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92화 (192/225)

192.

#짙어지는 암운 (4)

사방이 다 틀어막혀 문이 없어 보이는 장방형의 석실에서 한쪽 석벽이 반쯤 회전하여 열렸다.

그 틈으로 검은색 두건을 쓴 파리한 안색의 사내, 흑명귀(黑命鬼)가 무거운 표정을 한 채 들어왔다.

“부주(副主), 귀동의 기운이 끊어졌습니다.”

“그리되었구려.”

부주라 불린 흑암무영종의 이인자, 무흔이 얼굴을 굳혔다.

“어찌할까요?”

“잠시 기다려 봅시다. 곧 은조가 상황을 살피고 돌아올 테니, 그 후에 판단하겠소.”

“알겠습니다.”

무흔의 말에 흑명귀가 수하인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흑명귀는 귀문탈백종 소속인데, 신마황동의 대계를 위해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흑의를 입고 얼굴마저 검은 복면으로 가린 사내, 은조(隱鳥)가 흑명귀처럼 석벽의 비밀 문으로 들어섰다.

“은조, 바깥 상황은 어땠지?”

“부주(副主), 진우선이 다른 무인들을 윽박질러 이곳에 들어오는 걸 막았습니다. 그러고는 일문을 무너뜨리고서 들어섰습니다.”

“혼자?”

“네, 혼자입니다.”

“그럼 귀동의 기운이 사라진 건 그의 짓이겠군.”

“흑명귀가 보고를 드린 모양이군요.”

대번에 상황을 파악한 은조에게 무흔이 물었다.

“귀실도 확인해보았나?”

“네. 귀실에 펼쳐져 있던 육합귀문진은 산산이 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귀동은 귀기를 잃은 채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된 것 같았나?”

“귀동은 두어 시진 정도 전에 숨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진우선은 보지 못한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를 마주치거나 강력한 기운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은조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흑암무영종에서 은둔술과 잠행술로는 무흔과 쌍벽을 이룰 만큼 뛰어난지라, 신마황동 내부는 그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 그렇겠지. 이번에 일 구역만 돌아보고 온 건가? 그럼 진우선이 이 구역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신마황동에는 가장 큰 입구인 일문부터 삼문까지 세 개의 통로가 있었다.

그중 일문으로 들어서면 일 구역으로, 비급이 놓인 공동을 거쳐 귀실(鬼室)이나 독실(毒室)로 길이 나 있었다. 그 뒤로는 미리반천진(迷離反天陣)이 이어져 있어서, 귀와 독을 용케 통과하여도 진법에 빠져 동굴을 헤매다 지쳐 숨을 거두는 구조였다.

한데 미리반천진은 이 구역과의 경계이기도 했다. 이 구역은 이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현재는 일문만 공개한 상황이었다.

그런 이 구역에 진우선 홀로 들어섰다고 무흔과 은조가 판단하고 있었다.

“그럼 이문을 열어야겠군. 예상보다 하루이틀 정도 빠르긴 하나, 지금이 적기야!”

무흔이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더니, 말을 이었다.

“은조. 너는 독교에게 이제 독실로 가지 말고, 이 구역에 있는 제혼소(制魂所)로 가라고 전하라.”

“알겠습니다. 부주.”

은조가 무흔의 명령을 받들었다.

무흔이 흑명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지금 상황은 어떻소?”

“비역(秘域)은 이미 첫 단계를 마친 상태입니다. 삼백의 귀가 모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육백, 세 번째는 일천이라 들은 거 같은데?”

“맞습니다. 그리고 현재 두 번째 단계도 막힘없이 진척되고 있습니다. 바람으로는 두 번째도 다 채웠으면 좋겠습니다만, 어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진우선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진법가라도 미리반천진 속에서는 하루를 꼬박 헤매며 살펴야 이 구역으로 올라올 수 있을 텐데, 예상대로라면 진우선은 너무 빠릅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 구역에서 그를 상대하는 건 우리가 아니오.”

“아! 알겠습니다.”

흑명귀가 무흔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한결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마군께선 언제 당도하시오?”

“밤중에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구음신녀님과 비슷하게 도착하시겠군. 공교롭게도 딱 좋을 때 오시는구려.”

