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방가장으로 (2)
번화가에서 십 리 가량 떨어진 허허벌판에 허름한 장원이 한 채 있었다.
용천월이 진우선을 그리로 안내했다.
“방가장에서는 일단 숨진 무사를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시체에서도 독기가 흘러나올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조처하셨군요.”
두 사람이 마당에 놓인 관 앞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마라혈독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이미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상태가 이상합니다. 명 무사의 주검에는 전혀 손대지 않고 관에만 모셔두었으니, 진 무사님께서 한 번 보시지요.”
용천월이 관 뚜껑을 열어 숨진 무사의 시체를 진우선에게 보였다.
“헛-!”
진우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시체의 오른팔이 시커멓게 죽은 게 눈에 확 들어온 까닭이었다.
“두 눈은 지금 멀쩡해 보이지만, 숨을 거두고 한 시진 정도 후까지 핏빛 안광이 뿜어졌습니다. 그래서 마라혈독이라 유추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신체의 일부분이 검게 죽는 건 금시초문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건 마라혈독의 증세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저도 처음 봅니다.”
“역시 처음 있는 일이군요.”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진우선과 용천월의 음성이 어두워졌다.
진우선이 시체를 조금 더 살폈다.
“일단 시신에서 마라혈독이나 마기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럼 눈을 감겨드려도 되겠군요.”
용천월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 장원을 지키며 두 사람을 돕던 방 가장의 식솔에게 장례를 치르도록 말을 전했다.
장원을 나오면서 진우선이 용천월에게 물었다.
“저 분은 어디서 저렇게 되신 것입니까?”
“방가장에서도 정확한 건 알지 못하더군요. 상단의 일로 포목점들을 돌다가 중간에 행적이 끊겼다고만 합니다. 그리고 마을 어귀에서 좀전의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진우선의 안색이 더 굳어졌다. 이래서야 흉수의 흔적을 당장 뒤쫓을 방도가 없었다.
“일단은 방가장으로 가시지요. 방 총관님이 진 무사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후.
방가장에 들어선 진우선과 용천월이 총관의 업무실로 들어갔다.
기품 있어 보이는 방약빙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진 대협,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약빙이라고 해요.”
“만상각에서 온 진우선입니다.”
“진 대협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작년 봄쯤에 뵈었던 거 같아요. 그때 방가장에 한 번 오셨지 않나요?”
“맞습니다. 광명칠대가 총관님을 호위해 방가장으로 올 때, 호심당 제자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총관님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는데, 저를 기억하고 계셨군요.”
“상인은 작은 인연도 놓치는 법이 없지요. 반가워요.”
방약빙이 우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용천월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 총관님. 장원에 다녀온 결과, 진 무사님도 마라혈독의 증상은 맞다고 하셨지만, 주검에 남은 흔적은 처음 봤다고 하셨습니다.”
“후우-! 그랬군요. 진 대협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이는 아무래도 천마교의 새로운 행태라고 봐야겠습니다.”
“일단은 그게 타당할 것입니다.”
진우선의 대답에 굳은 얼굴의 방약빙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분께 긴히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반 시진 전에 전해진 소식이 하나 있는데, 엊저녁쯤에 정호산 유력 문파인 형의파가 몰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한데 제가 들어보니 그들의 시신이 명 무사와 흡사 하더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용천월의 눈을 서늘하게 빛내며 물었다.
“네. 오늘 아침에 상행을 다녀오다가 발견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같은 흉수일 가능성이 매우 크겠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도, 적어도 한통속이리라 보이구요.”
그 말에 진우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곳에도 가봐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사대를 꾸려 다녀올 참이었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방약빙이 진우선의 말에 뜻을 더했다.
그때, 업무실로 부총관 두겸이 들어오더니 방약빙에게 보고를 올렸다.
“총관님. 방일대가 준비를 마쳤습니다.”
***
해가 지기 직전, 정호산 형의파에 한 떼의 인마가 도착했다.
