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204화 (204/225)

204.

#운명의 굴레 (2)

신마황동의 동쪽에 자리한 산 중턱에 사이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동혈이 있었다.

그 깊숙한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인영.

바로 사령신군의 진체(眞體)였다.

“컥! 커헉-!”

한참 동안 좌정하고 있던 사령신군이 별안간 눈을 번쩍 뜨는 것과 동시에 피를 토해냈다.

굳건히 호위하고 있던 대호법 해금파가 즉시 그의 안색을 살피며 다가왔다.

“련주님!”

“대호법! 나를 부축해라.”

해금파가 얼른 사령신군을 붙들었다.

사령신군은 입가로 흐르는 선혈을 닦아낼 틈도 없이, 곧장 주변을 에워싼 영기의 흐름을 살피며 물었다.

“좌호법. 대법은 지금 어떤 상태지?”

“조금 전에 영기가 크게 흔들리며 균열이 생겼는데, 곧 깨질 것 같습니다.”

“반 각! 반 각이면 된다. 버텨라!”

“해내보겠습니다.”

좌호법 사마대륜은 사색이 된 얼굴로 코와 입에서 선혈을 흘려대면서도, 사령신군의 명령에 복종했다.

사령신군이 펼쳐낸 사령군림대벽(邪靈君臨大壁)을 조율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사령군림대벽은 사령을 위한 영벽(靈壁)으로, 하늘의 눈을 피해 천지간의 기운을 사령에게 주입하고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대술법이었다.

사령신군은 그렇게 배가된 사령의 힘으로 은밀하게 또 하나의 대법을 펼친 상태였다.

“우호법은 총군사에게 일천 사도 무인들의 진격을 명하라! 그를 혈라(血羅)로 포박했지만 끌고 오지는 못했으니, 얼른 몸을 추슬러서 가져와야 한다! 그 시간을 벌도록!”

“련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우호법 사마철륜이 곧장 대답하고는 신형을 날려 사령군림대벽 밖으로 빠져나갔다.

“대호법은 내게 혈사십침대법을 펼치도록!”

“련주님! 설마 그것까지…….”

“어서-!”

한시가 급한 사령신군이 말도 채 듣지 않고 윽박질렀다.

그에 해금파가 얼른 품에서 대침을 꺼내 백회혈부터 용천혈, 기해혈 등을 비롯한 사령신군의 십대 사혈을 푹푹 찔렀다.

주룩!

사혈에 침이 들어갈 때마다 검은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사령신군에게 죽음의 기운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혈사십침대법(血邪十針大法)은 방문좌도의 수법 중 하나로, 십대 사혈을 찔러 인간이 지닌 생명의 힘인 진원지기를 끌어내는 구명대법(救命大法)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죽음을 한 번 비껴갈 수 있으니, 사령신군이 이를 해금파에게 전수한 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자 한 바였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푸욱.

해금파가 명문혈에 마지막 대침을 꼽았다.

그 순간, 사령신군의 얼굴이 시꺼메지며 죽음의 기운이 어렸다.

“련주님!”

심장이 떨어진 듯이 놀란 해금파가 당황하여 외쳤다.

바로 그때.

우우웅-!

사방의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운기행공에 빠진 사령신군에게로 선천지기가 몰려들더니, 정수리 백회혈로 쏙 빨려 들어갔다.

사령신군의 얼굴이 확 밝아지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잠시 빠져나갔던 진원지기의 자리에 선천지기가 채워진 까닭이었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푸스스-.

어느새 사령신군에게서 짙은 영기가 흘러나와 사령군림대벽의 기운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아! 련주님!”

사령신군이 힘을 회복한 걸 바로 알아챈 좌호법 사마대륜이 반색하여 외쳤다.

“후우-!”

이윽고 사령신군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러고는 얼른 사마대륜에게로 달려갔다.

사마대륜은 이제 피를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대술법인 사령군림대벽을 목숨 걸고 일 각 가까이 혼자 버텨낸 터라, 죽기 일보직전이나 다름없었다.

“고생했다.”

“가장 애쓰신 건…… 련주님이시지요.”

사마대륜이 사령신군의 웅혼한 내력을 전해 받으며 옅게 웃어 보였다.

“생사법왕의 후손답구나.”

“감사……합니다.”

생사법왕은 백 년 전 삼대법왕의 한 사람이며, 사황이 가장 총애한 인물이었다.

