 여기 왜 나타난 거냐? 어찌 그리 빨리 정도의 무공을 깊이 익혀낸 거지?”
“금천? 그렇군. 아무튼, 괴상해. 대체 어떻게 정사마의 공력을 한 몸에 지닐 수 있는 거지? 게다가 극사경을 넘었다니!”
천(天)이 새겨진 금면을 보고서 왜 금천인지 바로 알아챈 절대천마가 그의 내력에 대해서도 의문을 드러냈다.
적문강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진우선과 절대천마는 그보다 경지가 높아 숨길 수가 없었다.
“후후후! 내 비밀이오. 그리고 금천이라 불러줘서 고맙소. 이름이 그럴싸하고 멋있어 보여, 그걸로 바꿀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소. 아마 선천지기의 금룡이 전신을 휘감는 그 무공이 있었으면 진즉에 바꿨을 거요.”
적문강은 두 절대자 앞에서 하나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오만방자한 태도로 능글맞게 대꾸했다.
한데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던 진우선이 절대천마에게 따지고 들었다.
“근데 천마 당신도 저놈을 모른단 말이오? 저놈은 천마교도이기도 한데?”
“뭐라고?”
절대천마가 오히려 반문했다.
바로 그때였다.
“……!”
적문강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이형환위의 이치를 더한 축지성 촌의 술법을 펼쳐 단박에 뒤로 휙 물러나더니, 무언가를 낚아채고는 몸을 훌쩍 날렸다.
“무슨 짓이야?”
“호야-!”
진우선과 절대천마가 놀라서 달려드는 사이, 적문강은 산 아래로 부리나케 달아났다.
절대천마가 즉각 기운을 끌어올렸다.
쐐애애액-!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땅바닥에 팽개쳐져 있던 천마신검이 묵빛 강기를 머금고 허공에 불쑥 치솟아 올라 적문강에게로 쏘아지고 있었다.
“제길! 갑자기 금천의 본색을 보일 줄이야!”
인제 보니, 적문강은 세 사람 간의 화제를 혈라의 사령체로 몰아가며, 은밀하게 잔백마군의 주검을 확인한 게 틀림없으리라.
콰앙!
허공을 격하고 날아간 천마신검이 적문강을 꿰뚫어버린 순간, 폭음이 터져 나왔다.
한데 폭음 뒤에 있어야 할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적문강이 환영에 공력을 담아 천마신검의 희생양으로 남겼던 까닭이었다.
“제길! 제길! 제-길-!”
급히 이기어검술을 전개했으나 적문강을 놓쳐버리고 만 절대천마가 악을 마구 질렀다.
그는 내공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이토록 분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걸,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놈은 대체 누구였느냐?”
“흑암무영종의 마영이오.”
“흑암무영종이라고?”
싸늘한 음성을 내뱉은 절대천마에게서 매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바로 그때, 검은 장포를 걸친 사내가 산꼭대기에 올라섰다.
“지존이시여. 깨어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흑야! 마영을 아느냐?”
절대천마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마영은 제 수하입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가 방금 이곳을 다녀갔다. 잔백마군의 시신을 들고.”
“아! 종전에 만나서 명령했었는데, 벌써 다녀갔단 말입니까?”
“뭐라고? 그걸 명령했었다고?”
“산 아래에서 교도들을 이끌어 본교의 성세를 알리고, 소인이 지존을 모신 후에 귀문탈백종주의 시신을 챙기라 명했습니다.”
“하! 너도 몰랐구나! 그놈은 금천에 속해 있었어!”
“금천 말입니까? 최근에 암중에서 획책한다던?”
“완전히 당했구나! 그럼 그놈이 정사마의 무공을 다 지녔고, 극사경에도 올랐다는 것 역시 몰랐겠군.”
“아-! 소인은 정말로 몰랐습니다.”
흑야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탄식을 흘리며, 절대천마의 옆에 선 진우선을 쳐다보았다. 금천이란 표현의 진우선에게서 시작되었단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 맞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가 금전을 이끄는 모양입니다.”
“그럴 수가!”
적문강이 직접 금천이라 명명하고 싶다고 말했으니, 그게 틀림없으리라.
흑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법이 극성을 이뤘다고 해도, 어떻게 이리 빠르게…….”
“사황의 축지법을 쓰더군.”
“마, 말도 안 됩니다! 사황이 둘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혹시 사령신군이 숨겨둔 패였던 건 아닐까요?”
흑야가 급히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축지성촌을 펼치며 동쪽에서 산꼭대기에 올라온 사령신군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나 말고도 축지성촌을 쓰는 자가 있다고?”
“몰랐소?”
“축지성촌의 술법은 극사경에 올라야만 펼칠 수 있거늘. 나는 누구한테도 전수한 적이 없는데!”
“그럼 누가 안단 말이오?”
“나야말로 네놈들에게 그걸 물을 생각이었어! 종전에 여기 있던 극사의 사도인이 누구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