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들썩이는 천하 (4)
“아앗-!”
제갈영이 사색이 된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무슨 일입니까?”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진우선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제갈세가가…… 크게 당했어요…….”
“그런 일이 어찌! 제갈 책사님, 제가 그걸 봐도 되겠습니까?”
용천월도 덩달아 놀라며 물었다. 제갈영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찰을 건넸다.
제갈영이 보던 서찰은 남양지부에서 전해진 것이었는데, 세 사람은 서안지부의 무인이 한꺼번에 가져온 서찰을 나눠서 살피는 중이었다.
“용 무사님.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아! 월령마화종이 호북성에서 북진하여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마주쳤는데, 제갈세가의 포위망을 관통한 모양입니다.”
“이런…….”
용천월의 말을 들은 진우선의 얼굴에 안타까운 기색이 어렸다.
“당주님이 무당파의 어르신들이자 최고수이신 천강삼성(天罡三星)을 모셔왔는데, 월령마화종은 그분들을 피해 양양쪽 포위망을 돌파했나 봐요. 조부님께서 애써 막으셨지만, 백여 명이 목숨을 잃고 이백여 명의 중상자가 나왔어요.”
제갈영의 음성은 몹시 떨렸으나, 그녀의 두뇌는 전황의 흐름을 단박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럴 수가!”
“아-!”
용천월과 진우선이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후우-! 마음이 편치는 않네요. 하지만 세가가 완전히 무너진 게 아니니 괜찮을 거예요.”
제갈영이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책사의 본분을 이어나갔다.
“그보다 월령마화종이 남양을 지날 거에요. 아무래도 만상각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북진하여 올라오는 모양이니, 낙양을 거쳐서 이곳 삼문협으로 올 것 같습니다.”
정무맹 만상각에서 보낸 서찰을 받아본 건 엿새 전이었다. 이들은 그 지식을 기반으로 천하의 흐름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용 무사님이 살펴보신 서찰은 어떻습니까?”
진우선이 용천월에게 물었다. 그는 하남성 신양지부에서 도착한 서찰을 살핀 상황이었다.
“이곳으로 향하는 다섯 사람이 신양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백 책사님과 한 무사님, 만 무사님, 우문 무사님이 출발하실 때, 탁 무사님도 자청하여 합류하셨다는군요.”
“무도원의 탁운비 공자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아! 탁 형이 자진해서…….”
진우선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한 사람의 이름에 놀랐다. 일찍이 받은 서찰에는 탁운비 없이 네 사람만 쓰여 있었다.
“지금 천하가 난리라지만 삼문협의 상황이 더 중차대한데, 탁 무사님은 진 대협을 돕고 싶어 자청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랬군요.”
진우선이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용천월이 진우선에게 물었다.
“진 무사님, 서안에서는 뭐라고 왔습니까? 양 지부장님이 이리로 오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걸 보니, 그쪽에도 큰일이 터진 모양인데요.”
“일전에 각주님께서 예측하셨던 것들이 심화된 상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잔백마군이 귀문탈백종을 이끌고 한중을 지났다고 쓰여 있으니, 그들은 아마 지금쯤 서안에 도착했겠지요. 근데 아미와 청성, 당문에서 도움을 요청해오는 바람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해왔습니다.”
“아! 그런 거면 어쩔 수 없겠군요.”
사천의 정세에 밝은 제갈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의견을 이어나갔다.
“사천사세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귀문탈백종을 따라 그들 역시 이곳으로 올 것 같습니다.”
“애초에 정사마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던 그들 셋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자체가 신기합니다. 자존심이 강하다 했지만, 더 큰 걸 얻을 수 있을 듯하니 바로 도움을 요청하는군요.”
제갈영의 판단에 용천월이 제 생각을 얹었다.
진우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양원창 서안지부장의 서찰을 거듭해 읽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용천월이 문득 떠오른 의문을 던졌다.
“잔백마군이 극마에 올랐다던 소문은…….”
“그는 극마에 오른 게 사실이라 보입니다.”
진우선이 단박에 대답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혈불이 혈련수라종의 무리 수십과 함께 며칠 전에 서녕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들도 삼문협으로 향한다면, 귀문탈백종과 하루 이틀 사이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헛! 혈불까지!”
