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염성방 (4)
“우리의 목표는 환사문이 펼친 연환대진을 최대한 빠르게 해체하는 거요.”
냉군상이 회의실에 모인 다른 일곱 명에게 계획을 전했다. 그의 진중한 눈빛과 목소리가 방에 꽉 들어찼다.
회의실이 넓지 않은 건 축일공이 평원의 작은 장원을 급히 사들여 임시 진영의 거점으로 삼은 까닭이었다.
하지만 방 안의 사람들은 환경에 상관없이 냉군상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염성방은 지금 환사문의 술수로 시야가 막혀서 우리가 도착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연환대 진을 벗겨내야 하오. 그럼 염성방이 정무맹의 도움을 확인하고서 천지무로절행진을 풀고 나올 거요.”
“냉 대협, 닷새 내에 가능하겠소?”
화동일검 교중학이 물었다.
“쉽지 않소. 그래서 잠시 후에 직접 진을 살펴보려고 하오.”
“직접 말이오?”
“그렇소. 연환대진이 염성방을 빙 둘렀으니 아마 곳곳에 연환의 축이 있을 테고, 어딘가에는 이 모든 걸 조율하는 중심축이 있을 거요. 진법이 복잡하여 밖에서는 모두 파악하기가 어려웠소. 그렇다면 들어가서 확인하는 게 제일 빠르오.”
“그보다는 나와 진 대협을 비롯한 여러 고수가 공력을 뿌려 진을 허물어뜨리는 게 빠르지 않겠소? 범위가 저리 넓은데 언제 다 파악하겠소?”
진우선이 들어보니,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냉군상이 보기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교 대협. 물론 그 방법도 나쁘지는 않소. 진법조차 단박에 찍어 누르거나 파쇄할 공력이 있다면 상관없지. 하지만 우리는 연환대진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오. 어쩌면 진 무사와 교 대협이 며칠씩이나 공력을 쏟아 부어야 할 수도 있소.”
냉군상이 단호한 태도로 자기 뜻을 더 분명하게 말했다.
“또한, 진법 속에 사파 무인들도 숨어 있었소. 그럼 단옥철각과 혈풍곤도 있을 거요. 사사천의 십대 빈객 중에서도 상석을 차지하는 그들이 진법의 힘을 등에 업고 공격해온다면, 교 대협의 방법은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릴 거요.”
“잘 알겠소. 아무래도 냉 대협의 의견을 따라야겠구려. 나는 다만 냉 대협이 전체를 조율해야 하니, 위험에 몸소 뛰어드는 걸 말리려는 뜻이었소.”
“염려에 감사하오. 하지만 상황이 급하여 내 몸을 아낄 틈이 없구려.”
냉군상의 말을 들은 교중학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니 여러분도 도와주면 좋겠소. 이는 상당히 위험하니 이곳에 모인 분 중에서만 자원자를 받아 소수정예로 다녀올 생각이오.”
“저는 가겠습니다.”
진우선이 곧장 대답했다.
“진 무사, 고맙소. 든든하군.”
곧 소무강과 냉하상, 그리고 교중학도 참가 의사를 밝혔다. 백하련과 제갈영도 갈 뜻을 보였다.
“하지만 방비도 해야 하니 냉 대주가 진영을 지켜주시오.”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냉군상이 진양각 이양의 대주 냉하상에게 명령하고는 전체에게 일렀다.
“해가 지기 전이 좋을 테니, 반 시진 이후에 출발하겠소. 일단은 반 시진 내에 살펴보고 나올 생각이오. 다들 단단히 준비해주시오.”
진우선이 회의실을 나왔을 때, 축일공이 얼른 뒤따라 나오며 말을 걸었다.
“진 대협, 저는 축일공이라 합니다.”
“소방주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진우선이 축일공에게 인사를 건넸다. 교중학도 어느새 두 사람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축일공이 작게 말을 건넸다.
“진 대협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게 따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잠시만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진우선이 축일공을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진 대협. 먼저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방을 늘 도와주시는 교 대협께서 진 대협의 의기가 크다 하셨는데, 아까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그리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교 대협께서 저를 좋게 보셨군요.”
“나는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오. 궁가장에서 진 대협께 감복한 이후로 수소문해보니, 알면 알수록 대단하다 느껴졌소.”
