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84화 (184/225)

184.

#또 다른 움직임 (3)

한편, 제갈영은 진우선의 뒤편에서 혈련수라종의 마교도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우선 일행을 두 겹으로 에워싼 채 간격을 좁혀 들어오는 중이었다.

일제히 꺼내든 도검의 첨예한 칼끝에서 섬뜩한 기운들이 흘러나왔다.

각기 뿜어내는 예기가 겹치고 또 겹쳐서 맞물리며 온몸을 깊게 쑤시듯이 찔러 들어왔다. 그 압력에 숨통이 조여지는 듯했다.

제갈영이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마교도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의 눈자위 주변으로 마기가 일렁이며 피에 젖은 광기와 살기가 가득 흘러넘치고 있었다.

‘살인을 예사로 한 자들이다!’

턱이 덜덜 떨려오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은 당장이라도 멎을 것만 같았다.

내공을 일으켜 자신을 지켜야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안 돼! 이럴 수가…….’

한데 그 순간이었다.

혈도 속에 잠잠히 깃들어 있던 맑은 기운이 돌연 세차게 흐르며 힘을 발휘하더니, 은연중에 침투하는 마기를 짓눌렀다.

그러더니 오랫동안 익혀온 현원기공(玄元氣功)의 내력이 움츠려 있는 것도 얼른 북돋워서 일으켜 주었다.

‘항마의 기운!’

제갈영이 단박에 알아챘다.

항마의 힘이 마치 거대한 강처럼 온 혈도를 휘돌고 있었다. 그 흐름이 깊고 그윽하여 흔들림이 없고 그치지도 않으니, 자잘한 두려움 따윈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대단하다!’

제갈영이 차분한 마음으로 사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긴박한 와중인데도 냉철한 눈으로 직시할 여유마저 생긴 상태였다.

‘모두 쉰 명!’

쉰 개의 첨예한 칼끝에서 살기가 끝없이 흘러나오고, 백 개의 눈에서 마기가 어린 거무죽죽한 안광이 기괴하게 빛났다.

하지만 이제는 마냥 두렵지 않았다.

‘수라금강진은 이렇게 점점 숨통을 조여오는 거구나. 개개인은 그리 강하지 않으나, 서로의 힘이 겹쳐져서 무거운 거였어!’

그와 동시에, 눈앞의 용천월이 검을 곧추세운 채 수라금강진의 약점을 찾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

제갈영이 작게 물었다.

“용 무사님. 수라금강진의 허실이 보이시나요?”

“아니요.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니, 건방(乾方)과 간방(良方)을 동시에 무너뜨려 주세요! 그 두 곳이 축입니다.”

“아!”

용천월이 탄성을 내뱉으며 곧장 검을 그어 내렸다. 그러자 푸른 빛을 머금은 검강 두 줄기가 정면에서 좌우측으로 각 일 장 거리에 있던 마교도들을 향해 쏘아졌다.

퍼펑! 펑!

그와 함께 수라금강진에 균열이 생겼다. 겹겹이 중첩되어 전신을 난자하던 뾰족한 기운들이 일거에 무뎌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흐압!”

용천월이 강렬한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두르며, 비룡출해의 초식으로 검강을 연이어 날렸다.

“큭!”

“끄윽-!”

혈련수라종의 마교도들이 각자 공력을 다해 검강을 피하고 막았다.

하지만 곳곳에서 비명이 마구 터져 나왔다. 비룡출해의 검강에 실린 공력을 제대로 감당해낼 수 없는 까닭이었다.

어찌어찌 막아보고자 허우적대듯이 공중에 펼쳐대는 초식은 난잡해 보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한없이 혼잡한 와중에 짐승의 것보다도 괴기스러운 웃음소리가 귓전에 꽂혀왔다.

“크흐흐흐-!”

그 소리에 혼백마저 오싹할 정도였다.

하지만 숨을 두어 번 쉬었을까.

“컥-!”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섬찟한 괴성도 그쳤다.

그리고 살기가 엉킨 가운데, 느닷없이 편안한 기운이 맴돌며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두 분께서 이미 마교도들을 제압하고 계셨군요. 일단 얼른 끝내겠습니다.”

진우선의 목소리였다.

