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삼청태산 (1)
염성방 입구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냉군상 일행이 정무맹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진 무사님. 그간 여러모로 감사했어요. 장사에서 다음 임무도 잘 마치고 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야말로 책사님이 계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백하련이 진우선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여기서 바로 산동으로 가시면 만 소협은 못 만나실 텐데, 혹시 전할 말씀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제가 전해드릴게요.”
“아! 그렇게 되겠군요. 태산에 다녀와서 또 보자고 말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무사님께도 수고 많으셨다고 전해주세요.”
“그러겠습니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백하련에 이어 냉군상과 제갈영도 진우선에게로 다가왔다.
“진 무사. 강소삼정의 일에 큰 힘을 써줘서 고맙네. 이로 인해 태산에 다녀오는 임무가 좀 늦어졌을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내당주님께서도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그 역시 걱정하지 말게. 어제 연락을 받았는데, 벽력신창 탁 대협께서 만 무사와 함께 가려고 궁가장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더군.”
“아! 탁 대협께서 맹으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전서에 그런 말은 없었으니, 어떤 뜻인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아직은 불편하게 여기시지 않겠는가? 탁 대협께서는 뜨거운 분이시라네.”
“하긴, 그렇지요.”
냉군상의 말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평생 몸담았던 정무맹에서 크게 상처 입었으니, 쉬이 아물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때, 제갈영도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진 공자. 아마도 태안현을 통해서 태산에 오르실 텐데, 상황이 되면 태산 반대편인 제남현 대명호의 오가객잔에도 가보세요. 황궁 출신 숙수가 요리를 기가 막히게 하더라고요.”
“제갈 소저는 다녀오신 적이 있군요.”
“산동에 갈 때가 있으면 꼭 들러서 먹었어요. 진짜 맛있으니까, 한 번 다녀오세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진우선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냉군상과 제갈영과도 인사를 마쳤다.
그들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무강과 정연서도 바로 앞에 나타났다.
“진 대협. 고마웠소.”
“진 공자. 저도 고마워요.”
같은 말을 내뱉은 소무강과 정연서가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다.
“두 분을 여기서 만나게 되어 뜻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중에는 임무가 아니라 따로 뵈었으면 좋겠네요.”
“나도 그러길 바라오.”
“진 공자, 알겠어요. 찾아갈게요.”
소무강과 정연서는 말수가 많지 않은 편이라, 인사만 딱 건네고 사라졌다.
축일공이 염성방주 축대원을 데리고 진우선에게로 다가왔다. 홍가장주 홍천보를 비롯하여 대풍상단과 염성전장의 사람들까지 몰려왔다.
축대원이 대표로 인사를 건넸다.
“진 대협, 사도련과의 일을 말끔히 해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무가 있어 떠나신다고 하니, 그간 본 방의 제일 은인이신 진 대협을 잘 모시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연회도 감사했고요.”
“그건 모두의 연회나 다름없었지요. 진 대협께 작게나마 성의를 보이고자 했으나, 천하를 구휼해달라는 큰 뜻마저 들었으니 이 큰 은혜를 도무지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시는 길에라도 꼭 한 번 들러주십시오. 저희가 받은 구명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축대원의 장황한 인사에 진우선이 얼른 대답을 마쳤다.
그렇게 이별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난 뒤, 사람들이 뿔뿔이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떠날 채비를 마친 교중학이 진우선의 옆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소. 다들 한마디씩이라도 꼭꼭 인사를 건네니, 진 대협만 잔뜩 고생했구려. 얼른 가는 게 어떻소?”
“교 대협이시군요. 그런데 교 대협도 산동으로 가십니까?”
“내 사문이 태산 가는 길에 있소. 내가 불편하지 않다면 이참에 말동무나 하면서 같이 가는 게 어떻소?”
교중학이 소탈하게 웃었다.
그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수검문으로 방향을 잡으셨군요. 알겠습니다.”
***
진우선과 교중학은 오후에 강소성 회안에서 배를 탔다.
염성에서 태산까지 천 리가 넘는 길이기에, 대운하를 통해서 갈 계획이었다.
“허어-!”
배의 난간에 기대어 전방을 바라보던 교중학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옆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 진우선에게 물었다.