그들은 진우선과 용천월을 비롯한 방가장의 무인들이었다.
형의파의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시체가 썩으며 생긴 짙은 악취가 확 풍겨왔다. 넓은 연무장 곳곳에 선혈이 흘러 굳어버렸고, 몇몇은 내장이 헤집어져 있기도 했다.
참으로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일단 형의파를 간단하게라도 정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방약빙이 무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사이, 진우선과 용천월이 시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인들의 시체는 왼팔이든 오른팔이든 한쪽 팔이 다 검게 죽어 있었다.
‘마라혈독에 의해 혈도가 다 터지고, 독기가 뼈와 살을 다 죽여 버렸어!’
여러 구의 시체를 확인하니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진우선이 얼른 시체의 검은 팔뚝 하나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휘이이-
그러자 시꺼멓게 죽어버린 팔뚝 하나에서 매캐한 연기가 흘렀다. 시취보다 심할 정도로 지독한 냄새도 흘러나왔다.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진 대협!”
“부총관님. 이건 마라혈독에 의한 흔적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상극의 기운을 불어넣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말씀을 듣고 보니, 팔뚝의 색이 좀 돌아온 게 확연히 보입니다.”
두겸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고약한 냄새 때문에 다가왔다가, 진우선이 붙잡은 시체를 확인했다.
진우선은 이화가 가진 정화의 능력으로 시커먼 흔적을 태우고 있었다.
‘마라혈독의 기운은 사라졌으나, 흔적은 확인이 돼!’
사람이 숨을 거두면 생명에 깃드는 기운은 대자연으로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마라혈독이 휩쓸고 간 흔적은 이화로 확인되고 있었다.
그때, 진우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마라혈독의 흔적이 단전에서 이 팔로만 이어졌다고?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는 게 맞을 텐데, 한쪽 팔에만 집중돼 있었다.
진우선은 급작스럽게 든 의문에 근처의 시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라혈독이 깃든 정도가 조금씩 다를 뿐, 다 비슷해!’
진우선이 벌떡 일어나 형의파 무인들의 시신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두겸에게 물었다.
“부총관님. 혹시 이곳 장문인의 주검도 볼 수 있겠습니까?”
“평 대협의 시신은 저 위에서 발견했다더군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진우선이 두겸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잠시 후, 따로 지어진 전각 앞에서 처참하게 망가진 시체 한 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분이 바로 형의파의 장문인이셨던 평상찬 대협이십니다.”
“아! 온몸에 상흔이 심상치 않군요.”
“그렇습니다. 문파가 횡액을 당한 것이 분하셨는지,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두신 모양입니다. 어휴-!”
두겸은 깊은 안타까움이 들어 땅거죽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머리가 함몰되었고, 다리는 기괴하게 꺾였으며, 단전은 뻥 뚫린 채 죽음을 맞이한 모양이었다. 전신이 난도질된 까닭에 피를 철철 쏟았는지, 주변에 검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그나마 눈코입이 멀쩡하여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겨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진우선이 씁쓸한 어조로 대답하면서 시체를 자세히 살폈다.
평상찬의 시신 역시 왼팔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한데 특이점이 있었다.
‘왼팔이 오른팔보다 두 배 정도 두꺼워!’
그래서 신체의 모습이 기형적이었다.
진우선이 얼른 두겸에게 물었다.
“혹시 평 대협은 권법이나 장법으로도 유명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여기 검이 떨어져 있듯이, 평 대협은 검법만으로 형의파를 일으키셨습니다. 혹시 팔 때문에 그러신지요? 그렇다면 지금 모습이 이상합니다. 분명 제가 두 세 달 전에 뵈었을 때엔 양팔 모두 오른팔처럼 적당한 두께였습니다.”
“그렇군요.”
진우선이 의아한 마음으로 평상찬의 왼팔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리 부었을까?’
의문과 함께 내공을 흘려 넣은 순간.
