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화산으로 (1)
정무맹 내당은 세 채의 전각이 품(品)자로 배치된 형태였다. 내도원을 중심으로 좌우에 무도원과 혜도원이 마주 보는 구조였다.
쌀쌀한 어느 겨울날, 그중 한 채인 혜도원의 회의실에 여섯 사람이 모여 있었다.
내당주 냉군상이 웃으며 대화를 열었다.
“정검신협, 오랜만에 보니 정말 반갑소.”
“냉 당주님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진우선이 멋쩍은 듯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강직한 인상을 풍기는 사각턱의 사내가 자신을 소개했다.
“난 혜도원주 공손철이오. 진 무사의 위명을 날마다 감탄하며 들어서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반갑소.”
“진우선입니다. 반갑습니다.”
진우선과 공손철이 인사를 마치자, 냉군상이 회의를 진행했다.
“진 무사와 용 무사, 그리고 제갈 책사를 한 자리에 청한 것은 그대들에게 맡길 중대한 임무가 있기 때문이오.”
“얼마 전, 화산파 장문인인 매화검백께서 어떤 절대고수의 습격을 받아 일 각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셨는데, 그 주검마저 사라졌네. 그걸 계기로 조사해보니 근 이삼 년 동안에 죽거나 실종된 정사마의 고수들이 이십 명이 되더군.”
냉군상에 이어 만상각주 공야청이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공야청은 한 달 전에 정무맹주에게 보고한 이후에도 계속 조사해 왔는데, 그사이 실종된 무림고수가 열 명 더 늘어나 있었다.
진우선을 비롯한 좌중이 심히 어두워진 얼굴로 설명을 계속 들었다.
“이삼 년에 걸쳐 강호 전역에서 벌어진 일이라 거의 알아채지 못했었네. 더러는 백 명의 사상자 가운데서 최고수 한 명의 시신만 사라졌으니, 잠시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지. 연관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네.”
“그래서 진 무사를 비롯하여 용 무사와 제갈 책사에게 이 일을 부탁하려고 하오. 천마교와 사도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나, 그들만큼이나 커다란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오.”
냉군상이 특유의 안광을 내뿜으며 냉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조심스레 말하고 있으나, 어조는 확신에 가까웠다.
그 속뜻을 어렴풋이 눈치챈 진우선이 물었다.
“이런 일이 비단 이삼 년간에만 일어난 게 아니겠군요.”
“그렇다네. 진 무사가 매우 예리하게 보았군. 그 이전의 기록이 실로 방대하고 제각각이며, 근 이삼 년과는 다른 경향도 있어 계속 확인하고 있네만, 실종자가 더 있는 것 같네.”
“아-! 강호에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었군요.”
공야청의 대답에 용천월이 탄식을 흘렸다.
그때, 제갈영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세 분께서는 이 일이 사도련이나 천마교와는 별개로 벌어진 사건이라 보시는 건가요?”
“일단은 그렇지. 정사마의 고수가 두루 희생되었으니까.”
“그럼 혹시 만악서생과 독주요마의 실종도 이와 같은 맥락일까요?”
“맞아. 그들의 죽음과 실종도 석연치 않지.”
제갈영의 물음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공손철이 곧장 대답해주었다.
일련의 대화를 들은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장 최근에 벌어진 화산파부터 다녀오는 게 좋겠습니다.”
“진 무사, 고맙소. 화산파는 현재 자하선옹께서 내부의 일을 살펴보고 계시며, 이미 도와주기로 승낙 받았소.”
“그럼 내일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진우선이 그리 말하며 좌우의 용천월과 공손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과 용천월, 그리고 제갈영은 정무맹을 나와 악록객잔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분은 어제 맹에 돌아오셨는데, 하루도 채 못 쉬시고 바로 떠나시는군요. 정말 고생 많으시네요.”
“다들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천마교가 한꺼번에 들고 일어난 데다가 사도련도 여기저기서 출몰하니까요. 전에는 그래도 한쪽이 난리를 피우면 다른 한쪽은 다소 잠잠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서로 짠 듯이 밀어닥치는 거죠. 이러다 정말 큰 일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정말 그럴 거 같습니다.”
