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삼청태산 (2)
“선천(先天)의 도와 후천(後天)의 술을 얻어 선도(仙道)에 들어선 신인이시니, 빈도의 부족한 눈으로 천기만 살펴서는 섣불리 가늠할 수 없었소.”
“과찬이십니다. 저는 진인께서 귀한 시간을 내시어 직접 내려오실 만큼 대단하지 않습니다.”
진우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태허진인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겸양의 자세를 취했다.
“허허. 신인은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지 않소?”
“그렇긴 합니다만, 태산에 들어선 후에야 뵐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내가 궁금해서 왔소. 여기까진 금방이니.”
교중학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허진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런 모습은 예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마중하러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인께 먼저 드릴 게 있습니다.”
진우선이 독고월의 서찰을 태허 진인에게 건넸다.
태허진인이 서찰을 펼쳐보았다.
……한순간의 혈기로 산에서 내려온 불민한 제자가 이제야 연락을 드립니다. 이생의 끝이 다가오니 용기가 생긴 까닭입니다.
……스물다섯에 사문을 뛰쳐나와 천하를 종횡하였습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는데 도는 깨닫기 어려우니, 스승님을 뵐 면목이 점점 더 없어졌습니다.
……천지간의 이치를 몸으로 겪으면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뒤늦게서야 이해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관조하니, 도는 멀리 있었으나 또 제 안에 있었습니다.
……스승님. 저를 거두어주시고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으로 제 뜻을 펼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은혜를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나이는 적으나, 큰 사람을 만났습니다. 불현듯 스승님께서 ‘마음을 올바르게 나아간다면, 숨이 다하기 전에 큰 귀인을 만날 것이다.’라고 지나가듯이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스승님께서 기다리시던 귀인일까 싶어 그를 통하여 서찰을 보냅니다.
……스승님, 태산은 어떻습니까? 임 사제와 문 사매는 인연이 잘 맺어졌습니까? 태산에는 이제 꽃이 피고 있겠군요. 걱정 없이 뛰놀던 그때가 문득 그립습니다.
태허진인이 서찰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신인은 월이와 가까웠던 모양이구려.”
“함께 지낸 건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마지막 순간을 나누며 깊은 뜻을 배웠습니다.”
“그 아이는 큰 도기(道器)를 타고났으나, 공명심 또한 컸기에 쉽지 않은 인생일 줄 알았소. 하지만 신인이 그의 끝에 나타나셨으니 웃으며 갔겠구려. 정말 고맙소.”
태허진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오. 신인 덕분에 종국에는 과욕을 부리지 않았으니 말이오. 허허허.”
태허진인이 독고월과의 기억을 잠시 반추하며 웃음을 흘리더니,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혹시 신인은 그 아이에게서 들은 말이 있소?”
“독고 대협께서 자기 대신 저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만 말했구려. 허허.”
태허진인이 잠시 허공만 바라보았다.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신인. 태산은 영기가 가득하오. 많은 도문이 그 영기를 나눠 가지며 수련해도 언제나 넘치듯 흐를 정도요. 이는 세 문파가 각기 삼청(三淸)을 주관하고 있기 때문이오.”
태허진인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사방의 시끄러운 소리가 차단되며, 탁자 위로 태허진인의 음성만이 흘렀다. 그가 도술을 펼치고 있었다.
“태청은 다함이 없으니, 태청도문은 천기를 보며 천하의 도를 살피는 역할을 하오. 그 도를 깨닫기가 지극히 어려운 탓에 월이가 참지 못하여 산에서 내려갔소. 그를 옥청에 그대로 두었으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태허진인의 음성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흘렀다.
태청, 상청, 옥청 중에 좋고 나쁨이 어디 있겠냐만, 옥청은 태청만큼 깊지 않아 오롯한 도기가 아니어도 견딜 만했다.
“하지만 인연은 신묘막측하니, 월이가 신인을 이리로 이끌었구려. 이는 태청도문의 문하로서 이 생의 업(業)이 있기 때문이라오.”
“제가 그 업에 연이 있습니까?”
“그렇소. 월이마저 감탄했을 정도로 신인에게서 풍기는 현기(玄氣)는 그윽하오. 천지간의 이치가 신인께로 모이기 때문이오.”
태허진인의 깊은 눈동자가 간절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니 빈도는 신인께서 태청동(太淸洞)에 한 번 드시길 바라오.”
“태청동이요?”
진우선이 되물었다.
“헛!”
화들짝 놀란 교중학이 두 눈을 부릅뜨며 입을 열었다.
“태청동이면 태산의 신역(神域) 아닙니까?”
