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안정과 변화 (1)
천문환상미로 대진이 깨진 순간, 환사문을 주축으로 한 사도련 무리는 정무맹의 무인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당주님, 집계를 마쳤습니다. 진법을 파훼하는 과정에서 부상자가 스무 명 나왔지만, 사망자는 없습니다.”
“다행이군. 분위기는 어떤가?”
“다들 기뻐하고 있습니다. 염성방에서도 환영하고 있으며, 의원이 다녀가면 약재도 무상으로 보내주는 등 성심껏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군.”
냉군상이 제갈영의 보고를 받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무맹 무인들은 이미 염성방의 접객당에서 들어와 있었다.
그들이 사도련을 물리쳤을 때, 축일공이 말했던 대로 천지무로절행진이 사라졌다.
그에 염성방이 문을 열고서 정무맹을 맞이한 상황이었다.
“그보다 제갈 책사가 밤늦게까지 수고 많았군. 이만 돌아가서 쉬게.”
“당주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직 정리가 다 되지 않았습니다.”
“괜찮네. 급한 건 끝났으니 나머지는 내일 하지. 다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정작 자네는 옷조차 갈아입지 못했잖은가.”
제갈영의 의복은 젖었다가 마른 형색이고, 흙먼지도 잔뜩 묻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고단함도 배어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눈빛은 초롱초롱하나, 이래서는 일을 더 시키기 미안했다.
“그럼 당주님도 쉬십니까?”
“허허.”
냉군상이 허탈하여 웃었다.
그에 제갈영이 겸연쩍은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당주님은 궁가장에서도 그렇고, 여기 들어오신 후에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여쭈었습니다. 일을 더 보실 생각이시면, 제가 도와드리는 게 더 빨리 끝나지 않을까요?”
“내가 그런 사람이었군.”
“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갈영이 급히 손사래를 쳤으나, 냉군상은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어렵게 보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오늘은 쉴 생각이니 걱정하지 말게.”
“아!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저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갈영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방을 나갈 때였다.
냉군상이 문득 그녀를 불러 세우더니 물었다.
“제갈 책사! 잠깐 하나만 묻겠네. 내가 그리 여유 없는 사람이었는가?”
“당주님께서는 매사에 꼼꼼하여 어떤 일도 허투루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당과 맹을 생각하시느라 그런 것이니까요. 그 덕분에 맹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여유는 없었다는 말이군.”
냉군상이 제갈영의 말에 담긴 속뜻을 꿰뚫어 보았다.
뒤집어서 들으면, 윗사람이 일하고 있으니 아랫사람은 쉬이 집에 가지도 못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제갈영은 냉군상이 그리 이해한 걸 깨달았다. 민망하여 저도 모르게 멋쩍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핫! 그런데 당주님이 지금은 좀 다르신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물어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가?”
“혹시 많이 피곤하셔서 평소보다 일을 덜 생각하시는 건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피곤하면 더 집중하고 더 날카로워지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한데, 급한 건 끝났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렇지.”
제갈영이 문 앞에 서서 계속 대답했다. 어느새 몸을 돌린 그녀의 모습이 마치 다시 일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냉군상이 바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알겠네. 이제 궁금한 건 끝났으니 얼른 돌아가서 쉬게. 내일 아침까지 푹 쉬도록. 업무는 염성방의 연회가 끝난 오후부터 이어가겠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갈영이 방을 나섰다.
그러자 냉군상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감사까지 할 줄이야…… 내가 여러모로 어려운 사람이었구나.’
***
다음 날, 염성방의 대전은 간만에 편안한 얼굴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염성방이 승전보를 기뻐하는 것과 함께 귀인들을 맞아 연회를 베푸는 까닭이었다.
“축 방주, 오랜만이오. 우리가 비록 슬픈 일로 오게 되었으나, 그래도 이렇게 함께 만날 수 있어 다행이구려.”
