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요동치는 천기 (3)
지극히 상서롭고 찬란한 광휘가 천하를 내리비췄다.
“아……!”
신마황동 주변에 모여든 수많은 무인이 일제히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태양 빛보다 강렬한 광채에 눈이 쪼아져 멀어버릴 것만 같은 까닭이었다.
“사람이…… 이리 빛날 수가 있다니…….”
“빚에 쪼여 단박에 타버리겠군!”
무인들에게서 숭앙하면서도 두려움이 깃든 탄성만 연신 흘러나왔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이 아려올 정도로 섬뜩한 빛이었다. 그들은 누가 이 빛을 내뿜었는지 대번에 알아챈 상태였다.
바로 산 위로 올라간 진우선이었다.
산 아래 무인들이 이러할진대, 지척에서 직격 당한 잔백마군이라고 괜찮을 리 없었다.
“끄아악-!”
잔백마군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육신의 두 눈을 꽉 감았는데도 거침없이 꿰뚫은 빛살이 영혼마저 쪼개는 듯했다. 고통이 극심했다.
한데 그 순간.
귀안마강의 강기가 단박에 소멸했다.
‘명부의 기운이 느껴질 줄이야! 그렇다면 귀기들은? 혼백들은?’
잔백마군이 이를 악물고서 억지로 귀안을 열었다. 불길한 직감이 엄습한 까닭이었다.
귀안은 귀문탈백종의 모든 무공과 법술의 중추로, 귀역무간진 역시 귀안을 통해서만 펼칠 수 있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귀역무간진의 현상황을 보려면, 광휘의 불길이 동공을 태워버릴 듯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자 허공으로 흘러오던 혼백들이 도중에 마구 승천하는 게 보였다.
“네, 네놈이!”
잔백마군이 원통에 차서 외치며, 귀광을 서릿발처럼 발했다.
번쩍!
귀문탈백종의 근간인 풍도귀공(豊都鬼功)의 공력이 일순간에 터져 나와 천지사방을 메운 광휘에 저항했다.
-모든 귀(鬼)는 진우선을 참(斬)하라! 그는 너희들을 명부로 끌고 가기 위한 사자(使者)이니,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업력의 불길에 가두어라! 나 잔백마군이 명하노라!
-모든 악귀도 진우선을 참하라! 깊디깊은 원한을 풀어내기 위해 구유에서 기(氣)를 일으켰거늘, 구천에 쌓인 원성의 탑을 허물려는구나!
귀는 혼백이고 악귀는 귀기이니, 잔백마군은 귀역무간진의 모두가 진우선을 공격하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심지어 혼백이 귀기로 변하고, 귀기가 생자(生者)를 죽여 새로운 혼백을 만드는 귀역무간진의 순환조차 잠시 멈춰 세우면서까지 그리 시켰다.
그러자 혼백과 귀기들이 저 멀리서부터 서서히 몰려들었다.
그때였다.
무아지경에서 한참 동안 검을 휘두르던 진우선이 핑그르르 돌며 잔백마군 앞에 내려섰다.
진우선의 전신에 어린 순백의 서광이 잔백마군에게서 뿜어지는 사이한 귀광을 짓눌렀다.
“잔백마군. 정녕 명부로 돌아가야 할 혼백들을 이리 희생시켜야겠소?”
“희생? 크큭! 웃기는 소리 하는구나. 혼백과 악귀는 풍도대왕(鄭都大王)인 내가 거둔 백성이거늘, 네놈이야말로 어찌하여 나와 백성들을 막아서느냐? 귀역무간진이 바로 그들의 극락정토임을 모르는 것 아니냐?”
잔백마군의 뻔뻔한 대답에 진우선은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극락정토? 허! 천하에 이보다 얼토당토않는 말이 어디 있을까! 마공이 인륜을 그르치는 것도 모자라, 천륜마저 거스르게 하는구나!”
“역시 네놈은 말이 통할 놈이 아니었다. 삼층귀력의 귀역무간진마저 네게 쏟아질 것이니, 억조창생의 업력을 어디 한 번 감당해 보아라!”
잔백마군의 눈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귀기의 불꽃이 섬찟하게 타올랐다.
그에 진우선이 시선을 들어 사방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일만이 훌쩍 넘었구나! 잔백마군, 당신은 대체 얼마나 많은 귀기를 품고 있었던 거요! 그들의 업력을 대체 어찌 감당하려고!”