무혼이 은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은조, 사도련에서도 도착했다고 했었나?”

“맞습니다. 사도련만이 아니라 소림과 무당이 이미 도착했고, 사천과 산동의 무인들 역시 곧 당도할 예정입니다. 정사외도의 무리를 합치면 강호인이 이천을 넘어갑니다.”

흔히 사마외도라 하나, 은조는 마교도의 입장에서 정사외도로 무인들을 통칭하고 있었다.

“많이도 모여들었군. 이마저도 더 늘어날 테고 말이야.”

머릿속으로 계획을 조율하던 무흔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명령을 내렸다.

“원하는 규모의 판이 거의 갖춰졌다. 그럼 더 기다릴 필요 없지. 이문이 열리면 이 구역의 수하들에게 마음껏 활개 쳐도 된다고 전하라. 제혼소 뒤의 오마동(五魔洞)도 열도록!”

“알겠습니다.”

무흔이 흑명귀에게도 말을 전했다.

“비역을 여는 것도 곧이오. 준비해주시오.”

“명을 따릅니다.”

***

“진짜 신마황동이 나타났다-!”

“백 년 전의 고수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말이 돌기가 무섭게, 삼문협의 무인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난리가 났다.

그들은 진우선이 신마황동의 입구를 무너뜨린 것에 대해 잘한 건지 못한 건지 서로 마구 헐뜯으며 싸워대던 중이었다.

“진 대협 때문에 신마황동이 폐쇄된 거로 답답해하지 말고 갈 사람은 모두 갑시다!”

“진위가 확인되지 않았소. 일단 맞는지는 확인해야 하지 않겠소?”

신중히 접근하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의견은 한 시진 만에 깨졌다.

“소양마공(小陽魔功)이 나타났소!”

“안에 들어가면 비급이 수두룩하다 하오.”

“이럴 수가!”

“좋소! 나는 들어가겠소. 어제 들어가지 않은 걸 오늘 하루 내내 후회했었소.”

“맞소!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오. 다들 나중에 땅을 치며 통곡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 봅시다.”

잠시 망설였던 무인들이 소문에 휩쓸려 대거 신마황동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자가 별로 없었다.

“잠사공(潛邪功)! 방금 잠사공을 가져간 도둑놈이 누구냐?”

“저놈을 잡아라! 거령신마공(巨靈神魔功)을 품에 숨겼다고!”

“오절서생이 태을건천신공(太乙乾天神功)을 챙겨서 달아났다!”

밤이 새도록 신마황동의 새로운 입구 주변에서는 온갖 외침이 들려오며, 칼부림이 그치지를 않았다.

한데 상황이 난잡한 건 입구 쪽만이 아니었다.

내부는 지금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헉! 헉!”

“흐윽! 죽는 줄 알았네.”

십수 명의 무인들이 숨을 몰아쉬며 지나온 통로를 돌아보았다.

그때, 맨 앞에 선 헌앙한 중년인이 다른 무인들에게 물었다.

“아우들, 모두 무사한가?”

“대형! 유검이가…… 유검이가…….”

“유검이가 왜?”

“크윽! 대형, 저를 두고…… 가십시오. 저는…… 틀렸습니다.”

“대형, 운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제길!”

신룡방을 이끄는 황하신룡(黃河神龍) 교금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신룡방의 정예 서른과 함께 신마황동의 비밀을 쫓아왔다가 피해가 막심해진 까닭이었다.

사실 애초에 피해가 없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금천이 당황하는 건, 기관진식에 당하리라곤 생각한 적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유검이와 운호 외에는?”

“저희는 괜찮습니다.”

“빌어먹을!”

“대형. 진정하십시오.”

“진정되게 생겼어? 벌써 식구들을 반이나 잃었는데?”

교금천이 악을 터트렸다. 신룡방에서 호형호제하며 지내온 이들 서른 명이 함께 신마황동에 왔는데, 이제 둘을 빼면 열셋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앞쪽을 바라보고 있던 한 부하가 외쳤다.

“대형, 저쪽에 누군가가 죽어 있습니다.”

“어디?”

“오래된 시신입니다. 둘이 함께 죽은 모양입니다.”

“뭐? 얼른 품을 뒤져봐!”

