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몰려드는 구유마라종 (2)
아수라장이 벌어진 대은객잔 삼 층.
용천월이 굳은 얼굴로 흑괴를 노려보며, 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지잉-!
검에 어린 푸른빛의 검강이 한층 더 짙어졌다. 비천용문(飛天龍門)을 대표하는 비룡승천검강(飛龍昇天劍)의 위엄찬 모습이었다.
‘아비규환이 되어가고 있다. 단숨에 승부를 봐야 해!’
용천월은 흑괴와 몇 초식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주변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모양이군. 하지만 네놈 뜻대로 될까?”
흑괴가 이죽거리며 손을 마구 쳐 냈다.
일순간에 흑살마장의 장력 수십 개가 전방을 포위하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후웅-!
용천월이 묵중한 내공을 실어 검을 그어 올리며 검초를 펼치기 시작했다.
푸른빛의 검강 한 줄기가 회오리 치며 크게 피어오르더니 사방으로 넓게 뻗쳤다. 담룡비천(潭龍飛天)의 맹초였다.
‘바로 부순다!’
용천월의 의지가 짙게 뿌려졌다.
바로 그 순간!
흑괴의 눈에서 섬뜩한 흑광이 폭발했다.
그와 동시에 수십 개의 흑살마장이 제각기 네 개의 방위로 흘러나가며 복제되었다. 순식간에 족히 몇백 개의 장력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위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수가 늘어난 만큼 압박이 강해졌다고 봐야 하리라.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흑살마장의 장력들이 또다시 네 방위로 똑같은 모습을 찍어냈다.
이제는 천 개의 장력이었다. 흑살마장의 절초 흑살천영(黑殺千影)이 단숨에 압살해버릴 기세로 심혼을 옥죄어왔다.
퍼퍼퍼퍼펑-!
검강으로 펼쳐지는 담룡비천의 초와 식들이 흑살마장의 그림자들을 마구 분쇄했다.
하지만 천 개의 장력은 끝이 없었다. 또한, 각각에 실린 경력도 만만치 않았다.
‘수가 늘어났는데, 공력도 늘어났다고?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용천월이 쉼 없이 검을 휘두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담룡비천에 이어 비룡출해(飛龍出海)의 초식이 펼쳐지며 검강을 마구 뿌렸다. 검강에 흑살마장의 장력들이 마구 바스러져 갔다.
하지만 아직도 흑살마장의 장력들 수백이 겹겹이 에워싼 채 짓쳐 들고 있었다.
일단 막아야 했다.
용천월이 이를 악다문 채 검을 잠시 거두어들이며 내력을 응축했다가, 일순간에 터트렸다.
그의 신형이 기세를 타고서 앞으로 던져졌고, 흑괴에게로 쏘아지는 검극에서는 폭발하는 공력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비룡승천검강의 절초 비룡승천파(飛龍昇天波)가 펼쳐지자, 흑살천영(黑殺千影)의 장력들이 검 끝에 줄줄이 관통되어 허물어졌다.
퍼퍼퍼펑-!
흑괴가 낭패한 기색으로 손발을 어지럽게 놀렸다. 막는 데 급급한지 공력을 퍼붓듯이 쏟아냈다.
용천월의 검초에 얽히니 몸은 물론이거니와, 양팔로 초식을 전개하기도 버거워 보였다.
둘은 막상막하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흑괴의 눈에 어린 흑광이 괴이한 빛을 뿜었다.
파츠츳!
흑괴의 손에 갑자기 뇌기(電氣)가 어렸다.
손끝에 검이 부딪칠 때마다 용천월에게 뇌격이 터졌다.
“컥-!”
단전이 진탕되어 울혈이 턱 끝까지 치밀었다. 급작스러운 한 수에 용천월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당했다.
하지만 검을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흑괴의 손속에 숨을 잃으리라.
“크크. 네까짓 놈이 이걸 버틴다고?”
흑괴가 비웃음을 흘리며 용천월을 밀쳐내더니, 뇌기가 섞인 장력을 마구 쏟아냈다.
흑살마장의 초식 중 내력의 소모가 가장 크지만, 가공할 위력을 뿜 어내어 감히 그 한계를 정할 수 없는 흑살뇌우(黑殺雷雨)의 절초였다.
