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들썩이는 천하 (1)
“그랬군. 그래서였어.”
만상각주 공야청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조금 전에 도착한 전서가 들려 있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요?”
“흑암무영종이 삼문협에서 대계를 꾸미고 있던 모양이야. 나머지는 혜원주 자네가 직접 읽어보게.”
공야청이 상체를 비스듬히 돌려 백혜원주 금청청에게 서찰을 건넸다.
금청청이 단박에 내용을 살폈다.
“종주인 흑야가 실질적으로 부교주나 다름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천마교에서 대계를 꾸몄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그래서 귀문탈백종이 사천을 지나서 올라가는 모양입니다.”
“역시 혜원주가 보기에도 그들이 삼문협으로 향하는 것 같은가 보군.”
“그렇습니다. 잔백마군이 귀주에 이어 사천도 풍비박산을 내듯이 돌파하며 너무 많은 원망을 자아 내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인제 보니 삼문협으로 시선을 모으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마인들이니 그 같은 행보가 공포심을 자아내기에도 딱 좋지.”
귀문탈백종의 진군으로 인해 귀주가 피로 물들었고, 사천 역시 거리에 시체가 즐비할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
“사천사세가 복수에 혈안이 되어 귀문탈백종을 뒤쫓고 있으니, 그들 또한 삼문협까지 올라갈 겁니다.”
“그러니 정말 큰일이네. 그들은 사천을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고서 저마다 힘을 기르며 콧대만 드높였지 않은가?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치욕을 갚으려 하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천사세 모두가 귀문탈백종에게 무너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천사세는 사천성의 유력한 네 문파로, 청성파와 아미파, 사천당문과 흑수방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자존심이 강해 어딘가에 속하기를 거부했는데, 사도련 흑요궁에서 비롯된 흑수방만이 궤를 달리할 뿐이었다.
그나마 아미파가 정무맹과 우호적일 뿐, 청성파와 사천당문은 일절 교류조차 없었다. 그들은 아예 정무맹의 무인들이 사천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을 정도였다.
정무맹이 사천사세가 격파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었다.
“후우-! 그들이 상황을 직시해야 할 텐데……. 그리고 귀안을 심어 극마에 오른 잔백마군을 누가 상대하겠단 말인가?”
“추적하는 인원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청성과 아미, 당문의 최고수들이 협공할 심산인 것 같습니다.”
“애꿎은 피가 또 흐르겠군. 알량한 자존심일 뿐인 것을…… 쯧쯧.”
“절대천마도 아니고 잔백마군을 위시한 귀문탈백종에 모조리 당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겠죠. 그러고서 목숨을 잃으면 숭고한 희생이라 외칠 겁니다.”
금청청은 사천사세의 고약한 성미와 횡포를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야청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화제를 돌려서 물었다.
“월령마화종은 어떤가?”
“그들은 어제 호북에 들어섰습니다. 무원주를 비롯해 현청각 무인들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다가, 북진을 택한 것 같습니다.”
“그들도 삼문협이 목적지인 모양이야. 아무래도 무원주와 여 각주가 구음신녀를 버텨낸 덕분에 우리는 피해가 적은 것 같군.”
월령마화종주 구음신녀는 극마에 오르지 못했으나 지닌 무공이 심히 음유하여, 그녀를 상대할 때 겪는 까다로움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직속 수하인 사대마령과 백여 명의 월령까지 있었다.
정무맹에서 내로라하는 고수 두 명, 현청각주 여문탁과 무원주 이능운이 아니었으면 사천사세처럼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역시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엊그제 말씀드렸던 대로, 조만간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월령 마화종을 마주하게 될 것 같습니다.”
“쉽지 않겠군. 별 탈 없어야 할 텐데…….”
“내당주께서 이미 대비하고 계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냉 당주는 제 몸을 별로 돌보지 않아서 무리할 때가 많으니 걱정이라네.”
공야청은 걱정이 앞섰지만, 어쨌거나 내당 소관의 일이었다. 머릿속에서 무당파와 제갈세가의 일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금청청이 혈련수라종으로 화제를 이어나갔다.
“각주님, 혈불도 조만간 중원으로 들어오지 않을까요? 천마교 대계의 중심지가 삼문협이라면, 혈련수라종주인 혈불 역시 모습을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십중팔구 그럴 것이네. 혈련구고저는 그가 애지중지하던 신물이니까. 아마도 그걸 먼저 보냈을 뿐일 걸세. 삼문협의 대계를 위해서 말이네.”
