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삼청태산 (3)
천지사방에 영기의 운해(雲海)가 흐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섬처럼 솟아 있는 거대한 산등성이는 태산의 옛 모습처럼 보였다.
정상에는 기암괴석을 평평히 다진 넓은 광장이 있었다. 광장의 끝에 석조전각 현명궁(顯冥宮)이 홀로 솟은 봉우리를 등받이 삼아 위엄을 흘리고 있었다.
진우선과 검노야가 그 앞에 서 있었다.
-허허!
인세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천상의 기품을 지닌 태산부군이 웃음을 흘렸다.
-선인은 왜 거기 계시오?
태산부군의 말에 사방의 영기가 검노야에게로 쏠렸다.
[무슨 말씀이시오?]
-왜 선계에 오르시지 않고, 현계에 머무시냐는 말이었소.
[허허!]
검노야가 입가에 희미한 호선을 그리며, 태산부군처럼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태상부군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귀 공께선 상제의 천손이시니,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리라 생각하오. 그렇다면 왜 아직이냐고 물으시는 것이오?]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하오. 하지만 나 역시 하늘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오. 맡겨진 일에 충실할 뿐이지.
[그렇구려. 천기를 보셨을 테니 혼천(混天)인 걸 보셨을 것이오. 역천(逆天)하여 사마가 창궐했고, 혼돈마저 태동했지 않소? 하지만 하늘은 공평하시니, 내게도 천명이 있더이다.]
-그랬구려. 이제야 알겠소. 내가 명부(冥府)를 주관하기에 인간의 천명은 알지만, 선인의 천명까진 다 알지 못해 궁금했던 것이오.
[이해하오.]
그에 태산부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우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우선이 검노야의 옆에 서서 태산부군을 직시했다.
그에게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영기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고고하여, 누구라도 절로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신인은 지금의 상황이 의문일 거요. 나는 태산부군이며, 긴히 천하를 살필 일이 있어 신인을 청했다오. 반갑소.
“진우선입니다. 태산부군을 이렇게 실제로 뭘 줄을 몰랐습니다.”
-그럴 거요. 원래 태산은 죽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 죽은 후에야 나를 보는 게 순리라오. 태청동으로 인연을 이끈 게 그래서였소.
“아! 역시 그랬군요!”
진우선이 태산부군의 말뜻을 이해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부군은 명부의 군주로, 죽은 자를 다스리는 존재인 까닭이었다.
지금처럼 산 자가 오는 건 경계를 무너뜨리는 심대한 일이었다.
-신인은 자신의 천명을 아시오?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천하의 악인들을 쓰러뜨리며 대의를 세우는 일이지 않습니까?”
-맞소. 그래서 신인에게 선인과의 연이 이어졌다오.
태산부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도 신인께 연이 이어졌소.
“그렇습니까?”
-그렇소. 신인이 가야 할 길이 내가 해야 할 일과 겹치기 때문이오.
“그래서 이리로 인연을 이끄신 거군요.”
태산부군은 진우선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마디 덧붙였다.
-맞소. 그리고 이는 선인에게 남겨진 업이기도 하오.
“아-!”
[허허!]
진우선이 장탄식을 흘렸다. 검노야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태산부군이 허공에 손을 들어 움켜쥐자, 난데없이 두 개의 명패가 나타났다.
그 명패들을 곧장 두 사람에게로 던졌다.
그러자 시꺼먼 명패가 진우선과 검노야의 앞에서 멈추더니, 허공에서 일어서며 붉게 적힌 이름을 보여주었다.
위태극
담진천
[이들은 설마?]
검노야가 경악하여 두 눈을 부릅뜨며 명패를 보았다.
-맞소. 선인께서 쓰러뜨리셨던 사황과 천마로, 백 년 전의 두 사람이오.
[그들의 명패를 보여주신 건 무슨 뜻이오?]
-예상하시는 대로요. 이들 두 사람은 명부에 오지 않았소.
“헛-!”
진우선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린 입을 닫지 못했다. 아니, 사고가 아예 멈춰버린 듯했다.
하지만 태산부군과 검노야의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이들 두 사람은 후천의 술로써 선천의 도를 속였소. 이만한 이치를 깨닫고 행한 것은 능히 대단한 일이나, 선천의 도를 속였으니 벌하지 않을 수 없소.
[아! 그래서 역천이었구려.]
검노야가 태산부군의 말을 들으며 천기를 크게 깨달았다.
여태껏 알았던 바는 이 진실에 비하면 작은 조각에 불과했다.
-그래서 두 분께 부탁을 드리오. 이들 둘을 멸해주시오.
[나는 알겠소. 우선이는…….]