사령신군은 그를 언급할 정도로 지금 사마대륜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악중뇌 사마광후가 괜히 사마대륜에게 세가를 맡기려 한 게 아니었으리라.

어쨌거나, 잠시 후 낯빛이 원래대로 돌아온 사마대륜이 사령신군에게 물었다.

“련주님은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해금파도 이제야 자초지종을 묻기 시작했다.

“련주님. 여쭙기 송구하오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하아-! 그가 신선경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그라면, 진우선을 수호한다 하셨던 기운 말씀이십니까? 대체 누구였기에…….”

“창궁진인! 그는 백 년 전의 검선 창궁진인이었어!”

“아!”

해금파가 장탄식을 흘렸다.

사령신군이 해금파를 위시한 삼대호법에게 비술로써 발견한 천기에 대해 간략히 말해준 바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우려됐던 기운의 정체가 바로 무신 창궁자였을 줄이야!

“아직도 아찔하군. 혈라를 함께 엮지 않았다면, 반령반신이 베인 순간 진체(眞體)마저 무너졌을 것이다.”

“그 정도였습니까?”

“그래. 그리고 처음이라 통했다. 두 번은 안 될 일이었어.”

사령신군이 흑안에서 사이한 눈빛을 짙게 뿜어내며 단정 짓듯 말했다.

육신의 피로 사사혈라대법(邪邪血羅大法)을 펼쳐야만 만들 수 있는 혈라는 영체마저 가둘 수 있는 완전무결한 그물이었다.

그걸 사령천인기(邪靈天刀氣)의 비술인 반령반신에 심은 건, 다시 생각해봐도 완벽한 한 수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실패했으리라는 걸, 사령신군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렇다면 절대천마와 함께 있는 순간을 노린 것 역시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맞다.”

진우선은 혼자이지만, 둘이나 다름없는 까닭이었다. 홀로 마주섰다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사령신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는 창궁진인을 혈라로 포박하기만 했을 뿐, 가져오지 못했다. 창궁진인은 전장 근처에 그대로 있었다. 영체의 기운이 너무나 무거운 탓이었다.

그래서 끌고 오기는커녕 오히려 사사혈라대법이 끊어져 버린 상황이었다.

얼른 가서 회수해야만 모든 목적을 이룰 수 있으리라.

그때, 어느새 사령군림대벽의 영기를 모두 거둬들인 사령신군이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겠다. 너희들은 총군사를 찾아 전장에 합류하도록!”

***

쿠쿠쿠쿠쿵-!

저 멀리 산 위에서 거대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 순간, 흑야의 안색이 굳어졌다.

“마영! 느꼈느냐?”

“느꼈습니다! 지존께서 뿜어내신 기운이 크게 출렁거렸습니다. 아무래도 건곤일척의 승부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

“맞아. 상황이 생각보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하지만 지존께선 진마경을 이룬 절대고수이십니다. 패하실 리 없습니다.”

“아니야. 이제 예측할 수 없다! 반선경의 무인이 둘이었던 게 밝혀진 순간, 모든 게 알 수 없게 된 거야!”

“송구합니다. 제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됐다. 인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냐. 지금은 그런 일에 쏟을 심력도 없어!”

상황이 이토록 어그러진 건, 반선경의 인물이 둘이 되었을 때부터이리라.

이는 흑야가 그토록 천기를 살폈어도 전혀 알아채지 못한 바였다.

그렇기에 흑암무영종의 중추로서 천하의 소식을 모으고 책략을 내는 마영에게 아무런 탓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흑야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입술만 연신 물어뜯었다. 그러다 결정을 내렸다.

“나는 지존께 바로 가봐야겠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당장 가야 해! 지존의 안위가 먼저다. 지존께서 살아계셔야만 대계가 완성되지 않느냐? 지존께서 계시지 않으면 본교는 천마교가 될 수 없어!”

흑야는 마음이 급했다.

한데 지금 서 있는 곳은 신마황동의 서쪽 산봉우리인지라, 당장 달려간다 해도 산에서 내려갔다가 올라가야 하니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바로 그때였다.

마영이 흠칫 놀라더니 재빨리 입을 열었다.

“주군! 지금 사령신군의 기운이…… 무너졌습니다.”

