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삼청태산 (5)
고오오오-!
장내에 흐르는 영기의 바람이 좌중의 심령을 뒤흔들었다.
그 영기가 온몸으로 확실히 느껴지니, 희락의 전율이 멈출 새가 없었다.
골짜기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정적이 흘렀다.
진우선이 광영창파 한 초식을 마쳤음에도, 짙고 깊은 영기가 그를 떠나지 않는 까닭이었다.
“허어-!”
태허진인이 소리 없는 탄성을 흘렸다.
‘신인에게 도가 함께하는구나!’
그만이 아니었다. 장내에 모인 모두가 그걸 보았으며, 느끼고 있었다.
도란 본디 고요하여 소리도 없고, 몽롱하여 모양도 없으나, 불변하여 삼라만상을 두루 멈추게 했다.
태허진인은 진우선이 이곳에 모인 도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뜻이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도를 이토록 직접 느끼게 하니, 덕으로써 태정과 태금을 품는구나.’
태허진인은 진우선의 넓은 도량에도 감탄했다.
현옥검과 백관우사가 어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보다 훌륭한 결과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나갔다.
휘오오오-!
진우선에게로 집중되는 영기의 흐름이 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헛-!’
태허진인이 속으로 놀람을 삼켰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진우선이 영기에 휩싸인 채 허공으로 조금씩 떠오르는 까닭이었다.
영기가 진우선의 몸을 마구 드나들었다. 천지사방의 기운이 진우선과 통하고 있었다.
태허진인이 얼른 전음입밀의 기예로 현옥검과 백관우사에게 생각을 전했다.
[신인께서 무아경에 드셨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도를 느끼거라. 천재일우의 기회를 주셨구나!]
[이미 옥청의 제자들은 다 그러고 있소.]
[사형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조차 모를 만큼 수련이 얕지는 않다오!]
현옥검과 백관우사는 어리석지 않았다.
도의 이치가 그윽한 이 순간을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진우선이 보여준 한 초식이 자신들의 공격을 산산이 부숴버렸던 일은 이미 신경조차 안 쓰고 있었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문하의 도인들도 모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사방에 흐르는 짙은 영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태산의 도인들이 더 모여들었다. 골짜기에 올라오는 이들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태산에 일대 기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 이와 같은 상황의 근원인 진우선은 의식을 고요하게 하며 정기신을 관조하는 중이었다.
명부에서 흐르던 영기가 진우선의 몸으로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명토(冥王)의 기운이다.’
그 힘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며 온몸을 흠뻑 적셨다. 천지간의 기운 가운데서 그윽하기로는 제일이었다.
‘토기가 맞이하는구나.’
신령스러운 명토의 기운은 토에 속하여, 오행진기의 토기가 직접 소통하고 있었다.
진우선은 이런 상황이 어색하지 않았다. 만년괴암의 금기를 품을 때와 비슷했다.
그렇기에 더욱 집중하여 진체를 느끼고자 애썼다.
검노야가 진우선을 도왔다.
[명토의 기운은 무릇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며,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으며,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으니, 이는 명부가 천지만물이 귀원하는 곳이기 때문이구나.]
진우선이 심상의 세계로 더욱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오행진기의 광륜이 환히 빛나며 휘휘 돌고 있었다. 사방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광륜의 힘을 주변에 투영하는 실체였다.
토기는 그런 오행진기의 한 축이며, 또한 모든 곳에 존재했다.
‘토는 중(中)이니 천하의 바탕이며 만물을 포용한다. 화려하지 않은 것은 편안하기 때문일 뿐, 이야말로 근간이었구나.’
오행진기의 토기에 명토의 영기가 깃들었다. 이는 태산영기의 정수로서 토기에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이름은 명토가 맞겠구나!’
진우선은 고민할 것 없이 그 이름을 불렀다.
명토의 영기가 토기 속에 잔뜩 서려 드니, 광륜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광륜이 다채롭게 빛난다. 각각마다 성(性)을 보이니, 광륜이 약동하는구나!’
수화목토금 오행의 기운이 저마다의 광채를 마구 뿜어냈다.
수기는 항마로, 화기는 이화로, 목기는 벽사로, 토기는 명토로, 금기는 철벽으로.
광륜의 오행진기는 이제 광휘를 내뿜으며 회오리치고 있었다.
[허허허. 기운이 현묘하고 또 현묘하니, 삼라만상의 문이 열리겠구나.]
검노야가 진우선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도가 지극히 깊어져 삼라만상의 문이 열리니, 이는 곧 참다운 깨우침으로 나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열흘이 흘렀다.
골짜기에 어린 영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영기의 운무가 걷히고 나니, 태청동도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
태산의 한 봉우리 위에 절경을 내려다보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그곳에서 천하를 내려다보는 한 청년이 있었다.
