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77화 (177/225)

177.

#구지의 주인 (3)

‘온다!’

진우선은 혈괴의 등 뒤편에서 뿜어지는 극마의 기운을 느꼈다.

이곳에서 공무동을 이토록 뒤흔들고, 심령마저 요란하게 울릴 수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염라마군!’

그걸 느낀 혈괴는 종전보다 더욱 진우선을 비웃으며 비아냥거렸다.

“곧 죽을 것들이 발악하는구나. 마군께서 오시는 것을! 크큭!”

“그 안에선 아늑한가 보군. 이리 입을 나불거릴 틈이 있는 걸 보니.”

진우선이 혈괴를 사납게 한 번 노려보더니, 광륜의 오행진기를 확 끌어올려 순백의 섬광을 몸에서 터뜨려버렸다.

그 순간, 진우선이 펼쳐내는 검로를 타고 빛이 출렁이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광영무에서도 손꼽히는 위력을 가진 광영창파의 초식이 펼쳐진 것이다.

촤아아아-!

콰앙-!

혈괴의 적혈마벽이 빛의 거센 물결에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져 내렸다.

그런 혈괴의 코앞에 암중의 막대한 공력이 들이닥쳤다.

거침없이 뚫고 간 빛의 파도에 뒤이은 그림자에 묵직한 항마의 공력이 담겨 있었다.

“크헉-!”

혈괴가 피분수를 뿜으며 뒤로 나자빠졌다.

호신강기였던 적혈마벽이 파괴된 순간, 그는 진우선의 공격을 더 막을 수 없었다.

혈괴의 온몸에 덮친 공력이 그의 육신은 물론 내력마저 갈기갈기 찢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떠… 말도…….”

혈괴는 단 한 수에 자신이 나가 떨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였다.

진우선은 숨넘어갈 듯이 들리는 그의 음성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혈괴의 사정일 뿐.

푹-!

빛의 물결 속에 직선의 궤적으로 쏘아진 한줄기 검광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부들대던 혈괴의 육신이 땅바닥에 철퍼덕 떨어져 내리더니, 이내 숨마저 사라졌다.

혈괴는 그토록 고대하던 염라마군을 알현하지 못한 채 절명해버리고 말았다.

한데 광영창파의 초식은 한 방향만으로 흐르는 게 아니었다.

수면에 이는 물결이 원형으로 사방에 번져나가듯, 광영창파의 강맹한 위력 역시 공무동 전체로 줄곧 퍼져나가고 있었다.

애초에 진우선이 온 내력을 끌어올려 광영창파의 초식을 펼쳐 낸 것은 염라마군이 당도하기 전에, 단숨에 적들을 처치하기 위해서였다.

“커헉!”

“큭!”

“……!”

세 사내가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연거푸 밀려오는 광과 영의 공력들에 당해 크게 피를 쏟았으며, 심각한 내상도 입은 상태였다.

“내공이 왜…….”

청안이 고통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어떻게 해서든 공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한 줌의 공력만 있어도 은형보(隱形步)로써 어둠 속에 몸을 숨길 수 있고, 두 줌의 공력이 있으면 환마보(幻魔步)를 따라 환영을 만들며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의 공력이 있다면 더 좋으리라.

염라마군이 깨어나서 다가오고 있으니, 공력만 모인다면 어떻게든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내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단전이 바닥난 상태였다. 광륜의 오행진기가 온전히 실린 광영창파의 일격에 공력이 모조리 쓸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런 청안의 눈동자에서 또 한 차례 밀려오는 순백의 물결이 보였다.

“제길!”

청안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가슴속에서 짙은 두려움과 망연자실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저건 죽음의 물결이었다.

그런데 청안만 그런 게 아니었다.

“허억- 허억-!”

풍혈객이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절망 어린 눈빛을 띠었다.

‘아무리 반도 채 소화해내지 못했다지만, 만독지기와도 상극이라니!’

만독지기(萬毒之氣)는 만독지처에서 얻을 수 있는 공력이었다.

