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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검전-189화 (189/225)

189.

#짙어지는 암운 (1)

동굴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서안대협 왕관웅이 안력을 잔뜩 끌어올린 채, 조심스레 걸어 들어갔다.

그의 성명절기인 건곤광양신공(乾坤光陽神功)은 흑암 가운데서 사방을 밝히 보는 공능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통해 보게 된 건 처참한 시신들뿐이었다.

‘끔찍하군!’

왕관웅은 또다시 팔다리가 뜯겨 나가고 잘려서 나뒹구는 광경을 마주했다.

갈가리 찢긴 시체만 벌써 수십 구였다.

철퍽-. 철퍽-.

바닥에서는 불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체를 피해서 걸어가려니, 핏물이 흥건한 땅을 밟고 갈 수밖에 없었다. 비릿한 혈향도 코를 파고들었다. 참담한 심정을 이루 형용키 어려웠다.

‘일신일마일황의 소문을 듣고서 삼문협에 모인 이들이 천 명은 족히 되었을 터. 다들 욕심을 좇은 말로가 이렇구나! 신공절학과 신병이기에 눈이 멀어 음침한 동굴 속에서 생을 다하고야 말았어!’

하지만 왕관웅은 발길을 멈추거나 돌리지 않고, 계속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신마황은 백 년 전 강호의 정점에 섰던 자들이다. 먼저 들어온 사람 중에 벌써 진체를 얻은 사람이 있을까? 음사검에게 천마신검이 이어져서는 안 되는데!’

산서삼견이 혈사강기를 얻었다고 하는 것도 걱정이고, 소청고검이 가져갔다는 무신의 유언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그런 와중에 왕관웅이 자신의 목표를 되새기며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빠르게 알아보고 나가자. 천하만민이 더 몰려들기 전에, 얼른 진실을 살피고 알려서 강호에 불어닥칠 더 큰 혼란을 막아야 한다!’

이미 허망하게 죽은 무인들의 수가 상당했다. 참혹한 상황 속에서 왕관웅의 발걸음을 강하게 이끄는 건 천하를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던 중, 동굴이 둘로 갈라지는 지점이 나타났다.

그리고 왼쪽 동혈의 입구 쪽에서 미약한 숨결이 들려왔다.

왕관웅이 잠시 멈춰 섰다.

그때, 중년 사내가 자조적으로 내뱉은 한마디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크크큭……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부나방이 또 들어왔군.”

왕관웅이 슬며시 다가가 사내를 살폈다.

그는 눈코입귀의 칠공(七孔)에서 피를 쏟고 있을 정도로 내상이 극심해 보였다. 그런데도 왕관웅의 접근을 알아챘으니 얼마나 고수란 말인가.

“이놈의 정파 나부랭이는 겁도 많구나. 크큭! 간담이 이리 콩알만 하면서 어찌 들어왔을꼬?”

“그러는 형장은 뉘시오?”

“크크-. 나는 동천산장의 추풍검이었지. 이제 옛 이름이 되겠지만 말이야.”

“추풍검(追風劍) 교단생! 형장이 정말 추풍검이오?”

왕관웅이 화들짝 놀랐다.

추풍검은 섬서성에서 매화검백의 뒤를 잇는 절대고수이지 않은가.

그런 그가 이곳에서 죽어가고 있는 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때 추풍검이 실소를 흘렸다.

“크흐흐흐-!”

“일으켜 드리겠소.”

“됐다. 곧 죽을 몸인데 무슨. 그리고 내 몸에 손대는 순간 너도 죽어. 크흐흐!”

왕관웅이 손을 뻗다가 몸을 움찔하며 멈춰 섰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시오?”

“제 몸은 끔찍하게 아끼네. 크큭! 독에 당하기는 싫은가 보지?”

“추풍검께서도 이토록 사투를 벌이고 계시는데, 소인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소?”

“말이 참 번지르르해. 됐고, 네 이름이 뭐냐?”

“서안대협 왕관웅이오. 동도들이 과분한 이름을 붙여주었소.”

“서안대협? 푸핫-!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정파 나부랭이가 서안에 있다는 말을 듣긴 했었는데, 그게 네놈이었구나!”

추풍검은 입으로 피를 꾸역꾸역 흘려대면서도 이죽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왕관웅이 서안대협으로 불린다고 하나 그 명성은 서안 근처에 국한된 것일 뿐, 섬서성 전체를 주름잡던 추풍검에 비하면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왕관웅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누가 형장을 이리 만들었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독교(毒橋)의 독공에 당했다. 좀 더 들어가면 그녀가 암수를 펼친 공동이 나올 거야.”