화르륵-!
이화의 기운이 평상찬의 주검을 힘차게 훑으며 매캐한 연기를 잔뜩 피워냈다.
그리고 뻥 뚫린 복부에서 섬뜩하리만치 검은 화염으로 확 일어났다.
‘……!’
진우선이 눈을 부릅떴다.
‘다르다! 훨씬 굵어!’
팔뚝에서 단전까지 기운이 흘러 들어갔던 혈도가 훨씬 굵었다. 마라혈독의 흔적 역시 두텁고 짙었다.
“과연 형의파 장문인이셔서 그런지 연기가 훨씬 많이 나는군요. 이 정도 악취는 저로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두겸이 몇 걸음이나 물러나며 진우선에게 고통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장문인이시니 마라혈독에 더 크게 당하신 모양입니다. 문하제자들보다는 훨씬 강했을 테니까요.”
“허어-!”
두겸이 장탄식을 흘렸다.
“일단 저는 총관님을 뵈어야겠습니다.”
“총관님께선 입구 쪽에 계실 겁니다. 함께 가시지요.”
잠시 후.
진우선이 용천월과 방약빙, 두겸을 모아놓고, 생각한 바를 꺼내기 시작했다.
“시신들을 확인해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팔뚝만 검게 죽어 있는데, 마라혈독에 당한 흔적을 따라 혈도를 확인해보니 단전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럼 설마 마라혈독이 한쪽 팔로만 쏠려 나왔다는 말씀이신가요?”
진우선의 뜻을 재빠르게 알아챈 용천월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한데 마라혈독에 대해서 정확히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마라혈독은 원래 마라혈인이 마라혈기를 끌어올릴 때, 주변에 퍼지는 것입니다.”
진우선은 일전에 철혈객에게 직접 들은 바를 바탕으로, 자신이 추측한 바를 말했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단전에 마라혈독의 흔적이 가득했고, 장문인께서는 단전이 아예 뻥 뚫려 있었습니다. 혈도를 타고 단전까지 흘러 들어간 것입니다. 원래 마라혈인이 공력을 끌어올려야 중독이 되었는데, 이제 어쩌면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럼 마라혈인을 찾아야 하는 거군요!”
용천월이 눈을 빛내며 재빨리 결론을 찾았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약빙과 두겸에게 물었다.
“제가 일전에 만났던 자는 온모의 피부가 시커맸습니다. 여기 무인들의 팔처럼요. 혹시 그런 자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 정도라면 보고가 올라왔을 법도 한데, 들은 적이 없어요.”
“저도 없습니다.”
방약빙과 두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우선이 침중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그럼 일단 오가는 사람들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
광주 번화가의 원청루 오 층에는 일남일녀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뭇 남자의 정신을 쏙 빼놓을 법한 요염한 여인은 청순하면서도 관능적이라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반면에 맞은편에 앉은 사내는 새하얀 피부에 눈매가 뾰족하고 눈썹이 없어 인상이 매우 차가워 보였다.
“무혈객. 형의파의 일이 다 퍼졌어. 방가장에서 다녀왔나봐.”
“아무렴 어떻습니까? 나를 찾아낼 수도 없을 텐데요.”
무혈객이라 불린 사내가 술 한 잔을 마시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건 그래. 하지만 네가 곤란해질 수 있잖아.”
여인이 그리 말한 순간.
푸슥!
무혈객이 가볍게 쥐고 있던 술잔이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괴요. 아무리 상관인 당신이라도 그런 말은 불쾌하군요. 나를 무시하는 언사입니다.”
화륵-!
잔을 쥐었던 무혈객의 손끝에서 시커멓고 시뻘건 기운이 슬쩍 어렸다.
삽시간에 피어오른 독기에 괴요라 불린 여인은 숨이 막혀 목을 감싸쥐며 마구 손사래를 쳤다.
무혈객이 싸늘하게 말했다.
“이 힘은 곤란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