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백중세 (1)
“귀역무간진이 깨졌다!”
“드디어 귀기가 물러갔다!”
무인들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커다란 외침이 일대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이제야 악몽이 끝났어!”
귀역무간진은 진법을 이루는 축도 보이지 않고 생문(生門)도 존재하지 않았다. 며칠간 귀무 속을 헤매다 길을 잃어 죽고 악귀에 쫓기고 찔려서 죽는 일만 가득할 뿐, 살아나갈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악귀들을 아무리 없애도 계속 늘어나기만 하니, 열흘이든 한 달이든 다 죽기 전에는 끝이 없어 보였다. 즉, 귀역무간진은 희망 따윈 보이지 않는, 한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가득한 진법이었다.
인세의 지옥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리라. 괜히 강호 이대금진에 꼽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지저부터 천상까지, 평원에서 산등성이까지 드넓게 펼쳐져 있던 귀무가 산산이 흩어지며 맑은 하늘이 열린 것이다.
“역시 정검신협이셨어!”
“하늘이 이리 맑았구나!”
“이제 살았어!”
강호인들은 정사외도의 소속이나 신분 등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탄성을 터트렸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르르릉-!
귀역무간진이 소멸하기도 잠시,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워지더니 어둠이 내렸다.
“갑자기 하늘이 왜 이러지?”
의문이 들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벽력이 번쩍이고, 뇌성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쿠쿠쿵-! 쾅-! 콰콰쾅-!
하늘이 대노한 것일까. 천둥번개가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하지만 놀랄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산, 산 위를 봐요!”
“번개가 왜 산꼭대기에만 내려꽂히는 거요?”
“저곳에 정검신협께서 계시지 않소?”
“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아까 어검비행하는 고수를 봤다고 하지 않았소? 그가 산꼭대기에 내린 거요!”
“어검비행? 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신선이나 그럴 수 있다면 모를까, 세상천지에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어딨소?”
어검비행(馭劍飛行)은 검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으로, 전설상의 신선들이나 가능하지 않을까 이야기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쉬이 믿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상당한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헛!”
벽소군이 혈불과 격전을 벌이다 말고, 뒤로 확 물러서며 산 정상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사색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저런 마기라니!”
그 순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혈불이 씨익 웃었다.
“크흐흐! 지존께서 오신 걸 느꼈나 보군.”
“지존? 설마 절대천마?”
“기억하고 있었나? 하긴, 천하를 주재하실 고귀한 분이시니,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꽤 지쳐보였던 혈불이 신나게 떠들어댔다. 여태껏 벽소군과 격전을 치르며 입은 내상과 외상이 적지 않았건만, 절대천마의 등장에 기세가 부쩍 오른 모양이었다.
벽소군이 혈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빛과 표정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절대 그리될 리는 없을 것이다. 네놈 역시 내 손을 빠져나갈 수 없듯이!”
“곡주의 자신감이 대단하군. 그런 말도 이젠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십 년 전에 아비가 죽을 땐 고작 코흘리개 꼬맹이였는데 말이야.”
“혈불! 네놈이야말로 곧 내 손에 죽을 텐데도, 참 평온하게 지껄이는군.”
“후후후. 평온하지. 내가 죽을 리는 절대 없어서 평온한 거야.”
혈불이 냉랭한 표정의 벽소군을 계속 자극하며 입을 놀렸다.
“근데 정말 놀라워.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는 하지만, 빙화 덕분에 무극지경에 올랐을 줄이야! 나도 쉰에 이르러서야 극경에 올랐는데 말이지.”
“빙화의 영기를 어디 잡스러운 네놈의 무공과 비교하느냐?”
“어휴! 얼마나 영험한지는 나도 다 알지! 내가 직접 다녀갔는데 그걸 왜 모를까? 하지만 너도 지금 느껴지지 않아? 빙화처럼 살아 있는 신비의 영초가 누구에게 더 잘 어울릴지 말이야.”
“수작질 그만해라. 회복할 시간을 벌려고 잔꾀를 다 쓰는군.”
“회복은 무슨! 지존께서 오셨으니, 네게 마지막 말을 건네는 것뿐이다. 이곳은 곧 초토화될 테고, 강호를 지배할 천마교의 터전으로 뒤바뀔 테니까.”
“뭐라고?”