“진 대협은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고 계시오?”
“태산의 귀인이 누굴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동곽 선생께서 선문답하듯이 말한 탓에 진 대협이 고심하고 있었구려. 당연히 태청도문의 태허진인이시지 않겠소? 삼청태산이라 하나, 귀인이라면 그분밖에 없지.”
“그렇군요. 한데 삼청태산은 무슨 말입니까?”
“아-! 진 대협은 산동에 대해서 아예 모르셨구려.”
“초행길입니다.”
교중학은 그제야 진우선이 산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
“진 대협. 태산은 영기가 가득하여 도문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삼청태산(三淸泰山)이라 하여 세 곳을 손꼽아 부른다오. 옥청검문이 유명하고, 상청선문이 맑고, 태청도문이 신비롭다고들 하지.”
옥청검문(玉淸劍門)의 장문인은 현옥검(玄玉劍)으로 세상사에 관심이 많아 문파가 가장 컸다.
상청선문(上淸仙門)의 장문인은 백관우사(白冠羽士)로, 선도의 수련에 집중하여 도인들은 많지 않으나 실력이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그리고 태청도문(太淸道門)의 장문인은 태허진인(太虛眞人)이었는데, 도문의 역사가 깊고 이름이 드높았으나 문하제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태허진인 역시 종적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이래서 교 대협이 태허진인을 태산의 귀인이라 하셨던 거군요.”
“그렇소. 많은 이들이 세 장문인을 모두 귀인으로 칭하지만, 내가 보기에 진정한 귀인은 태허진인뿐이오. 일전에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눈빛이 한없이 깊어 나를 뚫어 보시는 줄 알았소.”
“교 대협이 그리 말씀하실 정도면, 아마도 그분이 확실할 것 같습니다.”
“맞소. 딱 십 년 전에 뵈었소. 그때는…….”
교중학이 무언가 말하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진우선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교 대협,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오, 괜찮소.”
교중학이 허탈한 눈으로 대운하의 강물을 한 번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십 년 전, 뜨겁게 피어오르던 사도련의 기세에 힘입어 추성보가 악독한 짓을 마구 저질렀소. 다 갚은 고리채를 계속 들이밀며 강압적으로 빚 독촉을 해왔지. 한데 그뿐만이 아니었소.”
교중학이 한숨을 내쉬고는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추성보주는 사모님과 그 딸인 소사매에게 음심을 품은 거였소. 두 사람을 내놓으라고 은근히 협박하며, 세력을 계속 이끌고 와서 핍박했지. 사수검문의 대사형이었던 나는 그들의 만행을 더는 참을 수 없었소.”
“헛-!”
진우선은 교중학의 이야기가 너무나 기가 막혀 헛웃음만 흘렸다. 이런 속사정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었다.
“그래서 다 베어버렸소. 추성보에 속했던 이들은 모두 베어버렸지. 그때 그분이 나를 찾아오시더니, 심마(心魔)에 들지 말라 하셨소. 나를 보시던 그 심유한 눈빛을 아직 잊을 수가 없구려.”
“아!”
“그분께서 나더러 사수검문은 지켜줄 테니, 천하를 돌며 마음을 다스리라 하셨소. 그래서 십 년을 바깥에 있었다오. 그 와중에 화동일검이라는 별호도 얻었고.”
교중학이 태허진인을 높이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엊그제는 강호를 주유할 거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맞소. 엊그제까지는 그랬소. 근데 사자검문의 서 문주가 결자해지하러 염성방에 왔다는 말을 들은 순간,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이 바뀌었소. 서 문주는 나보다 한 수 아래인데다가 생각이 가볍다고만 여겼는데, 그 한 모습은 진정 대인이더이다.”
“아마도 서 문주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그랬을 겁니다.”
“허허. 맞소. 그건 그랬겠지. 그러나 생각만 하는 것과 몸소 행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겠소? 그래서 나도 이리로 방향을 정했다오.”
“그 말씀도 맞습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교중학이 그런 진우선을 보며 살짝 웃었다.
