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구지의 주인 (2)
“침입자가 있다.”
독괴가 방에 들어서며 말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운기행공을 하던 혈괴가 번쩍 눈을 뜨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대체 누가 여길?”
“아마도 진우선일 거야. 마군께서 극경의 고수라 하셨으니까.”
“청안이 꼬리를 달고 온 모양이군. 그는 어딨지?”
혈괴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에서는 시뻘건 안광이 흐르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마군께서 그를 삼처로 보내셨으니까. 그곳들엔 아직 기운이 가득 남아 있으니, 쉽게 빠져나오긴 힘들 거야.”
“그럼 차분히 대처할 시간은 있겠군.”
흥분하여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던 혈괴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삼처(三處)는 만독지처, 마혈지처, 극음지처로, 이곳 구지(九地)의 세 성소였다.
각 처의 기운은 인세에서 절대 느낄 수 없을 만큼 지독하여, 제아무리 극경의 고수라도 쉬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특히나 만독지처와 마혈지처는 각각 독괴와 혈괴가 대를 이어 만들어낸 곳이니, 두 사람은 그 기운들이 얼마나 극독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혈괴가 독괴에게 물었다.
“마군께선 일어나시려면 얼마나 남았지?”
“곧 눈을 뜨실 거다. 마라혈정이 거의 녹아들었으니, 오래 걸려봤자 서너 시진쯤이겠지. 아마 마지 막으로 기운을 갈무리하는 중이실 거다.”
“그럼 혼백(魂魄)은 이미 옥체에 돌아오셨겠군. 다행이야. 우리의 숙원이 허사가 되는 일은 없겠어.”
“하지만 만의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는 게 좋겠어. 극경의 무인이니 어떤 수가 있을지 모른다.”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다. 마군께서 눈을 뜨시기 전까지 입구를 지켜야겠군.”
독괴와 혈괴가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며 의기투합했다.
그들의 숙원은 사실 십년지계가 아니라, 백년지계였다. 그러니 완벽하게 끝이 날 때까지 아주 사소한 하나라도 방심할 수 없었다.
“내가 공무동(空無洞)으로 가겠다. 독괴 너는 비동(秘洞)을 지키며 영동(靈洞)을 살펴라.”
혈괴가 단호한 결의를 내비쳤다.
공무동은 구지 아래에서 가장 커다란 공동으로, 한가운데 있어 여러 동굴과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삼처 중 극음지처와도 유일하게 맞닿아 있었다.
독괴는 비동에서 염라마군이 잠들어 있는 영동을 살펴봐야 할 테니, 혈괴가 공무동으로 가겠다고 자처하고 있었다.
그에 독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매서운 눈빛을 뿜었다.
“알겠다. 그 대신 혈괴 너는 은혈객(隱血客)과 풍혈객(風血客)을 데려가라.”
“회복은 다 된 건가?”
두 마라혈인은 그간 끌어모았던 내력들을 마라혈정으로 쏟아내고서 쉬고 있었다.
“보상은 엊그제 이루어졌었다. 마군께서 대업을 마치신 후 만독지처에 다녀오라 했었지. 후후후.”
“좋군.”
혈괴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진우선과 용천월이 극음지처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야명주로 밝혀진 커다란 공동에 네 사람이 나와 있었다.
마라혈인 둘과 적발의 중년인과 릉하동 내부로 뒤쫓아 왔던 청의 사내였다.
그들은 은혈객과 풍혈객, 혈괴와 청안이었다.
“진우선! 정말로 네놈이 내 뒤를 밟았었구나!”
“나를 아시오?”
“약관의 나이도 안 되어 등봉조극에 오른 고수가 천하에 너 말고 누가 있겠느냐?”
청안이 눈에 쌍심지를 켠 채 잔뜩 분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는 혈괴를 따라 공무동에 자처하여 나와 있었다.
진우선으로 인해 과오를 저지르게 되니, 그를 상대하는 일에 힘을 보태지 않고서는 도무지 성이 차질 않는 까닭이었다.
“청안.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아, 알겠소.”
혈괴가 청안을 제지하며 진우선을 노려보았다.
“당신의 이름은 많이 들었소. 내 아우 둘이 이번에 숨을 거두었고, 본교에서도 많은 이들이 당신의 손에 목숨을 잃었지.”
“그랬군.”
“그러고 보니, 우도도 저 자의 손에 숨을 잃었소! 은월도!”
청안이 다시금 노기탱천하여 외쳤다.
그에 진우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우도는 누구고, 은월은 누구요?”
“뭐? 설마 그들을 모르느냐? 그럼 초무량과 맹여립이라 하면 알겠군. 개 같은 정무맹의 치부일 텐데. 크크크.”
“천마교에서는 그들을 그리 불렀었군.”