“후후후! 내가 괜히 억조창생이라 했겠느냐? 괜히 강호의 날파리 떼들을 이끌고 왔겠어?”
“설마 다 거두어갈 생각은 아니었겠지?”
“크큭. 삼 할이면 충분하다. 삼 할이면 나 풍도대왕은 극마를 넘어서지. 그때면 나는 살아있는 귀(鬼)요, 내가 발 디디는 곳이 풍도이니라!”
“미쳤군!”
진우선이 짓누르며 밀려드는 수많은 혼백과 귀기를 보며 탄식했다.
저들 각자마다 살아온 업력이 상당할진대, 모두의 업력은 감히 그 무게를 어찌 측정할 수 있을까!
‘신광만천(神光滿天)만으로는 안 되겠구나!’
진우선이 광륜검을 꽉 움켜쥐며 기운을 피워올렸다.
직전에 수없이 반복하여 펼쳐냈던 신광만천은 신비로운 광휘로 천하를 가득 채워 밀려드는 적들을 상대하는 광영무의 절초 중의 절초였다.
빛이 보이는 곳까지 그 힘이 미치니 광명천하와 광영창파 초식보다 위력이 광대하여, 거대한 귀역무간진을 마주하는 데 제격이었다.
하지만 삼층귀력의 대귀역무간진은 그것만으론 부족한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슈우우우-!
저 멀리 어디선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검노야의 긴장 어린 음성이 전해졌다.
[우선아!]
‘저도 느꼈습니다, 스승님. 절대 천마가 오고 있나 봅니다!’
[맞다! 절대천마구나. 마기가 상당해!]
‘일단 여기를 최대한 빨리 깨트려야겠습니다!’
진우선이 잔백마군을 노려보았다.
그는 아직 절대천마가 오고 있는 걸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이제는 끝을 내야겠다!”
“그렇게 지친 얼굴로 말해봤자 발악으로 보일 뿐이야. 크큭!”
사방에 혼백들이 가까워질수록 혈색이 좋아지는 잔백마군이 진우선을 비웃었다.
쉼 없이 신마황동을 돌파하고, 명토의 기운을 앞세운 광륜의 오행진기로 연거푸 신광만천을 펼쳐 댔으니, 공력소모가 극심한 게 당연한 일이리라.
잔백마군이 그걸 알아보고는 참으로 밉살스럽게 지껄여댔다.
“후후! 곧 내 백성이 되겠군. 그땐 내가 너를 긴히 쓰겠다!”
“지친 건 잔백마군 당신 아닌가? 인제 보니 귀안을 심어 극마에 올랐으나, 귀안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어. 다 깨달았다면 두 눈이 다 귀안이었을 텐데.”
“크큭! 재밌는 소리군. 어림도 없지만 말이야.”
“그럴까? 참인지 거짓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진우선이 미소 띤 얼굴로 싸늘하게 대꾸하더니, 검초를 펼쳐나갔다.
신비로운 광휘가 다시금 번져나갔다. 산천초목을 거침없이 뚫고 나가 천상부터 지저까지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화아아아-!
[흐윽-!]
[킥-!]
짓쳐 날아드는 혼백과 악귀가 종전보다 섬뜩하고 날카로운 빛살에 관통되었다. 그들이 지닌 이승의 업력마저 승화하여 날아올랐다.
한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후우-!”
막대한 내공을 쏟아낸 진우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음 초식을 펼쳐나갔다.
흑영만천(黑影滿天).
신광만천과 따로이면서도 쌍을 이룰 수 있는 광영무의 절초였다.
빛과 그림자.
극과 극의 두 힘.
그러나 둘은 상극이면서도 조화로운 대상이었다.
흑영만천은 홀로여도 강력하나, 빛이 지나가고 나서 그림자가 어릴 때면 그 힘이 배가되리라.
그와 함께 진우선의 서슬 퍼런 명령이 울려 퍼졌다.
-혼백이든, 악귀든 모두 명부로 귀원하라! 이곳은 너희들이 있을 곳이 아닐지니!
온 세상에 달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태양이 달에 잡아먹혔을 때처럼 어둠이 어린 것이다.
