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요동치는 천기 (2)
먼동이 터오는 시각.
산 하나를 가득 품은 회백색 운무 앞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고심과 갈등의 빛이 역력했다.
일 각 전에 만난 불가와 도가의 태두, 소림사와 무당파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미타불. 귀역무간진에서 느껴지는 악귀의 힘이 소승의 불심마저 뒤흔드는구려. 아무래도 인세에 지옥이 펼쳐진 모양이외다.”
“그 말씀이 타당하오. 빈도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소. 이 광대한 크기로 미루어 보건대, 잔백마군은 백 년 전의 절대악인 잔백구유를 뛰어넘은 것 같소이다!”
소림사 십팔나한(十八羅漢)의 첫째인 대나한 방호 대사의 말에, 일백 도사를 이끌고 온 무당파 장로 청풍자가 대답했다.
그에 옆에 있던 방선 대사가 대화를 이었다.
“듣자 하니 귀무가 엊저녁보다 훨씬 짙어졌고, 저 산자락 끝에서 여기 앞쪽까지 번져 나왔다고 합니다. 밤중에 진세가 확장되었다더군요.”
“청풍 사형. 바로 뛰어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천마교가 천하를 상대로 음모를 펼쳤으니, 우리는 본분을 잊지 말고 정도의 의기를 세워야 합니다.”
청광자에 이어 청수자도 말을 꺼냈다.
“사형, 저 역시 청광 사형과 같은 생각입니다. 정검신협이 홀로 천마교에 맞서고 있는데, 그 혼자 감내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게다가 이번에 피해가 컸던 제갈세가의 여식이 이 안에 갇혔다더군요. 그 아이도 빠르게 구출해내는 게 좋겠습니다.”
“나 역시 달리 생각한 건 아니다. 명현 사조께서도 천하를 도우라 말씀하셨는데, 어찌 다른 생각을 했겠느냐? 다만 이 폭압적인 귀기를 느끼고 나니, 무작정 들어가기 조심스러웠던 참이구나.”
명현자는 무당파의 가장 큰 어르신으로, 천강삼성의 일인이었다.
그렇게 청풍자가 본심을 말하자 두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선 대사가 무당파 도사들에게 말을 붙였다.
“소승이 진인들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먼저 와 들은 바에 의하면, 혈불이 반 시진 전에 진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헤아려보니 천마사종 중에 셋이 이 안에 있겠더군요. 유의하셔야 합니다.”
“실로 무시무시하군. 혈불도 극마에 올랐다는 말이 있지 않았소?”
“그건 소승도 들었지요. 아마도 사실이라 사료됩니다. 아미타불.”
대나한 방호 대사가 염주를 매만지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흑발의 노파가 일행 사이로 끼어들며, 방호 대사에게 호통 쳤다.
“혈불이 들어갔는데, 방호 땡중은 여기서 뭘 머뭇거리고 있는 거요?”
“막 장로?”
방호 대사가 흑발의 노파, 막유수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들은 일전에 안면이 있었다.
막유수의 뒤를 이어 신비로운 광 채를 흘리는 여인이 사뿐히 내려섰다.
“곡주도 오셨구려! 두 분께서는…… 아!”
방호 대사가 빙화곡주 벽소군을 알아보며 인사를 건네다 말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대성을 축하드리오!”
“감사해요.”
벽소군은 언제나처럼 얼굴 주위로 얇은 빙막을 씌워 미묘하게 흐릿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지만, 전신에서 뿜어지는 극한의 빙기는 통제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당에서 온 청풍이라 하오. 빈도 역시 곡주께서 대성하신 것을 감축드리오.”
청풍자를 비롯한 무당파의 세 장로도 감탄하며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극악무도한 진법은 무엇입니까? 엊그제까지만 해도 이런 건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곡주님이 귀역무간진을 처음 보시는 게 당연합니다. 잔백마군이 어제 펼쳐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찌나 악랄한지, 밤새에 진세가 확장되었습니다. 산만 감싸다가 이 앞 평지까지 넓혀진 상황이지요.”
청수진인이 간략히 설명했을 때, 막유수가 방호 대사에게 입을 열었다.
“불법을 수호한다는 대나한씩이나 되어서 귀역무간진 앞에서 궁리만 하느라, 부처의 이름에 피를 묻히고 다니는 혈불을 쫓지 않았구려. 그대는 정말 땡중인 모양이오.”
“빙화곡의 두 분께서는 혈불을 쫓아오셨구려. 과거의 은원 때문이오?”
막유수의 날 선 비방에도 침착함을 유지한 방호 대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십 년 전에 성깔을 부려 크게 낭패를 본 적이 있는 까닭이었다.