“넌 그 장엄한 선포의 역사적 순간을 못 보고 갈 거야. 그래서 친절히 이야기해준 거다.”
벽소군은 순간적으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삼문협에 절대천마가 나타나는 것까지도 천마교의 계획이었을 줄이야! 저들의 음모는 단순히 강호에 혼란을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 천하를 집어삼키려는 원대한 야욕이었다.
하지만 곧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후. 과연 그럴까? 저리 어마어마한 선기가 느껴지는 데도?”
산 정상에서 한없이 신비롭고 맑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선천의 기운을 한껏 품은 선기(仙氣)였다.
“설마?”
갑자기 혈불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그와 함께.
사사사삭-!
차가운 빙기를 품은 빙극천월강(氷極天月)의 강기 여덟 줄기가 곧게 뻗어왔다. 종전보다 힘이 더 살아서 들어오며 목숨을 노려오고 있었다.
혈불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제길! 귀무가 사라진 차이가 꽤 크다!’
마인에게는 힘을 북돋워 주고 적에게는 악영향을 미쳤던 귀역무간진이 사라졌다.
그러자 혈불은 벽소군의 공력이 더욱 강맹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혈불이라고 아직 모든 패를 다 내보인 게 아니었다.
혈불이 입을 악다문 채 두 손을 합장했다. 온 내력이 들끓어 올라 피부가 시뻘겋게 변했다.
그러더니.
후우우웅-!
혈불의 전신에서 검붉은 형상이 피어 올랐다. 체내의 내공이 제외로 뿜어지며 유형화되어 섬찟한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혈마신(血魔神)이시여!”
검붉은 형상이 핏빛 기운을 뚝뚝 떨어뜨리며 삼면육비(三面六臂)의 모습을 갖춰갔다.
금강혈련마공(金剛血蓮魔功)이 정점에 이르러 펼쳐내는 혈마강림(血魔降臨)이었다.
혈마신이 합장한 두 손을 제외하고 네 손을 휙휙 휘둘렀다.
퍼석-!
퍼퍼퍽-!
네 손이 시리도록 새하얀 강기를 두 개씩 쳐냈다. 벽소군의 공격이 단박에 막힌 것이다.
그러나 벽소군은 이를 예상이라도 했었는지, 강하게 호통치며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악마같은 놈!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촤촤촤-!
벽소군의 주위로 빙벽이 맺히더니, 삼면육비 괴물의 공격을 튕겨 냈다. 빙벽은 무너지면 곧바로 생기고, 또 생겼다.
그러던 중, 벽소군이 강렬한 기운을 쏘아냈다.
쐐애액-!
빙강이 사방을 얼음으로 둘러치며, 혈불과 형상을 꿰뚫을 듯이 쇄도해 들어갔다.
그런 벽소군의 두 눈동자에서 눈꽃 같은 새하얀 빛무리, 빙령(氷靈)이 엿보이고 있었다.
***
“모두 적들을 섬멸하라-! 기세를 몰아쳐라-!”
한 무인이 검붉은 창을 허공에 치켜들며 일백여 무인들을 이끌고서 위엄차게 외쳤다.
“벽력신창께서 말씀하셨다! 모두 적들을 쳐라-!”
“달려!”
벽력신창 탁무위의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전장에 퍼져나갔다.
귀역무간진이 사라져 귀무에 숨을 수 없는 적군은 이제 두렵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다.
적들과 이제 싸워볼 만했다.
그걸 먼저 보여주는 게 말을 탄 채 선두에서 달려 나가는 벽력신창 탁무위였다.
파지직-!
그의 검붉은 무월창(武月槍)에서 뇌화(雷火)가 흐른다.
푸측-!
무월창이 마교도를 빠르게 베고 나가자, 무너져내리는 주검에서 샛노란 불꽃이 튀었다.
마교도는 그 어떤 대처조차 하지 못한 채 비명횡사해버렸다.
그리고 이런 광경은 비단 탁무위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적들을 베라!”
“쓰러뜨려!”
탁무위의 좌우로 길게 늘어선 무인들이 쐐기진형을 이룬 채 마구 달려 나가며, 적들을 들이받았다.
“귀무에 숨어 나를 베었던 놈이 누구냐?”
“저승에서 묻거든, 이 황하신룡 님께서 보냈다고 이르거라. 크하하하하!”
일 장에, 일검에, 일도에, 마교도들이 마구 나자빠졌다.