그와 함께 흑영의 기운들이 사방팔방으로 쏘아져 모두를 눈멀게 했다.
슥! 스스슥!
[끼에엑-!]
[흐아아악-!]
일만 혼백과 악귀의 비명들이 산천초목에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그들은 업력이 강하여 신광을 견뎠어도, 급변하여 찾아오는 흑영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시야가 꺼지듯 거짓된 명줄이 잘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으헉-! 으아아악-!”
잔백마군이 피를 토해내며 두 눈두덩이를 움켜쥐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으나, 손가락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건 아마도 핏줄기이리라.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광륜검에서 교차되어 뿜어지는 신광과 흑영의 검강들이 잔백마군을 에워싼 호신의 기운, 귀벽강기(鬼壁罡氣)를 뚫고 갈랐다.
푹!
검강이 가슴을 관통했다.
그와 동시에 잔백마군의 심장을 파고든 이화, 항마, 명토의 힘이 육체 내부를 휘돌더니, 무언가를 갈랐다.
“끄아아악-!”
잔백마군의 눈코입귀에서 피분수가 터졌다. 격렬한 고통의 신음성과 함께.
콰콰콰-!
얼굴의 칠공에 심장까지 더하여 팔공(八孔)에서 피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이건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어, 어떻게……?”
잔백마군이 피를 토하며 불신의 음성을 쏟아냈다.
진우선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귀안과 심령 사이에 결이 있더군.”
“말도 안 돼…….”
흐느끼는 잔백마군의 정수리에서 귀기들이 온몸을 감싸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건 귀문을 열었던 최초의 기운이자, 마지막 발악을 하는 최후의 기운이었다.
그리하여 잔백마군은 제 목숨이 떠나려는 걸 가까스로 붙잡았다. 하지만 살아나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 악의가 진우선에게로 쏟아졌다.
“크윽……! 나를 상대하는 게 끝일 거 같더냐? 본교는 이제 시작이니라.”
하지만 진우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직 점처럼 보이나 실로 어마어마한 마기가 저 멀리에서 날아오고 있는 까닭이었다.
“크…… 흐흐…… 오늘을 기점으로 본교의 이름은 중원만이 아니라 새외까지 진동시킬 것이다. 온 천하가 천마교를 두려워하며 벌벌 떨 것이야!”
잔백마군은 숨결이 극히 희미해졌음에도 말을 그치지 않았다.
“백 년간 숨죽여온 천마교의 장대한 서막이 드디어 올랐구나…… 내 목숨으로 열었으니 더욱더 값지구나. 흐흐흐.”
그때였다.
쿠쿠쿠쿠쿵-!
허공을 분쇄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슈슈슈우우-!
어느새 맑아진 하늘에서 점점 가까워져오는 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윤기 어린 감색 장포를 걸치고서, 검 한 자루를 탄 채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잔백마군의 옆에 도착했다.
“호야!”
“지존! 지존이십니까? 아……!”
땅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잔백마군이 몸을 들며 외쳤다. 두 눈이 다 망가져 볼 수는 없으나, 음성만으로도 기뻐하는 기색이 느껴지고 있었다.
“약속했던 원단보다 사흘을 앞서서 왔건만, 네 마지막만 보는구나.”
“하하…… 지존이시여. 소인이 존귀한 음성을 들었으니……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복수는 내가 할 테니, 너는 편히 눈 감기라.”
“네.”
잔백마군이 미약한 대답을 흘릴 순간, 그의 목이 뒤로 떨어졌다.
감색 장포의 사내가 잔백마군의 망가진 눈을 감겼다.
“잘 가거라.”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진우선. 맞나?”
“맞소. 그대가 절대천마 담선우요?”
“그렇다. 용케도 이름까지 알고 있군.”
감색 장포의 사내, 절대천마 담선우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생기 넘치는 그의 얼굴을 보자면, 아마 서른도 안 되었을 듯했다.
“후후. 근데 창궁진인은 왜 여기에 있는 거요? 아니, 왜 나를 그렇게 노려보고 있소?”
[네놈도 세월을 거슬러 반선의 경지에 올랐구나! 허어-!]
검노야가 아연실색하며 외쳤다.
인제 보니 절대천마의 경지 역시 반선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이왕이면 진마경(眞魔境)이라 해주시오. 반선은 선도에서나 쓰는 말이지 않소?”
