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몰려드는 구유마라종 (1)
“괴요. 그만 자극하십시오.”
무혈객이 당혹해하는 괴요를 나무라면서 앞으로 나섰다.
“어제 방가장이 분주하다 들었는데, 정무맹에서 대단한 분이 오셨소. 심장이 저릿저릿할 정도군.”
“피부가 새하얀 건 마라혈기를 대성해서 그런 거요? 독기를 다 소화해낸 모양인데.”
진우선이 무혈객을 직시하며 말을 던졌다.
그에 무혈객이 탄성을 흘렸다.
“허-! 놀랍군. 노괴들은 흑사오 음마공이 천마교의 비전이라고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오.”
하지만 진우선은 마라혈기만 철혈객에게 들어 얼핏 알고 있을 뿐, 흑사오음마공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무혈객에게서 느껴지는 독기와 마기를 통해 상황들을 유추해낸 결과였다. 토기를 얻으며 혜안이 뜨여 저절로 사고가 열린 까닭이었다.
어쨌거나 무혈객이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혹시 그건 알고 있소? 혹사오음마공은 대성 이후에 단계도 없고 한계도 없다는 거.”
“그게 중요하오?”
“몰랐던 모양이군. 뭐, 상관없지. 아무튼, 나는 의문이 들었소. 요즘 힘이 넘쳐서 도무지 주체할 수 없었거든. 그러니 당신이 나를 한 번 평가해보시오. 물론 할 수 있다면!”
광오한 자신감이었다. 무혈객은 자신의 힘에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은 채, 진중한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마라혈독을 회수하는 게 그와 관련된 거요?”
“후후후!”
무혈객이 대답 대신 씨익 쪼개며 웃더니, 단박에 마라혈기를 전부 끌어올렸다. 그러자 폭발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퍼엉-!
쾌애애애-!
그와 동시에 치명적인 마라혈독이 뜨겁게 뿜어졌다.
무혈객의 공력이 사방과 동화되어 독기를 흘리니, 같은 공간 속에 있다면 숨구멍과 피부가 타들어가 녹아내릴 터였다.
하지만 진우선은 달랐다. 항마의 수기와 이화의 화기가 움직이니, 무혈객에게서 뿜어진 마라혈독 따위는 스며들 틈이 없었다.
“역시!”
무혈객이 작게 중얼거리더니, 단박에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두 팔에 무지막지한 공력이 쏠렸다.
혈마기와 독기가 뒤섞여 이루어진 흑사오음마공의 정수, 극성의 마라혈기였다. 그 기운은 섬뜩하리만치 검붉었다.
쐐액-!
무혈객이 진우선에게 짓쳐드는 와중에 섬전 같은 속도로 손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형체도, 광채도 보이지 않았다. 쏘아낸 공력은 강기(罡氣)의 응집력과 파괴력을 지녔으나,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는 어지간한 고수라도 단박에 즉사할 게 틀림없었다.
이는 무영혈독수(無影血毒手) 중 무영반월파(無影半月破)란 초식으로, 은밀하고 잽싸게 뿌리는 수강(手罡)이라 무혈객이 자신만만할 만했다.
스릇-!
하지만 진우선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검을 뽑았다.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진우선이 기운의 흐름에 집중하더니, 검을 그어 내렸다.
콰쾅-!
두 힘이 충돌하여 폭발하며, 공력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길거리 양옆의 담벼락이 무너져 내리고, 사방의 지형지물이 단박에 분쇄됐다.
“크흐흐!”
무혈객이 실성한 듯이 괴소를 짓더니, 시뻘건 눈으로 진우선을 노려보았다.
“종군. 좋아. 이 정도는 막아낼 줄 알았지. 어떻소?”
“마라혈인은 마라혈독을 회수하며 공력이 늘어나는 모양이군.”
“후후후. 독은 곧 내공이지. 나에게는.”
무혈객이 소름 끼치게 말을 뇌까리더니, 괴소를 마구 흘렸다.
“오늘 원 없이 싸워보겠어. 크흐흐-!”
무혈객의 두 눈에 혈광과 함께 광기도 번들거렸다. 이 순간이 더 없이 짜릿하고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는 진정 싸움에 미쳐 있었다.
그때, 괴요가 저 뒤에서 외쳤다.
“무혈객! 이 미친놈아! 네 멋대로 광분하지 말라고-!”
“신경 꺼!”
쐐액-!