“그럼 혈불을 어찌해야 할까요? 천마교의 종주들이 천하에서 동시에 일어나니 다 상대해내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일단 우리는 빠르게 혈불의 행적을 발견하는 일에만 집중하면 될 걸세. 그러면 빙화곡주가 나설 것이네.”
“아! 잠시 빙화곡을 잊고 있었습니다.”
금청청이 그제야 빙화곡을 떠올렸다. 딱히 기대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에 공야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 생각을 밝혔다.
“혜원주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네. 빙화가 힘을 회복한 건 이제 고작 일 년 정도 되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빙화가 마라혈독에 물들어 간신히 살아있을 때도 빙화곡주의 성취는 상당해 보였네. 진 무사 역시 곡에 다녀온 후에 그리 말했었고. 한데 이제는 빙화가 온전하니, 지금은 어쩌면 전대 곡주의 수준을 넘었을지도 모를 일이야.”
“각주님은 이미 넘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맞네. 아무래도 빙화곡주는 빙공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게 아닐까 싶더군. 혹은 빙화를 아끼는 마음이 그녀를 높은 성취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고.”
“저는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빙화곡주께선 심성이 참으로 순수하고 맑은 느낌이라 강호의 풍파 속에서 쉽지 않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습니다.”
“그랬군. 하긴, 천하의 이치가 쉽지 않지. 하지만 때론 그런 순수함이 극으로 나아가는 길을 연다네. 가장 순수할 때 가장 빛나는 법이니까.”
금청청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야청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마음으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빙화곡주라면 혈불과 좋은 승부가 될 걸세. 혹여나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천마교를 상대하는 데 힘을 보태준다면 진 무사에게 큰 도움이 되겠지.”
“맞습니다. 빙화곡주가 도와준다면 큰 힘이 될 겁니다. 하지만 소무강 무도원주에게는 알리지 않는 거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업무를 시작한 게 이제 사흘째이니 정신이 없을 거야. 또한, 무도원주가 됐으니 어차피 이 소식을 접하겠지. 굳이 우리가 그의 신분을 들춰낼 필요는 없을 거야.”
소무강은 사흘 전부터 무도원으로 소속이 바뀐 상황이었다. 정연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천천히 직무에 적응할 틈이 없었다. 천하에 악인들이 들끊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천마사종에 대해서 두루 이야기를 나눈 뒤, 공야청이 금청청에게 지시를 내렸다.
“혜원주. 일단 우리는 저들이 준비한 삼문협의 대계가 무엇인지 파악해 나가도록 하세. 시간이 촉 박하니 그걸 가장 우선시해주게.”
“알겠습니다.”
“천마교가 이리 기세를 드높이고 있으니, 절대천마가 언제 어디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 보이는군. 이 점도 반드시 살펴주게나.”
“담가의 충신인 흑야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서, 저 역시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금청청이 공야청의 말에 수긍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들이 암중에서 어떤 계략을 꾸몄을까요? 삼문협이라면 강폭이 끝없이 넓고, 물살이 거친 데다가, 험준한 단애(斷崖)여서 무언가 일을 벌이기 어려울 텐데요.”
“나도 그걸 명확히 모르겠군. 예상되는 가짓수가 너무나도 많은데, 기억을 아무리 되짚어봐도 그간 알려진 바가 없어.”
공야청이 우두커니 선 채 고뇌에 빠졌다.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각주님, 아무래도 이건 진 무사에게 부탁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삼문협이 넓다 하지만, 진 무사라면 무언가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이미 삼문협으로 갔다고 했으니 당연히 그래야겠지. 하지만 조심하고, 제 몸을 아끼라는 말도 꼭 전해주게. 진 무사에게 중차대한 임무가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원을 더 보내는 게 좋겠네. 저들이 삼문협에서 무언가 오랫동안 획책했다면, 절대 예사롭지 않을 테니까.”
“그럼 한 무사와 백 책사를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 준비시켜주게. 출발은 닷새 후가 좋겠군. 그때면 우문혁과 만총이 백무원에 합류했을 테니 말일세.”
“혹시 그들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만총이야 지난번에 임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지만, 어쨌거나 두 사람의 첫 임무로는 너무 막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도 막중하단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하지만 느낌이 영 좋지 않군. 천마교도 문제지만, 종적이 묘연한 금천에 대해서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네.”
