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들썩이는 천하 (3)
진우선이 손에 들린 금강저를 바라보았다.
‘원혼들은 언제부터 묶여 있었던 것일까?’
수많은 원혼이 마(魔)에 의해 혈련구고저에 묶여 이승을 떠나지 못했으니, 그 증오와 한이 어마어마했을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 피맺힌 분노가 금강저의 법력에 절절히 담겼다. 금강마도가 펼쳤던 혈법의 힘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혼을 하고 나니 놀랍게도 말간 연꽃이 얼굴을 내보였다.
금강저의 양 끝에 조각된 혈련(血蓮)에서 핏빛 기운이 씻겨 나간 까닭이었다.
‘본래는 연화구고저였어!’
진우선이 연화구고저(蓮花九鉉竹)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강저에서 전해지는 순수한 법력이 참으로 맑고 깊었다.
이게 바로 연화구고저의 본모습이리라. 이제야 온전한 법보(法寶)의 위용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한데 연화구고저의 실상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우선은 연화구고저를 바라보며 그 안에 숨겨진 드러나지 않은 힘을 알아챘다.
그걸 이용해 천마교의 간계를 밝혀낼 참이었다.
바로 그때, 잠시 밖에 나갔었던 제갈영과 용천월이 돌아왔다.
“진 무사님, 서안지부에 연락을 취했어요. 급하다고 했으니 내일이면 도착할 거예요. 그리고 객잔을 나가서 십 리를 직진하면 수백 명은 족히 모일 수 있을 법한 광장이 나오는데, 그곳이 좋겠어요. 도중에 있는 객잔들에 무인도 많았고요.”
“제갈 책사님,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그곳이 좋겠군요.”
“진 무사님. 이 일대를 둘러보니 마교도가 수십 명가량 숨어있는 거로 유추됩니다. 하지만 청죽령이 심히 떨린 적은 없었으니, 아마도 천마교를 주름잡는 마인은 없는 모양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딱 선동할 역할의 마교도들만 이곳에 모여든 것 같군요. 용 무사님께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별 거 아니었습니다.”
진우선이 제갈영과 용천월에게서 부탁했던 바를 보고받았다.
스스로 움직일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만, 요 며칠 삼문협에 무인들이 몰려들어 진우선이 거리에 나서면 길을 막거나 에워싸고서 누구냐고 묻기 일쑤여서 곤란한 상황이 많았다.
유독 진우선에게 그러했다.
무인들이 진우선의 인상착의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그와 비슷해 보이면서 약관이 되지 않은 청년이면 일단 붙잡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중에 걸음걸이나 은연중에 풍기는 위엄과 기품으로 미루어보아 고수라 여겨질 때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진우선은 한동안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았다.
“진 무사님, 그럼 이제 나가보시겠습니까?”
“네. 지금 바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은 어제나 그제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진 무사님을 알아보고 몰려들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긴, 연화구고저가 있으니까요.”
제갈영이 진우선의 손에 들린 금강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진우선이 뇌가객잔을 나서서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리 곳곳에 있던 무인들이 진우선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혹시 진 대협이시오? 아! 내 앞에서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내가 이래봬도 추적술에…….”
“제가 진우선이 맞습니다.”
진우선이 단박에 수긍하자, 다른 무리를 이끌고 다가온 무인이 재차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귀하가 정말 정검신협이시오?”
“맞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으니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무슨 말을 할 예정이오?”
“그건 잠시 후에…….”
하지만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는 법이 없었다.
진우선에게로 덮칠 듯이 밀려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어허! 밀치지 마시오! 내가 먼저 물어볼 거요!”
“당신! 어디서 온 누구야?”
“진 대협, 정말 삼문협에…….”
“비급! 비급은 어디 있소?”
순식간에 거리가 인파로 가득 찼다. 진우선 주위는 도떼기시장처럼 정신없이 복잡했다. 귀에 제대로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죽고 싶어? 감히 날 밀쳐?”
“누구야? 감이 날 찌른 놈이?”
“어쭈! 우리 산서삼호를 가로막았겠다?”
“산서삼호? 풋! 산서삼견이 아니고?”
“네놈! 그런 망발을 하고도…….”
“모두 참으시오!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시오?”
“내가 네놈 따위의 명령을 들을 사람이 아니다!”