“네 말이 맞다.”
“교 대협, 대청동은 무엇이고 신역은 무엇이기에 그리 놀라셨습니까?”
진우선은 여전히 의문스러워하고 있었다.
교중학이 경악한 표정으로 아는 바를 털어놓았다.
“진 대협. 대청동은 태산의 신역으로 아무도 찾지 못했고,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들면 지극한 도를 깨우치게 된다고 합니다.”
“인연이 닿은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모양이군요. 그래서 신역인가 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산동에서 도가 무공을 익힌 자나, 선도의 무공을 수련하는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태산을 오릅니다. 도가 자신을 택하지 않았을까 해서요.”
태허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우선에게 핵심을 전했다.
“도의 그릇을 타고난 자가, 도를 담을 만한 크기가 되었다면, 태청동이 열리는 거요.”
“그럼 정말로 도(道)가 사람을 택하는 겁니까?”
“그렇소. 그걸 위해 태청도문은 태청동을 지키면서, 인연이 닿은 사람을 이끄는 역할을 하오. 그래 서 신인에게 말한 것이었소.”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교중학의 말과 태허진인의 뜻이 이제야 하나로 꿰어지고 있었다.
잠시 대화가 멈추자, 교중학이 끼어들어 태허진인에게 물었다.
“진인. 저도 들 수 있습니까?”
“너는 어차피 들어가지 못한다. 도는 형체가 없으니, 너는 마주하고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벽공검도를 깨달아도 그렇습니까?”
“그 도만으로도 네게는 지극하니라. 너는 애초에 등봉조극에 오르고 싶은 것 아니더냐?”
“맞습니다.”
다소 아쉬워하는 기색의 교중학에게 태허진인이 선심 써서 일러 주었다.
“벽공검도를 넘어서면 너에게도 열릴 것이니, 지금 너무 실망하지 말고 수련에 임하거라. 지극한 선도의 길은 극을 넘어서야만 보이는 것이다.”
“아-!”
교중학이 탄성을 흘렸다.
벽공검도를 깨달으면 등봉조극이니, 이를 넘으면 도가 자신에게로 온다는 뜻이었다.
한데 놀란 건 그 점 하나 때문만이 아니었다.
‘진 대협은 극경을 넘어선 무인이었구나!’
교중학은 태허진인의 말에서 자신의 추측을 확신했다.
그때, 진우선의 입이 열렸다.
“진인.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태청동에 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일전에 만유노사 동곽 선생이 저더러 진인을 만날 거라고 하면서, 제 길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혹시 이와 관련이 있습니까?”
“허허. 맞소. 그리 보시면 되오. 정확히는 도가 신인을 비출 거요. 정확히 무엇이 보일지는 알 수 없으나, 향후 나아갈 길이라 하면 틀린 말은 아니구려.”
진우선이 잠시 숙고하더니, 결심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그럼 태청동에 들겠습니다.”
***
이튿날이었다.
진우선과 교중학이 곡부를 나서며 작별을 나누었다.
“교 대협,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이제는 부디 마음이 가벼워지셨길 바랍니다.”
“고맙소, 진 대협.”
교중학이 태허진인에게도 극진히 인사를 올렸다.
“진인께서도 살펴 가십시오.”
“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리고 네 소사매는 애초부터 이어질 연이 아니었으니, 너무 놀라지 말고.”
“알고 있습니다. 이미 십 년을 떠돌다 왔는데, 마음 편히 몸을 뉠 곳만 있어도 다행이지요.”
“그래. 그럼 됐다.”
태허진인이 몸을 돌렸다.
진우선도 그와 함께 태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날이 맑았다.
태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훤히 보였다.
진우선과 태허진인은 급하지 않게, 하지만 누구보다 능숙하게 산을 올랐다.
“신인께서는 태청동이 어디서 열렸는지 느껴지시오?”
“저 봉우리 너머인 것 같습니다. 태산 곳곳에서 영기가 피어오르는데, 그곳으로 잔뜩 몰려들고 있습니다. 엄청나군요.”
“맞소. 정확히 보셨구려.”
“제가 본 것이겠습니까? 태산이 제게 길을 열어준 것이겠지요.”
“허허.”
진우선이 싱긋 웃으며 태산을 잘 아는 사람처럼 답하자, 태허진인이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이 그렇게 두런두런 말하며 봉우리를 넘어섰을 때였다.
“저곳이군요.”
골짜기 쪽에 영기의 운무가 자욱했다.
척 봐도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태청동이 그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맞소. 한데 아이들이 몇 있구려. 신인은 신경 쓰지 마시오.”
