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73화 (173/225)

173.

#몰려드는 구유마라종 (3)

한바탕 난리가 났던 대은객잔 삼 층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조금씩 장내가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

진우선은 별안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마라혈기가 솟구쳤어? 왜지?’

마라혈인은 모두 숨을 거두었으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우선이 곧장 몸을 돌려 객잔 밖으로 나왔다.

“헛-!”

그러자 객잔 앞 거리에서, 괴이하여 모골마저 송연한 광경이 진우선을 맞이했다.

괴요가 눈에서 혈광을 내뿜으며, 무혈객의 사체에서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죽었는데도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죽자마자여서?’

진우선은 생각과 동시에 기운을 쏘아냈다.

퍼억-!

무혈객의 시체에 한 줄기 경력이 꽂히자 살점과 뼛조각들이 마구 터져나갔다.

괴요의 상체로도 일격이 쏘아졌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핏빛 기운이 일어나더니 공력이 와해되어 버렸다.

괴요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어렸다.

“아…….”

정신을 놓고서 무혈객의 마라혈기를 흡수하고 있었는데, 그게 끊긴 까닭이었다.

그때, 역겨운 표정의 진우선이 소리쳤다.

“네놈들은 마라혈기가 목적이었구나!”

무혈객 옆에 괴요가 있고, 광혈객 옆에 흑괴가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괴요가 정신을 되찾더니, 요망한 기운을 흘리며 진우선에게 대꾸했다.

“호호호.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네.”

진우선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모은 마라혈기를 어디에 쓰려고?”

“근데 나 어때? 더 예뻐지고 더 탱탱해진 거 같지 않아?”

하지만 괴요는 진우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제 말만 내뱉었다. 애초에 제대로 대화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당신은 아까의 일격에 중상을 입은 거 아녔소?”

“맞아. 중상이었지. 지금도 욱신거려. 하지만 참을 만해졌어.”

“마라혈기가 엄청난 모양이군.”

중상을 입어 한동안 거동도 제대로 못 할 거라 봤는데, 지금은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아예 기운이 넘치는 듯했다.

“와! 너 진짜 괜찮네. 아! 가지고 싶어. 너무 아까워.”

괴요가 진우선에게 감탄하더니, 혀를 날름거리며 탐심을 드러냈다.

“진 공자. 나 어때? 나 가지고 싶지 않아?”

“……더는 대화가 어렵겠군.”

진우선은 괴요의 행태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즉각 검을 휘둘러 광륜의 오행지기를 날렸다.

솨솨솨-!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광이 여러 줄기로 뻗쳐나갔다.

이 광양찬망(光陽燦芒)의 초식은 빛줄기의 방향을 능히 조절할 수 있었는데, 진우선은 그걸 한 사람에게로 몰았다.

괴요의 전신에 빛이 내리꽂혔다.

그 순간.

퍼퍼퍽-!

둔탁한 굉음이 마구 터졌다.

어느새 괴요의 몸에서 피어오른 마라혈기의 지독한 기운이 알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더니 괴요가 핏빛 안광을 흘리며, 광폭한 기세로 짓쳐 들었다.

마라혈기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공력에 한계가 없는지 천지간을 압도하여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오싹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진우선의 눈은 명경지수처럼 맑았다.

‘저 마라혈기는 빌려 쓰는 것일 뿐, 괴요의 본질적인 힘이 아니야!’

그러니 어렵지 않으리라.

한데 바로 그때였다.

괴요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사람이 셋으로 늘어나고, 각기 팔이 여섯이 되었다.

괴요의 진신절기인 환영마공(幻影魔功)에서도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혈영십팔수(血影十八手)였다.

공력을 어찌나 쏟아부었는지 열여덟 개의 손이 한없이 커지며 피를 뚝뚝 흘려댔다.

그러더니 진우선을 찢어 죽이기 위해 마구 덮쳐왔다.

“흐압-!”

진우선이 기합을 토해내며 혈영십팔수를 상대했다.

빛살을 머금은 검이 수차례 혈영을 베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형체가 없으니 둘로 셋으로 쪼개져도 다시 모양을 이루었다.

그러면서도 조여오는 위력은 줄지 않았다.

‘뭐야, 이건!’