용천월이 기함을 질렀다.
“혈불도 극마에 오른 걸로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원한이 있는 빙화곡주가 복수하기 위해 얼마 전에 곡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마공이란 게 정말 무섭군요! 알고 보니 천마교 오대종주는 월령마화종주를 제외하곤 모두 극마에 오른 거지 않습니까?”
용천월이 기겁하여 외쳤다.
마인들이 오직 힘만을 추구하여 죽음을 무릅쓰고서 정도를 벗어나 마(魔)를 좇으며 극경에 올랐다지만, 천마교에만 그 수가 여럿이니 실로 너무나 두려웠다.
“용 무사님. 침착하십시오.”
“진 무사님, 저는 이 상황에서 침착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진 무사님께 숨을 거두었다지만, 구유마라종주 염라마군도 극마경에 올랐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절대천마는 천마교의 지존이니 종주들보다 더할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지금 이리 흥분한다고 해서 바로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 그건…… 맞습니다.”
용천월이 그 말을 듣고서 경악하여 불타올랐던 마음을 추슬렀다.
진우선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까부터 곰곰이 생각하던 바를 꺼냈다.
“저는 천마사종이 이곳에 모여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각주님께선 흑암무영종주가 천마교 내에서 부교주나 다름없어 모두가 힘을 합하여 계략을 펼친다고 하셨지만, 다른 것도 준비하고 있을 수 있다고 짧게 써주셨지요.”
“맞습니다. 분명 그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암계를 정확히 예상할 수 없어 그리 쓰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그럼 진 무사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진우선의 말에 제갈영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제갈 책사님과 용 무사님께서도 천하가 흘러가는 형국을 보셔서 아실 겁니다. 삼문협으로 모든 무인이 몰려들고 세인의 관심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사상자가 잔뜩 발생한다면 중원이 단숨에 혼란에 휩싸이겠지요. 하지만 그것만 논하기엔 이곳에 드리워진 암운이 너무 짙습니다…….”
진우선이 말끝을 흐리며 저 혼자 고개를 가로젓다가, 한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 느낌엔 아무래도 절대천마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각주님께서 이 내용은 함부로 언급할 수 없어 두루뭉술하게 쓰셨지 않을까요?”
“헛!”
“어쩌면!”
제갈영이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고, 용천월은 심히 납득이 되었는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진 무사님! 종주들만 해도 다들 극마경이니, 그는 극마경을 넘어섰을 게 틀림없을 텐데, 그럼 어찌 되는 것입니까? 혹시 진 무사님은…….”
“저 역시 절대천마의 극마경을 넘어선 경지에 있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
다급하게 물어왔던 제갈영이 창백한 얼굴로 탄식을 흘렸다.
그때, 용천월이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절대천마가 수많은 시체와 피를 짓밟은 채로 강호에 나타난다면, 천하는 혼란에 빠지고야 말겠군요.”
끄덕.
진우선이 침중한 안색을 드러내며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우선은 미처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허어-! 천기가 요동치니 극마(極魔)의 기운들만 불쑥 일어나 모여드는 게 아니구나. 한없이 미쳐 날뛰던 극사와 극마는 이제 틀을 깨고 나와 더욱 요란한 빛을 뿌리니 이를 어찌 막아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시꺼먼 암흑도 일어나고 있으니, 감히 천기의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스승님.’
검노야와 진우선이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둘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
“……크윽.”
한 사내가 죽기 직전의 창백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보륜객잔 입구에 들어섰다.
그는 며칠간 낭인들의 무리를 이끌며 욕망의 눈빛을 흘리던 반검낭인 부철룡이었다.
“철룡-!”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어디서 이런 상처를 입었단 말인가!”
“아침에 멀쩡히 나갔는데, 갑자기 왜?”
객잔에서 기운을 흘리며 식사를 하고 있던 낭인들 여럿이 즉각 달려왔다.
덩치 큰 낭인 소항우가 부철룡을 얼른 안아 들었다. 부철룡은 입에서 피를 마구 게워내면서도 어떻게든 음성을 토해냈다.
“남쪽…… 남쪽에 동굴이…….”