“이렇게 여유조차 없어서 어쩌죠? 만상각이나 내당만이 아니라, 많은 무인이 조금씩 지쳐가는 거 같더라구요. 두 분은 좀 괜찮으세요?”
“저는 그래도 괜찮은데, 진 무사님께선 어떠십니까?”
제갈영의 말에 묵직한 음성으로 대꾸하던 용천월이 진우선에게로 대화를 넘겼다.
“저도 괜찮습니다. 아까 물어보니 무원주님께서도 월령마화종을 상대하러 가시는 등, 모두가 숨 쉴 틈 없이 바쁘더군요. 하지만 천하에 더 큰 폭풍이 몰아닥칠 것 같으니, 그게 걱정입니다.”
진우선이 창밖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고뇌에 찬 눈빛을 보였다. 공교롭게도 천하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 시끌벅적한 객잔에서 한 무리가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자네, 그거 들었나? 구유마라종이 강호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더군. 정검신협께서 태산을 쪼개는 기세로 염라마군을 단칼에 베어버린 후 저승굴을 무너트리셨다더군.”
“오, 맞아! 나도 들었어. 정검신협 덕분에 천마오종이 천마사종이 되었다며?”
“허허. 자네도 이미 들었었군. 그래서 마교도들이 정검신협의 ‘정’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킨다던데, 내가 다 속이 시원했네.”
“맞아, 맞아! 나도 통쾌하더군. 이럴 때 한 잔 쭉 들이키세!”
그들이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강호의 대소사가 몇몇 무인들의 입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유쾌하게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누는 무인들도 있었다.
“현재 정사마의 세 축이 정검신협과 사령신군과 절대천마인가?”
“맹주님께서도 속깨나 앓겠군. 거력패도가 아니라 정검신협이 거론되니 말이야.”
“허허. 하지만 사령신군을 맞설 수 있는 건 정검신협뿐이지 않은가? 지난봄에 이미 그랬던 일인데.”
“그건 맞지.”
“어찌 보면 맹주님이 좀 딱하신 것 같아.”
“이 사람아! 천하를 두루 살피는 게 어디 무공실력만으로 될 일인가? 경륜과 인망이 있고, 천하의 흐름을 볼 줄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무위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많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 하지만 사마가 날 뛰고 있는데, 정검신협께서 중원을 두루 살필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나? 맹주께서는 천도관에서 천하가 어찌 흘러가는지 보시면 될 테고 말이야.”
“하긴, 그렇지. 어쨌든 우리는 정검신협께서 계셔서 혼탁한 세상에 그나마 기댈 곳이 있군.”
“이 사람아. 말 가려서 하게. 혹시나 맹주님이 들으시면 속상하실 것을.”
“뭘 그리 속 좁게 굴어? 그럼 지나가는 정검신협께서 들으시면 기뻐하실 걸세.”
그들의 대화를 듣던 용천월과 제갈영이 휙 진우선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아닌지, 그저 멍하니 시커먼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점소이가 탁자 위에 주문한 요리들을 가져왔다.
“일단 식사부터 하죠. 어쨌든 오랜만에 장사에 왔지 않습니까?”
용천월이 군침을 삼키며 말하자, 창밖을 바라보던 진우선이 용천월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대화를 이었다.
“용 무사님이 그토록 바라던 어향육사(魚香肉絲)가 이런 요리였군요.”
“네. 척 봐도 윤기가 곱고, 향기도 넘치지 않습니까? 근데 맛은 더 좋습니다. 진 무사님도 드셔보시면 감탄하실 겁니다.”
“정말 그래 보이는군요. 얼른 맛있게 드십시오.”
용천월은 악록객잔에서 어향육사를 먹는 게 그만의 휴식이었다.
진우선은 그와 돌아오는 길에 대화를 나눈 뒤, 오늘 이곳을 들른 차였다.
용천월이 진우선을 지그시 한 번 바라보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맛있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제갈영이 그런 용천월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요리를 맛보면서 슬쩍 물었다.
“용 무사님은 혹시 부모님께서 혼인을 알아보라고 하시지는 않나요?”
“흡! 큭!”
즐겁게 식사하던 용천월이 제갈영의 느닷없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기침했다.