바로 진우선이었다.
‘스승님. 토기에 명토의 능력이 더해졌고, 광륜에 광휘가 어렸습니다.’
[그렇더구나. 축하한다. 우선아.]
‘감사합니다. 스승님께서 이끌어 주신 덕분입니다.’
[허허.]
검노야가 흐뭇하게 웃었다.
진우선이 잠시 검노야를 바라보며 덩달아 미소 짓다가, 대화를 이었다.
‘토기가 오행진기를 조화롭게 지탱하며 륜으로 이끌었듯이, 명토가 다섯 능력의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맑아졌습니다.’
[마음이 맑아진 것은 눈이 뜨였기 때문이구나. 혜안(慧眼)이지.]
‘이치를 밝게 보는 것입니까?’
[맞다. 한데 혜안은 천하의 이치만이 아니라, 하늘의 기운도 종종 엿볼 수 있지.]
검노야의 말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 느껴지던 명토의 능력에 이름이 더해지자 확실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위태극과 담진천을 제대로 보라고 선물을 준 것 같습니다.’
[그들이 선천의 도를 속였다 하니, 그걸 꿰뚫어 볼 힘을 태산영기를 통해 전했구나. 태산부군의 뜻이 허투루 이어졌을 리 없을 테니.]
‘섭무악과 담선우였지요.’
진우선이 둘의 이름을 뇌리에 되새겼다.
검노야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근심이 잔뜩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선아. 역천의 근원인 그 둘도 문제이지만, 혼돈이 태동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도 듣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역천과 혼돈으로 혼천이 되었건만, 혼돈은 그들 둘과는 양상이 다른 모양입니다. 선천의 도를 속인 것이 없으니, 혼돈이 천하에 홀로 일어섰다는 뜻이겠지요.’
진우선은 현명궁에서 들은 바를 토대로 정확히 유추하고 있었다.
[허어-! 어떤 것이라도 스스로 일어난 것이 가장 강한 법이거늘, 천하는 어찌 흘러가려는 것인가?]
검노야가 탄식을 흘렸다.
진우선도 침음을 삼켰다.
그때였다.
백발의 노도사 태허진인이 진우선에게로 다가왔다.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아 보인다 했는데, 신인은 어떻소?”
“천하가 참으로 넓어 보입니다.”
“허어-! 근심이 많으신 모양이오. 태산이 편안하면 사해가 평안하다는데, 정작 신인께서는 태산에 안녕을 주시고서 시름을 짊어지셨구려!”
태허진인은 삼청태산에 현묘한 도를 전한 진우선의 수심에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진인께서 많은 이들을 통솔해주신 덕분에 태산에서 아무런 변고도 없었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신인께서는 겸양을 거두시오. 감사는 나와 태산의 도인들이 신인께 드리는 게 맞소.”
“저로 인해 태청동도 사라졌지 않습니까?”
“태청동은 신령스러운 곳이라, 태산의 영기가 자욱하게 모이는 곳에 다시 열릴 것이니 심려치 마시오.”
“아! 그렇군요. 그건 정말 다행입니다.”
“허허. 그건 작은 일이오. 큰 일은 우리가 신인께서 뿜어내는 칠채서광을 보았다는 것이오.”
태허진인이 몹시 감탄한 채로 말을 이었다.
“신인께서도 아시겠지만, 칠채서광은 깨달음이 깊어 등봉조극마저 넘었을 때 발한다오. 이는 백 년이 흘러도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니, 어찌 기사가 아닐 수 있겠소?”
도가 깊어 내공마저 극에 달하면 등봉조극에 오르는 것이나, 이를 넘어서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진우선은 광륜을 이룸으로써 등봉조극을 넘어서서 나아가고 있었다.
빛을 발하는 건 광륜의 오행진기가 휘휘 돌았기 때문인데, 칠채서광은 광륜이 광휘를 내뿜으며 회오리치는 데서 비롯된 일이었다.
“신인에게서 뿜어지는 신위를 직접 보고, 옆에서 도의 기운을 만끽한 것만으로도 다들 수양이 깊어졌을 거요. 후에 크게 깨닫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고 말이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진우선은 그저 명토의 기운을 받아들인 것뿐인데, 다른 이들이 도를 느낀 이 상황이 참으로 신묘하다고 느꼈다.
“허허. 과연 신인다우시구려.”
태허진인이 깊이 탄복하더니, 심유해진 눈으로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신인을 보며 그간 헤아리지 못했던 천기를 이해하게 되었소. 극사와 극마가 미쳐 날뛰고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사마가 극경을 넘어선 거였소.”
“사(邪)라면 사도련주일 것입니다. 그가 넘어섰더군요.”