부하 둘이 각기 한 시체씩 살피는 사이, 교금천의 눈이 금세 욕심에 벌게져 있었다.

이윽고 대답이 들려왔다.

“대형! 책을 찾았습니다.”

“저도 찾았습니다.”

“얼른 비춰봐! 이름이 뭐야?”

교금천이 캐듯이 묻자, 두 부하의 대답이 곧 들려왔다.

“헉! 음살마혼강기(陰殺魔魂罡氣)입니다.”

“이것도 봐주십시오! 천사혈강(天邪血罡)이에요!”

“이럴수가! 우리도 드디어 얻었구나!”

“대형! 감축드립니다.”

“후후후후. 고맙다. 다 너희들 덕분이다.”

교금천이 환하게 웃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흐으으….”

“흐윽… 흐으….”

비급을 찾아낸 두 부하가 눈이 붉어지며 이지를 잃더니, 괴이한 신음과 함께 몸이 무너져내렸다.

“뭐야? 너희들 왜 그래?”

“누구……?”

횃불을 들고 있던 철표가 얼른 무너져내리는 사내를 받아들었다. 그는 동공에 붉은 광채가 어린 채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시뻘건 빛.

그걸 마주한 순간, 그 빛에 빠져든다고 느낀 순간, 몸에서 힘이 빠져들어갔다.

“흐으으….”

철표의 입에서도 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철표, 넌 왜 그래?”

그에 철표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에선 신룡방의 무인들이 철표를 바라보았다. 철표의 눈에는 종전의 동료보다 짙은 핏빛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뭐야? 네 눈 갑자기 왜 그리 빨개졌어?”

“흐으으으….”

신음성과 함께 철표의 몸이 흐느적거리듯이 무너져내렸다.

그 순간, 등골이 쭈뼛 선 교금천이 외쳤다.

“독이다! 모두 내력을 끌어올려라-!”

하지만 교금천의 외침도 잠시였다.

“흐으으…”

“흐윽….”

폐쇄적인 장소에서 밀집해 있던 신룡방의 무인들이 동시에 괴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눈동자에도 붉은빛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런!”

교금천이 당혹성을 토해내며, 얼른 공력을 휘돌렸다.

그러자 자신의 몸속에서도 단전을 쿡쿡 찌르는 독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독이 대체 언제 침투했단 말인가.

하지만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쿵-.

풀썩.

멀쩡했던 부하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

두터운 공력으로써 독을 상대해 내던 교금천의 눈에 핏줄이 마구 솟구쳤다.

반도 남지 않은 식구들마저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끄으윽-!”

교금천이 신음을 흘렸다.

부하들의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바로 그때였다.

“당장 호흡을 멈추시오!”

통로 저편에서 들려오는 청명한 음성에 교금천이 저도 모르게 반응하여 숨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바람처럼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내 내력을 거부하지 마시오. 해독하는 것이니!”

그 순간 교금천이 자신의 장심에 손을 얹은 무인을 보고서 당황하여 외쳤다.

“진 대협-!”

“맞소. 나요. 이 독은 사람의 호흡을 통해 퍼지고 있으니, 숨을 멈춰야 하오.”

“아-!”

진우선의 차분한 대답에 교금천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탄성만 흘렸다.

이윽고 이화로써 교금천의 독을 해소시킨 진우선이 철표에게로 다가갔다.

“이 자까지는 구할 수 있겠소. 하지만 다른 이들은 절명했소.”

“크윽-!”

교금천이 통탄하여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다가가지 마시오. 이 독은 접촉하여 기운이 일어나고, 공기 중으로도 번지는 것 같소.”

“이, 이럴 수가!”

교금천이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아우들아.”

시신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멀찌감치 바라보던 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대협, 천하에 이런 독이 있다고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나도 모르겠소. 처음 접하는 부류요. 다만 마라혈독과는 비슷한 것 같소.”

“헛! 마라혈독!”

“비급을 두 권이나 얻으셨구려. 저기서 시작된 거요.”

모든 정황이 다 파악된 교금천이 진우선에게 물었다.

“그럼 신마황동이 천마교의 음모라는 게 정말이었습니까?”

“정말이오. 날 안 믿었던 모양이지만 말이오.”

“아-!”

교금천이 탄식하며 절망했다.

욕심에 멀어 그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던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