“뭐? 따위? 말 다 했어?”
“정검신협 앞에서 칼 함부로 뽑지 마시오!”
곳곳에서 신경전이 펼쳐졌다. 어깨가 부딪치고 몸을 치고 가다 보니, 싸움이 곧 붙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그때, 진우선이 목소리에 공력을 담아 좌중에게 외쳤다.
“다들 분란은 참아주십시오.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으니, 십 리 앞 광장에서 뵙겠습니다. 그리로 모여 주십시오.”
말이 끝났을 때, 아주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다시 마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알겠소! 그러리다.”
“십 리 앞 광장이라는군.”
“십 리 앞?”
“허허벌판 거기?”
다행인 건, 이제 별일 없이 진우선이 걸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진 대협. 그런데 이곳에 정말 비급들이 많소?”
“진 대협, 본인은 서안대협(西安大俠)이라 불리는 왕관웅이오. 나는 정검신협께서 강호일통을 한다는 소식에 열렬히 환영하는 바요!”
“진 대협…….”
진우선은 이제 일절 대답하지 않은 채, 조용히 수많은 무인을 이끌고서 십 리 앞의 광장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광장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는데, 진우선은 제갈영에게 미리 언질 받은 대로 언덕 위쪽으로 나아갔다.
“진 대협, 뭐라고 말을 좀 해보시오! 강호의 정의에 앞장선다는 정무맹의 뜻은 과연 무엇이란 말이오?”
“신마황의 유진이라니! 그게 사실이오?”
“아무리 대협이라 해도 모든 걸 독차지해선 안 되오! 강호는 누군가의 것이 아니오!”
“정검신협이라는 별호에…….”
물경 삼사백을 헤아리는 무인들이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진우선이 언덕 위에서 잠시 묵묵히 그들을 주시했다.
그러더니 기세를 피워 올렸다.
후우웅-!
진우선에게서 피어나는 강맹한 공력이 유형화되어 새하얀 빛을 뿌렸다. 그와 동시에 장포도 세차게 펄럭거렸다.
언덕 쪽에 몰려든 무인들은 진우선에게서 비치는 후광에 눈을 가려야만 할 정도였다.
-.
그 순간, 사방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이목이 진우선에게로 집중되었다.
“강호제현을 뵈어 영광이오.”
진우선이 엄정한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보며 운을 뗀 뒤, 말을 이었다.
“동도들께선 일신일마일황의 유진을 바라며, 혹은 이곳에 잠든 고인들의 유품을 찾기 위해 삼문협으로 직접 걸음 했을 것이오. 하지만 알려진 소문에는 거짓된 게 많소!”
“대체 무엇이 거짓이란 말이오?”
한 백의인이 우렁차게 질문을 던지자, 곳곳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홱!
진우선이 말을 끊은 자들에게 기세를 실어 노려보았다. 그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곧장 입을 다물었다.
“말을 끊지 마시오. 나는 동도들과 토론을 하러 나온 게 아니라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온 것이니 말이오.”
진우선의 추상같은 외침이 광장에 모인 이들의 심령을 바짝 조였다.
그 단호한 음성에 반박할 여지 따윈 없어 보였다.
“알아본 이들도 있겠지만, 신마황전이 이곳에서 펼쳐진 것은 맞소. 하지만 결전을 치르러 온 그들이 어찌하여 비급을 가져왔겠소? 그러므로 동도들이 찾는 유진은 없소.”
그 말에 무인들의 눈빛에 의문이 가득 떠올랐다. 진우선이 곧장 그 답을 주었다.
“삼문협을 기점으로 퍼진 소문은 천마교의 암계요. 잊혔던 진실에 음모를 섞었소. 그들은 천하가 혼란에 빠지길 바라고 있으며, 이곳에 모여든 동도들의 목숨을 인질로 잡은 것이오.”
“그, 그런…….”
“설마…….”
곳곳에서 불신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쉬이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반검낭인(半劍狼人) 부철룡이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정검신협 그대는 무공이 고강하여 모를 수 있으나, 강호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결코 이 소문을 간과할 수 없소. 상승무공을 접할 기회가 평생에 요원하니,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다면 목숨 걸고 달려간 판이오. 게다가 수천의 무인이 신마황전에 가담했었다는데, 진 대협은 그 수천이 모두 빈 손이었다는 걸 확신하오?”
