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운명의 굴레 (1)
츠앗-!
현월검이 그어진 순간, 진회색 불꽃이 튀면서 허공이 찢어졌다.
우우우우우르르르르릉- 쿠쿠쿠쿠쿵-!
천지가 뒤집힐 듯한 진동과 굉음이 대자연을 떨쳐 울렸다. 어찌나 강렬한지, 산꼭대기에 마구 내려 꽂히던 뇌성벽력의 위세조차도 일순간 잊게 만들 정도였다.
“컥!”
“!”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이 추락하듯이 저 멀리로 튕겨 나갔다. 잠시 비명을 토해낼 틈도 없었다.
현월검이 나타나는 걸 보자마자 대비에 들어갔는데도, 검노야의 일격에 담긴 힘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이게 고작 한 수라니!’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이 심혼에 육중한 타격을 입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검노야는 초식이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 가볍게 검을 휘둘렀으나, 미증유의 거력이 일어나 공간 자체가 단박에 터져나간 것이다.
“미쳤군! 이리 차이가 날 줄이야! 진인 역시 아직 탈경에 오르지 않았거늘!”
“제길! 하늘은 왜 이리 불공평하단 말인가!”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이 창백한 낯빛으로 숨을 고르며 온몸을 부들거렸다.
심령에 전해지는 지독한 고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서로 간에 전력의 높고 낮음을 바로 알아챈 까닭이었다.
둘 다 반선의 경지인 진마경과 반사령에 올랐어도 비슷한 양상이라니. 이래서야 백 년 전에 벌였던 신마황전과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이번엔 진우선마저 있으니, 그때보다 열세였다.
[너희의 존재 자체가 내게 남겨진 업이다. 하늘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행실을 먼저 돌아보라!]
“궤변이오! 하늘은 공평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항상 진인만 편든단 말이오?”
[하늘은 공평하다. 순리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검노야가 사령신군의 울화에 냉엄한 답을 내렸다.
신색을 다소 회복한 절대천마가 싸늘하게 눈을 검노야를 바라보았다.
“진인은 여전히 그때와 똑같이 말하는군!”
[그럴 수밖에. 그게 내 천명이니까.]
검노야가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한데 그때였다.
검노야의 영체를 노려보던 사령신군이 멀리 떨어져 있는 절대천마에게 천리전음(千里傳音)을 보냈다. 이는 전음입밀의 수법이 가진 거리의 제약을 초월한 상승의 공부였다.
[천마. 시간을 끄는 게 좋겠다. 진인의 무위가 막강하나 영체를 담고 있을 육신이 없어. 그렇다면 저 꺼림칙한 영기를 머금을 수 있는 시간은 절대로 길지 않아!]
[아! 그렇겠군. 잠시 간과하고 있었어!]
육신은 혼백을 담는 그릇이니, 육이 없는 영체는 이승에서 제대로 힘을 낼 수 없었다. 검노야가 영체에 영기를 채워 능력을 발휘 하고는 있지만, 이는 한시적일 뿐이리라.
그런 상황을 알아챈 절대천마가 사령신군의 뜻에 동조하며 말했다.
[사황. 그럼 내가 진우선을 처리할 테니, 그때까지 네가 진인을 견제해라.]
[수하들의 복수를 하려는 건가? 네 뜻은 알겠다만, 나 혼자서는 진인의 힘을 버텨내기가 쉽지 않을 거 같군. 진인은 아무래도 반선을 훌쩍 넘어 신선경에 가까워져 있으니까.]
[오래 버티라고 한 적 없다. 얼른 상대하고 오마.]
[후우-. 알겠다. 그럼 어떻게든 버텨 보도록 하지.]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이 순식간에 뜻을 맞추더니, 곧장 전신의 공력을 터트렸다.
펑-!
사사삭-!
절대천마가 폭음이 날 정도로 땅을 박차더니 진우선에게로 쏘아졌다. 전신에 두른 먹빛 강기가 바람을 갈랐다.
사령신군 역시 검노야에게로 여의혈옥을 내던지며, 맹렬히 날아 왔다.
‘스승님! 저들이 협공해 옵니다.’
[사령신군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느꼈건만, 아무래도 내가 육신이 없으니 영체로서는 힘을 오래 쓸 수 없음을 알아차린 모양이구나.]
‘아! 그렇다면 저들과 전력으로 부딪치는 게 낫겠습니다. 절대천마도 사생결단을 내려고 제게 다가오니까요. 한데 건네드릴 명토의 기운이 이제 많지 않습니다, 스승님!’
