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진법을 깨다 (3)
“동곽 선생. 어쩐 일로 이리 급히 오시는 거요?”
“축 방주에게 바로 알려줄 사항이 생겼기 때문이오. 진우선과 그 일행이 천지무로절행진에 떨어졌소.”
“그게 정말이오? 그런데 진 대협이 진법에 들어온 게 아니라, 떨어졌소?”
염성방주 축대원이 동곽소의 말에 사뭇 놀라며 물었다.
“그렇소. 환사문의 연환대진에서 충돌이 있었는데, 악범승이 만든 진법이 일부 깨지며 허점이 생겼소. 그때 진우선 일행이 천지무로절행진에 원치 않게 발을 들였소. 그놈은 이러려고 진법을 겹칠 듯이 설치한 거였소!”
“교묘한 한 수였구려! 우리를 빈틈없이 철저하게 에워싸려는 줄로만 알았는데.”
“악범승의 능력으로 보면 이건 교묘하기보단 얻어걸린 거요.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진우선 일행이 스스로 천지무로절행진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이오!”
축대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동곽소가 펼친 천지무로절행진의 위력을 익히 아는 까닭이었다.
“그게 가능한 거였소?”
“나도 신기했소. 그들 중에 한 아이가 감각을 통제하며 이루어지는 진법의 현혹(時惑)을 무시한 채, 기운만을 따라 나아갈 줄 알더군. 그런 방식은 금시초문이었소.”
“허-! 그럴 수도 있었구려. 천지무로종횡진도 이제보니 허점이 있었소.”
“아니오. 이건 허점이 아니오. 그래봤자 십 장의 폭으로 두른 천지무로절행진을 나서기는 요원한 일이니까.”
“그럼 어떻게 빠져나간 거요?”
축대원은 이제 속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그때, 동곽소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진우선이 일행을 이끌었소!”
“진 대협이?”
“그렇소. 축 방주가 진우선을 너무나 주목하고 기대하고 있어서 나도 그를 열심히 지켜봤는데, 그가 선천지기를 이용해 빠져나가더이다!”
“선천지기!”
축대원이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선천지기야말로 전설 속에서나 듣던 말이었다. 이는 전설이라 불리던 만년삼왕으로도 얻을 수 없는 순수한 하늘의 기운이었다.
“근데 선천지기로는 가능한 거였소?”
“본디 기문학(奇門學)은 후천중생(後天衆生)을 위한 것이오. 선천(先天)은 무위지도(無爲之道)요, 후천(後天)은 유위지술(有爲之術)이니, 후천의 술이 어찌 선천의 도를 앞설 수 있겠소?”
“허허!”
동곽소의 설명에 축대원이 웃음만 흘렸다.
“천지무로절행진은 진법으로서 극에 올랐다 할 수 있으나, 선천지기를 이처럼 다룰 수 있으면 후천의 술로는 그를 가둘 수 없소.”
“진우선이 빠져나오는 데에는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라는 말이오?”
“아마도 그럴 거요. 그를 영원히 가두진 못할 테니까. 그는 극경을 이룬 정도가 아니라, 넘어섰다고 생각해야 하오.”
동곽소가 단언하듯이 말하자, 축대원은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축 방주, 그를 붙잡고 싶었던 마음이 아직도 유효하오?”
“내가 그를 붙잡을 수 있겠소?”
“그는 신인(神人)이오. 축 방주가 만년삼왕을 주어도 그를 붙잡지는 못할 거요.”
“이 말을 하러 오신 거였구려.”
“그렇소. 들어보니 혼례도 생각한 모양인데, 그것도 포기하시오.”
“허허. 그건 진즉에 포기했소. 혼인을 통해 가족이 되어 그를 가까이할까 싶었는데, 수소문해보니 여인에게는 큰 관심이 없는 모양이더이다.”
동곽소는 축대원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진우선의 소식도 전할 겸 그를 찾아온 상황이었다.
그때, 축대원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나보다도 진 대협이 걱정이오. 이 정도면 냉 당주는 그를 품어내지 못할 텐데.”
“신기수사 냉군상 말이오?”
