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방가장으로 (1)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가올 즈음이었다.
천도관에서 세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도관에 정무맹주 탁신과 내당주 냉군상, 만상각주 공야청이 굳은 얼굴로 모여 있었다.
“……화산파 장문인 매화검백(梅花劍伯) 장명이 일 각을 버티지 못하고 당했는데, 시신마저 없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 냉 당주는 이 일을 어떻게 보고 있나?”
“화산파에 대해선 크게 걱정할 게 없습니다. 당분간 혼란에 휩싸이겠지만, 유서가 깊으니 곧 수습되겠지요. 대장로이신 자하선옹(紫霞仙翁)께서 이끄실 거라 생각합니다.”
“자하선옹께서? 거의 은거하셨지 않은가? 그럼 한 이십 년만일 테고, 구순에 가까우실 텐데.”
“일선에서 손을 떼셨다고만 알려졌을 뿐, 공식적으로 은거하신 적은 없습니다.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들은 바 없고 대장로직이 누군가에게 이어진 것도 아니니 살아계실 겁니다.”
“그렇군.”
탁신이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한 냉군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시신이 없다는 말은 왜 한 건가?”
“그건 공 각주에게 들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의문을 꺼낸 건 공 각주였습니다.”
탁신이 공야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맹주님. 이 일을 전해 듣고 상황을 정리해보던 중, 섬뜩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 이삼 년 동안 종종 주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여기에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허어-! 자세히 말해보게.”
탁신이 심각한 눈빛으로 공야청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정확히 이 년 전에 본 맹이 무당파와 형산파, 철혈보에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무당파에서는 청송자께서 백여 명의 도사들을 이끌고 맹으로 향하다 천마교의 월령마화종에 변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수습하러 가니 그분의 시신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 그 일은 알고 있네. 하지만 청송자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었다고?”
“그렇습니다. 당시 천자산 자락에서 사태가 벌어졌고,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이능운 무원주가 세 시진만에 도착했었습니다. 한데 청송자의 주검만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더군요.”
“누군가가 시신을 가져갔다는 말이로군.”
“그렇게 추정됩니다. 그 일이 생각난 김에 조사해보니, 근 삼 년 안에 숨을 거두었던 정사마의 고수 중 시신이 없어진 게 열 명가량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감쪽같이 시신을 잃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공야청의 말에 탁신은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일들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왜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
“이건 공 각주가 아니라면 여전히 아무도 몰랐을 일입니다. 정사마의 고수는 천하에 흩어져 있고, 근 삼 년의 일들을 꿰고 있어야 하는데, 어찌 연관시킬 수 있겠습니까?”
냉군상이 차분하게 말하며 탁신을 진정시켰다.
“그것도 그렇군. 만학수사가 아니면 천하를 이리 꿰고 있기 어렵겠지. 그럼 도대체 누구의 시신이 사라진 것인가?”
“정도에서는 무당파의 청송자, 소림사의 방연대사, 아미파의 홍연사태가 있으며, 사도에서는 만악서생, 사심귀도, 사사노괴가 알려졌고, 마도에서는 벽안귀마, 취안마승, 독주요마입니다.”
“그리고 화산파의 매화검백이로군. 무위나 명망으로 보면 매화검백이 가장 윗줄이겠어.”
이름깨나 날린 무인들이라 탁신도 최소한 한두 번씩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화산파의 매화검백이 가장 이름값이 높았다.
“이들뿐인 건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그나마 이름이 알려졌기에 시신이 없어졌다는 게 전해졌겠지요. 이런 경우가 얼마나 더 있을지는 예단키 어렵습니다.”
공야청이 굳은 얼굴로 말을 올렸다.
탁신이 턱을 쓰다듬으며 숙고하면서 냉군상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일단은 사파의 술법이나 마도의 대법이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더 확인해야 할 일입니다.”
“그 수밖에 없겠군. 알겠네. 이 일은 특별히 두 사람이 협의하며 살펴보게.”
“알겠습니다.”
하나의 안건이 이렇게 끝났다.
공야청이 말을 이었다.
