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61화 (161/225)

161.

#안정과 변화 (3)

소무강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정자 앞 작은 연못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무뚝뚝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대협이 그걸 물어볼 줄은 몰랐소.”

“죄송합니다.”

“아니요. 너무 놀란 것뿐이오.”

소무강이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맞소. 나는 그곳에서 왔소. 십 년 전에 복수하기 위해 그곳에서 내려왔지.”

소무강의 음성에 미안한 기색이 잔뜩 어려 있었다. 너무나 미안해서 ‘빙화곡’이라는 세 글자조차 차마 말하지 못하는 듯했다.

“…….”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소무강이 가진 마음의 무게였다.

잠시 후.

생각을 얼추 정리한 소무강이 진우선에게 물었다.

“진 대협은 최근에 다녀오셨소?”

“몇 달 전에 다녀왔습니다. 임무가 있었습니다.”

“빙화곡주는 소군이였소?”

“네, 맞습니다. 그분이 곡주이셨습니다.”

“이제는 다 컸겠군.”

“한 번도 안 가셨었군요.”

“복수를 하겠다고 아홉 살이던 어린 여동생의 손을 뿌리치고 내려왔는데, 어찌 올라갈 수 있었겠소?”

소무강의 말에서 미안함만이 아니라 괴로움도 짙게 묻어나왔다. 그는 마음속에 돌아갈 곳이 없었다. 스스로 배수의 진을 친 격이었다.

“그럼 그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것도 모르시겠군요.”

“……후우! 그렇소. 창피하군.”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소 대협께서도 큰 결심을 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겠지만, 그곳의 소곡주였던 내가 진 대협께 곡의 이야기를 듣는 상황이 어찌 편하겠소. 소 대협이라 불리는 것도 편하지 않은데 말이오.”

“아-!”

진우선이 탄식을 흘렸다.

그는 복수를 위해 십 년 동안 소무강으로 살아왔으나, 그 시간이 어찌 편할 수 있었겠는가.

진우선은 문득 소무강이 검에 상담(嘗膽)이라 이름 붙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때, 소무강이 여러 불편한 심정을 이겨내며 담담하게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듣고 싶소. 너무도 궁금하오.”

“일단 빙화곡은 신령스러웠고, 대자연의 기운도 한이 없더군요. 빙화도 영기를 잃지 않고 버티고 있던 터라, 깊게 물들어 있던 마라혈독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빙화에 마라혈독이 스며 있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아! 이는 이 년 전에 마문광 장로가 빙화를 탈취하고자 천마교와 결탁하며 꾸민 일이었습니다.”

“허어-! 십 년 전에 곡을 무너뜨린 것도 천마교의 짓이었는데, 마 장로가 어찌-!”

소무강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십 년 전쯤부터 빙공의 성취가 나아지지 않았다더군요. 그래서 아예 빙화를 아예 흡수하여 대성할 심산이었다고 막 장로님께 들었습니다.”

“하-! 그가 은혜도 모르는 짐승이었을 줄이야. 빈민가에서 불쌍하게 죽어가고 있어 아버지가 구해주셨거늘-!”

소무강이 기가 찬다는 듯이 대꾸했다. 새하얀 얼굴은 어느새 붉으락푸르락했다.

원래는 과묵하고 냉정한 성정을 지녔으나, 지금은 격노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소 대협, 진정하십시오. 그의 목숨을 벽 곡주님이 거두셨습니다.”

“아! 소군이가!”

소무강의 안색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탄성을 흘리더니, 진우선에게 물었다.

“진 대협, 소군이의 무위는 어땠소? 마 장로를 제압했을 정도면 절대 얕지는 않을 텐데.”

“음……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빙공의 성취가 상당해 보였습니다. 빙화와 영통(靈通)함에 있어서 막힘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진 대협은 자세히 알고 있는 거나 다름없소. 한령신공은 영통한 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오. 곡에서는 빙화와 잘 소통하는 게 최고의 칭찬이오.”

“아! 그랬군요.”

진우선은 문득 소무강의 옛 모습과 빙화를 떠올리며, 한령신공(寒靈神功)의 이치에 대해 얼추 알아챘다.

빙화와 영통하여 빙기를 받아 수련하며, 한령지에 부족한 수기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 과정에서 수기가 냉기가 되고, 빙기로 승화하는 묘리를 깨닫는 게 핵심이었다.