[일단 선천지기가 계속 몰려들고 있으니, 종전 같은 일격을 한 번은 더 펼칠 수 있겠구나. 저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몰라도 하나만 달려든다면,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그럼 저 역시 빠르게 승부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저희가 더 불리해질 것 같습니다.’
진우선이 광륜검을 힘껏 움켜쥐며 결의와 전의를 되새겼다.
전력으로 부딪친다면 싸움은 절대 길지 않으리라.
[우선아. 먼저 가보마. 조심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검노야가 격려를 남기고 사령신군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때 문득, 섬찟한 생각 하나가 뇌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나의 선도는 비움의 길이다. 우선아, 너도 너의 선도는 어떤 길인지 잘 살폈으면 좋겠구나.]
[너희의 존재 자체가 내게 남겨진 업이다.]
‘설마?’
머릿속에서 검노야가 예전에 건넸던 이야기와 지금 내뱉은 말이 느닷없이 이어졌다.
진우선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저 앞쪽으로 쏘아지고 있는 검노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게 스승님의 천명이었습니까?’
진우선은 차마 이를 물어볼 자신이 없어 속으로 생각을 삼켰다. 계속 곱씹어 볼수록 확신이 차오를 뿐이었다.
“후우-!”
진우선이 깊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절대천마가 저 멀리서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일단 지금은 천마를 상대하는 게 먼저다!’
광륜검에 맺혀있던 선기가 짙어지며, 진우선의 육신을 뒤덮었다.
진우선이 절대천마에게로 마주 달려가며 검초를 펼쳐 나갔다.
천지간에 흐르는 오행진기가 광영무로써 광륜을 이루고, 마찬가지로 천지간에 흐르는 선천지기(先天之氣)가 패왕금룡신공으로 빚어져 서로 합한다.
광륜검이 이를 머금고 허공을 노닐었다. 전신에 흐르는 금빛 선기(仙氣)가 금선무의 춤사위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 검초는 빠르기도 하면서 느리기도 했다. 어찌 보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았다. 한 검초에 이처럼 상반된 이치를 머금고 있는 것은 빛과 그림자의 존재를 담아 낸 광영무의 무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빠름과 느림은 비단 천지에 국한된 이치가 아니라, 시공이 품은 순리였다.
순리! 근원에 가까운 도(道)!
그러니 비록 광영무처럼 날카롭고 강맹한 위력은 쉬이 엿보이지 않아도, 결코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격(格)이 있었다.
격을 품은 진우선의 검이 절대천마와 부딪쳤다.
콰아악-!
찬란히 빛나는 묵색 마기가 충돌의 순간에 크게 떨려왔다.
절대천마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걸로도 마땅치 않다고?’
진마(眞魔)의 마기로 펼쳐낸 천마신공의 절초가 통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은 마도무학의 정점으로, 대성을 이루면 극마경에 들 수 있었다. 다른 무공을 기웃거릴 필요 없이 단 하나만으로 시작부터 극경까지 이를 수 있는 정순한 마공이며, 절대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런 천마신공으로도 백 년 전 검노야에게 패했기에, 절대 천마는 진마의 마기를 끌어 올려 진우선을 덮쳐갔다.
진마경에 올라 더욱 정순해진 마기라면, 단숨에 끝장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오판이었다. 백 년 전의 진인보다 진우선의 내력이 더 상승의 이치를 품었을 줄이야!’
절대천마는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도 단박에 알아챘다.
극경을 넘어서면 선천지기를 끌어올 수 있어 본연의 무위나 지닌 내력 등을 훨씬 높은 수준으로 이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천지기를 스스로 품어낼 수 있는 자를 넘어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길!”
절대천마가 울분을 토해냈다. 이런 공격으로도 어쩔 수 없다면, 이제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진우선이 금빛 안광을 뿜어냈다.
절대천마가 마기 어린 눈으로 마주 노려보았다.
선기가 어려 한없이 맑은 안광이 진마의 마기와 팽팽히 맞서다가 파고들었다.
돌연, 절대천마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내가 굴복할 것 같으냐!”
또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 성이 난 것일까.
진마의 마기를 모두 끌어 올려 천마신공을 펼치는 것뿐만 아니라, 심혼을 겁박하여 파멸시키는 파천마혼의 수를 담았다.
쿠쿠쿵-!
‘저건?’
진우선의 동공에 당혹스러운 빛이 어렸다. 절대천마에게서 노도처럼 밀려오는 기운을 맞상대는 게 절대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금선무는 미완성의 무공이지 않은가.
제대로 상대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물러설 수도 없다. 이 한 수에 걸어보는 수밖에!’