“독교란 말이오? 그럼 정말 이게 천마교의 음모요?”

독과 마공에 통달했다고 알려진 독교는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에서 독살을 일삼아 공적이 된 여마두였다.

“크크크. 답이 분명한데, 왜 되물어? 겁나나 봐?”

“그게 아니오. 정말 진 대협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에 놀란 거요.”

왕관웅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정말 천마교의 음모라면 강호인들을 몰살시키려는 뜻일 터였다.

그때, 추풍검이 온몸을 들썩이며 피를 울컥 쏟았다.

“커억-! 컥!”

“형장!”

“젠장할, 힘이 하나도 없군……. 이렇게 죽는구나.”

추풍검의 목소리가 점점 꺼져 들고 있었다.

왕관웅이 다소 허둥대며 얼른 말을 꺼냈다.

“형장, 그럼 하나만 답해주시오. 혹시 천마신검의 검집을 얻었다는 음사검은 만나셨소?”

“못 만났다. 만났으면 내가 가졌겠지. 음사검 따위가 날 만났다면 곧바로 바쳤을 거야.”

“그랬구려. 하지만 문득 그 소문이 거짓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소.”

“거짓? 크큭-. 재밌어, 너는 참 재밌어! 그리 욕심이 나면서도 위선을 떨고 있으니 대화하는 맛이 있군.”

“사람 잘못 보셨소. 이는 어디까지나 천하의 안위를 살피는 걱정이오.”

추풍검이 슬쩍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섬서미검(陝西美劍)이 실전됐다고 알려진 현천도인의 현천무상심결(玄天無常心訣)을 얻고서 나갔다. 네놈과는 친분이 있다지, 아마?”

“헛! 그게 정말이오? 그가 현천무상심결을 얻었소?”

“그래. 그걸 얻고서 한바탕 혈전을 치르고 빠져나갔다. 아마 한 시진쯤 됐겠군.”

그 순간, 왕관웅이 힐끗 고개를 돌렸다.

추풍검은 시각을 잃고서도 그런 왕관웅의 반응을 알아챘다.

“탐나나? 섬서미검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을 테니, 지금 바로 나가면 빼앗을 수 있을 거야.”

“그게 아니오. 섬서미검은 상승무공에 대한 갈증이 있었기에 잘 됐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소.”

“사실 섬서미검이 얻은 무공은 사사노괴의 극사패공(極邪覇功)이야. 현천무상심결보다 더욱 강맹하다고 알려진 무공이지.”

“설마? 그가 그걸 얻고 나갔단 말이오?”

“부러운가 보군. 하지만 더 부러운 사실 알려줄까? 사실 그는 둘 다 얻었어. 현천도인과 사사노괴 둘의 시체를 한꺼번에 발견했으니까 말이야. 크크크.”

“그, 그럴 수가!”

왕관웅의 음성이 몹시 떨려왔다.

추풍검이 그런 왕관웅을 신나게 조롱했다. 목숨이 꺼져가는 와중이라서인지 더 즐거운 듯했다.

“크크큭. 역시 재밌어. 넌 정말 위선적이군. 말속에 욕심이 그득해. 귀로만 들으니 너무도 명확히 느껴져.”

“아니요. 잘못 들으셨소.”

“욕심나서 들어온 주제에 아닌 척하기는! 크큭. 네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정파놈들 꼬라지가 진짜 가관이야. 솔직한 놈이 하나도 없어, 하나도!”

“그건 오해요, 오해! 누군가는 이 동굴을 살피고 나가서 음모임을 알려야 하지 않겠소?”

왕관웅이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항변했다.

“욕심 부리지 말고 돌아가. 그게 좋을 거야. 크흐흐흐…….”

그러나 추풍검은 마지막까지 왕관웅의 말을 믿지 않고 웃었다.

“끅.”

웃음소리가 멈추며, 추풍검의 고개가 떨어졌다.

“형장. 가셨구려.”

푹-!

왕관웅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더니, 입구 앞에서 보았던 검을 들고 와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러고는 곧장 오른쪽 동혈로 들어섰다.

‘독교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이쪽으로 들어가야겠다.’

왕관웅이 조심스레 길을 살피며 들어갔다.

‘이쪽은 추풍검이 들어갔던 길에 비해 시신이 적은 모양이다.’

하지만 잠시 후.

고요한 공동에 들어선다고 느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눈앞이 흐려져 왔다.