“그럼 빙화는 기운이 어떻소?”

“빙화는 생기가 넘쳤습니다. 곡주님은 살아생전에 이런 모습을 처음 본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허어-!”

소무강이 복잡한 심사가 담긴 한숨을 쏟아냈다. 기쁘면서도 마냥 편하지 않은 듯했다.

“진 대협. 사실 나는 빙화가 되살아나지 못하리라 생각했소. 그래서 그곳을 뛰쳐나온 거였소. 재물도 잔뜩 들고 나왔지.”

소무강이 회한에 젖은 눈빛으로 정자 앞 연못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재물로는 만년한철을 샀소.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조금씩 샀지. 한령신공과 짝을 이루는 한빙검을 만들기 위해서였소. 그러다 작년에서야 이 검을 손에 쥐게 되었소.”

소무강이 상담검을 보며 옛 한빙검을 떠올리고 있었다.

“혈불을 쓰러뜨리기 위해서입니까?”

“그 얘기도 들었소?”

“곡주님이 빚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랬군. 맞소. 혈불이 바로 내가 곡을 내려온 이유요. 또한, 이 검을 만들어야만 했소. 한빙검이 혈불의 몸에 꽂힌 채 부서졌기 때문이오. 한령신공과 짝을 이루는 빙혼검결을 펼치려면 꼭 필요했는데.”

소무강이 자신의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손목과 손등에 힘줄이 마구 솟았다.

천마교의 오대종주 중 하나인 혈련수라종주 혈불만 생각하면 바로 복수심이 들끓어 오르는 까닭이었다.

“아버지는 십 성의 한령신공과 한빙검으로 맞서 싸우셨으나 패하셨소. 한빙검은 만년한철을 통째로 써서 만들었으나, 이 검은 다소 부족하오. 대신 한령신공을 대성하면 상관없을 테고.”

한령신공을 대성하면 빙령(氷靈)을 얻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소무강은 그걸 위해서 불철주야 자신을 단련하고 있었다.

진우선은 소무강의 말을 들으며, 그의 목표에 대해 명확히 알게 되었다.

“소 대협께서는 이제 빙기를 자유자재로 펼치시더군요. 곧 대성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 말해주어 고맙소. 사실 지금 십 성의 경지에 오른 것도 작년에 진 대협을 만나 단초를 얻어서 가능했던 거요. 이제야 최소한의 수준을 갖춘 셈이지.”

소무강이 진우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감사의 눈빛을 전했다. 그러더니 공손하게 부탁했다.

“진 대협. 나는 혈불을 만나기 전에 그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기대했었소. 한 번 더 비무를 청하고 싶었기 때문이오. 이번에도 한 수 가르침을 내려주시오.”

“가르침이라니요. 소 대협과의 비무로 저 역시 얻은 게 많았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직 연회가 다 끝나지 않았으니 내일 새벽에 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소. 그게 낫겠군.”

소무강이 진우선의 뜻에 동의했다.

그때, 진우선이 소무강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소 대협.”

“말씀하시오.”

“곡주님께서 가족을 꼭 찾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진우선이 먼저 빙화곡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바로 이 말에 있었다.

그에 소무강은 물끄러미 연못만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 역시 보고 싶소. 하지만 아직은 볼 면목이 없다오. 이번에는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 만족하겠소!”

“알겠습니다.”

되돌아가는 소무강의 뒷모습이 꽤 쓸쓸해 보였다.

***

연회가 끝나고 밤이 되었다.

냉군상이 진우선을 비롯한 몇 사람과 함께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진 무사, 내일 사자검문에서 서 문주가 올 거요. 저번에 약속한 대로 그간 억류했던 물자를 가지고 온다더군. 하지만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자이니, 진 무사가 응대해주시오.”

“서 문주가 직접 오는 게 맞습니까?”

진우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사자검문주 서도광은 사실과 거짓을 뒤섞거나, 사실을 일부만 전하는 등 말을 교묘하게 하는 데 뛰어났다.

남경을 떠나기 직전에 포구에서 만났을 때도 염성방이 가진 게 만년삼왕 하나와 천년설삼 셋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목숨을 건다면서 호언장담했던 그가 염치없이 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냉군상의 말을 듣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강소성의 사태는 서 문주의 욕심에서 시작된 것이니, 더 큰 화를 막으려면 최소한 악범승의 시체는 챙겨가야 할 거요. 그러니 진 무사가 백 책사와 함께 그를 맞아주시오.”