“저도 그리하겠습니다.”
진우선이 단호한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속에 뜨거운 기운이 솟는 듯했다.
태산부군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둘을 어떻게 찾을 수 있소?]
-위태극은 섭무악이 되었고, 담진천은 담선우가 되었소.
“사도련주 섭무악!”
진우선이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하지만 태산부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침착하게 대답했다.
-맞소. 위태극은 그요.
[그럼 담선우는 누구요?]
-그대들이 말하는 천마교주요.
[후손인 모양이군.]
-맞소.
검노야가 냉정한 마음으로 태산부군에게 물으며, 필요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모았다.
-그들이 사람으로 태어나 극경에 오르며 천지간의 이치를 깨달은 건 상관없으나, 선천의 도를 어기고 탈경(脫境)에 오르려 하니 천기가 매우 어지러워졌다오. 아마 현계도 매우 복잡해지고 있을 거요.
태산부군도 최대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탈경은 극경 이후의 경지로, 공력이 극을 넘어 천지만물과 소통하여 신(身)을 벗는 경지였다. 신선이 그러했고, 사령과 탈마, 묘각과 생사경 등이 다 그러한 경지였다.
의문이 생긴 진우선이 태산부군에게 물었다.
“섭무악은 앙천극사대법을 통해 사령으로의 길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그럼 설마 그때도 위태극이었습니까?”
-당연하오. 그는 사령을 이루어 탈경에 오르려 하고 있소.
“헛!”
진우선은 몇 달 전에 마주쳤던 사도련주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가 씨익 웃고 있는 듯했다.
검노야가 문득 이마를 찌푸렸다.
[허허. 갑자기 영기가 흩어지고 있구려.]
-그렇구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가 달라 영기로써 접점을 만들었건만, 그 힘이 다 되어가는 모양이오. 이 정도밖에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이리 흩어질 줄이야.
태산부군도 불편한 인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태산을 둘러싼 영기의 운해가 급속도로 물러가고 있었다.
그때, 검노야가 신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소. 혼돈이 태동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오?]
-음-! 그건 말하기 어렵겠구려. 선인께 알려드리고 싶으나, 순천의 이치가 아니기에 내가 일러드릴 수가 없소.
태산부군이 인상을 팍 쓰면서 불쾌한 빛을 역력히 드러냈다. 하지만 무언가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 듯했다.
-그리고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소. 이럴 때면 꼭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간다니까.
태산부군의 중얼거림을 들은 진우선이 물었다.
“얼마나 지났습니까?”
-지금 나간다면 보름쯤 지났을 거요.
“정말입니까?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한 시진도 채 안 지난 거 같은데…….”
-명계의 시간이 더디 가는 것은 업화(業火)가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오.
태산부군의 설명에 진우선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은 이제 돌아가시는 게 좋겠소. 그리고 밖에 선물을 준비해두었소. 시간이 없어 자세히 일러드릴 수 없으나,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요. 그럼 잘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알겠소.]
***
태산의 정상에서,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백발의 노도사가 있었다.
그는 서찰 하나를 꺼내어 읽은 뒤 다시 품에 집어넣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눈시울이 매우 붉었다.
그때, 한 중년의 도사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노도사를 불렀다.
“스승님. 오늘 밤도 쌀쌀합니다. 닷새째 잠도 안 주무셨으니, 오늘은 내려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허허…… 벌써 닷새나 흘렀구나. 시간은 참으로 알 수 없어.”
노도사가 허허롭게 말했다. 텅 빈 마음을 어떤 것으로도 달래지 못한 까닭이었다.
“명건아. 네 사형이 묻더구나. 임 사제와 문 사매가 인연을 잘 맺었는지 말이야.”
“명진 사형답군요. 아직 그걸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때 제가 다친 이후에 늘 근심했었나 봅니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명진은 독고월의 도명이었다.
“그런 모양이다. 허허허.”
노도사는 흐릿한 옛 기억이 눈 앞에 펼쳐지자, 가슴에 이는 먹먹함을 어찌할 수 없었다.
중년의 도사, 명건도장이 노도사에게 물었다.
“그리 걱정할 사람인데, 왜 이제야 연락을 보냈을까요?”
“용기가 없었다더구나. 폐만 끼치고 내려온 건 아닐까 염려한 거겠지.”
“사형은 원래 옥청검문에서 왔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그래서 품을 수 있는 도가 더 컸는지도 모릅니다.”
“허허. 그랬을지도 모르겠구나.”
노도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건도장도 한숨을 내쉬며 조금씩 밀려오는 감정을 내비쳤다.
“사형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나도 마찬가지구나.”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어떤 한 사람이 다녀갔으면 하는 시간이었다.