그가 용천월과 제갈영에게 말을 걸면서, 왼손을 바깥으로 휙 내저었다.

그 순간.

화아앗-!

금빛 기운이 고귀한 자태를 드러내며 거센 물결처럼 마당을 확 채워나갔다.

‘아름답다!’

제갈영이 고요하게 번져가는 황금빛 공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용의 형상을 한 그 기운은 소음조차 없이 적들을 잠재워버리고 있었다.

‘진 무사님은 정말 대단하시구나.’

제갈영은 지금 상황이 위험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절로 감탄만 흘러나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새삼 놀라울 정도였다.

이윽고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자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상황이 일단 정리된 것 같으니, 저들의 목적을 캐내야겠습니다.”

진우선이 장내를 한 번 둘러보며 말하자, 제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서안지부의 무인들과 함께 표국에 대해서도 얼른 알아볼게요.”

그때, 용천월이 진우선의 오른손에 들린 걸 가리키며 물었다.

“진 무사님, 그건 무엇입니까?”

“혈련구고저라고 하더군요. 금강마도가 제 몸에서 한 치도 떼어놓지 않고 지키던 마구(魔具)였는데, 여기에 수많은 원혼이 서려 있었습니다.”

“아! 금강저가 어찌…….”

혈련구고저가 불가의 법구임을 알아본 용천월이 안타까움에 탄식을 흘렸다.

반면, 내력이 약한 제갈영은 핏빛 광채가 사라져 흔한 쇳덩어리가 된 혈련구고저를 질겁하여 바라보았다.

“너무 불길해 보이네요!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이리 됐을까요?”

“이제 그걸 알아볼 참입니다.”

진우선이 생각이 많은 눈으로 혈련구고저와 혼절한 금강마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이었다.

서안지부의 마당 한가운데에 진우선이 있었다. 그는 혈련구고저를 한 손에 쥔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요히 눈을 감은 상태였다. 깊고 깊은 의념 속에 잠긴 듯했다.

그때 제갈영이 용천월, 양원창과 함께 다가왔다.

“진 무사님.”

“말씀하십시오.”

진우선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대답하자, 용천월이 말을 이었다.

“표국 사람들과 마교도들을 취조한 결과, 금강마도와 혈련수라종이 서장의 대소사에서 온 것임을 알아냈습니다. 그곳의 한 고승에게서 표물을 건네받았다고 합니다.”

“그들도 표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런데 대소사는 어떤 곳입니까? 이 혈련구고저가 그곳의 법보인 건가요?”

“그것에 대해선 정확히 듣지 못했습니다. 금강마도가 고승을 독대하는 것만 봤다고 합니다.”

취조를 주관했던 용천월이 명확한 사실만을 추려서 전했다.

그는 이 이상을 알아낼 수 없었다. 안탑표국에 있던 혈련수라종의 마교도 쉰 명 가운데 구 할이 넘게 즉사하고, 세 명만이 중상을 입은 채 잡혀 온 까닭이었다.

그때 제갈영이 설명을 덧붙였다.

“대소사는 서장 불교의 성지예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서장에서의 대소사는 강호에서의 소림사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혈련구고저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알게 됐으나, 그곳의 법보여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표물의 목적지는 어디라고 하던가요?”

진우선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묻자, 다시 용천월이 대답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안탑표국도 천마교의 말단에 불과하여 표국주조차 이 표행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저 금강마도를 극진히 모시며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짧게 한 마디 내뱉었다. 한데 단단한 어조에서 흐르는 여운이 심상치 않았다.

그에 용천월이 물었다.

“진 무사님. 혹시 대소사로 가보시려는 것입니까?”

“…….”

하지만 진우선은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계속 눈을 감고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장내에 잠시 적막이 감돌더니, 돌연 진우선이 눈을 치켜떴다.

번쩍!

그 순간, 정광이 좌중 사이로 흘렀다. 그와 함께 숭엄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진혼(鎭魂)을 해야겠습니다.”