“맹주님. 사도련과 천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심상치 않았지. 이번엔 또 어떻단 말인가?”
“사도련이 산서와 하북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대사파가 꽤나 힘을 발휘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참으로 공교롭군. 산서와 하북이면 우리가 신경을 쓰기 힘든데, 때마침 화산파가 혼란스러워졌어.”
“그렇습니다. 물론 선후를 따지자면야 사도련의 약동이 먼저이긴 합니다만, 마냥 연관이 없다고만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도련주는 어떤가?”
“그에게서는 특별한 낌새가 보이진 않습니다. 개봉에서만 모습을 종종 보일 뿐, 밖으로 나서진 않는 모습입니다. 한데 괴이한 소문이 있습니다. 사도련주가 사령으로써 천하를 지켜본다며, 사파 흑도의 무리가 그를 사령신군(邪靈神君)이라 칭한다더군요.”
“사령신군이라고? 흐음-! 마냥 흘려들을 수만은 없는 말이군.”
탁신이 굳은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천마교는 어떤가?”
“십만대산을 내려온 귀문탈백종이 귀주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인세의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합니다. 한데…… 종주인 잔백마군의 한쪽 눈이 귀안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귀안을 그럼 온종일 펼쳤다는 말인가?”
“그것보다는 귀안을 심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 무사가 그의 왼쪽 눈을 터트렸는데, 한쪽 눈만이라면 그걸 대체했지 않겠습니까?”
“허-! 무공을 펼치는 게 아니라, 능력을 몸에 심었다니…….”
탁신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말문을 잃었다.
악명 높은 무공 귀안마강은 귀기를 다스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시선이 닿는 곳을 강기로써 베어 버리는 극악한 능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 능력의 귀안을 아예 심었다니!
“백 년 전의 대마인이었던 잔백구유가 항시 귀안을 흘렸다던데, 딱 그 모습이겠군.”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럼 진천검문은?”
“들으신 게 바로 진천검문 쪽에서 전해온 소식이었습니다. 일단 명맥은 유지한 모양이나, 세가 크게 약해졌을 겁니다. 일단 맹에서 지원이 나갔으며, 그들이 귀주를 지나간 탓에 수습을 할 수는 있을 거라 합니다.”
“사천으로 가는 모양이군.”
탁신이 침중한 음성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맹주가 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으나, 날마다 근심과 한숨만 느는 듯했다. 천하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방가장에서도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광동으로 구유마라종의 마교도들이 자꾸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이미 광명각과 진양각의 무인들 오륙 십 명이 흑괴와 괴요에게 당했습니다.”
“흑괴는 구유마라종의 큰 뜻을 따라 움직인다 해도, 괴요는 제 맘대로 천하를 누비는 요녀인데 희한한 일이군.”
“그 점 때문에 아무래도 혈독쌍괴가 직접 움직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공야청의 말에 탁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냉군상을 바라보았다.
“냉 당주. 그럼 방가장에는 누가 가 있는가?”
“용 무사가 보름 전부터 조사하고 있었는데, 이 일이 심상치 않아 보여 공 각주에게 진 무사의 협조를 부탁했습니다.”
만상각주 공야청은 대외의 적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상대하는 일을 주로 맡고 있었다.
내당주 냉군상은 여러 정도 문파들과의 관계를 조율하니, 이럴 때면 둘은 서로 돕는 관계였다.
“용천월이 가 있었군. 한데 진우선마저 가야 하는가?”
“혈독쌍괴까지 직접 움직이고 있다면 용 무사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혈독쌍괴!”
탁신의 음성에 어린 근심이 또 한 번 깊어졌다.
용천월은 내당 무도원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는데, 관무평이 몸을 회복하고 있는 지금으로선 내당 소속의 최고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군. 마라혈독까지 염두에 두어야할 테니.”
“그렇습니다. 다행히 공 각주가 흔쾌히 승낙해주었습니다.”
탁신이 냉군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냉군상과 공야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맙네. 두 사람이 이리 애를 쓰는데도 천하의 일은 정말 쉽지 않군.”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냉군상이 탁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탁신이 호흡을 고르며 물었다.