“그리고 진 대협이 태산에서 귀인을 만나게 될 거라는 동곽 선생의 말씀도 계속 생각났소. 그래서 동행을 자처한 거요. 그분을 만나면 한마디 주시지 않겠소? 그때 만약 이게 아니라 하시면 다시 천하로 흘러가면 될 거요.”
“교 대협께선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그렇소. 진 대협에게 미리 전하지 못해 미안하오. 실은 출발 직전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오.”
“이해합니다. 그리고 괜찮습니다. 사실 저 혼자만 왔으면 삼청태산이 무엇인지, 귀인은 누구신지 전혀 몰랐을 겁니다.”
“이해해줘서 고맙소.”
교중학이 활짝 미소 짓다가 서둘러 한마디 덧붙였다.
“아! 하지만 진 대협도 예사로운 사람은 아니오. 태허진인과는 다르나 진 대협 역시 내가 감히 재단할 수 없는 사람인 걸 여실히 느끼고 있소.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어도 말이오.”
“그렇습니까?”
“당연하오. 물어 뭐하겠소? 화동일검인 나조차 진 대협을 대하기 편치 않은데 말이오.”
“그랬군요.”
진우선은 유유히 흐르는 대운하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교 대협. 태허진인이 그런 분이시라면, 우리는 아마도 꼭 뵐 것입니다. 제가 태청도문에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
다음 날 오후였다.
산동성 제녕의 포구에 도착한 진우선과 교중학은 곡부로 이동하여 짐을 풀었다.
“교 대협.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이곳에서 묵고, 내일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소.”
두 사람이 삼동객잔의 객실에 각자 짐을 푼 뒤, 식사하러 내려왔다.
“태산이 근방이라 그런지, 도사 분들이 종종 보이는군요.”
“당연하오. 여기서 태산까지는 이백 리 길이 채 안 되오.”
교중학이 진우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수검문도 이 근방이지 않습니까? 종전에 지나가는 대화를 들으니 사수현이 멀지 않다고 하더군요.”
“맞소. 육칠십 리밖에 안 되오. 걸어가도 세 시진이면 충분히 닿을 거리지.”
답하는 교중학의 표정이 꽤 오묘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모르겠소. 막상 여기까지는 왔는데, 망설여지는구려.”
“교 대협,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십 년이면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교 대협께선 이미 검으로 일가를 세우실 만큼 깨달음이 깊어지셨습니다.”
“맞소. 나는 늘 사문으로 돌아오는 생각을 했었소. 이만하면 사제들에게도, 또 아직 만난 적 없는 제자들에게도 무언가 전할 수 있겠다 싶었고. 하지만 막상 오니 쉽지 않구려.”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옛 마음을 떠나보내셔도 될 것입니다.”
그때였다.
가지런히 빗어 내린 백발의 도사가 교중학의 옆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옳구나. 네가 심마에 들지는 않았으나, 아직 살업(殺業)에 눌려 있으니 말이다.”
“헛-!”
교중학이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 진인! 여기에 어떻게…….”
교중학이 까무러칠 듯이 놀라며 외쳤다.
“시끄럽다. 호들갑스러운 건 여전하구나. 나를 만나려고 이 청년과 함께 온 것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진인의 일갈에 교중학이 금세 차분해졌다.
“벽산검결의 끝을 보았고, 도를 세웠구나. 이름은 뭐라 하였느냐?”
“아! 벽공검도(碧空劍道)라 하였습니다.”
“허허. 공(空)을 찾았구나. 잘했다. 그래도 천하를 웬만큼은 둘러본 모양이야.”
벽산검결은 사수검문의 절학으로, 교중학의 진신절기였다.
교중학은 벽산검결을 대성하여 벽공검도를 열기 시작했는데, 진인은 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사문에 돌아가도 되겠다.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니 말해줄 수밖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공(空)을 잃지 않으면서, 네 마음을 따라 행하거라.”
진인의 말에 교중학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진인이 진우선을 쳐다보았다.
“나는 태허진인이라 하오. 신인의 이름은 무엇이오?”
“처음 뵙겠습니다. 진우선이라고 합니다.”
“허허-! 진우선이라……”
태허진인이 허허실실 웃으며 진우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감탄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단하시구려. 이래서 천기로는 다 헤아릴 수 없었던 모양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