진우선이 나직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당신은 우리와 은원이 많았군. 그러고도 이곳에 함부로 침입해왔으니, 대단한 자신감이야. 혹시 이들은 알아보겠소?”
혈괴가 양옆의 두 마라혈인을 잠시 바라보며 가리켰다.
그때, 용천월이 진우선에게 몰래 전음을 보냈다.
[진 무사님. 저들이 시간을 끌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 그럴까요?]
[염라마군이 극마를 이루었으나, 아직 미동이 없습니다. 잠들었다고 알려졌었으니, 아마도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진우선이 용천월에게 빠르게 전음을 보내면서, 동시에 혈괴의 말에도 대답했다.
“마라혈인 아니오?”
“바로 알아보는군. 당신은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고 싶을 테지만, 우리는 계획을 이루었소. 운남과 사천의 소식은 듣지 못했나 본데…….”
혈괴가 길게 말을 건네오자, 진우선이 재빨리 용천월에게 전음으로 계획을 전했다.
[왼쪽으로 두 번째 동혈을 따라가면 중심부가 나올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곳의 기운은 삼처와는 달리 아직도 염라마군과 강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지키는 이도 있으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마라혈기의 강력한 생기를 품고 있으니,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이어져 있는 기운이 마라혈기의 생기였습니까?]
용천월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괴요가 마라혈기를 빨아들이며 죽음이 가까웠던 중상에서 살아났지 않은가.
아니, 살아난 정도가 아니라 마기가 더 짙어져 있었다.
[그래서 용 무사님께 부탁드린 것입니다. 아무래도 느낌이 심상치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혈괴가 산만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진우선을 보며, 말을 끊었다.
“……우리 이야기가 별 관심이 없나 보군. 공무동만 둘러보고 있는 걸 보니.”
“동혈이 여덟 개 나 있으니, 아무래도 여기가 중심부인 모양이오. 왜 나를 여기서 막았는지 알 거 같군.”
“그렇소? 과연 극경의 무인은 뭔가 다른 모양이군.”
혈괴가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은 채, 서서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극경의 무인이라도 삼처를 지나오느라 공력의 소모가 컸겠지. 여기서 죽는 게 당신의 운명이니, 멋모르고 날뛴 자신을 탓하시오.”
제멋대로 판단하는 혈괴의 눈에서 혈광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몸 주위로 붉은 광채가 구처럼 어렸다.
그의 진신절기인 적혈마벽(赤血魔壁)은 호신강기가 기본이 되는 무공이었다.
혈괴와 함께 은혈객과 풍혈객도 기운을 끌어올렸다.
짙은 독기가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은혈객에게서는 독기가 잘 벼려진 비수처럼 날카롭게 쏘아졌고, 체격이 우람한 풍혈객에게선 위압감이 절로 뿜어져 나왔다.
청안 역시 옷자락이 마구 펄럭일 정도로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더니 네 고수가 협공을 펼치며 일제히 들이닥쳤다.
쐐애-!
퍼퍼펑-!
은혈객이 암경을 쏘아내며 달려오고, 풍혈객이 권풍(拳風)을 뿜으며 삼 장 앞에서 강맹한 연격을 뿜어댔다.
하나는 독침이고, 하나는 독연이나 다를 바 없었다.
콰쾅-!
혈괴의 적혈마벽에서도 핏빛 강기가 화살처럼 쏘아져 왔다. 모두가 진우선에게로만 집중하여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에 진우선이 두 걸음 앞으로 나서며 광륜검을 뽑았다.
검에서 순전한 빛살의 광채가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진우선이 재빠르게 검을 휘둘러 빈틈없이 쇄도해오는 공력들을 마구 상쇄시켜 나갔다.
그러더니 몸을 우측으로 슬쩍 돌리며 광륜검을 크게 휘둘렀다.
샤아악-!
광륜검에서 빛무리가 휙 뻗어 나갔다.
좌측에서 은밀하게 달려들던 은혈객이 단박에 가슴팍이 부욱 찢기며 뒤로 나뒹굴었다.
“컥!”
살수 출신으로서 장기를 십분 살려 숨어들려 했으나, 진우선의 일검에 가슴에 큰 자상을 입은 것이다.
진우선이 걸음을 크게 내디디며 검을 그어 올렸다.
검초가 풍혈객의 공격방위를 모조리 막아내며, 그의 기운을 마구 튕겨냈다.
그에 이어 순백의 검강이 풍혈객에게로 짓쳐 날아갔다.
“쿠억-!”
풍혈객이 피를 울컥하더니, 공세가 끊겼다.
한데, 그때였다.
청안의 신형이 앞으로 빛살처럼 쏘아졌다. 실체가 너무 빨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잔상만이 남을 뿐.