그 말에 진우선이 물었다.
“아직 탈마하지 못했으니, 마에 속해 있다는 뜻이오?”
“맞다. 하지만 진정한 마는 깨달았지.”
후웅-!
절대천마가 손짓하자, 허공에 치솟은 마기 덩어리로 천하를 흐르던 선천지기가 조금씩 흘러들었다.
진우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기로도 선천지기와 소통하다니!”
“선천의 기운에는 주인이 없는데, 뭘 그리 호들갑이오? 어쨌든, 이래서 진마경인 거요.”
절대천마가 진우선에게 대답한 뒤, 검노야를 바라보았다.
“진인. 인연이 참으로 막측하고 신비롭구려.”
[그러게 말이구나. 네놈마저 다시 볼 줄은 몰랐다.]
“나도 몰랐소. 나는 그저 죽기 싫었을 뿐이었으니까.”
[도대체 명부에 안 가고 여기 있는 것이냐?]
“그거 아시오? 진인이 하늘의 명을 행한다던 그때, 나는 극도의 좌절감에 빠져 있었소. 진인의 무위는 넘어설 수 없는 벽과 같았고, 일평생 심혈을 기울여 창안한 천 마신공마저 속절없이 파훼됐었지. 결국, 죽는 건가 싶었소.”
절대천마가 담담하게 옛이야기를 꺼냈으나, 그 안에 담긴 한은 무척 깊었다.
“근데 화가 나더이다. 강호를 거닐며 정사외도의 이치를 역행하여 홀로 마를 깨우쳤는데, 죽는 건 순리를 따른다니, 내 꼴이 너무 우습지 않겠소? 그래서 거스르기로 마음먹었소. 그때 부지불식간에 무공 하나가 떠오르더이다. 그게 뭔지 아시오?”
[뭐였지?]
“후후후! 비밀이오.”
절대천마의 웃음에서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나왔다. 마치 말싸움에 이겨 의기양양한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근데 이제 와 보니 진인도 여기 있구려. 그래서 인연이 참으로 신비롭소. 나만 역천한 줄 알았는데, 인연에 다시 묶여 있으니 역천이 아니었나 보오?”
[나도 모른다.]
“아무렴 어떻소? 다시 복수할 기회가 생겼으니 충분한 것을.”
[네놈은 그때나 지금이나 싸움에 환장한 건 똑같구나. 그게 마(魔)인 것을 왜 모르느냐?]
“그렇군. 그래서 이번에 파천마혼(破天魔魂)을 만들어 탈마경에 오르려 했는데, 진마경밖에 못 온 모양이오.”
절대천마는 탈마를 원한다기보다, 진심으로 마에 젖어 싸우기를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진우선이 서늘한 눈빛을 뿌리며 외쳤다.
“천마. 당신은 아직 순서가 되지 않았소. 스승님을 뵙기 전에 나를 먼저 꺾어 보시오.”
“후후! 네놈과도 당연히 싸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힘깨나 쓴다 해도, 어찌 네깟 놈 같은 반선을 이길 수 있을까?”
절대천마가 진우선을 바라보며 섬찟한 미소를 지었다. 수천수만의 살행을 즐긴 깊은 눈빛이 배어 나왔다.
한데 그때였다.
뒷짐을 진 채 능선을 툭툭 밟으며 축지법을 쓰는 듯이 산에 올라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투명한 동공에서 사이한 눈빛을 내뿜는 미남자, 사령신군이었다.
“진인. 오랜만이오!”
사령신군이 검노야에게 인사를 건넸다.
“위태극. 네놈이구나.”
“지금은 섭무악이오.”
사령신군이 서늘하게 웃으며 농담처럼 대답했다.
바로 그 순간.
온 하늘에 느닷없이 먹구름이 가득 찼다.
그리고 찾아온 한낮의 어둠속에서.
번쩍!
우르르릉- 콰쾅-!
벽력 줄기들이 세 사람, 하지만 네 존재의 주위에 마구 내리꽂혔다. 뇌성이 터져 산천초목이 몹시 떨고 있었다.
진우선이 먹구름을 뚫고서 하늘을 살펴보더니, 탄식을 흘렸다.
“아! 천기가 머리 위에서 요동치는구나!”
그와 동시에 소름 끼치는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하늘은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