“그렇소. 그는 신기(神技)를 얻어 천하를 내려다보며 매사에 완벽을 도모하는 성격인데, 어찌 쉬이 위를 쳐다볼 수 있겠소?”
“능력은 뛰어나나 주변을 힘들게 하는 자로군. 축 방주는 그를 어렵게 대하셔야겠소.”
“나야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오. 하지만 냉 당주가 제 아량으로 진 대협을 감당할 수 있겠소? 그는 본인이 최고여야 직성이 풀리는데. 자신의 틀을 벗어나는 이는 용납하지 못할 거요!”
“하지만 며칠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지겠소?”
“동곽 선생께서 그들 둘이 힘을 합쳐야 환사문의 연환대진을 며칠 내로 열 수 있다 했잖소? 나는 그 과정이 심히 우려되는 거요. 냉 당주는 누군가와 쉬이 힘을 합치기 어려운 까닭이오. 물론 공과 사를 구별 못 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오.”
동곽소가 축대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사람을 언급했다.
“축 방주. 그건 일공이에게 맡겨 봅시다. 일공이가 방주를 닮았더구려. 사람을 귀신같이 보더이다. 거상(巨商)의 자질을 타고났소. 아마 환사문을 쫓아낼 때까지는 별문제 없도록 할 거요.”
“허허. 동곽 선생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오. 일공이가 이참에 진 대협과 좋은 인연이나 맺었으면 좋겠소.”
***
자정이 넘은 깊은 밤이었다.
정무맹과 염성방의 사람들이 연환대진의 영역을 바라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 대협. 진 대협께서 꽤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저녁때 연환대진에 다녀온 냉 대협이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던 말이 너무 신경 쓰입니다.”
“소방주는 아무래도 진 대협과 일행이 천지무로절행진에 발을 들였을 거라 보는 모양이구려.”
“그렇습니다. 오전에 들어갔는데 벌써 자정이 지났으니까요.”
“맞소. 확실히 진 대협이라면 환사문의 연환대진에서 이리 헤매진 않았겠지.”
염성방 소방주 축일공과 화동일검 교중학이 걱정을 가득 드러냈다.
연환대진에 드리워진 짙은 운무는 달빛마저 삼켜버렸다. 그러니 칠흑보다도 더 어두운 흑암이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흑암은 사람들의 기대를 잡아먹었다. 그래서 절망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동곽 선생께서 천지무로절행진은 극경의 고수도 함부로 나올 수 없다 하셨는데…….”
“허어-!”
축일공과 교중학의 안색이 더욱 침중해졌다.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동곽소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리는 듯했다.
그때, 냉군상이 축일공과 교중학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두 분은 너무 심려치 마시오. 진 무사는 항상 우리의 예상을 넘어섰으니,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 믿소.”
“냉 대협께서 진 대협을 이토록 믿고 계셨군요! 하긴, 지금 가장 걱정될 분은 냉 대협이실 텐데요. 저 역시 냉 대협의 말대로 그분들이 무탈하게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축일공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냉 대협은 우리를 경계하고 있구나. 그리고 진 대협을 좋아하지 않아.’
축일공은 냉군상의 눈빛에 담긴 일말의 경계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진우선을 걱정하면서도 질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들이 나왔소!”
“아-!”
교중학이 어둠 속에서 진우선과 일행을 확인했다.
열두 명 모두 연환대진을 빠져나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얼른 달려갔다.
“진 무사, 일단 무사해 보이니 다행이구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내가 저녁때 들어가서 살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소.”
“아! 그러셨군요. 제 탓입니다. 연환대진에서 중심축을 발견하여 적들의 공격을 막으며 기운을 날렸었는데, 잠시 후 진법이 어그러지더니 천지무로절행진에 빠졌습니다. 거기서 나오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허-!”
냉군상이 탄식을 흘렸다.
그때 진우선의 말을 들은 다른 이들이 걱정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씩 웅성대기 시작했다.
“중심축을 발견했다고?”
“천지무로절행진에서도 빠져나왔다니!”
“과연 진 대협이구나!”
하지만 좌중이 이야기하는 것도 잠시였다.