진우선이 얼른 몸을 피하며 혈영십팔수의 기괴한 공격을 피해냈다.

시뻘건 손들이 마라혈기를 힘입어 솥뚜껑만 해져서 제각기 덮쳐오니, 사방팔방이 포위되어 몸을 내빼기가 쉽지 않았다.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 와중에도 혈영십팔수를 살피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구 옥죄어오는 괴요의 손은 왼손이 아홉이고, 오른손이 아홉이었다. 각기 여덟씩 환영이 더해져 십팔수가 되었지만, 실체는 오직 왼손과 오른손 단 둘뿐이었다.

이윽고 진우선이 그둘을 찾았다.

검에 어린 광륜의 오행진기에서 형을 이룬 수기와 화기가 맹렬하게 쏘아졌다.

콰아-! 콰아앙-!

진우선의 검이 혈영십팔수의 실체만을 재빠르게 베고 돌아오자, 굉음이 터지며 핏빛 환영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항마와 이화의 능력은 마라혈기와 상극이니, 핏빛 환영은 가루처럼 흩날리다 사라질 뿐이었다.

“컥-!”

괴요가 피를 토하며 뒤로 나뒹굴었다.

그녀의 몸에서 마라혈기의 기운이 마구 일렁거렸다. 그게 이제는 불안해 보였다.

“흐흐흐흐! 호호호!”

광기에 젖은 괴요의 음성은 듣는 이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촤락-.

진우선이 검에 남은 피를 털어내며 그녀의 괴성을 잘랐다.

그리고 다가가서 무거운 안색으로 물었다.

“마라혈기를 대체 얼마나 모은 거요? 이리 모아서 뭘 하려고?”

“내가 끝일 줄 아느냐? 마군께서 오시면, 네놈들은 죽은 목숨이야! 흐흐흐흐-!”

땅바닥에 널브러진 괴요는 여전히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채, 눈에 힘을 팍 주며 비웃었다. 마라혈기의 광채가 동공에서 폭사되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퍽!

그녀의 눈알이 저 혼자 터져버렸다.

마라혈기가 골수에까지 치솟아 아예 통제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는 진우선이 나타나자마자 뿌린 일격으로 마라혈기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탓이 컸다.

어쨌든, 마라혈기가 괴요의 신체에서 광분하기 시작하며 그녀의 생기는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아…… 곧 보러…… 갈게…….”

급기야 고개를 떨구며 숨을 거두었다.

진우선이 굳은 얼굴로 싸늘하게 식어가는 괴요의 주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뒤에서 용천월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그는 진우선이 객잔을 나서자 곧장 따라 나와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진 무사님, 수고하셨습니다. 갑자기 내려가신 이유가 이래서였군요.”

“그렇습니다. 무혈객을 죽였는데도 마라혈기가 느껴져 얼른 나왔더니, 중상을 입었던 괴요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회복해 있었습니다. 마라혈기를 흡수해서요. 정말 무섭군요.”

진우선이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말했다.

“저도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흑괴 역시 공력이 끝이 없었습니다. 공력이 마르지 않는지 절초들을 쉼 없이 쏟아내니 너무 버거웠습니다.”

“그럼 흑괴 역시 마라혈기를 다스릴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괴요는 채양보음하는 색마였으니 그 능력이 더 뛰어났을 텐데, 진 무사님이 빠르게 손쓰신 덕분에 그러지 못한 듯합니다.”

용천월이 진우선의 말에 척척 대답하더니, 우려되는 바를 더 이어 나갔다.

“진 무사님, 마라혈기의 힘이 너무나 지독합니다. 더구나 그토록 꺼렸던 마라혈독은 애초에 이 마라혈기를 모으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군요.”

“맞습니다. 저도 그래서 마라혈기를 도대체 뭐에 쓰려 했을지 궁금하더군요. 하지만 괴요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구유오괴는 구유마라종에 속해 있으니, 그 종주인 염라마군이 무언가 획책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한데 그게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저 역시 염라마군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해 추측하기가 어렵군요. 그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었습니다.”

진우선이 용천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화를 이었다.

“용 무사님, 그럼 혹시 옥에 대해선 아십니까?”

“아, 그건…… 아마도 옥괴일 겁니다. 예전에 구유칠괴일 때 괴요와 옥괴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옥괴는 남천패도 호 대협께 목숨을 잃었죠.”