“당연하지. 그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그러는 땡중은 여기에 왜 온 거요? 설마 강호에 부처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외다. 천마교의 음 모로 인해 천하가 어지러운 데다, 방연 사제마저 실종된 까닭에 방장의 명을 받들어 산문 밖으로 나오게 되었소.”
“그 말이 내 말과 뭐가 달라?”
그때, 벽소군이 막유수를 저지했다.
“파파. 그 얘기는 그만 해요. 그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이 중요해요.”
“알겠습니다, 곡주님.”
막유수가 뭇 강호인들 앞에서 극진하게 대답했다.
“방호 대사님, 혈불이 어디에서 들어갔는지 아시나요?”
“그건 소승이 알려드리겠소. 그들이 관도에서 접어들어 저쪽의 뻥 뚫린 평원으로 들어갔다 하더이다.”
“감사해요, 방선 대사님.”
벽소군이 용건만 간단히 확인한 뒤, 막유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파파. 우리는 얼른 가요.”
“그리하지요.”
막유수가 대답과 동시에 방호 대사를 한 번 노려보더니, 곧 벽소군을 따라 몸을 날렸다.
후욱-.
짙은 귀무가 두 사람을 집어삼킨 순간, 장내에 정적이 흘렀다.
청풍자의 넋두리가 그 적막을 깼다.
“허어-! 빙화곡주께선 일심으로 극에 오르셨건만, 빈도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으니 도가 가난할 수밖에!”
무당파 도사들이 한탄에 섞인 진심을 깨닫고는, 즉시 움직일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청광, 청수야. 들어가자! 망설이지 않았던 너희가 옳구나.”
“사형, 가시지요.”
청풍자가 무당파 제자들을 이끌고 귀역무간진 내로 들어갔다.
“방선아. 우리도 준비하자꾸나. 달마 조사께선 물론이시거니와 불존께서도 고행길을 자처하셨는데, 내가 눈이 어두웠구나.”
“사형,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나한과 제자들은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아미타불!”
대나한 방호 대사가 불호를 외치며 담대히 귀역무간진으로 들어섰다.
***
한편, 삼문협 일대로 접어드는 미남자가 있었다.
그는 유독 투명해 보이는 동공으로 사이(邪異)한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눈이 천하를 바라보니, 천하가 고스란히 담겼다. 이 순간 그는 천하를 내려다보는 관조자였다.
그런 그가 한 걸음에 십여 장씩 거침없이 나아갔다. 마치 대자연이 그를 비껴가는지 걸음에 막힘이 없었다.
그가 그렇게 쭉쭉 뻗어갈 때, 일단의 무리가 저 앞에서부터 고개 숙여 맞이했다.
“련주님, 오셨습니까?”
“다들 얼굴이 좋지 않군.”
사이한 눈빛의 미남자, 사도련주 사령신군 섭무악이 수하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에 총군사인 환사문주 모천기가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련주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잔백마군이 귀역무간진을 통해 일대를 집어삼켰습니다. 미리 언질을 주신 덕분에 신마황동으로 향하던 련의 수하들을 상당수 뒤로 물렸으나, 진세가 급격히 광활해지며 휘말린 이들이 많습니다.”
“쯧쯧. 그런 동굴 따윈 없다고 말했거늘.”
“다들 련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충심일 겁니다.”
섭무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 멀리 펼쳐져 있는 거대한 귀역무간진을 바라보았다.
진세가 그의 눈동자에 온전히 담겼다 싶은 순간, 눈에서 섬뜩한 광채가 일었다.
“귀음사영들을 보냈구나. 나쁘지 않은 선택을 했다. 숨진 이들이 많으나, 사사천과 오독교의 아이들은 찾은 모양이다.”
“련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사천주 혁련회와 오독교주 경초방이 고개를 조아렸다.
사사천의 귀음사영(鬼陰邪影)은 사로써 귀를 수련하고, 귀로써 사를 수련한 이들로, 사사천에서도 경원시할 만큼 귀신같이 섬뜩한 종자들이었다.
그때, 섭무악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정마에 극경의 고수들이 둘씩 있었군.”
“송구합니다.”
“혁련 천주. 자네를 탓한 건 아니야. 아쉬울 뿐이지.”
섭무악이 그리 말한 건, 사도련에 자신을 제외하곤 극사경의 무인이 없는 까닭이었다.
천하를 가늠하는 총군사 모천기가 의문을 드러냈다.
“천마교는 잔백마군과 혈불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만, 정도에서는 누가 있습니까?”
“이름은 모르겠군. 각기 빙기와 뇌기로써 극에 올랐는데, 처음 접하는 것 같군.”