콰콰콰콰콰-!
흑괴가 펼쳐낸 흑살마장의 끝 간 데 없는 공력이 사방을 떨쳐 울리며 마구 비산했다.
파슷!
돌벽이 단숨에 가루가 되어 바스러지고, 목재로 된 모든 것들이 산산이 쪼개졌다. 주변에 있던 남천 장의 무인이 이에 휩쓸려 단박에 육신이 수십 갈래로 터져나갔다.
“흐합-!”
용천월이 온몸의 공력을 짜내어 비룡승천검강의 절초를 이어나갔다.
‘이걸 막으려면 비룡파천(飛龍破天)밖에 없다! 어쩔 수 없어!’
비룡파천은 내력의 소모가 너무나 커서 지금 펼치면 온몸에 내공이 한 줌도 남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걸 펼쳐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력만은 확실한 까닭이었다.
괜히 비룡승천이 비룡승천검강의 절초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게 아니니까.
용천월의 검에서 검강줄기가 휙휙 쏘아져 나갔다.
콰쾅-! 쾅-!
푸른빛의 검강이 뇌기 어린 흑빛 장력을 깨부수고 쭉쭉 뻗쳤다.
‘진 무사님!’
뒤는 진우선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용천월은 난생처음으로 임무 중에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한편.
“이 미친-! 다들 뭐 하는 거냐고-!”
남천장의 삼 공자 호덕인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를 에워싼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죄다 부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서른 명가량은 광혈객이 외친 이후 즉각 싸우다가 피 흘리며 숨을 거둔 상태였다.
“뭐하는 거긴? 네놈을 붙잡으려는 거지. 크흐흐!”
“광혈객-!”
호덕인이 광혈객을 보며 악을 질렀다.
광혈객의 핏빛 장포를 보고 있으려니, 짜증이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간신히 억누르던 살심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총관! 정신 안 차려?”
“크르르-!”
하지만 총관은 호덕인의 말에 짐승의 울음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마라혈독에 중독되어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용 공자!”
뒤편에서 들려온 굉음에 고개를 돌리니, 용천월이 몰리고 있었다.
이래선 당장에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에 호덕인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결심을 다졌다.
“오냐! 어디 한 번 해보자!”
“크크. 진즉에 그리 나올 것이지!”
후우우웅-!
광혈객이 더욱 기세를 피워올렸다. 그의 눈에 혈광이 어리는 것과 동시에 막대한 기운이 사방으로 번져갔다.
“그르르-!”
“크흐흐-!”
마라혈독에 물든 남천장의 무사들이 짐승처럼 울며 살욕을 드러냈다. 그들이 제각기 공력을 짜내 어올리며 호덕인에게로 덮쳐들었다.
호덕인이 곧추세운 도를 눕혀서 부하들을 휩쓸어버리며 공력을 퍼붓기 시작했다. 분노에 찬 일격이 남천장의 절세무공인 멸광도법(滅光刀法)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광혈객은 웃을 뿐이었다.
“크흐흐! 가소로운 놈.”
공력은 깊으나 실력이 얕으니, 호덕인을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남천장의 무인들끼리 상잔하고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 순 없었다. 객잔 바깥에서 막대한 기의 파동이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그는 사전에 흑괴가 일러주었던 용천월이 아니었다. 무혈객으로서도 감히 함부로 감당치 못할 무인이었다.
아무래도 장내의 상황을 빨리 정리하는 게 나으리라.
“크흐흐-! 그 자를 이리 데려오너라.”
광혈객이 말하자, 무인들의 눈에 어린 혈광이 잠시 섬찟하게 빛을 발했다.
“뭐, 뭐야?”
호덕인의 도가 부하 둘을 베어가는 찰나.
남천장의 다른 부하들이 사지에 둘씩 들러붙고 몸통도 둘이서 포박하더니, 이내 사로잡았다.
마라혈독이 그들의 골수에까지 치밀어 광혈객의 음성에 반응하고 있었다.
“흐흐흐!”
광혈객이 눈앞까지 끌려온 호덕인의 팔뚝을 잡았다.
호덕인이 온몸을 비틀면서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말을 흘렸다.
“서, 설마?”
“크흐흐-!”
