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화산으로 (3)
그날 밤, 진우선 일행은 화산파의 객당에 들어가 각자 잠을 청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객당에 내려온 진우선은 몹시 피곤함에도 쉬이 눈을 붙이지 못했다.
오히려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스승님. 오행의 기운으로도 아까 가져온 제혼기에 파고들 수가 없습니다. 아예 일부조차도 섞이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구나. 현기를 가득 풍기면서도 대자연의 기운과 따로 겉돌 수 있다니.]
제혼기를 주시하던 검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우선은 화산파 소청각주 홍대원을 치료하면서 제혼기를 가져왔다.
현문정종의 기운은 대자연의 기운을 가져와서 시작된 것이니, 역할을 다하면 다시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이치였다.
하지만 제혼기는 현기를 가득 흘리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저 스스로 공처럼 둥글게 뭉친 채 더욱 견고해졌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결국 진우선이 통째로 가져와 제 단전 한구석에 가둬둔 상태였다.
‘도대체 제혼기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현기를 흘리지만, 대자연의 기운이 아니다. 나도 궁금하구나. 이런 기운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검노야가 탄식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오래된 경험 속에서도 이런 기운은 처음이었다.
[태산부군이 명부의 영기를 나눠 준 게 괜한 일이 아니었어. 참으로 놀랄 일이 많구나.]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아까의 일로 명토의 기운이 혼백을 다룰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요.’
[네 짐작대로다. 명부의 영기만이 혼백을 붙잡을 수 있겠지. 사황과 천마가 죽었음에도 명부에 가지 않은 건, 혼백이 소멸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니.]
진우선과 검노야가 깊이 공감하여 서로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혼기를 없애겠습니다.’
[그러자꾸나.]
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이 선천지기를 끌어올리자, 패왕금룡신공의 금빛 후광이 몸에서 일어났다.
그와 함께 손바닥에 달걀처럼 생긴 검은 구체 하나가 떠올랐다. 현기가 어린 오묘한 흑광을 은은하게 흘리는 제혼기였다.
‘알 수 없군.’
제혼기의 속이 명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흑광이 깊으나 혼탁하게 보였다.
진우선이 고개를 저으며 금빛 기운을 손바닥에서도 피워올렸다.
화라락-!
타타타탁-!
제혼기의 표면에서 시커먼 불꽃이 마구 튀어오르더니 점점 작아져 갔다.
패왕금룡신공의 선천지기가 제혼기를 태우며 소멸시키고 있었다.
[역시 선천지기로도 쉬이 흩어지지 않는구나.]
‘아까 그분의 몸속에서 이렇게 제거했다면 영영 이지를 잃으셨을 겁니다.’
진우선이 그리했던 건 비단 선천지기가 제혼기를 태우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제혼기는 광륜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었다. 아무리 오행진기가 제혼기를 조금도 녹여낼 수 없다고 하나, 광륜을 이루어 휘휘 도니 맞부딪쳐 깨트려버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상단전 내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다 태우고 터트려버려서야 어찌 사람을 살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구나. 정말 좋은 판단이었어.]
그렇게 잠시 대화하는 사이.
휘이이-.
제혼기가 허공중에 아지랑이만으로 남기며 모두 소멸했다.
제혼기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진우선과 검노야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스승님. 내일 홍 각주님이 깨어나면 자세히 물어봐야겠습니다.’
[그래. 오늘도 고생 많았다.]
***
이튿날 아침이 밝아왔다.
진우선이 방을 나섰을 때, 객당 앞에서 화산의 정경을 바라보던 제갈영이 말을 건네왔다.
“진 공자, 잘 주무셨나요? 좀전에 듣기로 어제 자정 넘어서 내려오셨다던데요.”
“네, 푹 쉬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보다 제갈 소저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푹 쉬지 못하셨군요.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제갈영이 진우선의 마음에 근심이 자리 잡은 걸 알아챘다.