진우선의 시선이 교중학에게로 향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자, 축일공이 본론을 꺼냈다.
“진 대협, 그런데 아까 들으셨던 말 중에 정정해드릴 게 있습니다. 사실 본 방에는 식량이 지금 사흘 치밖에 남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아낀다면 닷새는 가능하겠지요.”
“그게 정말입니까? 근데 왜 내당주님께는 닷새라고 하신 것입니까?”
“아버지께서 신기수사 냉 대협과 인연이 있으십니다. 그분이 천하의 이치를 꿰셨으나 매사에 철저하고 완벽하게 하시는 성격이라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면 필시 무리할 거라 하셨습니다. 지금만 해도 몸소 뛰어들기로 하셨구요.”
“아!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진우선은 냉군상이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작은 일에도 허투루 넘어가는 게 없으며, 한계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힘을 짜내어 능력을 펼쳤었다.
축일공의 부친인 염성방주 축대원이 그걸 알기에 미리 경계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의 화근이 된 영초에 대해서도 냉 대협께는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축일공이 숨을 한 번 들이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본 방에서는 만년삼왕 한 뿌리와 천년설삼 다섯 뿌리를 얻었습니다. 절대고수를 탄생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천년설삼은 다섯 가문이 하나씩 나누어 가졌고, 만년삼왕은 석 달 후에 자웅을 겨루어 우승자에게 줄 생각이었습니다. 그중에 저희 축가장의 몫을 진 공자께 드리고 싶습니다.”
“제게요? 그 귀한 것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귀물이 진 대협 같은 의인께 전해져야 천하에 두루 효과가 미칠 거라 하셨습니다. 저 역시 크게 동의했습니다.”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천년설삼과 만년삼왕이 도합 여섯 뿌리나 된다는 것에 놀랐고, 염성방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몫마저 과감히 내놓는 축일공과 축가장의 뜻에도 놀란 까닭이었다.
“그러니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축일공이 말을 마치면서 바닥에 부복했다. 극진히 부탁하는 모양새였다.
“허헛! 소방주님, 일어나십시오. 그래야 제가 편하게 대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진 대협!”
축일공이 일어나려 하지 않자, 진우선이 힘을 발휘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제가 어찌 귀 방의 어려움을 보고 모른 척하고 지나가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리고 좋은 뜻은 잘 간직하셨다가, 후에 귀히 쓰시는 게 옳을 것 같 습니다.”
“아닙니다. 진 대협께 드리는 게 가장 귀하게 쓰는 것일 겁니다.”
“소방주님. 제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무인이 영약영초를 복용하면 큰 내공을 얻어 단숨에 강해질 수 있으나,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큰 효과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
“축 소방주. 이건 진 대협의 말이 맞소. 이미 나부터가 그러니 말이오.”
축일공이 당혹스러워했다.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진우선이 축일공을 재차 안심시켰다.
“소방주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구하는 일이며 삿된 욕심을 부린 사도련을 상대하는 일이니,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
우르릉-!
콰쾅- 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고, 비가 내렸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생문(生門)과 사문(死門)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습니다. 일단 이쪽 생문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진을 살피던 제갈영의 말이었다.
일행은 그녀가 가리키는 생문으로 향했다.
채채챙-!
생문으로 들어가자 어디선가 병장기들이 마구 공격해 들어왔다. 진우선과 소무강, 교중학이 단박에 그들을 떨쳐냈다.
적들은 몇 차례 무기를 찔러 넣더니, 곧장 폭풍우 뒤로 사라져버렸다.
사방에서 다시 비바람이 몰아쳤다.
제갈영이 상황을 바로 파악했다.
“앗-! 대라환영진이 또 나왔습니까.”
“잠깐!”
냉군상이 단호하게 외쳤다. 그러더니 눈에서 신광(神光)을 뿌리며 사방을 꿰뚫을 듯이 살폈다.
허공에서 끊임없이 몰아쳐 오는 비구름은 계속 뇌전을 뿌리고, 땅에서는 구릉과 계곡이 언뜻 보이며 계속 운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종전에 들어올 때 하늘은 맑았고, 땅은 평평했으니 이는 분명 진법이 일으킨 천지조화일 터였다.