“역시! 신인께서 직접 그를 겪으셨던 모양이구려.”
태허진인이 진우선을 바라보며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는 아마도 절대천마이리라 생각되오. 대략 십오에서 이십 년 전쯤부터 천마교의 소문이 종종 들려왔는데, 그가 중심을 잡으며 천마교가 다시 기지개를 켰소. 그 역시 극을 넘은 모양이오.”
“저 역시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진우선이 깊이 공감하더니,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혼돈의 기운도 보셨습니까?”
“역시 신인께서도 천기를 보셨던 모양이구려. 하지만 나 역시 혼돈의 기운이 태동한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더이다. 용연(龍淵)에서 태어나 흑암을 몰고 다니며 하늘을 어지럽히는데, 쉬이 종잡을 수가 없었소.”
“아! 그러셨군요.”
진우선의 한숨에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신인의 걱정을 덜어드리지 못해 미안하오.”
“아닙니다. 계속 노력하며 살피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되겠지요.”
“맞소. 아직 다 헤아리지 못하니 애끓을 것이나, 기다리다 보면 밝히 보여줄 것이오.”
태허진인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 삼아 위로했다.
진우선이 정자에서 태산을 한 번 더 휘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만 내려가야겠습니다. 명건도장께서 정오에 현옥검과 백관우사 두 분이 올 거라 하시더군요.”
진우선과 태허진인이 태청도문으로 내려왔다.
산중턱에 위치하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태청도문의 전각들이 두 사람을 맞았다.
“사조님과 사숙님이 오셨어요.”
이제 막 여섯 살 된 임화월이 태허진인과 진우선을 발견하고는 제 부모인 명건도장과 명연선자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진우선은 독고월의 서찰과 함께 온 사람이라 사숙이라 불리고 있었다.
명건도장이 웃으며 다가왔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옥청과 상청에서는 아마 일 각 정도 후면 도착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임화월이 진우선에게로 다가오며 물었다.
“사숙님이 보여주신 영기를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워요. 단전에 자리를 잘 못 잡는 거 같아요.”
“태산의 영기는 신묘하니, 시간을 두고서 잘 붙들어두면 될 거야.”
“그럼 언제 돼요? 늦지 않아요? 저는 빨리 허공에 떠오르고 싶어요!”
그때 진우선이 받아들인 태산영기의 정수는 명토의 기운이었으나, 다른 이들에게 전해진 건 그저 짙은 태산영기일 뿐이었다.
태산영기가 진우선으로 인해 태청동 앞에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걸 명건과 명연, 그리고 임화월까지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떠올라서 뭐하게?”
“그럼 아버지를 이길 수 있으니까요! 꼭 이기고 말 거예요. 엊그제도 졌어요.”
임화월의 말에 좌중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시간이 잠시 흘렀다.
현옥검과 백관우사가 태청도문에 들어섰다.
그들 두 사람은 진우선에게로 곧장 다가왔다.
“신인. 이번에 저희가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두 분께서 성취가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다행이군요.”
“신인 덕분입니다. 극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약소하나마 성의를 표하고자 잠시 걸음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더니 백관우사가 품에서 조심스럽게 목함 하나를 꺼냈다.
“상청영단(上淸靈丹) 세 알입니다. 신인께 받은 걸 다 갚기엔 다소 아쉬우나, 근방에선 꽤 이름이 높으니 긴히 사용해주십시오.”
“아쉽다니요. 너무나 귀해 보입니다.”
목함을 슬쩍 열어본 진우선이 그윽한 향기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백관우사가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신인께서 쓰셔야 정말 귀한 곳에 쓰일 겁니다.”
“일기가 삼청이 되고, 수많은 도인과 양생술로 가지를 뻗었는데, 신인께서 이 모두에게 큰 도를 더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모두의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두 사람의 거듭된 말에 단약을 챙겼다.
“그럼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다들 평안히 계십시오.”
진우선이 떠났다.
그 밤에 태허진인은 천기가 한층 맑게 보였다.
“허어-! 이럴 수가!”
하지만 보이는 건 경악스러운 기운의 흐름이었다.
“혼돈이 몰고 온 흑암이 마구 번져나가는구나. 이래서는 구주만이 아니라, 팔황(八荒)마저 휩쓸겠어! 천하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 것인가!”
구주는 중원이요, 팔황은 새외이니, 이는 곧 천하였다.
천기는 천하가 겁란에 휩싸일 거라 나타내고 있었다.
태허진인은 얼른 진우선의 기운을 찾았다.
그 빛은 한 줄기 영롱함을 발하고 있었다.
“흑암에 비하면 저 별은 참으로 외로이 빛을 뿜고 있구나. 이래서야 너무나 작을 뿐인데…….”
태허진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음성에서 짙은 안타까움이 묻어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