진우선의 검이 현존하는 금선무의 마지막 초식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일전에 검노야는 본인이 깨달은 육초식의 선무를 진우선에게 전해 주었고, 진우선은 금선무를 칠초식으로 확장시켰다.
금선무의 마지막 두 초식은 선무의 틀을 벗어났는데, 그게 바로 금륜소천(金輪消天)과 금륜도겁(金輪渡劫)이었다.
구우우웅-!
진우선의 검이 가볍게, 하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묵중한 이치를 담아 허공을 울렸다.
그렇게 진우선과 절대천마의 대결이 마지막 순간으로 치달았다.
한편, 사령신군과 검노야 역시 서로 간에 쉽지 않은 승부를 펼치고 있었다.
푸슥푸슥-!
사령신군의 여의혈옥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극악무도한 사기를 지닌 작은 혈구(血球)들을 연신 토해냈다.
한 번 기운을 내뿜을 때마다 일백여 개의 혈구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니, 천하에 사악한 기운을 뿌리고 산천초목을 흔적도 녹여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스앗-!
퍼퍼펑-!
그에 검노야가 현월검을 휘둘러 혈구들을 소멸시켰다.
혈구는 작은 모래알 같으나 그 피해는 몹시 크니, 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자, 검노야가 천신 같은 위엄을 온몸으로 발산하며 현월검을 크게 휘둘었다.
퍼퍼펑-!
혈구들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그뿐 아니라 허공에서 강렬한 사기를 뿜던 여의혈옥마저 크게 짓눌리다 터졌다.
그와 동시에, 검노야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사령신군에게 일갈했다.
[네놈의 혼령이 참으로 탁하구나. 선천지기를 만끽했는데도 여전히 그러하다니. 이게 대체 어찌 된 노릇이야!]
“진인은 이해가 안 될지 모르나, 그게 내 본질이라서 그렇소.”
[허허. 본질?]
“그렇소. 사도의 무학으로 극에 이르렀는데 어찌 본질이 달라지겠소? 사령이나 사선으로 나아간다 한들 나는 사(邪)이며, 사에서 벗어날 수 없소!”
사령신군이 자기 생각을 밝히며 미소 지었다. 사가 심혼을 가득 채워서인지, 그 미소마저도 사악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무엇이더냐? 본질이 사악한 네놈이 별다른 이득조차 없을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는데.]
“허허. 진인은 여전히 나를 믿지 않는 모양이오.”
사령신군이 짐짓 여유를 부리면서, 슬쩍슬쩍 뒷걸음질치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천기가 요동쳐서 궁금해서 왔소. 천기를 보게 되니 가만히 앉아서도 천하가 어찌 흘러가는지 알 수 있어 참으로 재밌더이다.”
[네놈은 여전히 나를 속이려 드는구나.]
“내가 왜 진인을 속이겠소? 이건 진심이오. 사령으로의 길을 열기 위해 백 년을 넘게 살아오다 보니, 세상에서는 재밌는 게 없더이다.”
[백 년을 넘게? 설마 이혼대법을 계속 펼쳐왔던 것이냐? 그래서 네놈의 혼령이 몇 번이나 기워져 있는 거였어!]
“눈치가 제법이시구려.”
사령신군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속일 의도가 전혀 없는 것처럼 나름대로 애써서 순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검노야가 보기에 사령신군의 얼굴은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 네놈은 그게 역천임을 왜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어쩔 수 없었소. 이 방면으로 천고의 재능을 주었다면 나아갈 길도 끝까지 열려 있어야 하는데, 극사지체가 아니면 술법들을 못 견디겠더이다.”
[그래서 술법이다. 후천의 술로는 선천의 도를 가리지 못하니까.]
“나는 그게 억울했소. 진인은 도무지 이해 못 하는 것 같지만.”
[이해를 못 하는 건 너다!]
검노야가 한숨을 내쉬며 현월검을 치켜들었다.
우우웅~!
대기가 떨리며 현월검에 막대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명부로 귀원하거라!]
검노야가 죽음을 선포하며 현월검을 내리그었다.
사령신군이 사기를 끌어모아 겹겹이 방벽을 쳤다.
우우우르르르르릉- 콰콰쾅-!
현월검에서 쏘아진 기운에 대기가 단박에 찢기며 울부짖었다.
스악!
사령신군의 몸을 갈랐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검노야의 눈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소멸하는 사령신군의 몸에서 새빨간 기운이 그물처럼 뿜어져 나와, 삽시간에 검노야를 덮쳐버린 까닭이었다.
[네놈! 설마 지금 반사령으로 왔었단 말이냐?]
검노야의 영체가 핏빛 그물에 뒤덮이며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