풍혈객은 은혈객과 함께 만독지처에서 몸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견뎌냈음에도, 절반에 못 미치는 정도만을 내공으로 녹여낼 수 있었다.

‘온전한 만독지기를 얻었어야 했어!’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마도 독지에서 대성했던 흑사 오음마공이 천독마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만독지처의 강렬한 극독을 제대로 소화해내기엔 역부족인 까닭이리라.

그래서인지 진우선에게 진신절기인 혈풍십삼격(血風十三擊)을 한없이 쏟아냈어도, 그의 검초를 단 한 번도 뚫지 못했다.

‘만독지처의 정화를 쏟아낸다면 모르겠군…… 염라마군께서는 가능하실지도…….’

풍혈객은 한 동혈에서 느껴지는 염라마군의 기운을 느꼈다.

조금만 버티면 그 위력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잠시 했던 풍혈객이 짙은 현기의 파도를 목도했다. 그 기운은 항거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맑았다.

‘이럴 수가-!’

단숨에 끝장을 보려는 것이리라.

빛의 파도 뒤에는 보이지 않으나 묵직한 공력이 뒤따르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처음 관통 당했을 때 그걸 알아채지 못해 심대한 내상을 입었기에, 이번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막아낼 힘이 없었다.

‘잠시 후면 될 텐데…….’

하지만 찰나의 순간을 버텨내는 건 불가능하리라. 풍혈객의 얼굴에 체념의 암운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은혈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에도 풍혈객과 별다를 바 없는 어두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촤촤촤-!

진우선을 중심으로 광륜의 순전한 빛이 물결처럼 퍼져 공무동 내부를 가득 채웠다.

광영창파는 거침이 없었고, 단숨에 공무동 내부에 있던 생명의 숨소리가 모두 꺼졌다.

“…….”

텅 빈 공무동에 정적만이 흘렀다.

빗발치듯 터져나오던 굉음이 멎었고, 마구 들끓던 기운들도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진우선의 한숨만이 넓은 공동을 울렸다.

그는 염라마군이 오기 전에 광영창파와 일광삼점파를 동시에 펼쳐내며 네 명의 적에게서 단숨에 목숨을 빼앗았다. 목표한 바를 이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움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진우선은 극마의 기운이 다가오는 동혈을 바라보며, 광륜의 오행지기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천천히 열 번의 호흡을 내쉬었을까.

우우웅-!

한 중년인이 눈에서 혈광을 흘리며 동혈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는 허공에 뜬 채 움직이고 있어 흡사 유령 같았다.

중년인은 공무동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안타까움을 흘렸다.

“빨리 왔건만, 한발 늦었군.”

그가 혈괴의 시신을 바로 알아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충실한 종이었거늘.”

한마디 말에서 애석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도 잠시였다.

중년인이 이내 진우선에게로 눈을 돌리며, 싸늘한 기세를 피워냈다.

“네 녀석이 진우선이겠구나.”

“염라마군이시오?”

“당연하다! 이 몸이 아니고 누가 그리 불릴 수 있을까?”

중년인, 염라마군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남색 장포가 세차게 펄럭이며 온몸에서 핏빛 기막이 피어올랐다.

심혼을 옭아매는 섬찟한 기운이었다.

염라마군이 진우선을 보더니, 살기어린 음성을 내뱉었다.

“한 놈은 독괴에게로 갔군. 마라혈정을 노린 것이냐?”

“마라혈기가 강력한 생기를 띠고 있어 이상하다 싶었소. 그게 마라혈정이었군.”

“허! 마기에 대한 감응력이 이 정도라니. 정말 믿기지도 않는군!”

염라마군은 진우선의 능력에 심히 놀라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궁금하오. 당신은 왜 마라혈정의 기운과 지금도 이어져 있는 거요? 저 위의 기운들은 흔적만 있던데.”

“……!”

염라마군이 찢어질 듯이 눈을 부릅떴다.

“……그런 것도 느꼈다고?”

삼처의 기운은 육신에 채워지고, 마라혈정의 기운은 비동에서 영동으로 흘러들어 염라마군의 혼백에 깃들었다.