“냉 당주, 고맙소. 그대가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늘이 본 방을 돕는다고 느꼈소. 과연 정무맹의 의기가 강호를 지탱하는 게 맞더군.”
냉군상과 축대원이 서로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염성방이 정무맹과 한 식구가 되겠다는데, 당연히 도와야지 않겠소? 축 방주가 방주직을 맡아 반갑고, 이 일이 좋은 선물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이오. 하지만 차 전 방주의 일은 유감이오.”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던 참이었소. 차 단주는 많이 상심하여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양해 해주시오.”
“그건 당연한 바요. 괜찮소.”
며칠 전까지 염성방을 이끌었던 서회상단주 차재강은 마음에 병이 나서 드러누운 상태였다.
“축 방주. 그리고 나 혼자만 해낸 일이 아니오. 나 역시 애를 썼지만, 진 무사가 큰 역할을 했소. 인사는 나누었소? 아니면 내가 소개해주리다.”
“아까 간단히 통성명만 했소. 동곽 선생께서도 진 대협의 능력을 높이 보시더이다. 이미 천하를 호령하는 정무맹이 날개를 단 것이나 다름없다 하셨소.”
“남과 북에서 맹수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이제야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겠더구려. 진 무사가 나타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오.”
“냉 당주가 심히 기뻐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구려. 허허허! 아무래도 이리 큰마음으로 천하를 담고 있으니 하늘이 선물을 내리신 것 같소.”
냉군상의 말을 귀담아듣던 축대원이 속으로 매우 놀랐다. 그가 예전과 달라진 까닭이었다.
예전의 냉군상은 냉소적인 시선으로 천하를 바라보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우선을 진심으로 인정하며 오히려 그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었다.
‘냉군상은 독불장군 같던 사람이었는데, 그릇이 커졌구나!’
냉군상이 계속 꺼낸 이야기도 그런 축대원의 생각과 부합했다.
“하늘의 선물이라…… 그럴지도 모르오. 진 무사를 겪어보니, 그는 내 생각으로 담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더이다. 그런 이가 본 맹에 있으니 어찌 든든하지 않겠소?”
“그렇구려. 하긴, 동곽 선생께서도 진 대협을 일컬어 신인이라 하셨지. 과연 그랬던 모양이오.”
“동곽 선생께서 진 무사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셨군. 그래서 덩달아 나도 축 방주의 금지옥엽을 이제야 보게 되었고. 허허허-!”
“그건 아니오. 그간 피치 못하게 갇혀 있어서 편히 지내라고 한 것뿐이오. 게다가 제 또래의 사람들을 두루 만나고 교제하는 건 나쁘지 않지.”
축대원이 능청스럽게 자신의 딸 축려려의 등장을 비호했다.
축려려는 축일공과 함께 대전에 모인 젊은 무인들을 두루 만나고 있었다.
“냉 당주도 느껴지지 않소? 젊은 아이들끼리 대화하며 웃고 있으니 사방의 분위기가 다 밝아지는 것 같구려.”
“그건 그렇소.”
“게다가 아이들은 우리 같은 어른들과 있으면 괜히 답답해하고 불편하기만 하지. 특히나 근래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터라 더 자유롭고 활기차 보이는구려.”
“허허허.”
냉군상이 가볍게 웃었다.
축일공, 축려려 남매의 동선이 진우선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진즉에 눈치챈 까닭이었다.
축려려는 과연 축대원이 금이야 옥이야 키웠을 만큼 미모가 뛰어났다. 화려하고 고운 자태에 뭇 남성들의 시선이 쏠릴 정도였다.
그들이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축일공이 먼저 대화를 텄다.
“진 대협,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대협 덕분에 저희가 숨통이 트이게 되었습니다.”
“은공. 소녀는 축려려라고 해요. 저 역시 정말로 감사드려요. 사도련의 습격 때문에 새장에 갇힌 채 언제 죽을까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는데, 은공 덕분에 살 수 있게 되었어요.”
