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귀역무간진 (4)
“후우-! 후우-!”
“용 무사, 괜찮소?”
“괘, 괜찮습니다.”
용천월이 힘겹게 대답했다. 얼굴은 병색이 어린 듯이 창백했고,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언행이 불일치했다.
탁운비가 바로 옆으로 다가가 용천월이 쥔 연화구고저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아니요! 전혀 안 그렇소. 일단 이걸 내게 맡기고, 기운을 차리는 게 급선무요.”
“아, 아닙니다! 이건 진 무사님이 제게 맡기신 거라…….”
“이따가 괜찮아지면 바로 돌려주겠소.”
탁운비가 연화구고저를 용천월에게서 강탈하듯이 뺏어 들었다.
“아……! 알겠습니다.”
“용 무사님. 이쪽으로.”
제갈영이 용천월을 얼른 안쪽으로 들였다.
그사이, 백하련이 크게 외치며 칠성둔형진을 조정했다.
“천추(天樞) 방위가 방금 바뀌었습니다. 천선(天號)과 천기(天幾) 방위는 진의 흐름이 원활해질 때까지 반 각 정도만 일 할의 힘을 더 써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알겠소.”
칠성둔형진을 구축하고 있는 무인들이 재빨리 대답했다.
이들은 원래 근방에서 귀기와 사투를 벌이던 정도문파의 무인들로, 용천월 일행에 의해 구해져 함께 진형을 구축한 상황이었다.
“용 무사님. 악귀들이 얼마나 더 강해진 느낌이었습니까?”
“정확히 산정할 수는 없겠지만, 처음보다 배로 힘들었습니다. 마치 병졸이 아니라 장수들을 상대하는 듯했습니다.”
“하! 칠성둔형진을 둘렀는데도 그랬단 말인가요?”
“잔백마군이 선포한 이후에 저들이 더 세지기도 했지만, 귀무 속에서 제 무공을 펼치는 것도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나마 칠성둔형진이 펼쳐진 후에 근처에서는 괜찮아진 거고요. 아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용천월의 숨을 돌리며 말했다.
잔백마군이 대귀역을 선포했던 그 순간에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었다. 귀역무간진이 크게 들썩이며 악귀들의 몸집이 마구 불어났고, 귀기가 폭압적으로 짓눌러온 까닭이었다.
강력한 외부의 기운도 방해할 수 있는 칠성둔형진이 빠르게 갖춰진 게 천만다행일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백 책사님과 함께 또 대책을 찾아봐야겠어요. 용 무사님은 얼른 운기조식부터 하시죠.”
문답을 간단히 끝낸 제갈영이 용천월에게서 멀어지며 고개를 들었다. 다급한 와중에도 침착하게 전황을 파악하며, 머릿속으로는 전세를 헤아렸다.
그때, 백하련이 다가오며 심각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제갈 책사님. 아무래도 산 자가 존재하는 한 귀역무간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까 시체들에서 뽑혀 나간 혼백이 저리로 모이는 거 같아요!”
“산꼭대기요? 저기가 왜…… 아!”
제갈영이 눈을 부릅떴다.
산꼭대기에서 소름 끼치게 새하얀 귀화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잔백마군이 언제 저기로 올라간 거죠? 그리고 귀들이 정말 저리로 몰려들고 있군요! 이럴 수가!”
괴기스러운 빛의 귀들이 잔백마군에게로 빨려들고 있는 광경이 너무나 불길했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제갈영이 얼른 자신이 헤아린 바를 전했다.
“백 책사님. 일단 동굴 쪽에서 악귀들이 나오는 건 끝난 모양입니다. 지금 확인하니까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악귀들이 다 쏟아져 나왔거나, 진 무사님이 막아내셨나 봅니다.”
“진 무사님이 막아내신 것 같아요. 강호인들이 더러 나오는 것도 보였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책사님. 진을 조율해주십시오.”
우문혁의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하련과 제갈영이 즉시 반응하며 달려갔다.
“우문 무사님. 무슨 일입니까?”
파팍-!
[끼에-!]
우문혁이 근방에 있던 갑주를 걸친 기세등등한 악귀에게 권격을 날린 뒤, 곧장 말을 쏟아냈다.
“저자들이 우리를 발견했고, 한 명은 벌써 이리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곧 들이닥칠 것 같습니다.”
“헛!”
“저게 무슨!”
우문혁이 가리킨 곳을 확인한 백하련과 제갈영이 탄성을 터트렸다.
멀리 있고,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내가 보였다.
그중 앞쪽은 일당백의 실력으로 혼자 진법에 갇힌 강호인들을 도륙하는 무인이었고, 뒤쪽은 백여 명의 귀영을 이끌고서 사방을 휩쓸고 다니는 강력한 무장이었다.
“둘 다 심상치 않습니다.”