혼백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육신이 생하니, 이미 스며든 마라혈정 하나의 힘이 정기신의 흐름을 왕성하게 했다.

하지만 애초에 마라혈정은 두 개였다.

염라마군은 그 남은 하나의 기운을 끊지 않고 있었다.

“지존께서 대업을 이루시는 데 큰 걸림돌이었겠구나. 네놈은!”

염라마군은 진우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구천마라혈기를 극한까지 피워 올렸다. 핏빛 기막이 두껍고 짙어져 강기의 막이 되었다.

그러고도 기운이 넘치게 끓어올라 막에 어린 기운들이 마치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마구 요동쳤다.

“감사히 여겨라. 지존께서 군림하실 첫 제물로 네 피가 선택된 것을!”

염라마군이 오만한 목소리로 광포하게 외치며 시뻘게진 두 손을 치켜들었다.

혈류강막(血流幕)에서도 핏빛 불꽃이 타타탁 튀어오르고, 그 내부는 점점 핏빛 연기가 짙어졌다.

염라마군의 신형은 어느새 혈연(血煙)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파아악-!

혈류강막이 터졌다.

응축된 구유마라혈기가 일거에 공무동 전체로 뻗쳤다.

구유마라혈천공 최강의 한 초인 억겁혈세(億劫血世)였다.

진우선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동공에 혈염(血焰)이 마구 들끓는 혈류가 덮쳐오는 게 보였다.

그 극마의 기운은 육신뿐만 아니라 심령을 짓누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음기와 혈마기와 만독지기까지 다 퍼부었다! 이 한 수에 목숨까지 걸었구나!’

진우선은 염라마군이 구지에서 연단해낸 모든 기운을 모조리 쏟아부은 걸 알아챘다.

극도의 긴장으로 전신의 감각이 곤두섰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진우선의 눈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 수의 승부라면!’

극마의 기운이 폭발하여 쏟아지고 있기에, 진우선은 광영무에서도 위력이 가장 강한 한 초식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검을 빠르게 휘둘러, 덮쳐오는 혈류를 쳐내기 시작했다.

빠르게.

더 빠르게.

검이 움직이자 빛이 일었다.

단순히 내공이 순백의 색으로 흘러나오며 빛나는 게 아니라, 검이 쾌(快)를 넘어서 일어나는 빛이었다.

검이 더욱 빠르게 허공을 그었다. 그 속도는 마치 번개가 내리 꽂히는 순간 보이는 빠르기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화악-!

섬광이 터졌다.

찰나의 순간, 공무동 내부에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짙은 현기가 한순간에 공무동 내부를 가득 채웠다.

염라마군의 핏빛 기운은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단 한 구석도 붉은 기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하가 고요 속에 잠겼다.

광영무의 절초인 섬광적멸(閃光寂滅)이 만들어낸 상황이었다.

“후우-. 후우-.”

진우선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나지막한 숨소리가 매우 거칠게 들렸다. 지친 기색이 꽤 엿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바로 염라마군이 피투성이가 된 채 살아있는 까닭이었다.

그의 남색 장포는 넝마가 되었으나, 눈에 어린 혈광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극경을…… 넘어섰군. 륜(輪)마저 이루었을 줄이야…….”

염라마군이 숨을 몰아쉬며 감탄을 쏟아냈다.

극경에 이르면 내공이 천지만물과 소통하니, 운기행공을 거듭할수록 대자연 속 각 기운의 정수가 모여 단단해졌다.

하지만 극경을 넘어서려면 정수가 단단해지는 걸 넘어서서 스스로 륜(輪)을 이루어 순환해야 했다. 이게 탈경으로 나아가는 이치였다.

염라마군은 억겁혈세의 초식으로 진우선과 단 한 번의 공방을 나누는 사이, 그의 경지를 알아채고 있었다.

한데, 상대의 비밀을 깨달은 건 염라마군만이 아니었다.

진우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숨이 끊어졌는데 생기가 채워지며 살아나다니! 이 때문에 마라혈정의 기운을 놓지 않은 거였군.”

“……!”

염라마군의 혈광 어린 두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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