허공에서 뒤늦게 모습을 드러내던 악귀들도 단박에 소멸했다.
모두 기세가 등등했다.
그런 와중에 길을 막고 선 채, 냉기를 풀풀 날리는 한 여인이 있었다.
탁무위가 그녀를 발견했다.
“구음마녀는 내가 맡겠다! 너희 둘은 각자 좌우로 진을 이끌고 펼쳐나가라!”
“알겠습니다, 숙부님!”
“스승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탁무위의 양옆에서 달리던 탁운비와 만총이 좌우로 크게 퍼지며 사방으로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적들을 덮쳤다.
한편, 구음마녀의 앞에 당도한 탁무위는 말에서 내려 불편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너를 여기서 볼 줄을 몰랐군.”
“탁무위. 오랜만이야. 많이 발전했구나.”
“구음마녀, 네게 그런 말을 듣는 날도 오는군.”
“그러게. 나도 이런 말을 할 날이 올 줄은 몰랐지. 근데, 네가 이해해야 해. 몇 년 전에 강호를 떠났던 사람이 불쑥 무극지경에 올라서 나타났으니 말이야. 천하를 속여먹은 거지.”
“후후! 그게 아니야. 내려놓으니 보이더군.”
“좋겠네. 난 아직인데.”
“그러게. 나보다 늘 한 걸음 앞서갔었는데, 이제는 네가 한 걸음 모자라는군.”
탁무위와 구음마녀의 복잡한 시선이 교차했다. 둘은 각기 정과 마에 속해있으나, 서로를 바라보는 눈은 단순히 적을 바라보는 것 이상이었다.
“내가 왜 모자랄까? 늘 노력해왔는데.”
“그러게.”
탁무위가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뭐야? 그 말투는? 눈빛으로는 아는 것처럼 보이는데.”
“알려줄까?”
“어. 알려줘.”
구음신녀가 탁무위에게 당돌하게 요구했다.
탁무위가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구음신녀이니까. 구음마녀가 되지 못했으니까.”
“구음신녀여서 그렇다고? 마(魔)를 얻지 못했다는 말이야?”
“…….”
탁무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구음신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무언은 긍정인지라, 구음신녀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랬군, 그랬어. 나는 마(魔)에 온전히 빠지지 못했던 거야.”
“그래. 그게 너지.”
“흥!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
“그럼 모른다고 하자.”
탁무위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그의 애병인 무월창을 꽉 움켜쥐었다.
“맞아. 너는 나를 늘 아는 척했지만,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알지 못했어.”
“내가 몰랐던 게 있었나?”
“…….”
이번엔 구음신녀가 입을 꾹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탁무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정적만이 흐르던 둘 사이에서 탁무위가 먼저 마지막을 준비하는 말을 꺼냈다.
“대화는 여기까진가 보군. 예전의 나로 생각하지 마. 이번엔 널 베러 왔으니까.”
“너야말로 편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날 이후로 내 손에서 자비 따윈 던져버렸거든.”
원한 서린 눈으로 탁무위를 노려보는 구음신녀의 전신에서 심혼마저 얼어붙을 매서운 음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흑발이 순식 간에 허옇게 세며, 허공으로 확 치솟았다.
구음마녀의 진신절기인 구음대라 진력이 극성으로 펼쳐지며 생긴 현상이었다.
파츠측-!
탁무위의 전신에서도 뇌화가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불꽃이 온몸을 타고 흐르며, 허공중에서 마구 불티를 날려대고 있었다.
이는 혼원벽력진기(混元霹靂眞氣)로 무극지경에 올라, 뇌기가 온몸을 감싸는 경지였다.
바로 그때였다.
콰콰쾅-!
콰앙-!
산 위에서 천지를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정검신협이 시작했군.”
“절대천마께서 이기시겠지.”
“과연 그럴까?”
“뭐, 저들이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야?”
구음신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탁무위를 쏘아붙였다. 은연중에 그녀의 동공 속에 애증의 눈빛이 한 줄기 담겨 있었다.
하지만 탁무위는 한없이 가라앉은 눈빛을 드러내며 싸늘하게 말했다.
“우리도 시작하지! 먼저 들어와라.”
탁무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음신녀가 양손에 내력을 응축시키더니, 곧장 내던졌다.
파앗-!
“흥! 오늘도 그렇게 말한 걸 평생 후회하게 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