“진혼이요? 설마 혈련구고저에 깃든 원혼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금강마도를 데려다 주십시오. 그가 지금 혼백을 잃어 사경을 헤매고 있으나, 혈련구고 저의 법력이 부서지면 잠깐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겁니다. 그에게 들어야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용천월이 의문조차 가지지 않고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넘게 진우선을 따르며 기상천외한 능력을 많이 경험한 까닭에, 이 정도는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장에는 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였다. 제갈영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양 지부장님. 들으셨죠?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를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눈치껏 상황을 이해한 양원창이 곧장 제갈영의 말을 따랐다.

이윽고 혼절한 채 쓰러져 있는 금강마도가 들것에 실린 채 눈앞에 나타났다.

피를 왕창 쏟아냈는지 온몸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가슴이 아주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니 숨을 쉬는 걸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어 보였다.

진우선이 금강마도를 잠시 내려다본 후, 주변에 말했다.

“잠시 물러나 주십시오. 그리고 보이는 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좌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진우선이 금강마도를 옆에 두고서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혈련구고저를 무릎 앞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휘이이-!

어딘가에서 음산한 바람이 장내에 불어와 내려앉았다.

제갈영은 갑자기 주변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윽-!]

[하-!]

“헛!”

“이, 이게 무슨 소리죠?”

양원창이 기겁하여 놀라고, 제갈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의문을 던졌다.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는데, 그들의 심중에 귀곡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진 무사님께서 진혼을 위해 혈련구고저를 억제하던 기운을 잠시 푸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놀라지 마시고, 조금 더 물러서십시오.”

용천월의 말에 그를 제외한 모두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연거푸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휘오오-!

진우선에게서 신묘한 기운이 휘몰아쳐 나오더니, 사방에 자욱하게 번져갔다.

어찌 이리도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을 수 있지?’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란 용천월이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다.

기운이 현묘하고 현묘하니, 뭐라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이 영기가 혈련구고저에 깃드는구나!’

영기가 더욱 짙어져 자세히 보이지 않자, 용천월이 안력을 돋워 주시했다.

혈련구고저에서 아지랑이 같은 무언가가 쉴 새 없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설마……?’

일순간 번뜩인 생각 하나에 용천월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등줄기도 짜릿했다.

한편, 진우선은 혈련구고저를 노려보며 온 정신을 집중하여 기운을 쏟아내고 있었다.

‘혼백들은 명토의 기운을 따라 명부로 귀원하라! 사무치고 사무친 한을 풀 곳은 이승이 아니라 구천이니, 명부는 마땅히 돌아가야 할 곳이니라!’

[끼에엑-!]

[흐아아아-!]

[히으흐-!]

원혼들이 울부짖었다. 진우선의 외침에 깊고 깊은 원한을 토해내며, 혈련구고저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명토의 기운이 혈련구고저의 끝에서 끝까지 단박에 관통하니, 법보(法寶)의 법력(法力)이 아무리 크다 한들 숨어들 곳이 없었다.

결국, 원혼들은 혈련구고저를 에워싼 자욱한 영기를 타고 허공으로 흩날려갔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났다.

서안지부를 자욱하게 감싸던 기운이 일순간에 옅어지며, 진우선의 모습이 좌중에게 보였다.

그때, 진우선이 엄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금강마도. 당신이 깨어난 걸 알고 있습니다.”

“나, 나는…… 당신은…… 아!”

바닥에 누워있던 금강마도가 진우선을 바라보더니, 한없는 두려움에 빠져 눈을 파르르 떨었다.

“당신이 대소사에서 만난 고승은 누구요?”

“주, 주군…… 크윽!”

금강마도가 저도 모르게 사실을 대답하고서, 혼백이 쪼개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명부의 기운이 그대의 혼백을 쥐었으니, 속일 필요가 없고 속일 수가 없을 거요.”

“끅, 끄윽!”

금강마도가 숨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뱉었다. 혼백이 떨리는지 꺽꺽 대며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죽음이 코앞에 있어보였다.

진우선이 얼른 물었다.

“당신은 혈련구고저를 어디로 가져가고 있었소?”

“삼문협이오.”

“왜?”

“그건 잘 모르오. 주군께서 명령하신 걸 행할 뿐이었고, 흑암무영종의 대계를 위한…… 컥!”

금강마도가 세차게 부르르 떨더니, 몸이 뒤로 세차게 퉁겨졌다.

그렇게 혼백이 떠나버리며 생을 다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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