무혈객이 괴요에게 종전에 펼쳤던 무영반월파를 날렸다.
형체 없는 수강의 일격이 괴요에게 적중했다.
“컥-!”
오 장 뒤쯤에 있던 괴요가 피를 쏟으며 뒤로 튕겨 나갔다. 기운을 끌어올려 막았으나, 다 감당해내지 못했다.
“미친놈이었군.”
“크흐흐흐-!”
진우선의 말에 무혈객이 섬뜩하게 웃었다. 미친 개에게서나 볼법한 광소(狂笑)였다.
“이제 우리 싸움에 집중해볼까?”
이 말로 확실해졌다.
무혈객은 마라혈기로 이성을 잃은 게 아니었다. 본래 지니고 있던 광기가 폭발해 이성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살생과 힘에 취하며 한 없이 터져버린 광기였다.
쏴쏴쏴-!
무혈객이 단박에 진우선의 품 안으로 뛰어들며, 검의 권역을 무시 하고서 무영혈독수의 절초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진우선이 더러는 검을 휘둘러, 더러는 권법과 장법으로 막아냈다.
무영이라 하지만, 다 안 보이는 게 아니었다.
무혈객은 팔에 강기를 두르고서 진우선의 코앞까지 다가와 손끝으로 요혈을 노리는 한편, 조금만 틈이 생기면 보이지 않게 암격을 가하고 있었다.
채챙-! 퍼퍼퍽!
순식간에 십여 초식의 공방이 오갔다.
무혈객의 공력이 한없이 깊었다. 그가 펼쳐내는 초식들은 흡사 공력을 사방팔방에 뿌린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강맹했다.
미친놈이 힘이 넘쳐난다고 함부로 펑펑 쓰는 모양새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지치는 기색이 없으니, 마라혈독을 회수하며 마라혈기를 늘려 넘치는 공력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공력의 심후함이 완전한 건 아니었다.
‘공력이 제각각이다!’
많은 무인이 마라혈독에 중독되어 내공을 뺏겼으나, 아직 흑사오음마공으로 온전히 하나로 녹여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콰콰쾅-!
진우선과 무혈객의 격전에 사방으로 충격파가 뿌려지고 굉음을 터져나갔다.
그때 진우선의 눈이 빛났다.
‘그들이 도착했다!’
대은객잔에 흑괴와 마라혈인이 도착한 게 느껴졌다. 저들은 이 거리로 오지 않고, 바로 객잔 내부로 들어간 듯했다.
“네 놈은 여기까지다.”
진우선이 싸늘하게 말하며 검에 광륜의 오행지기를 불어넣었다.
광륜검에 광륜의 기운이 어렸다.
슈아앗-!
일월광륜의 초식이 힘을 터트렸다.
광과 영이 륜을 이루며 회전하더니, 일 장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무혈객을 단박에 베었다.
목과 어깨가 베어져나갔다.
진우선이 중상을 입은 채 멀리 나가떨어진 괴요를 흘깃 쳐다보더니, 대은객잔으로 몸을 날렸다.
***
한편.
객잔 삼 층에 오른 용천월은 지체할 틈 없이 곧장 호덕인에게로 다가가 말을 건넸다.
“호 공자. 지금 당장 취기를 날려 버리고, 호심공을 일으키시오. 흑괴와 마라혈인이 오고 있소!”
“앗! 용 공자 아니십니까?”
호덕인이 바로 용천월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흑괴라면 구유마라종입니까?”
“그렇소. 그들이 쳐들어오고 있소.”
“우리에게 말입니까? 왜 우리죠?”
“듣지 못했소? 형의파와 남곤묵도의 일을?”
“금시초문입니다.”
용천월의 다급한 물음에 호덕인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함께 온 남천장의 총관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에 도착한 후 형의파가 단박에 멸문하고 남곤묵도를 비롯한 무인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쪽 팔이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합니다.”
“저게 구유마라종, 그러니까 흑괴와 마라혈인의 소행이란 말입니까?”
총관의 말을 바로 이해한 호덕인이 용천월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그렇소. 그러니 얼른 호심공을 일으키시오!”
호덕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하들에게 곧장 명령했다.
“뭣들 하느냐? 얼른 취기를 날려 버리고, 호심공을 끌어올려라! 적들이 오기 전에 얼른!”
“알겠습니다!”
남천장의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호덕인이 히죽 웃으며 용천월을 바라보았다.
“호 공자도 하시오.”
“그러지요.”