“다들 고생 많으셨소. 일단 푹 쉬었다가 내일 이야기합시다. 때마침 밤도 너무 깊었구려.”
“알겠습니다.”
진우선과 소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환대진에 함께 들었던 십양이 곧바로 흩어졌고, 정무맹과 염성방의 무리도 근심을 풀고 돌아갔다.
냉군상도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그의 얼굴은 다소 굳어 있었다. 어둠에 가려져 그걸 알아본 이가 없었지만.
***
“진 무사. 천지무로종횡진은 정말 생문과 사문이 없었소?”
“그렇습니다. 사방팔방에 기운이 미미하게 흐르니 멈춘 곳도 없고 빠르게 쏟아지는 곳도 없었습니다.”
“연환대진과는 정반대였군. 한쪽은 문이 셀 수 없이 넘쳐나고, 한쪽은 문이 없다니!”
이른 아침에 진우선을 만난 냉군상은 연환대진과 천지무로절행진에 대해 정리하고 있었다.
“그럼 진 무사와 십양의 무인들은 감각이 다 차단되었는데 천지무로절행진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었던 거요?”
“십양의 정연서 소저가 다행히 감각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행으로 저희가 있던 곳이 천지무로절행진의 가장 끄트머리였습니다. 그래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생문이 없었는데도 나왔단 말이오?”
“운이 좋게도 천지무로절행진의 벽이 흩어졌습니다. 정말 운이 따랐습니다.”
“벽이 흩어졌소? 그건 어쩌면 염성방의 동곽 선생이 길을 열어 준 걸지도 모르겠군.”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진우선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본인도 놀란 듯이 말했다.
그에 냉군상이 웃음을 흘렸다.
“허허-.”
대체 ‘다행’이고 ‘천행’이고 ‘운이 좋다’라는 말이 이렇게나 겹칠 수 있을까.
하지만 함께 다녀온 십양의 무인들도 진우선이 말한 바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믿을 수 없게도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에 더는 물어볼 게 없었다.
“잘 알겠소. 그건 그렇고, 다시 연환대진에 들어가도 중심축을 찾을 수 있겠소?”
“그렇습니다. 어젯밤에 나올 때도 확인해보니 축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방비에는 좀 더 신경을 쓴 듯했습니다.”
“중심축은 함부로 옮길 수 없소. 그러면 진이 없어졌다가 새로 생기는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오.”
냉군상이 그리 설명하더니, 계획을 확정했다.
“진 무사, 그럼 오늘 정오를 넘어서 진을 파훼하기로 합시다. 중심축을 와해시키면 연환대진은 무너질 거요. 그럼 대라환영진 셋과 환영팔문진으로 쪼개질 텐데, 이건 각개격파를 하면 되오.”
“알겠습니다.”
냉군상은 이미 연환대진의 구조를 다 파악해두고 있었다.
“진 무사, 고맙소. 덕분에 이틀 만에 연환대진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당주님께서 정말 애써주신 덕분입니다.”
진우선이 겸양의 말을 건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따라 냉군상의 말 속에 뼈가 들어 있다고 느끼며.
***
“제갈 책사와 백 책사는 연환의 축이 무너져 대라환영진들이 드러나면, 각기 이양과 십양을 보조하여 진압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명을 받듭니다.”
냉군상의 말에 제갈영과 백하련이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교 대협께서는 진세를 살피고 계시다가 단옥철각과 혈풍곤이 보이면 그들을 상대해주시면 되오. 먼저 보이는 한 명을 부탁드리오.”
“알겠소.”
교중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진 무사와 바로 들어가겠소.”
모든 무인을 총지휘한 냉군상이 마지막으로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 들어겠습니다.”
끄덕.
냉군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우선과 함께 연환대진 속으로 들어갔다.
“교 대협, 아무래도 지난밤의 우려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소방주의 말이 맞소. 냉 대협의 모습이 딱 우려했던 대로요.”
무인들이 우르르 움직인 이후, 축일공과 교중학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무슨 일은 없을 거요.”
“오늘이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당분간은 교 대협께서 잘 살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