“그래서였군요. 이들이 여기 나타난 건 마라혈기를 모으는 한편, 그때의 복수도 하기 위해서였겠습니다.”

“진 무사님의 말을 들으니,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용 무사님, 다시 올라가 봅시다.”

“그러시죠.”

진우선은 객잔으로 걸어가기 전에, 괴요와 무혈객의 시체를 보며 손목을 휙 돌리더니 손끝을 튕겼다.

화르륵-!

괴요와 무혈객의 시체에서 매캐한 냄새가 나며 불에 타들어 갔다.

***

금사객잔의 별채에 깊은 밤이 내려앉았다.

“진 대협! 소인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하를 진동시키는 대협의 위명은 그간 익히 들어왔었는데,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호덕인이 진우선을 존경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호기롭게 외쳤다.

“호 공자께서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광혈객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제게 강제로 마라혈독을 집어넣으니, 내공에 곧바로 마기와 독기가 스며들어 제 뜻대로 다스릴 수가 없더군요. 그저 기운이 빨려 나가는 걸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덕인이 너스레를 떨었다. 죽다 살아왔기 때문인지 감정이 격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목숨에 지장이 없으니 다행입니다. 근데 팔에 어려 있던 독기는 태웠으나, 검게 죽은 피부는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이건 괜찮습니다. 목숨을 구했는데 팔 색깔이야 아무렴 어떻습니까? 오히려 진 대협과 인연을 맺은 기념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공자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다행입니다.”

호덕인이 호방하게 말하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공자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남천패도 호 대협께서는 구유마라종과도 많은 격전을 치르셨습니까?”

“괴요와 옥괴 때문에 물어보셨군요. 맞습니다. 아버지께서 옥괴를 베셨지요. 그들이 서로를 연모했다고는 하나, 태생이 색마인지라 각자가 수많은 이들을 흡정(吸精)하고 살았으니까요.”

호덕인은 부친인 호자청의 업적을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진우선이 하나 더 물었다.

“그럼 호 공자께서는 염라마군에 대해서도 들어보셨습니까?”

“네, 한 번 들어본 적 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지나가시는 말로, 구유마라종에는 한 기인이 있어 구지(九地) 아래에 잠들어 공력을 쌓는다고 하셨습니다.”

“……!”

진우선이 눈을 부릅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용천월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들의 행태가 염라마군까지 연관된 것입니까?”

호덕인이 뒤늦게 상황이 얼마나 막대한지 눈치챘다.

“그런 듯합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들은 잠시 구유마라종에 대하여 우려 섞인 대화를 더 나누었다.

이윽고 진우선이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 대협, 오늘은 제가 경황이 없어 은공께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다음에 꼭 남천장에 한 번 들러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물론이고, 아버지 역시 은공을 매우 반가워하실 겁니다.”

***

“넷째야. 괜찮으냐?”

기골이 장대한 적발의 중년인이 흰옷으로 차려입은 노파에게 하대하며 말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이가 죽었다니요!”

“상대가 진우선이었다. 그가 넷 모두를 쳐 죽였으니, 쉬이 믿을 수 없으나 믿기지 않는 일도 아니구나.”

“물론 어쩔 수 없었긴 하지요. 그놈이 극경의 무인이니.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듭니다.”

백의노파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남편인 흑괴가 불귀의 강을 건넜다는 생각에 눈물이 마르지를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살쾡이상의 중년인이 날카롭게 말했다.

“이제 곧 염라마군께서 깨어나실 시간이지. 백괴야, 힘들더라도 마음을 추스르고 대업을 이어나가야 한다! 교도들은 다 너만 바라보고 있지 않으냐?”

“후우-! 맞아요. 그렇지요. 알겠어요.”

백의노파 백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적발의 중년인이 살쾡이상의 중년인에게 말했다.

“독괴야.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광혈객과 무혈객이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제 마라혈정(魔羅血精)은 두 개밖에 없는데.”

“상관없다. 애초에 둘로도 충분하게 계획했으니까.”

그러더니 독괴가 섬찟한 웃음을 흘렸다.

“혈괴야. 우리의 숙원이 이뤄질 날이 이제 머지않았구나!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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