용천월의 말에 호덕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대응을 마쳤다.
눈에 총기가 어리자 시원한 이목구비가 확연히 드러났다.
호덕인은 쾌남아였다.
그가 절로 호감이 갈 수밖에 없는 미소를 지으며 물어왔다.
“용 공자. 그들이 당도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도 되오?”
“뭐요?”
“정무맹에 들어간 삼 년 전부터 위명을 따갑게 듣고 있소. 그래서 비천용문에 종종 들를 때면 아버지가 날 보시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더이다. 허허.”
호덕인이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용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용건만 말하시오.”
“알겠소. 용 공자, 우리 사이가 얕지 않은데 내가 부탁 하나만 하고 싶소. 용 소저를 보고 싶은데 너무 두문불출이신 것 같소. 매파를 보내봐도 방법이 없더이다. 용 공자가 어떻게 한 번 도와주신다면 이 은혜 잊지 않겠소.”
“……!”
용천월이 싸늘한 눈으로 호덕인을 바라보았다.
호덕인의 눈동자가 불쾌하게 번들거렸다. 음심이 눈빛에 떠올라 있었다.
그는 원래 호색한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런 순간에도 여색을 탐하는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낼 줄이야.
용천월이 분노에 찬 눈으로 호덕인을 바라보며 일갈했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안 보이시오? 구유마라종이 코앞에 닥쳐왔단 말이오!”
“왜 그리 화를 내시오? 아직 오지 않았잖소! 그리고 이건 나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요. 용 소저를 멀리서 한 번 봤을 뿐인데도, 내 마음이 요동치며 잊을 수 없더이다. 마음에 병이 났소, 병이!”
호덕인의 탐심 어린 눈빛에 어느새 간절함이 깃들었다. 실체를 모른다면 속아 넘어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딸랑-.
딸랑-.
청죽령이 울렸다.
“왔소!”
용천월이 청죽령을 잠재우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뒤편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크윽-!”
“크아악-!”
무인이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든 상관없이 상당수가 고통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더니 눈에서 시뻘건 광채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크흐흐!”
“크르르르!”
저마다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요?”
“이, 이런! 호심공의 수준이 얕았나 보오. 남천장의 무공이 이럴 리가 없는데!”
호덕인은 호심공으로서 마라혈독의 영향에 벗어나 있는데, 부하들은 멀쩡한 이가 반의반도 되지 않아 보였다.
“제길!”
용천월이 곧장 무시무시한 기운이 쏘아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콰앙-!
시커먼 기운이 대은객잔 삼 층 벽을 부쉈다.
삼 층의 뻥 뚫린 구멍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백발노인과 혈포의 청년이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들어섰다.
“다들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흑괴!”
“호오! 자네가 나를 바로 알아봤군.”
용천월이 검을 겨누며 눈을 부라렸다.
백발노인 흑괴가 용천월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놈은 남천장의 무인이 아니구나. 여긴 어쩐 일이지?”
“묻는다고 알려줄 것 같소?”
“뭐, 네 입으로 들을 필요도 없지. 며칠 전에 방가장에 정무맹의 용천월이 와 있다고 들었으니, 네놈일 텐데.”
흑괴가 섬찟한 미소를 짓더니, 곧장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장심에서 시커먼 기운이 단박에 쏟아져 왔다.
흑살마장의 강력한 초식인 흑령마격이었다.
“흐압-!”
용천월이 검에 공력을 담아 힘껏 펼쳤다.
퍼퍼펑-!
흑령마격의 세 줄기 공력이 터져 나갔다.
용천월은 단박에 머리가 산발이 되며 뒤로 쭉 밀려났다.
그때, 흑괴가 혈포청년에게 말을 건넸다.
“광혈객(狂血客). 마라혈독의 성은을 누리는 이들부터 얼른 상대해라. 저 밖에 있는 놈이 곧 올 거니까.”
“크크크! 당연하오. 무혈객 같은 미치광이 놈과 나를 비교하지 마시오.”
광혈객이라 불린 혈포청년은 무혈객과의 비교를 거부했다.
“그래 맞다. 네가 훨 낫지. 정파 놈들은 이런 별 볼 일 없는 것들 목숨을 보호하느라 승세를 붙잡지 못하니, 철저히 이용해야지.”
“그럴 셈이오. 크흐흐!”
그러더니 광혈객이 극성의 마라혈기를 뜨겁게 피워냈다.
“다들 혈투를 벌여라. 크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