“아! 금천…….”
“그래서 아무래도 무위가 뛰어난 만총과 우문혁까지 나서는 게 좋겠다 싶군. 어려운 임무부터 시작 하겠지만 그래도 단독임무는 아니니, 옆에서 도와주면 잘 적응해내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금청청이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상황이 그만큼 중대하다는 걸 그녀도 느끼고 있는 까닭이었다.
“사도련의 상황은 요즘 어떤가?”
“그들은 하남과 하북, 산서 등지에서 창궐하고 있습니다. 머릿수는 많으나 절대고수가 부족한지라, 우리뿐만 아니라 여러 대문파와도 충돌하는 걸 될 수 있으면 자제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군.”
공야청이 대꾸하면서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사령신군이 이리 조용한 게 이상하지 않나?”
“이상합니다. 사령신군의 행적이 너무나도 감춰져 있습니다. 환사문주와 사사천주만이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오히려 무언가 감추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동감일세.”
공야청이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계속 누르고 있었다.
“진 무사 같은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었으면 좋겠군.”
“욕심이십니다.”
“알고 있다네. 그저 아쉬워서 해 본 소리지. 진 무사의 능력이 출중하니 천마교에 한 명 보내고, 사도련에 한 명 보내면, 강호에 곧 평화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허허허.”
공야청이 그렇게 허튼소리를 중얼거리며 웃다가, 문득 금청청이 꽤 지쳐 보인다고 느꼈다.
“백혜원이 안 그래도 바쁠 텐데, 할 일이 더 많아지겠군. 혜도원에도 적당한 업무를 지원 요청하는 건 어떻겠나?”
“후우-!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한데 저보다는 각주님이 더 건강을 챙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눈이 충혈되고 얼굴이 노곤해 보이십니다.”
“허어-! 그런가? 알겠네. 내가 남말 할 처지가 아닌 모양이었군.”
두 책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숨에도 피곤이 찌든 듯했다.
***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천지사방이 만년설로 수북하게 뒤덮인 곳, 하늘로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어 감히 오를 생각도 들지 않는 곳.
바로 그곳에 믿을 수 없게도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금모야. 곡을 잘 지키고 있거라. 네가 아이들도 잘 이끌어주어야 한다.”
“장로님,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빙화곡의 소사를 관리하는 수제자 홍금모가 정광 어린 눈으로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빙화곡의 장로 막유수가 그에게 말을 이었다.
“그래, 알겠다. 금방 돌아오마. 혹여나 혈불이 나타날지도 모르니,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만년빙 백진을 열어선 안 된다.”
“명심하고 있겠습니다.”
만년빙백진(萬年水魄陣)은 빙화곡이 있는 골짜기에 설치된 절진으로, 만년설산이라는 천혜의 조건과 빙화의 영기를 이용한 신비로운 기문진법이었다.
그때, 멀리 천하를 내려다보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천지간에 쌓인 눈이 햇빛을 반사하니, 그녀에게 눈부신 광채가 어리는 듯했다.
“빙화곡의 과업을 이룬 뒤 돌아오면 금모 너를 장로로 임명할 생각이야. 다른 제자들도 한설빙공(寒雪水功)의 수련에 들어갈 거고. 그러니 모두 수련 빼먹지 말고 열심히 하려무나.”
“곡주님, 감사합니다. 꼭 명심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빙화곡주 벽소군의 말에 홍금모를 비롯한 제자들이 감격한 얼굴로 대답했다.
벽소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막유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파파, 이제 내려가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벽소군과 막유수가 가파르고 위험천만해 보이는 설산을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신법으로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파파. 혈불이 서장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태 종적이 드러나지 않았나 봅니다.”
“이제야 복수를 할 수 있겠어요.”
굳은 표정의 벽소군에게서 순백의 기운이 일렁거렸다.
막유수가 세 보 앞서가는 벽소군의 뒷모습을 보다가 흠칫 놀랐다.
빙기가 그녀의 전신에 어리더니 빙화의 형체를 그려내는 것 아닌가.
그녀를 감싼 빙화는 영롱하게 빛나며 신령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아가씨! 역시 이루셨군요!’
또르륵.
막유수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두 뺨에 살갗을 에는 만년설산의 칼바람이 불어닥치건만, 뜨거운 눈물을 식히지는 못했다.
그때, 벽소군의 재촉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파파. 얼른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