환상일 게 틀림없었지만 온몸이 비에 젖었고, 천둥번개는 청각과 시각을 혼란케 했다.
그 와중에 적이 수차례 암습을 해왔으니, 방비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에 들어온 일행조차 냉군상이 급히 창안한 육합금강진(六合金剛 陣)이 아니었으면,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때, 냉군상이 신광을 거두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 연환진법을 만든 사람은 참으로 사악하구려.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으며, 풍우가 이리 몰아치니 환상에 빠져, 먼저는 감각을 잃고 정신을 잃은 뒤 체력마저 잃어 목숨을 빼앗기는 극악의 진법이오.”
“허-! 그 정도였구려. 하긴, 지난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더이다.”
교중학이 탄식을 흘렸다.
냉군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영과 백하련에게 질문했다.
“제갈 책사, 생문을 찾는 건 어땠는가? 백 책사, 축은 보였는가?”
“환영팔문진들이 맞닿아 대라환영진을 만들었기에 생문을 찾을 수 있습니다만, 대라환영진을 중첩하여 만든 연환대진은 술식이 너무 복잡했습니다. 아무래도 진 내에서 계속 문만 넘어 들다가 숨을 거두게 만든 것 같습니다.”
“호풍환우의 술이 상당합니다. 지세(地勢)가 쏠린 곳이 드러나려 할 때 천둥벼락이 치니, 축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제갈영과 백하련이 고개를 흔들었다. 계속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그녀들의 당혹스러운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그렇군. 일단 진 밖으로 나가서 재정비하는 게 좋겠소.”
“나갈 수 있겠소?”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진을 나가는 길은 충분히 찾을 수 있소.”
자신감 넘치는 냉군상의 말대로, 일행은 잠시 후에 진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언제 천지조화가 심했냐는 듯이, 서산 위에 걸친 태양과 맑은 하늘과 평화로운 대지가 그들을 맞았다.
교중학이 감탄을 쏟아냈다.
“과연 냉 대협이시오.”
“교 대협, 그 말은 듣기 과분하오. 연환대진을 해체하기 쉽지 않으니 말이오.”
창백한 안색의 냉군상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냉 대협의 육합금강진 덕분에 별 탈이 없었소. 게다가 진에서 굳건한 기운이 계속 솟으니 한결 힘을 쓰기 수월하더군. 일단 이를 통해 앞으로 알아가면 될 것 같소.”
“그럴 생각이긴 한데, 진에서 기운이 솟았소? 그건 육합금강진이 가진 공능이 아닌데, 착각하신 것 아니오?”
“아니오. 분명히 느껴졌소. 소 대협도 그렇지 않소?”
“끊임없이 기운이 샘솟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럼 혹시 진 대협은 알고 계십니까?”
소무강이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진우선에게 물었다.
“혼란케 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육합금강진이 강력한 금기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보니,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이나마 거든 것뿐입니다.”
진우선은 연환대진 속에서 육합금강진이라는 작은 배에 철벽의 힘을 머금은 금기를 흘려 넣었다. 일행을 위해서였다.
“허! 그랬군. 진 대협이었구려.”
“진 무사, 고맙네.”
놀란 교중학과 오묘한 표정의 냉군상이 진우선을 보았다.
그러더니 냉군상이 대뜸 물었다.
“진 무사, 진법에 대해선 깊이 배우지 않았다고 들었네. 하지만 진법 속에서 전혀 휘둘리지 않은 것 같군. 그럼 혹시 생문이나 축이 보였는가?”
그 순간, 진우선은 종전까지 검노야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육합귀문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천지간의 기운이 흘러갈 따름이지 않았느냐?]
‘개(開), 휴(休), 생(生), 상(傷), 두(杜), 경(景), 사(死), 경(驚)의 문 중에, 완전히 멈춘 것은 사(死)이며, 제일 잘 흐르는 것이 생(生)이라 생각합니다.’
[잘 보았구나. 문이 천 개가 넘는다 하나, 기운의 흐름을 따라가면 되겠지.]
“언뜻언뜻 생기(生氣)가 흐르는 게 느껴지기도 했고, 힘이 쏠린 곳도 보였습니다.”
“……!”