운무가 잔뜩 몰려드는 신비지처(神秘之處)에 검을 든 일련의 무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태허진인이 혀끝을 차며 골짜기 쪽으로 몸을 날렸다.
“뭣들 하고 있는 게냐?”
“고인은 뉘시오? 이곳은 함부로 오실 곳이 아니오.”
검을 찬 도인들이 태허진인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그때, 태허진인의 입을 열었다.
“이놈, 명운아-.”
태허진인의 음성이 운무를 뚫고 태산의 사방팔방에서 골짜기로 울려왔다.
육합전성(六合傳聲)이었다.
“앗-! 누구십니까? 어디에 계십니까?”
운무 저편에서 한 사람이 탄성을 흘리더니, 소리를 지르며 운무 속을 헤맸다.
다른 도인들은 태허진인의 심오한 공력을 느껴 모두 몸을 움찔거렸다.
“여기다. 얼른 오너라.”
태허진인의 음성이 이번에는 운무를 꿰뚫고 명운도인에게로 곧장 전해졌다.
잠시 후, 운무 속에서 도관을 갖춘 중년의 도사, 명운도인이 나타났다.
“헛! 태허진인 아니십니까?”
명운도인은 운무를 나서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인사를 올렸다.
“태정은 어디 갔느냐?”
“문주님께선 손님을 맞고 계신 까닭에, 오후에 올라오실 것입니다.”
“허허. 도가 떠나갔거늘.”
태허진인이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태정은 옥청검문의 장문인인 현옥검의 도명이었다. 이들은 옥청검문의 제자들이었다.
“진인께서 그리 말씀하셔도, 검으로 지극한 도에 오르는 도인들이 있습니다. 장문인께서는 조만간에 극에 오르실 것이며, 도를 얻으실 것입니다.”
“세속의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고서 도를 찾는데, 어찌 도가 다가가겠느냐? 그 하나로 인해 너희들도 피해를 보는구나. 옥청에서는 들지 못하는 것을.”
“아무리 진인이시라 해도 그 말씀은 너무 과하십니다. 옥청검문을 욕보이지 마시옵소서.”
명운도인이 기개 있게 말했다. 이미 그의 뒤로 삼사십 명가량의 도인이 모여 있었다.
“태정은 이미 도와 멀어졌다. 그나마 너희들이 검으로써 도를 찾고 있기에, 옥청에 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태정이 물러나야만 옥청에 도가 다가갈 것이야.”
“진인, 언사가 지나치십니다. 그런 말은 삼가 주십시오.”
명운도인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눈을 날카롭게 부라렸다.
하지만 태허진인은 그의 모습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물리거라.”
“그 청년 때문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명운도인이 태허진인의 옆에 선 진우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놈, 명운아. 네놈이 막을 길이 아니다.”
그때, 진우선이 한 걸음 나서며 태허진인에게 말했다.
“진인. 태청동에는 아직 아무도 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는데, 제가 그냥 들어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허허.”
태허진인이 웃음을 흘리더니 진우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인의 뜻대로 하시구려. 태정이 도의 지극한 향기를 잊지 못해 끈질기게 미련을 남기는 것뿐, 도는 그에게서 떠났소. 이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손속에 자비를 베풀어주시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영기의 운무 속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옥청검문의 도인들이 진우선의 앞을 막아섰다.
“멈추시오. 들어가실 수 없소.”
“태청동이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들리십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소? 그리고 귀하는 뉘시오?”
명운도인이 눈앞의 상대를 아예 몰라보고 있었다.
“진우선이라고 합니다.”
“진우선? 설마 정무맹의?”
“그는 등봉조극에 올랐다고 들었습니다!”
놀람은 옥청검문의 도인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명운도인이 그걸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대가 진우선이오? 하지만 이곳에는 들어갈 수 없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휘적.
진우선의 신형이 잔상만 남을 정도로 빠르고 변화막측하게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옥청검문의 도인들을 헤집고서 지나갔다.
우당탕-.
서로 발이 얽히고 꼬인 옥청검문의 도인들이 마구 나자빠졌다.
그사이, 운무 깊숙이 들어간 진우선이 영기가 몰려드는 동굴을 발견했다.
태청동(太淸洞).
진우선은 동굴 위에 새겨진 이름을 본 뒤, 안으로 들어섰다.
영기로 가득 찬 고요한 태청동은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태청동은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막혀 있었다.
그때였다.
푸스스-
기묘한 기운이 일어나더니, 커다란 대문 하나가 벽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명궁(顯冥宮)
대문을 바라보자, 붉은 갑옷을 걸친 사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태산부군(泰山府君)께서 두 분을 기다리십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