“그러게요. 파죽지세입니다. 아무래도 귀문탈백종의 수뇌들 같아요!”
“일당백으로 싸우는 자가 비천귀(非天鬼)이고, 뒤의 무장이 신장귀(神將鬼)요. 아까 잔백마군이 외치는 걸 들었소.”
그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던 한효기가 둘의 정체를 전했다. 다른 방위에서 오감을 극대화한 채 적들을 상대하던 중에 알게 된 듯했다.
“혹시 우문 무사님께서 저자와 싸우실 생각이셨나요?”
“그렇습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쉽지 않아 보여요. 게다가 진을 나가면 귀역무간진의 진세가 너무 강해서 귀기를 상대하기 더 어렵고요.”
“그리고 악귀들이 귀갑을 둘러서 힘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보니까 악귀들만이 아니라 마인들도 진세를 등에 업던데!”
백하련과 제갈영이 연이어 걱정을 쏟아냈다.
하지만 우문혁은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군세를 이끌고서 사방을 초토화하며 다니는 신장귀가 오기 전에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게 좋은 수가 있으니, 진을 조정해주십시오.”
“아! 그렇다면 알겠어요. 그래도 조심하세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백하련이 한효기에게로 진세의 한 축을 옮겨주며 칠성둔형진을 조정했다.
잠시 후, 우문혁이 득달같이 달려가며 귄격을 마구 쏟아냈다.
퍼퍼펑-!
[켁!]
“컥!”
사방에서 우문혁에게로 달려들던 악귀와 마인이 단박에 튕겨나가고 죽어 버렀다. 아예 삼 보 거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와-!”
그 광경을 지켜본 제갈영과 백하련 등이 감탄을 흘렸다.
“우문 무사님이 저 정도였나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뒤에서 이 광경을 본 용천월이 입을 열었다.
“우문 무사님은 진세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대단하군요.”
“저게 이백 년 전에 강호를 위진시킨 권왕의 염왕신권이군요! 과연 그 명성이 허투루 생긴 게 아니었습니다.”
“그동안은 크게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우문 무사님이 이백 년 만에 익혀내셨나 봅니다.”
제갈영이 감탄하며 우문혁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들의 추측대로 방금 한 수는 염왕신권의 질풍격(疾風擊)이었다.
주먹을 쳐낼 때마다 강력한 기운으로 앞을 뚫고 나가니, 지금처럼 돌격할 때 쓰기에 제격이었다.
하지만 우문혁은 일행들의 감탄을 듣지 못했다. 오직 앞만 보며 달리던 중이었으니까.
‘지체해선 안 된다!’
우문혁은 머릿속에 단 한 가지 생각만 담고 있었다.
‘명왕기는 분명 통한다! 하지만 비천귀의 일격을 받아내기는 쉽지 않아. 일어서기도 힘들 테니, 빠르게 끝내야 해!’
명왕기(冥王氣)는 명옥기를 통한 염왕신권의 단련 중에 깨달은 북명천문 무학의 정점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따와 명왕기라 불렀는데, 명왕기는 귀역무간진 속에서도 온전했다. 우문혁의 자신감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후우웅-!
명왕기를 두른 우문혁의 전신이 불타오르듯 붉게 빛났다.
콰콰콰쾅-!
돌격에 속도가 붙으니 커다란 불덩이가 쏘아져 나가는 듯했다.
귀광을 뿜어내는 악귀들과 눈을 희번뜩 빛내는 마인들이 우문혁에게로 마구 달려들었다.
퍽! 퍽! 퍼퍽!
[히익-!]
[끼엑-!]
“네깟 놈이…….”
몸을 에워싼 명왕기의 구체에 적들이 죽어 나자빠졌다.
우문혁은 이제 주먹도 내뻗지 않고 있었으나, 또렷하게 유형화된 명왕기로 충분했다.
‘다 왔다!’
이윽고 비천귀와의 간격이 십 장으로 좁혀졌다.
십 장이면 금방이다.
우문혁이 명왕기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구체 속에서 힘을 한 점에 모은 우문혁이 튀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구체의 기운이 거대한 절대자의 형상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는 불타오르는 기백이리라.
그때, 비천귀가 웃어젖혔다.
“크하하하! 나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오너라-!”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귀갑 속에서 비천귀의 눈이 섬찟하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모든 공력을 한 주먹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몸에 두텁게 두른 귀갑이 주먹에 서리면서 귀기의 힘이 더해졌다.
또, 허공의 귀무가 주먹에 맺히면서 귀기가 더해지고, 또 더해졌다.
순식간에 십 수 겹의 귀기가 비천귀를 강화한 것이다.
주먹 대 주먹!
일격필살!
이 순간, 우문혁과 비천귀는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딪쳤다.
콰아아앙-!
***
한편.