“그럼 들어가지 않고서 왜 이리 왔어? 누구에게 당한 거야?”
“음사검이…… 들어갔네…….”
“뭐라고?”
남쪽에 동굴이 발견되었고, 음사검이 부철룡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인 후 안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다들 몇 마디만 듣고 정황을 눈치챘다.
그 순간, 보륜객잔에 머물고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뭐야. 정말 삼문협에 뭔가 있었단 말인가?”
“그럼 정검신협의 말이 거짓이란 말인잖아!”
그때, 소항우가 부철룡의 혈맥을 확인하며 화를 쏟아냈다.
“철룡! 음사검은 자네보다 윗줄이잖아. 왜 달려들었어? 왜? 우리한테는 목숨을 그리 아끼라 하더니-!”
“그곳에…… 그곳에…….”
부철룡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피를 토하며 말을 꺼냈다.
“천마신검의 검집……이 있었단 말이야…….”
잔뜩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 사이로 한 줄기 정적이 흐르더니.
“천마신검이라고?”
“천마신검이라니!”
“검집뿐이라 했지 않은가?”
“더 안쪽에 검이 있겠지. 검은 싸우느라 들고 있었을 테니까.”
모두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보륜객잔에 난리가 났다.
우당탕탕탕-.
무인들이 저마다 제 무기를 챙기고서 객잔을 마구 뛰쳐나갔다.
“어디야? 어디?”
“남쪽이랬어. 남쪽!”
“얼른 가야 돼! 내가 먼저!”
무인들이 앞다투어 경공을 전력으로 펼치며 달려갔다.
그러자 일대의 객잔에 머물던 이들도 황급히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뭐 발견됐어?”
“다들 남쪽으로 가는군.”
“음사검이 천마신검을 얻고서 동굴로 들어갔다더군!”
“이런 제길!”
“천마신공은 아무에게도 줄 수 없어! 내가 얻어야 해!”
무인들이 흉흉한 기세를 뿌리며 단박에 신형을 날렸다.
한편.
이와 같은 혼란에 미동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정검신협께서 하신 말이 맞을 거라네. 이는 천마교의 술수그 분명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천마신검의 검집이라더군. 그걸 뭐에 쓸 수 있겠나? 게다가 음모가 뻔하지!”
“이럴 줄 알았네.”
그들은 관망을 택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었을 때, 또다른 소문이 삼문협의 객잔 거리 근처에 찾아왔다.
“산서삼호가 혈사강기(血邪罡氣)를 얻었다!”
“뭐라고? 혈사강기? 사황성의 절세무공인 그게?”
“소청고검이 무신의 유언을 발견했다는군!”
“무신의 유언? 뭐라고 적혀 있었다는데?”
“모른다네. 알 수 없어. 낡은 옷자락에 적혀 있어서 그가 들고 튀었어!”
소문이 거리를 강타하기가 무섭게 정파와 사도의 무인들 수십 명이 마구 신형을 내달렸다.
“제길! 그럼 이곳에 신마황의 유진이 모두 남아있었다는 게 맞는 말이지 않은가?”
“당연하지. 정검신협이 틀린 거였어!”
“그럼 항마의 법구는? 그때 죽은 마교도들은?”
“이 사람아. 이해 안 되나? 마교도들은 천마님의 유진을 얻으러 온 거였겠지!”
“진 대협이 우릴 감쪽같이 속였군! 거짓일 리는 없고?”
“자네는 아직도 그를 믿으려는 건가? 정신 차리게.”
“내 말 똑똑히 듣게! 듣자 하니 월령마화종과 귀문탈백종도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다더군.”
“헛! 그럼 최소한 신마황 중에서도 천마의 유진은 확실하다는 말 아닌가.”
“그래, 이 사람아!”
그에 관망의 태도를 취하던 무인들마저 남쪽으로 향했다.
서안대협 왕관웅도 결국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남쪽으로 향했다.
이미 길이 잔뜩 나 있어서 동굴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왕관웅이 동굴 앞에 섰다.
어느새 그 위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신마황동(神魔皇洞)
해가 서산에 저무니, 어스름한 땅거미가 동혈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탓인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섬뜩하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왕관웅이 동혈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