“그 말이 맞소!”
“사마의 도적들이라면 몰라도, 정검신협이라면 천하를 모두 살펴야 하는 것 아니오?”
부철룡의 말에 곳곳에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그에 진우선이 외쳤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나, 느닷없이 퍼진 이 소문은 천마교의 음모요. 내가 적들을 쫓아 삼문협에 온 게 열흘이 채 되지 않았는데, 다들 나와 함께 삼문협에 오셨더이다! 이는 누가 일부러 소문을 냈기 때문이오.”
“그걸 어찌 믿소?”
“믿게 될 거요. 내가 이리 외친 까닭이 동도들에게 그걸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오.”
“헛-!”
진우선이 기세를 피워 올리며 소리치니, 주변의 소리에 마음 갈 바를 모르던 무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때, 진우선이 연화구고저를 치켜들었다.
“보시오! 이건 열흘 전에 서안에서 금강마도를 제압하고 빼앗은 혈련수라종주의 신물, 혈련구고저요. 저들은 이 안에 깃든 원혼을 이용해 동도들을 죽음에 내몰려 하고 있었소.”
“혈련구고저라니! 그게 정말 혈불이 애지중지한다고 알려진 물건 맞소?”
“진 대협! 혈련수라종은 이곳에 오지 않았는데, 그 말을 어찌 믿으란 말이오?”
그에 진우선이 서슬 퍼런 눈빛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리 질문해줘서 고맙소. 동도들은 방금 외친 자들을 똑똑히 기억해두시오. 지금부터 보여줄 게 있으니 말이오.”
“그, 그게 무슨!”
“아니, 정당한 질문이었거늘…….”
그들이 억울한 기색을 마구 표출했다.
바로 그때였다.
진우선이 연화구고저의 기운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다들 알다시피 혈련구고저는 마로써 쌓은 살생의 죄업이 깊었소. 금강마도에게서 빼앗아 혼을 달랬더니, 연화구고저는 아주 강력한 항마의 법구가 되더구려.”
“항마!”
좌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그 기운이 마교도들을 비출 것이오! 보시오!”
진우선이 말을 내뱉은 찰나.
번쩍!
콰콰쾅-!
연화구고저에서 섬광이 터지며, 뇌전 수십 줄기가 봇물 터지듯 쏘아져 나갔다.
뇌전은 빚이라, 누가 피할 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인들에게 내리꽂혔다.
“크아악-!”
“끄억!”
사방팔방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각자 숨기고 있던 마기를 내뿜게 되었다.
그때, 진우선 근처에 있던 서안대협 왕관웅이 물었다.
“진 대협, 그게 정말 항마의 기운이오?”
“맞소. 왕 대협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지 않소?”
“그렇구려!”
연화구고저의 빛줄기가 몸에 닿으나 아무런 이상도 없자, 왕관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천마교의 간계였다니!”
“내가 이깟 음모에……. 수치스럽군!”
“정검신협! 과연 대단하시구려!”
광장에 모인 무인들이 근처의 마교도들을 제압해나갔다.
그때, 진우선에게로 용천월이 다가왔다.
“진 무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이로써 소문이 잦아들겠군요.”
“그럴 겁니다.”
“그런데 여전히 걱정이 많아 보이십니다.”
“용 무사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천마교가 준비한 음모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까요.”
***
한편.
황금색 가면을 쓴 네 사람이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존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곳 삼문협에 강호의 고수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그렇지. 이제 그대들이 움직일 때가 되었다.”
“하명만 하십시오. 존자께서 말씀만 하시면 정검신협의 목이라도 베어 오겠습니다.”
“말이 과하구나. 그는 너희 셋이 아무리 힘을 합친다 해도 그를 당해낼 수는 없을 텐데.”
“그렇습니까? 그럼 충심의 발로로 들어주십시오. 존자께는 제 목숨을 내어드려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알겠다. 말로만 받지.”
입에 발린 말이지만, 존자라 불린 위엄찬 금면인이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명령을 내렸다.
“가거라. 천하의 이목이 이곳에 쏠리고 있으니, 지금 화산에서 그의 목을 가져오너라.”
“충(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