‘아니, 갑자기 왜……? 아! 진법이구나!’

경계를 넘어선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서걱-!

심혼이 단박에 잘려 나가는 충격을 받았다. 섬찟한 기운이 건곤광양신공으로 피워낸 안력을 잡아먹은 것이다.

히이이익-!

귀를 뚫고 심령으로 전해진 귀기의 울부짖음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컥!”

왕관웅이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 내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때였다.

앳된 음성이 귓가에 속삭이듯이 전해져왔다.

“후후후. 너는 그럭저럭 쓸 만하구나. 오줌을 지렸지만 주저앉지는 않았어. 그 정도면 합격이야.”

“무, 무슨 합격……?”

“내 친구들이 너 정도면 먹기 좋대!”

그 순간, 왕관웅의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다.

‘친구?’

그리고 떠올랐다.

귀기를 흘리는 친구를 둔 천마교의 마인이 누구인지.

‘귀동(鬼動)! 그럼 두 동혈로 나뉘어 있었지만, 결국 독교 아니면 귀동이었구나!’

***

밤이 내린 시각.

“헉! 헉!”

중년의 미남자 섬서미검은 지금 몹시 숨이 가빴다.

삼문협에서 멀어지기 위해 쉴 새 없이 신형을 움직이는 까닭이었다.

그는 온몸에 상처를 입어 쏟아낸 피가 상당하건만, 급히 응혈만 시킨 채 도망치고 있었다.

품에 든 걸 뺏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회복해서 이 두 무공만 익히면 돼!’

섬서미검이 화려한 미래를 꿈꾸며 고통을 참아냈다.

현천무상심결과 극사패공의 비급은 그가 초인적인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헛-!”

섬서미검이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걸음을 멈춰 섰다.

갑자기 십 수 명의 흉흉한 무인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놈은 동굴에서 뭘 들고 나온 모양이오.”

“소녀 역시 그리 보이는군요.”

흑의사내와 잿빛 의복의 여인이 서늘한 기세를 뿜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흑의 사내가 뒤에 서 있는 부하에게 물었다.

“저놈이 누구냐?”

“섬서미검입니다.”

“그럼 과분한 걸 들고 나온 거겠군. 운이 참 좋았어.”

흑의사내가 섬서미검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내놔라. 편히 죽고 싶으면.”

“다, 당신들은……?”

섬서미검이 참담한 심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결코 감당키 힘든 기세의 무인들이었다.

“곧 죽을 텐데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흑의사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검을 들어 올리더니, 단박에 내리그었다.

섬서미검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순간, 찰나 간에 온갖 생각이 지나쳐갔다.

‘내가 어떻게 얻은 무공비급인데…….’

불과 한두 시진 전에 함께 동굴로 들어간 친우들을 배며 비급을 얻었건만, 그걸 채 익혀보기도 전에 횡액을 당하게 되었다.

잠시간의 일장춘몽에 젖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흑의사내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섬서미검의 주검을 가리키며 부하에게 명령했다.

“시체를 뒤져 봐라.”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부하가 두 권의 책을 찾아 가져왔다.

그때, 여인이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조심하세요. 책에 독이 묻어 있어요. 내게 먼저 주세요.”

여인이 먼저 책 두 권을 받아들더니, 독이 묻어 있는 종잇장을 찢어냈다.

혹의사내가 책 알맹이만 건네받아 빠르게 살폈다.

“극사패공이라니! 이게 여기 있었군.”

“진본인가요?”

“진본인지는 모르겠소. 동굴에만 있었다기엔 생각보다 책의 상태가 좋구려.”

“내용은요?”

“한데 내용은 아무래도 사사노괴의 극사패공이 맞는 것 같소.”

“역시 예상한 대로군요.”

“그렇소. 이러면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겠군.”

“맞아요. 그들의 계략이겠지만, 우리로서도 얻을 게 많을 테니까요. 이걸 노렸겠죠.”

“신녀께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흑의사내가 오독교의 소주, 무정신녀에게 물었다.

“교주님께서 알리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독교의 독이니까요.”

“그랬군. 사사천주께서도 총군사님과 함께 곧 오신다고 하셨소. 진우선이 근처에 있다고 하니 말이오. 우리는 그 전에 동굴을 한 번 살펴보고 옵시다.”

“그러지요.”

무정신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사사천의 신비무인 묵천일영이 뒤에 선 부하들을 불렀다.

“묵천십영은 이제부터 신마황동을 탐색한다. 적을 보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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