“제갈 소저는 혹시 혼백을 제압하는 무공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지요?”
“혼백 말입니까? 어제 소청각주님이 그런 무공에 당하셨던 건가요?”
제갈영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소청각주님께 남아 있던 기운이 혼백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지를 잃고 계셨습니다.”
“해결은 잘 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제압하던 기운이 사라지고, 혼백이 풀려나 신(神)이 제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니 완전히 회복하실 일만 남았네요.”
“그건 정말 다행이군요. 진 공자께서 이번에도 큰일을 해내셨네요! 대단해요!”
제갈영이 진우선에게 감탄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던진 질문에는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난색을 보였다.
“그리고 혼백을 제압하는 무공은 근 일이백 년 동안은 강호에 나타난 게 없을 거예요. 알려진 것도 하나도 없어요. 예전에 사황성이 무너지면서 섭혼쇄심술(攝魂碎心術)이라는 사도의 비술이 잠시 소문나긴 했다던데, 이 역시 실체는 없었지요. 혹시 이와 관련이 있나요?”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도의 술법이 아니었으니까요.”
“하긴 그러면 진 공자께서 이미 알아채셨겠지요. 그럼 도대체 뭘까요?”
“현문정종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침투해있던 경력 정도가 아니라, 뚜렷한 성질을 가지고 있던 기운이었구요.”
“헛-!”
제갈영이 너무나 놀라 아무런 대꾸조차도 하지 못했다.
“제혼의 힘이 너무나 강하여 제혼기라 불러도 무방하겠더군요. 일단 뽑아내어 소멸시켰으나, 기운의 성질이 몹시 흉악하니 심히 염려됩니다.”
“제혼기…….”
지금 막 방을 나선 용천월도 진우선의 말을 중얼거리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한 사람이 객당으로 다가왔다.
연백위와 함께 진우선 일행을 안내했던 화산제자 황륜이었다.
그가 다가오자 진우선이 먼저 물었다.
“황 소협, 혹시 홍 각주님께서 깨어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태사숙조께서 진 대협이 깨어계시면 소식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올라가서 뵈어도 되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바로 올라가시겠습니까?”
“오늘은 다 같이 가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황륜이 그리 대답한 뒤, 진우선 일행을 이끌고 태을각으로 올라갔
그러자 햇살 드는 곳에 앉아있던 세 사람이 진우선을 발견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밤에 푹 쉬었소?”
“객당이 편하고 좋았습니다. 화산이 영산이라 기운이 맑으니 아침이 더 상쾌했습니다.”
“그럼 다행일세.”
자하선옹이 진우선을 반겨 맞더니, 옆에 있던 홍대원이 말할 수 있도록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신인께서 빈도의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홍 각주님께서 이리 쾌차하신 걸 보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달리 불편하신 곳은 없는지요?”
“없습니다. 오히려 마치 길고 깊은 잠을 자다가 지금 막 깨어난 것처럼 심신이 가볍습니다.”
어제까지 이지를 잃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홍대원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진우선이 그를 살펴보니 성정이 침착하고 눈빛이 곧았다. 오롯이 도의 길을 걸어온 도사의 풍모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화산파의 어린 제자들을 양성하는 소청각(小淸閣)을 이끌기에 제격이었다.
“그럼 악몽을 꾸지도 않으셨겠죠?”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처가 혼백에 남았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군요. 천운이 함께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신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천행이지요.”
“아닙니다. 어찌 저 혼자서 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진인께서 힘써 죽을 고비를 넘겨주시고, 연 각주님께 곁에서 보살펴주신 덕이 정말 큽니다.”
진우선이 겸양의 말을 꺼내자, 자하선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한 건 신인께서 한밤중까지 심혈을 기울이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 그건 신인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해낼 수 없을 일이라네.”
“정말 과찬이십니다.”