축려려가 흐느끼는 듯한 가냘픈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름다운 얼굴에는 그늘도 잔뜩 져 있었다. 그녀를 마주하는 사람이라면 측은지심이 절로 생길 정도였다.
“축 소저,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걱정은 내려두시고 연회를 즐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은공께선 말씀도 따뜻하게 하시는군요. 너무나 감사해요. 후우-! 소녀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답니다. 은공께서 안 오셨으면 어찌 되었을지…….”
“축 소저.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홀로 그들의 습격을 막아낸 것이 아닙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맹과 귀 방의 무사들께서도 목숨을 다해 지켜주셨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은공께서 제 목숨을 살려주신 바나 다름없지요.”
축려려가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며 감격에 찬 얼굴로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진 공자. 지금 바쁜가요?”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맑은 음성이 진우선을 찾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정연서였다.
“앗!”
축려려는 정연서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정연서의 꽃과 같은 외모에 감탄한 까닭이었다.
“괜찮습니다. 근데 무슨 일 있습니까?”
정연서가 축려려를 흘깃 바라보더니, 진우선에게 물었다.
“진 공자. 공자가 최근에 사도련의 고수들과 많은 격전을 치렀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긴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렇군요. 무엇입니까? 제가 아는 바라면 말씀드리지요.”
“고마워요. 하지만 할아버지와 관련된 얘기라…… 자리를 좀 옮겨도 될까요?”
“아-!”
진우선이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정연서는 금정대협과 관련하여 말하려는 모양이었다.
“소방주님, 그리고 축 소저. 아무래도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서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진우선이 정연서와 함께 대전을 나섰다.
그때, 정연서가 대전을 나서며 축려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축려려는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만 질끈 깨물고 있었다.
한편.
축대원은 갑작스런 여인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헛! 냉 당주, 저 여인은 누구요?”
어지간한 일로는 별반 내색조차 하지 않는 그였으나,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의 미모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축려려의 미모는 그녀에 비하면 보름달 아래 반딧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단박에 축려려의 미모가 평범하게 보이는 게 그래서였다.
하지만 냉군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다가온 여인에 대해 말했다.
“아! 십양의 정 무사요. 둘은 이번 임무에서 만나게 됐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진 무사와 호심당을 같이 마쳤다더군. 그런데 확실히 축 방주의 말대로, 젊은 아이들끼리 있으니 분위기가 밝아지는 것 같소.”
“허허허.”
축대원이 뜻 모를 웃음을 흘렸고, 냉군상은 그 옆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
“정 소저. 무슨 일입니까?”
“진 공자, 혹시 장검평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장검평이요? 저는 처음 듣습니다. 그가 혹시 정 소저가 궁금해하는 무인입니까?”
염성방의 대전을 나온 두 사람이 정자 근처에서 굳은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맞아요. 그는 십삼 년 전의 사람이에요. 그때 그는 삼십대 후반이었어요.”
“그럼 지금은 쉰 가량 되었겠군요.”
“그럴 거예요. 장검평은 그때 사파의 최고수였는데, 할아버지가 그에게 숨을 거두었어요. 참고로 할아버지는 이제 전전대 맹주이신 금정대협 정인학이에요.”
“아-! 그런데 장검평이라는 이름을 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까요?”
“그건 저도 의문이에요. 그는 사파의 최고수로 십 년 가까이 손꼽혔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를 쓰러뜨린 후, 갑자기 사라졌어요.”
“정 소저는 그를 오랫동안 찾았었군요.”
정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장검평은 진 공자가 알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정연서가 진우선에게 꼭 물어보려던 질문은 장검평이 아니었다.
“진 공자, 근데 장검평은 할아버지의 단전에서 내력을 구슬처럼 만들어 뽑아갔어요. 칠성홍옥대법이 이와 비슷했다는 말을 언뜻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