청안의 형체가 맺어지는 곳은 진우선의 등 뒤 쪽이었다.
그는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수법으로 단박에 몸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그를 마주 보는 건 용천월이었다. 용천월이 힘껏 검을 휘둘렀다. 그의 손에서 비룡승천검강의 강기가 번쩍 쏘아졌다.
후욱-.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베지 못했다!’
용천월이 즉시 초식을 이어가며 눈 깜짝할 사이에 우측으로 신형을 옮긴 청안을 상대해나갔다.
퍼퍼펑-!
하지만 용천월은 그를 쫓기가 쉽지 않았다. 청안이 장력을 마구 쏘아대면서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까닭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
강력한 검기 하나가 허공에 내리꽂히는 듯하더니, 청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진우선의 일격을 맞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웅-!
그때, 공무동이 크게 떨려왔다.
“……!”
진우선이 별안간에 눈을 부릅뜨며, 용천월에게 얼른 외쳤다.
“지금 가십시오!”
“네!”
용천월이 사전에 계획한 대로 여러 동혈이 있는 왼쪽으로 즉각 몸을 날렸다.
그에 적혈마벽 속에서 강기를 쏘아대던 혈괴가 이죽거렸다.
“크크크. 그곳에 뭐가 있는 줄 알고?”
***
한편.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의식의 세계에서 떠도는 이가 있었다.
‘백년지계를 이루어 이제야 지존께 감사를 드릴 수 있거늘!’
영(靈)은 대노했다.
백년지계를 이루었고 이제 깨어나기만 하면 되는 순간인데, 그의 집이나 다름없는 구지에 불청객이 들어온 까닭이었다.
그간 심혈을 기울였던 노력과 시간은 과연 얼마이던가.
영은 구지 아래에 있는 천하의 신비 극음지처를 대대로 지켜오며, 만독지처와 마혈지처를 만들어냈다.
만독지처를 구성하기 위해 만독을 다룰 수 없는 천독마기를 익혔음에도 대를 이어 희생한 독괴와 그의 선조들.
또한, 마혈지처를 이룰 마혈을 모으기 위해 적혈마벽을 익힌 채 혈혈단신으로 강호에 뛰어들어 천하를 피로 물들인 혈괴와 그의 선조들.
구지의 삼처는 오직 일념만으로 목숨을 내놓은 채 대를 이어 악착 같이 살아온 세 가문의 결과물이었다.
천마가 내려준 일념!
-구유마라의 기운이 혈천을 이루는 날, 천하가 발 앞에 엎드릴 것이다.
그런데 백 년의 염원이 서린 곳에 청하지 않은 외인이 이리도 쉽게 들어왔을 줄이야.
영은 그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지존이시여!’
영이 심중에 부르짖었다.
구유마라혈천공(九幽魔羅血天功)은 천마교의 시조에게서 가문이 내려받은 비전의 마공이었다.
이는 천마의 심복으로서 인정받고 총애 받은 증표이며, 그와 동시에 천마교의 대업이 펼쳐질 때 천하를 진동시킬 절대의 무공이었다.
영이 온 의식을 집중하여 구유마라혈천공의 구결을 되뇌었다.
무아지경 속에서 육신을 잊었으며 찰나를 영원처럼 인식하니, 구유마라혈천공이 뜨겁게 타올랐다.
구유는 구지의 음기요, 마라는 마혈 속에서 들끓는 진득한 마기이며, 혈은 독혈로서 만독의 독기였다.
인간의 육신으로는 삼처 중 하나의 기운도 제대로 체화하기 어렵거늘, 구유마라혈천공은 삼처의 힘을 육신에 모으고 마라혈정으로서 영을 붙들어 멸세(滅世)의 마기인 구유마라혈기(九幽魔羅血氣)를 피워내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극마에 오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대공(大功)은 이미 그렇게 완성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육신과 혼백이 떨어져 있었던 십 년의 간극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래야만 진정한 합치였다.
이윽고.
번쩍-
무시무시하고 섬뜩한 빛이 공동을 채웠다.
혼백이 근원으로 돌아오니 육이 눈을 뜨며, 눈에서 정광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릉하동이 잘게 진동했다.
우우우우우웅-!
그가 전율하는 쾌감에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후-!”
십 년 만에 흘러나온 육신의 음성이 공동을 적셨다.
그가 돌로 만들어진 원형의 제단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지극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만고천추(萬古千秋)에 독보하시는 지존이시여! 이제야 주신 뜻을 이루었나이다. 이제 이 종복을 쓰시어 천하에 군림하시옵소서!”
그는 염라마군이었다.
염라마군이 눈에서 지독한 살기가 밴 혈광을 흘리며 공무동으로 향했다.
“저들을 첫 제물 삼아 올려드리고 나가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