진우선이 자하선옹의 말에 가볍게 대답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때 벌어졌던 상황에 대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해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홍대원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 일행이 나무로 만들어진 기다란 탁자 앞에 둘러앉았다.
홍대원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허공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는 해가 지기 전인 저녁 무렵이었는데, 빈도는 문 사형과 함께 바로 이곳 태을각 앞에서 장문인을 뵙고 있었습니다.”
홍대원이 태을각 앞의 마당을 한 번 흘깃 보더니 말을 이었다.
“별안간에 세 괴인이 나타나 각기 우리를 상대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절대고수였는데, 무공은 제각기 다르더군요. 한 명은 현기 가넘치는 정도의 무공을 펼쳤고, 한 명은 극악한 사공을 썼고, 한 명은 섬뜩한 마공을 뿌렸습니다!”
“허-! 정사마의 괴인이 함께라니!”
자하선옹의 탄식이 잠시 흘렀다.
“후우-! 그중에 사공의 고수가 특히 사나웠는데, 문 사형은 그와 백여 초를 겨루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때마침 태을각으로 제자들이 올라왔는데, 그가 단박에 쳐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권장지각이 한 수 한 수가 참으로 악랄하니 감히 감당해낼 제자가 없었지요.”
홍대원이 침음을 삼키며 말하는 가운데, 진우선이 물었다.
“홍 각주님께서는 정도의 고수와 싸우셨겠군요.”
“그렇습니다. 그자도 적수공권으로 저를 상대했는데, 분명 정도의 무공임에도 표독하고 악랄한 살수를 마구 펼쳐왔습니다. 현기가 어려 있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섬뜩했지요. 저는 이백여 초를 지나며 손속이 점점 어지러워지다가 등을 내주게 되었는데, 그렇게 정신을 잃었습니다.”
진우선은 홍대원이 가격당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때 후두부에 큰 충격을 받으셨을 겁니다. 홍 각주님의 혼백을 억압하는 기운이 그곳에 뭉쳐 있었으니까요.”
“아무래도 그랬을 겁니다. 아까 사숙조님께 들었을 땐 정말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일격이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테니까요.”
“그렇습니까?”
진우선이 묻자, 홍대원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문인께서 돌아가셨다고 외친 게 저였습니다. 마공의 고수는 거의 극마에 오른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의 마기가 실로 잔악했지요. 그는 목숨을 도외시하고 검초를 뿌린 장문인을 어렵지 않게 쓰러뜨렸습니다.”
“이런!”
“허!”
연 각주와 자하선옹이 피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사형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마공의 고수는 장문인의 주검을 옆구리에 끼며 ‘하나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홍대원은 화산파의 세 사람 중 가장 마지막에 쓰러지다 보니, 상황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도의 고수가 홍대원을 마지막으로 쓰러뜨리고서 얼른 화산파를 탈출한 모양이었다.
그때, 의문이 생긴 진우선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괴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이 안 나십니까?”
“아! 잠시만…….”
홍대원은 그들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기억이 날 듯 말 듯한지, 이마를 찌푸리며 정확히 생각해내기 위해 그 당시의 순간에 집중했다. 그러다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아! 생각났습니다. 얼굴이 금빛이었습니다. 황금색 가면요. 그래서 아무런 표정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홍대원이 급작스럽게 떠오른 금면인(金面人)에 대한 기억을 마구 쏟아냈다.
“아무래도 그 상황에서 술법에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들의 얼굴이 계속 흐릿한 안개처럼만 생각났거든요. 하지만 그 순간만은 명확히 떠올랐습니다. 무정한 인면귀라 생각할 때였으니까요.”
“아무래도 제혼기에 당하셨을 때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제혼기가 딱 맞겠습니다. 그럼 신인께서 걷어내주셔서 이 한 순간이 생각났나 봅니다.”
홍대원이 진우선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던 중, 또다시 떠오른 생각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외쳤다.
“천(天)! 천입니다. 그들의 이마 부근에 그리 새겨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