광혈객이 광기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호덕인은 사냥된 초식동물처럼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두 눈동자는 공포감에 절어 있었다. 그에 비친 광혈객의 모습은 포식자였다.
“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호덕인의 전신 핏줄이 불뚝 솟아올랐다.
그리고 눈동자가 대번에 흑광으로 물들었다. 마라혈독에 중독된 것이다.
그러더니 삽시간에 온몸이 흑광으로 물들며, 호덕인의 몸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공력이 끌려나가는 까닭이었다.
마라혈독에 시커멓게 죽어버린 팔이 마구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커거걱-!”
호덕인이 저도 모르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바로 그때였다.
퍽-! 퍽-!
둔탁한 소리가 갑자기 들리더니, 광혈객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얼굴로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팔뚝에서도 시꺼먼 독혈이 새어나왔다.
강력하게 쏘아진 빛살 한 줄기가 광혈객의 관자놀이와 팔뚝을 단박에 꿰뚫은 까닭이었다.
광혈객이 단숨에 절명해버렸다.
한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퍽-!
또 다른 빛살 한 줄기가 흑괴의 복부에 꽂혔다.
원래는 관통하고 나갈 위력이었으나, 흑괴는 섬뜩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즉사를 면한 상태였다.
이렇게 광혈객과 흑괴를 제압한 빛살 세 줄기는 바로 광영무의 한 초식인 일광삼점파의 검광들이었다.
“컥!”
흑괴가 눈을 부릅뜨며, 손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손 틈으로, 팔 밑으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이 정도라면 그저 숨만 붙어있을 뿐, 살아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너, 너는……!”
“오랜만이오.”
“네가 왜 여기에…….”
흑괴의 동공에 진우선이 비쳤다. 그래서인지 두려운 빛을 담아 마구 떨리고 있었다.
“작년에는 잘도 도망쳤지 않소? 그래서 이렇게 만난 모양이오.”
“이, 이럴 수는…….”
흑괴가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채 눈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쿵- 소리를 내며 신형이 뒤로 무너졌다. 더는 숨을 쉬지 못했다.
그 순간, 진우선은 곧장 용천월을 찾았다.
“용 무사님. 괜찮습니까?”
“후우- 후우- 괜찮습니다.”
이미 탈진해버린 용천월이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그 말과 함께 입가로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런! 괜찮지 않으시군요.”
진우선이 얼른 용천월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용천월이 고개를 마구 가로저으며 매우 꺼리는 어조로 말을 쏟아냈다.
“내력이 진탕된 것이니, 당분간 좀 쉬면 될 겁니다. 일단 저보다 남천장의 무인들을 먼저 살펴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반대편의 무리를 살폈다.
남천장의 무인 십수 명이 눈에서 혈광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마라혈독에 중독된 그들은 광혈객이 숨을 거둔 순간에 갈피를 잃었다.
살심이 치솟아 호덕인에게로 다가가다가 광혈객의 주검을 보고서 움찔거리며, 알 수 없는 모습과 고통에 찬 얼굴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컥-! 커헉-! 대협, 저 좀…… 저를…….”
호덕인이 진우선을 불렀다.
호덕인은 광혈객이 직접 마라혈기를 밀어 넣어 중독되었으나, 그가 숨을 거두자 본연의 심법으로 정신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알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진우선이 호덕인에게로 다가가 그를 광혈객의 품에서 빼냈다.
잠시 후, 진우선에 의해 마라혈독이 해소된 남천장의 무인들 열일곱 명이 슬픈 얼굴로 동료들의 시체를 치우기 시작했다.
한편.
괴요가 쓰러져있는 무혈객의 시체로 다가가 다급하게 손을 뻗고 있었다.
‘크윽! 아직 기운은 살아있어!’
괴요가 바닥에 누운 무혈객의 기해혈에 손을 얹고서 구결을 운용했다.
무혈객의 두터운 내공이 상당히 느껴졌다.
일부가 소실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숨을 거둔지 얼마 되지 않아 꽤 많은 양이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
어쨌든, 괴요의 손바닥으로 무혈객이 끌어모은 마라혈기가 마구 빨려들기 시작했다.
괴요의 눈에서도 핏빛 광채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이걸 염라마군(固强魔君)께로 가져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