“할 말이 또 있었군. 무언가?”
“이번 겨울에 있을 전체 인사개편 때, 진양각의 소무강과 정연서를 데려와야겠습니다.”
“소무강은 십양의 대주라 들은 거 같은데, 정연서는 누군가?”
“그녀는 호심당을 수석으로 마친 십양의 대원으로 금정대협의 손녀입니다.”
“아! 들어본 것 같군. 정연서는 그렇게 하게.”
정연서는 대원이니 내당주가 처리할 수 있었다.
탁신이 소무강에 대해 물었다.
“근데 소무강은 왜 데려오려는 것인가?”
“무도원주로 적합해 보입니다.”
“그럼 관 원주는?”
“그는 무위가 뛰어나나 시기심이 많아 자리에 오래 앉혀둘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간에 쌓아 온 실적이 있어 무도원주를 맡겼으나, 때마침 좋은 인재가 나타난 거지요.”
“저번에 강소삼정의 일에서 좋게 본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소무강은 사사천의 십대빈객 혈풍곤 숙일위보다 반 수 정도 뒤졌으나, 이는 경험의 차이로 보였습니다.”
혈풍곤 숙일위는 엄청난 고수로, 그 실력이 정무맹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백무원주 이능운에 비할 만했다.
소무강이 그보다 반 수 뒤진다고 하니, 이 정도면 진양각의 대주로서는 능력이 차고 넘친다고 봐야 했다.
“그 정도면 무도원주로는 더할 나위가 없겠군. 능히 백무원주와 비할 만하겠어.”
“조만간 그렇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맹주님께서 힘을 써 주십시오.”
“알겠네. 자세한 건 자네가 다 알아봤을 테니, 내가 힘을 써주겠네.”
“감사합니다.”
진양각주가 그만한 고수를 쉽게 놔줄 리 없기에, 냉군상은 탁신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탁신이 공야청에게 물었다.
“만상각에서는 어떻게 인원을 보충할 생각인가? 초무량이 나간 이후 공백이 있을 텐데.”
“저희는 올해 호심당을 마치는 만총과 우문혁을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진 무사와 친분이 깊고, 신분 역시 확실합니다. 냉 당주와도 이미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알겠네. 그럼 그렇게 하게. 이제 얼추 끝난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돌아가 봐도 좋네.”
탁신이 눈을 감으며 쉬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몹시 피로해 보였다.
하지만 곧장 눈을 다시 떠서 냉군상을 불렀다.
“냉 당주, 잠시만.”
“하문하십시오.”
“운비는 어떤가? 가정을 이룬 이후로, 도통 만날 수가 없군. 내당에는 잘 적응하는 거 같던데.”
탁신의 말에 냉군상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맹주님께서 왜 그걸 안 물어보시나 했습니다. 탁 무사는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진 무사의 옆집에 산다고 하는데, 자주 비무를 하는지 실력도 일취월장하고 있더군요.”
“그런가? 다행이군.”
탁신은 몹시 피곤해 보였으나, 그의 입가에는 한 줄기 흐뭇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
광동성 광주에 맑은 인상의 한 무인이 도착했다.
그는 곧바로 마중 나온 무인을 만났다.
“반갑습니다. 용천월입니다.”
“진우선입니다. 반갑습니다.”
용천월은 피부가 유달리 하얗고 보드라워 보였으며, 콧날이 꽤 오뚝한 미남이었다.
그에 반해 목소리가 심히 굵으니, 앳돼 보여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용천월이 진우선을 방가장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진 무사님. 혹시 이곳에 대해 얼마나 듣고 오셨습니까?”
“광동에 흑괴와 괴요가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구유마라종의 마교도들이 많이 넘어왔다더군요. 혈독쌍괴와 마라혈독이 나타날 상황도 염두에 두라더군요.”
“맞습니다.”
용천월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마라혈독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어제 방가장의 무사가 독에 노출되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주변으로 피해는 없었습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알려진 것과 달랐습니다.”
진우선이 눈을 부릅떴다.
“달랐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