“일단 알겠습니다. 그런 이들을 만나게 되면 주의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그러도록. 슬슬 들어가면 될 것 같으니까.”
섭무악의 말에 모천기가 환사문도들을 준비시켰다. 사사천주와 오독교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모천기가 다가와서 물었다.
“그런데 련주님. 진우선은 저 안에 없는 것입니까?”
“아니. 있다. 그가 지금 잔백마군과 승부를 내려고 하고 있구나.”
“아! 그럼 정파에서는 극경의 무인이 셋이지 않습니까?”
“셋? 아니다.”
섭무악의 눈에서 사이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모 군사. 진우선은 잊어라. 그는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났으니까.”
“그 정도입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그를 제외하고 할 수 있는 것만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 오겠습니다.”
모천기가 바로 단념하고서 뒤돌아갔다.
여전히 귀역무간진을 꿰뚫어보던 섭무악이 홀로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구나! 이제야 보일 줄이야…… 허허.”
섭무악이 미간을 찌푸렸다. 놀라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한지 연신 실소를 흘려대고 있었다.
“나는 백 년이 넘게 걸려 여기까지 왔거늘, 그대는 어느새 제자마저 그리 키워놓고 있었구려. 과연 반선이었어!”
***
[그가 왔구나.]
검노야가 짤막하게 한마디 던졌다.
‘사령신군이라더니, 정말 영체(靈體)의 존재감을 흘리는 것 같습니다.’
산 중턱 위로 오르고 있던 진우선이 대답했다.
[나를 알아본 모양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나도 당황스럽구나. 반선과 비슷한 경지에 올랐는지, 영체인 나를 알아챈 것 같다. 반사령(半邪靈)쯤 되겠군. 세상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어.]
한데 비단 검노야만이 아니라 진우선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사령신군이 자신만 지켜보는 줄로 알았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왜 나를 계속 노려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지금 기색을 보니, 잠시 후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나 스승님과 일전을 치를 모양입니다.’
[그렇구나. 달려들 거였으면 지금 바로 왔겠지.]
그러던 중, 진우선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 섭무악이 앙천극사대법으로 사령의 길을 열었다고 했는데, 그는 왜 사선(邪仙)이 아니라 사령으로 나아간 걸까요?’
[선인은 속세의 업(業)을 벗게 되니, 그는 그게 싫었던 것 아니겠느냐?]
‘후천의 술로써 선천의 도를 속이기까지 하며 천하에서 이루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군요. 어렵습니다.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게 말이구나.]
진우선과 검노야가 그렇게 찝찝한 마음을 품고서, 산 정상으로 올라섰다.
“후후후. 네놈이 왔구나.”
귀기의 빛무리에 휩싸인 잔백마군이 음산한 목소리를 쏟아냈다.
“오랜만이오.”
진우선이 차갑게 대꾸하면서 잔백마군을 자세히 보았다.
그는 귀안 하나로 섬뜩한 귀기를 쏟아내면서, 온몸으로 혼백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네놈에게 눈을 잃은 후, 복수할 날을 기다리며 대공을 이뤘다. 인생이란 게 참으로 알 수 없으나, 그 순간만큼은 네깟 놈이 고맙더구나. 후후후.”
“나는 후회했소. 그때 당신의 눈이 아니라 목을 베었어야 했는데 말이오.”
“크큭! 뚫린 입이라고 마구 지껄이는군.”
잔백마군이 피식 웃으며 진우선을 노려보았다. 수천의 귀화가 휘휘 돌며 에워싸고 있는 까닭인지, 그는 여유가 넘칠 정도로 자신만 만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호위조차 없군. 저 혼백과 귀기들이 모두 수하나 다름없기 때문이구나!’
진우선이 긴장한 눈빛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큭! 눈치가 빠르군.”
잔백마군이 진우선을 슬쩍 비웃으며, 눈을 치켜떴다.
구오오오오-!
후으으으으으-!
심령을 한없이 짓누르다 못해 저승의 구렁텅이로 끌어갈 듯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귀역무간진을 이루는 수많은 귀기가 진우선 하나만을 노리고 허공을 격하여 쏘아진 것이다.
실로 수천의 혼백, 수천의 악귀가 가진 업력의 무게가 짓눌러오고 있었다.
한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쎄에엑-!
잔백마군은 귀린이 타오르는 두 눈으로 극성의 귀안마강을 쏟아냈다.
살아있는 혼백마저 뚫어버리기 위해 온 힘을 실어낸 강기였다.
바로 그 순간!
번쩍!
진우선이 눈을 부릅떴다.
그와 동시에 온몸에서 빛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