“아! 용 무사님을 당황케 할 의도는 없었어요. 괜찮으세요?”
“후우-. 네, 괜찮습니다.”
용천월이 차를 마시며 얼른 숨을 가다듬었다.
그에 제갈영이 신세 한탄하듯이 말을 꺼냈다.
“저는 내년이면 약관이라면서 슬슬 부모님이 언질을 주시더라구요. 그래서 용 무사님은 어떨까 싶어 한 번 여쭤봤어요.”
“저에게는 아직 별말씀 없으십니다.”
“조부님도요?”
“네, 조부님도.”
제갈세가와 비천용문이라는 명문세가 자제의 대화였다.
게다가 제갈영과 용천월은 어릴 적부터 다소 친분이 있어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진우선은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럼 용 무사님은 흠모하는 분은 있으신가요?”
“아니요. 아직 없네요. 임무가 너무 많아서.”
“그쵸! 맞아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네요. 집안의 구속이 덜하다고 해서 여기 왔는데, 오히려 더 바쁘기만 해요. 저는 할아버지한테 속았어요.”
제갈영이 제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떠들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남궁 오라버니와 얼른 혼례를 올리라고 해요. 집을 떠나왔는데, 할아버지가 가끔 곤란해요.”
“남궁 무사 말입니까?”
“맞아요!”
진우선이 말한 남궁 무사는 남궁경이었다.
제갈영이 용천월에게 물었다.
“용 무사님은 같은 무도원에 속해 있으니 좀 아시나요? 보시기에 남궁 오라버니는 어때요?”
“문무를 겸비한 인재 아닌가요? 문과 무에 두루 능통한 건 좋은 거죠.”
“그건 허울 좋게 알려진 이야기일 뿐이죠. 여럿 파봤지만, 깊이가 않아요.”
“그래도 매사에 의욕이 넘치더군요. 특히나 성취욕이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습니다.”
“대화를 나눠 보면 그건 의욕이 아니에요. 그냥 욕심이 많더라구요. 특히나 재물을 좋아해서 자기 주머니에 넣으면 꺼내는 일이 없죠. 게다가 가끔 옹졸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으으!”
제갈영이 말을 채 잇지 않은 채 코를 찡긋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용천월이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탐탁치 않은 모양이었다.
“제갈 책사님께선 그를 내키지 않아 하시는군요.”
“맞아요. 저번에 진 무사님과 강서성에 함께 임무를 다녀왔는데, 함께 보게 되니 사람이 정말 경망스럽더라고요.”
“그리 생각하신다면 부모님께 그리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용 무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저도 그러려구요.”
제갈영이 용천월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용천월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제갈영이 불쑥 물었다.
“용 무사님이 보기에 진 무사님은 어때요? 남자는 남자가 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던데요.”
“저, 저요?”
진우선이 놀란 눈으로 되묻는 찰나.
“흡! 커헉!”
용천월이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다.
“아, 죄송해요. 그냥 물어본 거였는데…….”
“괜찮습니다.”
간신히 호흡을 고른 용천월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진 무사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분이시지요.”
용천월이 차분하게 대답했으나, 제갈영을 바라보는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
진우선과 용천월, 제갈영이 빠르게 움직여 열흘만에 섬서성에 도착했다.
세 사람은 화음현의 연화객잔에서 화산파 도사를 기다리며, 극히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만상각주님께서 주신 서찰을 보면 섬서성에서 실종된 무림고수가 꽤 많았습니다.”
“저도 보았습니다. 스무 명 중에 여섯이더군요.”
“맞습니다. 다른 곳은 많아야 두셋이었는데 말이죠.”
진우선의 말에 제갈영과 용천월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진지하게 의논했다.
“그런데 시간대를 살펴보니, 묘한 게 있습니다. 삼 년 전에 둘, 이 년 전에 둘, 작년에도 두 사람이 실종되었는데, 서로 한두 달 차이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맞아요. 벽안귀마와 만악서생이 한 달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두 달 안팎이더군요.”
진우선의 말에 제갈영이 맞장구를 쳤다.
그때, 용천월의 눈이 번뜩였다.
“아! 근데 매화검백께서 실종되신 게 아직 두 달이 채 안 됐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