“알겠습니다.”

서도광이 협상해오면 백하련과 함께 잘 마무리하라는 뜻이었다.

냉군상이 그 말을 시작으로 정무맹 사람들에게 임무를 내리더니, 해산을 명했다.

그리고 진우선에게로 다가왔다.

“진 무사.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 남아달라고 했소.”

“말씀하십시오.”

“진 무사는 십양의 정 무사와 어떤 관계요? 축 방주가 두 사람이 연회에서 같이 나가는 걸 보고는 물어왔소.”

“정 소저와는 호심당을 같이 마친 사이입니다. 그녀는 조부님의 흔적을 뒤쫓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 별다른 얘기는 없었소?”

“그렇습니다. 한데 왜 그러십니까?”

진우선이 미심쩍은 마음으로 물었다.

“음-. 진 무사가 입이 무거우리라 생각하여 말해주겠소. 정 무사를 내당으로 뽑을까 생각 중이오.”

“아!”

진우선이 냉군상의 뜻을 이해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정 소저라면 실력이 매우 뛰어나고 책임감이 있으니 잘 해낼 겁니다.”

“나 역시 잘 적응할 거라 생각하오.”

냉군상이 보기에 정연서의 무위는 십방도객 관무평에 못지않았다.

게다가 부대주 직책에 오른 사람부터는 인사이동이 쉽지 않으니, 여러모로 그녀를 데려오는 게 딱 좋았다.

“그리고 일전에 보고받기로 정 무사는 사람들과 거리를 많이 둔다고 들었는데, 본성이 어두운 건 아니더군.”

“맞습니다. 정 소저는 기감이 예민할 뿐이지요. 그래서 스스로 사람들을 피하는 것 같습니다.”

“그랬군.”

“아! 그리고 제갈 소저와는 사이가 불편해 보였습니다.”

“알겠네.”

냉군상이 진우선의 말을 잘 경청하더니, 웃으며 대화를 이었다.

“진 무사에게 한 가지 말해주고 싶은 게 있소. 내 생각에 진 무사는 염성방을 떠날 때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좋겠소.”

“정 소저에 대해서 말입니까?”

“그렇소. 축 방주만이 아니라 염성방의 주인들이 진 무사와 연을 맺고 싶어 하기 때문이오. 아마도 축 소저 같은 경우가 또 생길 거요.”

“아!”

진우선이 축려려와의 순간을 떠올렸다.

“염성방의 다섯 가문 중에서, 상단으로 돌아간 차 전 방주를 제외하곤 다들 진 무사를 눈여겨보고 있더이다. 그러니 잘 염두에 두시오.”

“알겠습니다.”

***

이튿날이 밝아왔다.

진우선과 소무강이 새벽부터 비무를 한 후 돌아오고 있었다.

“소 대협, 수고하셨습니다.”

“진 대협, 나야말로 고맙소. 오늘 많이 배웠소.”

“과찬이십니다. 소 대협의 검이야말로 매서웠습니다.”

두 사람이 편히 대화하며 접객당 쪽으로 접어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진 공자.”

“정 소저시군요.”

새하얀 얼굴의 정연서가 진우선을 부르며 다가오다가, 옆에 있던 소무강도 발견했다.

“아! 대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정 무사로군. 진 대협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네.”

“알겠네. 때마침 나와는 용건이 끝났으니, 편히 이야기하게.”

소무강이 진우선에게 곧바로 들어갈 뜻을 밝혔다.

“진 대협, 오늘은 고마웠소. 나는 먼저 들어가 보겠소.”

“알겠습니다. 쉬시지요.”

그에 진우선과 정연서 두 사람만이 남았다.

하지만 접객당 앞이 한적한 건 아니었다. 진우선에게 다가오려다 물러서는 중년인들이 많았다.

“저분들도 진 공자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요.”

“그렇군요.”

진우선이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 공자. 일단 이곳은 좀 그러니,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기로 해요.”

한편, 소무강은 접객당으로 들어가다 말고 몸을 돌렸다.

‘소군이의 나이가 딱 정 무사와 같겠군.’

이른 아침에 마주한 정연서의 모습에서 십 년이나 못 본 여동생이 떠오르고 있었다.

근데 마음에 드는 감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꽤 잘 어울려 보였다.

‘소군이도 잘 어울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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