“뭐야? 갑자기 왜 둘의 기운이 다 사라져버린 거지? 설마 둘이 공멸하기라도 한 거야?”

흑야와 마영이 신마황동의 산꼭대기를 살폈다.

하지만 육안으로는 별달리 보이는 게 없었다.

네 명의 절대자에게 갑자기 무슨 사단이 난 것이리라.

흑야가 마영에게 바로 외쳤다.

“마영! 네게 오백 마교도의 총지휘를 맡기마. 너는 교도들을 이끌어 본교가 강호에 살아있음을 똑똑히 보여주어라! 네 활약으로 본교의 이름이 중원부터 새외팔황에까지 널리 전해질 것이니, 막중한 임무인 걸 명심하도록!”

“그 뜻을 뼈에 새겨 이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된다면 귀문탈백 종주의 시신도 수습해라.”

“명을 따릅니다.”

흑야는 마영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급한 마음에 곧장 산비탈을 가로질러 내려갔다.

곧 흑야의 기운이 한참 멀리 떨어졌다.

마영이 품을 뒤지더니, 황금색 가면을 꺼내 얼굴에 썼다.

곧이어 오래된 동경 하나를 꺼내며 조용히 읊조렸다.

“옴 비스푸라다 락사 바즈라 만 달라 훔 파트!”

그 순간, 동경 속에 사령신군의 모습이 비쳐 보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반령반신에 사사혈라대법을 심었었구나! 그걸로 반선경의 영체에 뒤집어씌웠어!”

마영은 종전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단박에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반령반신을 펼쳤다는 건 진체가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다.”

마영이 잠시 무언가 생각하면서 진언을 다시 외웠다.

“옴 비스푸라다 락사 바즈라 만 달라 훔 파트!”

그 순간, 동경 속에서 사령신군의 진체가 바삐 무언가 해내는 모습이 보였다.

“사령군림대벽에 혈사십침대법까지? 진원지기마저 끌어낼 정도로 다급하다고?”

마영이 놀람을 머금은 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갔다.

믿을 수 없게도 마영은 사령신군의 술법을 보는 족족 알아채고 있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단 말인데…… 대체 그 영체가 무엇이었기에!”

하지만 그라고 해서 영체의 정체까지 알아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마영은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일단 혈라의 기운이 끊어진 건 분명하군. 저기 어디 떠 있겠어.”

마영이 잠시 고개를 들어 신마황동의 산꼭대기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육안에 보이는 건 없었다.

“사령신군보다는 먼저 올라가야겠군. 잔백마군의 시신도 있을 테니, 얼른 가야지! 크크크큭!”

마영이 음흉하게 웃더니, 재차 진언을 외웠다.

“마지막으로 산봉우리만 보면 되겠군. 진우선, 네놈은 대체 어찌된 것이냐? 정말 절대천마와 동수였어?”

잠시 후.

산봉우리의 상황을 확인한 마영이 황금가면과 동경을 다시 품속에 챙겨 넣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풍노.”

“네, 마영님.”

그 순간, 암흑 속에 은신하고 있던 풍노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다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네가 나 대신 활약해줘야겠다. 극경의 고수들이 다 쓰러져가고 있는 지금이 기회야.”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흑야만 마주치지 않으면 되겠군요.”

풍노의 말에 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크게 날뛰지는 마라. 피해가 커선 안 된다. 다 천룡부(天龍府)의 백성이 될 거니까.”

“그 점 유의하겠습니다.”

풍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후,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풍노의 얼굴과 체형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마영이 둘이 되었다.

원래의 마영이 황금빛 가면을 꺼내서 썼다.

“좋군. 그 정도면 어지간해선 몰라보겠어.”

“이게 다 대자대비하신 존자께서 보살펴주신 덕분입니다.”

“이 순간부터 네가 마영이다. 가라! 네가 일천 마교도를 어찌 통솔하는지 시험하겠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마영으로 변한 풍노가 떠났다.

홀로 남은 사내, 종전까지 마영이었고, 그전에는 적문강이기도 했던 금면인이 잠시 맞은편의 산세를 한눈에 담았다.

그의 눈동자가 욕망의 빛으로 심히 번들거렸다.

“후후후! 이제 수확하는 일만 남았다!”

그가 훌쩍 절벽을 뛰어내려, 축지성촌(縮地成寸)의 술법으로 순식간에 산에서 내려가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