잠시 후였다.
작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사조님. 날이 추워요. 내려오시래요.”
예닐곱 살쯤 된 듯한 여아의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노도사가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태허진인이었다.
“허허. 우리 월이가 벌써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태산이 가파른데, 안 힘들었느냐?”
“이제 이 정도는 쉬운걸요!”
“그래. 내려가자꾸나.”
태허진인이 명건도장의 어린 딸 임화월을 품에 안고 정상을 내려섰다.
이백 보쯤 내려오자 달처럼 우아한 한 여인, 명연선자가 있었다. 그녀는 명건도장의 아내이며, 임화월의 어머니였다.
“스승님.”
명연선자가 다소 조심스럽게 태허진인을 불렀다.
하지만 태허진인은 극히 평온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옥청검문의 일이라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신인께서 태청동에 드셨으니 말이다. 우리는 내일 정오쯤에 마중을 나가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
골짜기를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했던 짙은 운무가 옅어지고 있었다.
시야가 조금씩 트였다. 즉, 영기가 사방으로 흩날리며 희미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때, 인상이 날카로운 노도사가 명운도장에게 말을 걸었다.
“소진인이 곧 나오겠구나.”
“그렇습니다.”
“검을 그리 잘 쓴다지?”
“등봉조극에 올랐다고 알려졌으며, 실제로도 그의 경지를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랬겠지. 네가 알아볼 수 있었으면, 그때 놓치지도 않았을 테니까. 또한, 네가 그를 꺾었으면 내 자리에 앉아 있을 테고.”
“죄송합니다.”
“되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
명운도장이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을 든 노도사는 성격이 뾰족하여, 상대의 폐부를 찌르는 말을 곧잘 내뱉고 있었다.
그러면서 욕심도 많았다.
“소진인이 운도 참 좋구나. 나도 아직 오르지 못했는데 벌써 극을 봤을 줄이야. 저 안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물어봐야겠구나.”
나직하게 내뱉은 그 말을 다가오던 백의백관의 노도사가 듣고서 대꾸했다.
“태정, 너는 그래서 아직도 오르지 못한 거다.”
“태금, 너라고 다를 거 같나?”
태금은 백관우사의 도명이었다.
그의 뒤로 열 명의 도사가 따르고 있었다. 상청선문의 도사들은 태청동 앞에 유람하듯이 나와 있었다.
“신인께 인사를 드리고, 한 수 배우고 싶어 왔을 뿐이다. 선도에 드는 건 순서가 없으니, 배울 수 있다면 어찌 좋지 아니하겠느냐? 너는 도가 떠났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야.”
“뭐가 어째?”
백관우사의 말에 현옥검 태정은 분을 참지 못했다.
현옥검이 기세를 뿌리기 시작하자, 그의 뒤로 옥청검문의 도인들 쉰 명이 모여들었다.
그때, 백발의 노도사 태허진인이 휘적휘적 걸어왔다.
“허허. 다들 탁한 마음을 가지고 몰려나왔구나. 너희들은 이럴 거면 왜 나왔느냐?”
“그러지 마십시오. 일기화삼청(一卷化三清)이며 삼청태산이라, 태청동의 일은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도가 다가오는 법이거늘, 이리 다퉈서야 어찌할꼬?”
태허진인이 혀끝을 찼다.
“이게 다 태허 사형 때문이오. 날마다 나더러 도를 깨달을 수 없다고 하니, 태금도 내게 그리 말하지 않소?”
“태정 너는 정말 염치도 없구나. 네놈의 행실 때문에 도가 멀어진 것을 항상 남 탓만 하고 있네. 그러니 그 모양이지.”
“허허허!”
태허진인이 허탈한 마음에 웃음을 흘렸다.
바로 그때였다.
영기가 기이하게 휘몰아치더니, 한 동굴로 빨려들었다.
태청동 세 글자가 보였다.
“헛!”
좌중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때, 태청동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진우선이었다.
“진인. 저를 맞이하러 나온 분들이 많으시군요.”
“허허. 그렇소. 이들이 저마다 삿된 마음을 가져 도를 찾지 않고, 그 흔적만 찾고 있더이다. 신인께 내가 미리 사죄드리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진우선이 태허진인의 말을 들으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현옥검과 백관우사는 둘의 대화가 결코 탐탁지 않았다.
“태허 사형, 그게 무슨 말이오? 나와 옥청검문은 그저 도를 물어 보러 왔을 뿐이오!”
“맞소. 상청선문 역시 선도의 가르침을 청할 생각뿐이었소.”
“그런 놈들이 싸울 준비를 바득바득하고서 온단 말이냐? 망할 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