귀기가 끊어진 신마황동의 이문에서 일단의 무리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바깥도 난리가 났구나!”
가장 먼저 밖으로 나선 황하신룡 교금천이 놀람을 터트렸다.
“컥! 커컥! 숨을…… 숨을 쉴 수가 없소!”
“나, 나도 아까부터 그랬소! 천하에 이런 진법이 있었다니!”
“아! 진 대협의 기운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모두 힘들어도 내력을 끌어올려 저항해야 하오! 그럼 그나마 좀 낫소.”
무인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그들은 신마황동 속에서 이화의 기운을 나눠 받아 독기를 태워버릴 수 있었으나, 동혈을 나오면서 귀무에 노출되어 진세에 짓눌리고 있었다.
넝마가 된 옷을 걸친 채 기진맥진해 보이는 교금천이 그 와중에도 상황을 명확히 살폈다.
“보시오! 아까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굉음이 들렸던 게 이 진법 때문이었던 모양이오!”
“이 진법이 뭔지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크윽! 모르오!”
“귀기가 극성이군. 너무 많소!”
“이 정도 진법을 펼쳤다면…… 잔백마군 아니겠소?”
“그럼 설마…… 귀역무간진?”
“강호 이대금진(二大禁陣)의 그 귀역무간진 말이오?”
백여 명의 머리가 모이다 보니, 금세 답이 도출되었다.
“그럼 어떡하면 좋소?”
“밖에 나왔는데도 상황이 이리 막막할 줄이야!”
“처음부터 정검신협의 말씀을 새겨들었어야 해.”
“괜히 욕심을 냈었구나!”
좌중이 밀려드는 걱정과 후회에 휩싸였다.
그때, 교금천이 한 곳을 발견하고 외쳤다.
“저기 저분들, 혹시 진 대협과 함께 온 정무맹 분들 아니오?”
“오! 맞소! 맞소! 진 대협께서 신마황동의 첫 번째 입구를 폐했을 때, 옆에 계시던 분들이오.”
“저리로 갑시다! 저분들은 뭔가 체계적으로 대응을 하시는 것 같소!”
“그럽시다. 혹시나 진 대협께서 합류하실지도 모를 일이니.”
“이게 정말 귀역무간진이라면, 진 대협께서 오셔야만 방법이 보일 것 같습니다.”
철표가 진우선에게 강한 신뢰를 드러냈다.
그에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게 무인들이 조금 움직였을 때였다.
츠읏-!
갑작스레 미백색의 서늘한 강기가 무인들을 베고 지나갔다.
“커억-!”
“적이다!”
이미 신마황동을 빠져나오며 만신창이였던 무인들이 혼비백산하여 제각기 원래의 소속대로 뭉쳤다.
바로 그 순간.
휘휘휙-!
채챙!
갑자기 한기 어린 공격들이 빈틈을 찔러 들어왔다.
귀기와 음기 속에서 기척을 감추고 있던 여인들이 마구 튀어나와 살수를 펼쳐대고 있었다. 그 수가 서른 명쯤 되어 보였다.
“월령마화종이오! 조심하시오!”
그들을 알아본 허름한 도포의 노도사가 급박하게 외쳤다.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달빛 같은 반월형의 빛이 번쩍인다 싶던 순간.
“컥!”
노도사의 목이 잘려 나갔다.
“흩어지면 안 되오!”
“당황하지 마시오. 모여야 하오. 적은 우리보다 적소!”
“월령은 우리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소! 두려워 마시오!”
“월인마벽강(月印魔碧)만 조심하시오!”
교금천을 비롯한 몇몇 무인이 목청이 터지게 외쳤다.
하지만 쉬이 통솔이 되지 않았다.
츠앗-!
“컥!”
무인들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연이어 쓰러져갔다. 달빛을 닮은 미백색의 강기가 이토록 섬뜩할 수가 없었다.
누가, 어디서 강기를 날리고 있단 말인가!
단숨에 스무 명 가까이 숨져버리니, 무인들 사이에 두려움이 마구 엄습했다.
바로 그때였다.
화아악-!
빛이 사방으로 퍼지는 것과 동시에.
“힉!”
“컥!”
서른 명의 월령들에게서 일제히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하를 밝히는 빛에 월령 서른이 단박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강기를 쏘아 보내던 여인, 백란의 모습도 발각되었다.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눈을 휘둥그레 뜬 상태였다.
그 순간.
핏!
새하얀 빛 한 줄기가 미간을 관통했다.
백란의 몸이 뒤로 쿵 쓰러져버렸다. 즉사였다.
그리고 한 사내가 장내에 내려섰다.
그가 교금천을 바라보았다.
“고생이 많았소.”
교금천이 그 한마디에 녹아내리며 격정 어린 말을 쏟아냈다.
“진 대협! 하명하신 바를 완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